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고요함의 지혜, 기억과 망각의 책

나뭇잎숨결 2021. 4. 20. 14:03

By 포토친구, 사과나무

 

 

고요함의 지혜, 기억과 망각의 책

-The Wisdom of Calmness, the Book of Memory and Oblivion

 

 

[부 활 제 3 주 일 (나 해) 2021. 4. 18. Luc. 34,35-48]

 



1.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오규원)
2. ‘잊음’에 대한 ‘이즘-ism’, 언어의 본성에 대하여(대니얼 헬러-로즌)
3.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24,35-48)

 

 

 

1.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오규원)

 

우리의 삶은 한 권의 책, 기억과 망각으로 쓴 책이다.

 

그 책은 우리가 바라본 세계를 담고 있다. 세계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다. 즉 의미와 의미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사건을 목련이 지고, 라일락이 피는 일처럼 ‘그냥’ 순수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면, ‘그냥 있을 뿐’인 세계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이 쓰여졌을까?

 

오규원의 「고요」, 「호수와 나무―서시」를 읽어본다.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오규원, 「고요」, (『두두』중)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오규원, 「호수와 나무―서시」(『새』 중)

 

 

오규원의 「고요」에는 라익락, 바람, 비비추, 개미, 때죽나무, 장미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화자의 ‘고요’가 있다. 모든 세계가 고요하다. 그냥 사실의 세계일 뿐이다. 그래서 ‘고요가 고요하다’처럼 고요한 화자에게 세계의 모든 사건들 역시  ‘고요하다’.

 

「호수와 나무―서시」에서도 고기를 낚고 있는 한 사내가 있고, 그 사내는 고기와 호수와 이미 한 셋트처럼 사실의 세계에 풍경처럼 놓여 있다.

 

이 고요하고 당연의 세계에 의미가 덧붙여지는 순간 사실의 세계는 굴절되고, 조금씩 금이 간다.

 

「고요」에서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지고 있는 장미와 「호수와 나무―서시」에서 물가에서 ‘높이로’ 있던 나무가 ‘깊이로’ 물속의 나무로 보이는 순간이다.

 

장미가 피어나는 순간을 위의 고요로, 장미가 지는 순간을 아래의 고요로 바라본 화자는 ‘피어나는 것과 지는 것을’ 동일한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 물가의 나무에서 물속에 비친 나무로 시선이 이동되면 높이만큼 깊이가 부여되기도 한다.

 

이미 장미나 나무는 하나의 사건이고 이 사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의미는 ‘고요함’으로 치환되지만, 그 고요함에 의미가 덧붙여지는 순간 그 물질성이 달라지게 된다.

 

오규원은 세계를 자신의 오욕(五慾) 칠정(七情)에서 비롯된 주관적 인식과 판단을 배제한 채, 순수의식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시인이다.

 

세계는 ‘그냥 있을 뿐’이고. 그 ‘있을 뿐’인 세계를 잡으려고 언어를 들이대는 순간, 그 고요는 개념을 낳고, 정서를 낳고, 갈등을 낳고, 전쟁을 낳게 되고. 결국 세계는 과잉되거나 결핍된다는 것을 알았다.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는 것을 경계했던 시인이다.

 

오규원은 평생 사실의 세계를 포착하려는 ‘날(生) 이미지’를 얻기 위한 전략으로 ‘환유적 체계’와 ‘동사적 접근’을 하였다.

 

의미과잉의 시대에 드라마와 서사의 시대에 ‘세계, 주체, 언어’의 삼각형 속에서 가장 첨예한 꼭짓점을 이룬 것은 언어였다는 것을 고민한 시인이었다.

 

그냥 있을 뿐인 세계에. 언어를 들이대는 순간, 세계는 개념화되거나 관념화되고 사변화된다. 그리하여 개념화되기 이전의 사건, 사물, 현상을 붙잡으려 했다.

 

예컨대, 우리가 고통이라고 부르는 사건들도 그냥 있을 뿐인 세계에서 일시적이고 찰라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고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천개의 의미를 붙여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각색하고 윤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은 온통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한 드라마를 쓰느라고 미쳐있다고 시인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토록 순수 언어에 주목했던 오규원의 시세계를 ‘날 것의 이미지’라 부르고, 이에 대해 평자들은 “인식 주체의 주관성이라는 프리즘과 언어라는 매체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얻어진 순수 이미지”로 “존재의 드러남에 주관이 가담하는 광경”으로 ‘언어 너머를 통해 다른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의 이미지를 통해 동사적 사건성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규원 시를 읽다보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 접합되는 부분이 있다. ‘사건’은 A나 B의 고정된 상태를 지시하는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그것들의 변화와 생성을 표현하는 동사에 관련된다.(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결국 명사와 명사가 결합, 접속, 연쇄하는 ‘동사적’ 순간에 그 물체들의 표면에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만이 존재하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면서 지워져버린다. 따라서 사건들의 시간은 그 양극이 과거와 미래로 끊임없이 멀어지는 순수한 직선,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의 터전이 되는 시간, 즉 아이온(Aion:시간의 계속이라는 뜻으로, ‘영원’ 또는 ‘시대’)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은,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지금 있는, 앞으로 있을 사건, 즉 일종의 보편성, 우주적 잠재성이 구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든 사건은 단순하고. 그것은 일시적이고, 복수적이며, 단지 하나의 ‘동사’일 뿐으로 바라본 것이다.

 

오규원식 시선은 다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차원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유에 해당한다. 과거와 미래로 흩어지는 시간의 파편들 속에서 유희하는 사건을 사유하는 것. 이러한 사유가 인도하는 곳에 시인이 말하는 “살아서 팔딱거리는 우주가 한 알의 언어로 집적되는 기적 같은 찰나”, 즉 “날(生)”(오규원) 이미지를 만나는 것이다.

 

그때, