마니피캇(Magnificat)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나뭇잎숨결 2021. 3. 17. 23:54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사 순 제 4 주 일 (나 해) 2021. 3. 14. Jean. 3,14-21]

 

 

 

1. 본다(emblepein)는 것은 무엇인가?

2.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3.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요한 3,14-21)

 

 

 

 

 

1. 본다(emblepein)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은 하나의 시선이다.

 

김훈은 『자전거 기행』 중에서

 

①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②동백꽃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을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④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⑤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져버린다.(김훈의 『자전거기행』 중에서)

 

김훈은 2000년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길에서 본 것들을 생태, 지리, 역사, 미학을 종과 횡으로 엮어낸 문장가이기도 하다. 자전거열풍을 몰아온 그의 필력은 소설가 김훈이 아니라 문장가 김훈이라는 평가를 낳는다. 이는 그가 동백꽃 한 단락을 묘사하는데도 김훈식의 메타언어를 직조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기 보다 천을 짜듯 언어와 사유를 직조(織造)했다는 표현이 그에게 어울린다.

 

①은 동백꽃의 생태적 특징이다. 그는 일단 사물을 멀리서 바라본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연기한다.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을 때 ②는 동백꽃 가까이 다가가 현미경 같은 시선으로 사물을 들여다본다. 동백꽃이 하나의 ‘개별자’가 되는 순간이다. 사물에 그의 사유가 입혀지는 과정이다. ③그 사물을 주접떨지 않고 사라지는 인간사로 끌어오다 돌연 ④에 이르면 패망한 백제의 역사로 치환하여 절정(절벽)에서 추락한(뛰어내린) 낙화(뭇생명)로 확장하여 거침없이 ⑤ ‘후두둑’ 으로 모아진다. 본다는 것(사물)이 사유를 낳고, 사유가 느낌으로 올라와 몸으로 표출되는 메타언어를 직조하여, 남해안 어느 해안선에서 본 동백꽃을 부여의 낙화암으로 시공간을 이동해 ‘찰라의 아름다움’이 지닌 탄식을 하게 만든다.

 

<본다>는 것에서 <사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전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소위 일장검이라는 이순신의 칼을 보기위해 수없이 현충사를 찾아 하루 종일 ‘칼’만 들여다보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또 본 다음에 그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미지의 모태인 사물의 존재 이유를 밝혀보려는 이런 사유는 『난중일기』에서 어떻게 『칼의 노래』가 나왔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사물과 사유가 피륙을 짜듯 ‘본다’ 것과 ‘사유한다’는 것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주인과 하인>에서 사건과 사유가 직조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브레이노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감자기 멋진 거래를 마치면서 매입자의 손을 두드릴 때 보여준 그러한 결정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털외투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의 얼어붙은 니키타의 몸을 덥히기 시작하였다. ...난 무서웠다. 나의 기력이 다한거야. 그러나 이러한 연약함이 언짢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몰랐던 특별한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얼마후 사람들은 그가 니키타 위에 그를 꼭 껴안고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러시아의 추운지방, 겨울 들판에서, 눈보라가 몰아친 밤에, 벌어진 일이다. 욕망의 화신 성공한 사업가 브레이노프는 넓은 임야를 사들일 기회를 잡고, 하인 니키타를 재촉해 임야를 보러 썰매를 타고 가던 중 하인이 길을 잘못 들어 벌판을 헤메게되자, 외투도 걸치지 않은 니키타를 눈 속에 버려두고 임야를 보러간다. 그는 혼자 썰매를 끌고 벌판을 헤메다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동사의 기로에서 서게 된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 갑자기 죽어야 한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 선다. 그는 동사로 죽어가는 니키다 곁으로 돌아온다. 그는 니키타를 살리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하다, 결국 죽음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하인 니키타를 꼭 껴안고 죽는다. 주인이 마지막 남기고간 체온 덕분에 니키타는 살아난다, 이 이야기는 어떤 목회자들이 인과응보의 사건으로 바라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이유 ‘그러니 재물을 탐하지 말라’라는 주제로 써먹기도 한다.

 

문학은 이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릴케는 『기도시집3부』에서 “오 주여, 각자에게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각자가 사랑과 의미와 슬픔을 만났던, 진정 그 삶에서 비롯된 죽음을” 이라고 노래한다.

 

그 맥락에서 브레이노프가 니키타 위에 마지막 몸을 눕힌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고, 그 불가피함을 바라보는 것이 문학의 시선이다. 그것이 문학에서 말하는 밤이고 죽음이고 영감이라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브레이노프의 죽음을 그의 삶에서 비롯된 죽음으로 온통 세상이 눈덮힌 밤속에서 완결시킨다. 아름답게 산 사람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추하게 산 사람의 아름다운 죽음 앞에서 문학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를 훌쩍 넘어선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웠는가가 초점이 아니라 브레이노프가 니키다 위에 몸을 누웠다, 라는 사실에 포커스를 둔다. 살기위해서 니키타를 끌어안거나 니키다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넘어서는 순간, 한 죽음 위에 한 죽음을 꽃잎처럼 포갰다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포착한 것이다. 톨스토이 문학을 문학의 성서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를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가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천쪽이 넘는 『안나 카레리나』를 썼다고 바라본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개별적 상황들을 획일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고유한 삶의 방식 안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는 사유의 창을 무한히 열어 놓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자비의 시작이자 완성이고, 철학적으로 레비나스가 바라본 타자윤리학을 낳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문학의 시선은 ‘그렇다’라는 답을 하고 있다. 작가가 사물 자체나 행위를 단순 묘사하는 순간에도 가라앉힌 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서나 의미를 배제한 무의미시를 쓰는 작가라 할지라도 ‘무의미’라는 것은 사유안에서 떠오른 ‘무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본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모든 이에게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 가에 의해 사유가 발생하기도 하고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증명했다.

 

 

 

 

 

 

 

 

 

2.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

 

여기서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는 것, 혹은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만나게 한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유다를 비극적 인물로 바라보듯, 역사적으로는 유대인을 500만명 이상 학살한 행정 집행관인 아이히만을 희대의 범죄자로 기억한다.

 

아이히만의 재판기록일지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아렌트, 한길사, 2006)에서 사유할 수 없는 인격에서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놀라운 비인격을 만나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존재와 시간』을 쓴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자 한때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였던 철학자다. 하이데거가 나찌의 자발적 협조자였던 것을 알게 되고,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이별하게 되고, 시온주의자란 주홍글씨가 붙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여있다. 이 한 편의 보고서로 한나 아렌트는 또 이스라엘의 공공의 적이 된다. 아이히만의 인격에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 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시선’ 때문이었다.

 

500만명 이상 유태인을 치밀하게 학살할 정도의 악인에게서 어떤 악의 외적 표시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오의 이름이었다. 악은 우리가 상상하듯, 혹은 기대하듯, 드라큐라나 좀비나 한국의 귀신처럼 그 어떤 외적 표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희대의 살인사건을 벌인 범죄자라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악의 표지가 분명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라는 주문을 은연중 하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범죄 뒤에서 내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절규하는 모성의 마음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그런 어떤 악의 표지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나찌 행정부의 단순 형집행관이었므로 또한 유태인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의지도 없었으므로 법리적으로 범죄추정원칙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 재판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사유할 수 없는 것 바로 이것이 악이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라는 결론을 내린다.

 

'생각의 무능성이 말의 무능성을 낳았고, 말의 무능성이 행동의 무능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떻게 하나의 스크럼을 결성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⑴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은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무능력이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p.106)

 

⑵그는 단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이것이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p.391)

 

⑶ (아이히만이 교수대에서 마지막 남긴 말)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p,349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의 범죄구성의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 비인격의 단면을 나타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악행은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괴물같지도 악마적이지 않는 아이히만이 희대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죽음마저도 장례식장의 조문사로 대신할 정도로 그의 심장의 소리를 가로막는 언어적 장애가 있었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상투적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는 그의 인격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쓰는 언어, 세계를 바라보는 상투성은 아이히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으시오!라는 가두선교가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거나. 목회자의 뜨거운 설교가 단지 상투적인 구호처럼 들릴 때, 강론을 듣는 대신 주보를 읽고 있는 신자들, 이 모든 문제 안에는 언어를 상투적으로 만드는 아이히만의 유령이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상투성에 악의 평범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악이나 어둠이 특별한 표지를 하고 나타난다면 우리는 경계의 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아주 평범하게 일상을 조금씩 잠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인의 통찰, 나의 언어는 나의 세계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자 세계의 한계는 나의 윤리의 한계이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한나이렌트의 최종 결론처럼 아이히만의 사유할 수 없는 능력이 그를 희대의 범죄자로 만들었다면, 하이데거는 왜 사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이지만’ 히틀러라는 사람의 인격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하이데거는 어린시절부터 사제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몸이 약해 번번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의 형이상학의 전모라 할 수 있고, 『존재와 시간』이 발표되었을 때 유럽의 지성사는 발칵 뒤집혔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철학적 사유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찌의 자발적 협조자라는 것이 드러나자 ‘하이! 하이데거!’라는 풍자가 철학계를 다시 강타했다. 이에 하이데거는 나치의 전체주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대학 운영자로써 상식적인 차원의 싸인이었다고 해명했다. (이때, 한나 아렌트는 『존재와 시간』을 책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시간』 강의를 직접 들은 학생이었고 그와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사유를 발생시키는 세 층의 ‘본다’는 것이 있음을 추론 할 수 있다. 즉 하이데거의 사유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다른 차원의 사유를 발생시킨다, 한나 이렌트나 레비나스처럼 타자의 윤리학을 통한 실존적 사유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이렌트는 훗날 하이데거의 ‘존재의 사유’를 이해하고 그와 화해하게 된다. 야스퍼스를 지도교수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으로 박사논문으로 쓴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에서 말하는 그 사유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3.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요한 3,14-21

 

 

많은 대학은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혹은 "VERITAS VOS LIBERABIT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모토를 지향한다. 지식이 진리로 수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인간에게 자유를 박탈하면 그것은 인간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고, 진리가 인간의 자유를 담보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임을 전제로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지식이 곧 진리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일 뿐으로, 지식이 진리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진리값은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 지식이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은 진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달라질 만큼 ‘본다(emblepein)’는 것은 존재와 실존, 두 사유가 종합되어 크로스의 힘을 발휘할 때, 그때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복음(요한 3,14-21)과 사순4주 오신부님 강론은 공통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다.

 

오신부님은 사순4주 강론에서,

 

①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그리고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하는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느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②그리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 또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는 평상시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맞이할 때,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③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고,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④‘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죽음이지만,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기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보면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복음(요한 3,14-21)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유대인의 최고위원의원이며 바라사이파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시간에 대해 치밀한 기록자인 복음사가는 그 시간을 <밤>이라고 기록한다. 대화의 내용은 <빛과 어둠>에 관한 것이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에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 ⒞ 사람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 ⒟구원은 빛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전언한다.

 

이를 철학적으로 사유가 발생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종교적으로 명오 (明悟)가 열렸다, 혹은 슬기와 지혜의 은사를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십자가는 크로스적 사유, 즉 사유의 종합에 해당한다.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관계와  사람과 사람이라는 수평적관계의 결합에서  십자가 신학은 완성된다. 하늘과 땅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존재론이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문제삼는 실존론, 그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도 십자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존재와 실존을 통합하는 크로스적 사유를 우리가 바라보고 살 때, ‘영원한 생명’은 상투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

 

복음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십자가의 원리

Ⓑ성부, 성자, 사람과의 관계

Ⓒ심판과 구원에 대해

Ⓓ어둠과 빛과 진리

 

Ⓐ에서 모세와 구리뱀의 관계를 십자가에 들어올려진 예수님과의 관계로 바라본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전언한다. 이 전언은 진리와 상투어 사이에 처해있다.

 

성서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어두운 영들에게 입 다물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 몸과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것을 바라보고 그런 후에 나온 말인가가 진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값을 요구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상투화는 집단무의식의 진원지다. ‘영원한 생명’을 상투어로 만들어 버린 것은 시간 밖에서라는 천국의 논리가 담겨있고, 그것이 심판의 결과라는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두려움을 팔아 종교카테고리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연쇄적으로 십자가사건을 피동형을 만들어 바라봄으로 십자가 역시 상투화시킨다.

 

십자가가 사건은 단순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피동형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됨이 없이 십자가가 된 사랑의 능동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은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죄에 구속받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정신이 죽기 전에 오랜 ‘죽음’의 이유에 대한 해명이자, 인간이 신을 소외시킨 결과를 연역하게 만든다. 이 죽음은 죽기 전의 죽음 상태에 살았던, 살고 있는 인류의 방황을 종식시킨 도구가 바로 '십자가'라는 사실을 바라봄이다. 그때 십자가는 기념이 아니라 삶의 비전이 된다.

 

Ⓑ십자가의 의미와 영원한 생명의 의미가 상투화 되지 않을 때, 시간안에서 크로스적 사유가 발생하고 ‘영원한 생명'이 '오늘' 어떻게 가능한가를 바라보게 한다.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종적인) 그리고 그것을 믿는 우리의 관계 정립(횡적인)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관계 정립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정립을 낳는다. 이 사유의 순서는 말하자면 종(하이데거식)의 사유가 먼저고 그 다음에 횡(한나 아렌트)의 사유가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성호를 긋는 순서와 일치한다.

 

그 반대로 타자의 윤리학에서 하이데거식 사유로 넘어가기가 얼마나 힘든가는 사르트르, 니체, 들뢰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낳는 사유는 그 사유가 결국에는 사유하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봉착한다. 실존철학이 마지막 지점에서 사유의 돌파구를 더 이상은 찾을 수 없을 때, 사유의 블랙홀에 빠진다고 할 수 있다. 사유의 극단으로 몰고간 이들이 집어드는 마지막 카드가 자살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의 원인이 Ⓓ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십자가를 우리 삶에서 만들지 못하고 어떤 일방향으로 쏠리거나 아님 아예 어떤 방향성도 갖지 못한 상투적인 삶은 이미 그 자체가 죽음이고 그가 낳는 것 역시 죽음일 수밖에 없다. 이 죽음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에게 준 죽음이다. 그래서 이미 심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론에서는 그 예로 유다를 들고 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빛을 팔아넘긴 것이고, 희망을 팔아넘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두움과 절망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포기를 선택했습니다. 유다가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그는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망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유다는 그 순간, 절망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넘어서는 인간의 죄란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사랑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바라본’ 결과들이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이고, 빛이고 진리의 실천이라면 이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가? 라는 물음을 할 수 있다.

 

인류의 스승 중 이에 대한 답을 가장 정확히 들려준 사람이 하이데거가 아닌가 생각된다.(내가 읽은 책 중에서 그렇다) 하이데거가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에서 말한 그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유(Denken)는 ‘ 신과 인간은 근원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속해있는 존재’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사유는 그것을 ‘기억’ 하고 ‘감사’하고 ‘내맡김(Anbefehlen)’이고, ‘응답(Entsprechen)'하는 것이자, 존재의 은총에 대한 '반향(Widerhall)'이자, '가장 깊이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유할 때, 존재(신)와 인간이 함께 속해있음을 ’발현(Ereignis)’시킨다고 보고 있다. 현현 혹은 발현은 신비한 기적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깊이 사유할 때 언제나 체험되는 그런 은총이라는 것이다.

 

“존재(신)와 인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사유가 이루어진다. 사유는 존재에 의해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는 존재의 사유인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무엇을 통해 드러나는가? 그것은 사유하는 자가 그들의 말함을 통해 존재의 개방가능성을 언어에로 가져오고 언어 안에 보존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 살면서 이 거처를 지키고 존재를 언어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면서 이 존재에게 낱말을 찾아주는데, 이 낱말로부터 존재의 진리가 언어에로 드러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진리를 말하도록 존재에 의해 요구받고 있으며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하며 다가가는 그런 응답 속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든 묵상이든 사유든 전례든 그분과 우리가 근원적으로 함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은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함께 있다’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요소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분에게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당연히 수긍한다. 그러나 그분 역시 우리에게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진리의 창이 우리라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만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사랑에서 연유된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자,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에서 눈 돌리고 왜곡하는 것이 악이자 어둠이고 자기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 있었던 어떤 비극적 시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표상하는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차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표상적 표지만 읽어낼 때, 그분이 고통 받고 견디고 가신 길이니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참고 견디리라는 1차적인 의미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엄밀히 사유가 아니라 믿음의 시작이자, 자칫 추종에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상황들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 단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그분과 함께하는 '나'를 체험하는 장대한 ‘나의 실현’ 의 장이 된다면, 그때, 사유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사랑이듯 나도 사랑이라는 것)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이 표상적 차원인가 본질적 차원인가는 어디에서 알 수 있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어둠의 시작은 생각의 시작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이 스크럼은 악과 어둠의 시작이다. 어둠인지도 모르는 어둠이고, 악인지도 모르는 악이다. 그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세 가지 조건,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둠의 시작이 자기 욕망이 만들어낸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면, 사유의 시작은 영혼의 소리를 듣을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사유의 문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사유의 시작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이고 싶은지, 나는 결국 누구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타자윤리학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내 몸처럼 이웃을 ~ 할 수 있는 힘’  에서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나를 알고 너를 알게 되면 그분이 누구인지도 자명하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내가 내 영혼의 소리를 들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되었다는 것은 실은 그분의 현존을 인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태 앞에 직면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알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한다는 이 순환논리에 갇히고,  그 갇힘 안에서 나는 과거의 그분이고, 오늘의 그분이고,  미래의 그분임을 바라보게 된다. 나의 시작과 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 때, 그 사유가 그분의 '현존'을 발생시켰다,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사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사유에서 나온 말은 언어화 해야 한다.  그때 하이데거의 직관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 된다'  말해야 무슨 소용있나 아무도 변하지 않을텐데...하는 사유의 마지막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사유의 과정을 거쳐(고뇌하고, 고뇌하며, 밤을 새우며) 말하는 자신은 적어도 변화되었을테니까...  세상을 향해 발화하는 그 자체가 '실천'이라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리는 사유하는 자의 소유가 아니므로 진리는 진리의 길을 가게 하라!

 

하여, 의사여 네 자신의 병을  먼저 고쳐라!(데이비드 호킨스)  사랑과 진리와 영원한 생명과 십자가와 자비라는 말을  함부로 소비하지 말고 낭비하지 말라,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내 심장이 터질거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을 거 같은 말만 하라!  자기가 삼키고 소화시킨 말만 뱉어라, 자신이 먹어보고  맛있는 음식만  타자에게 권하라, 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는 사랑이다', 는 첫 언어를 발설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 각자 앞에 놓여있는 십자가(상황들이)가 단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뎌내야하는  상황이 아니라, '나' 역시 그분처럼 사랑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장대한 ‘나의 실현’ 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강론에서 제언하는 그 지점을,  '자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넘어서는 인간의 죄란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사랑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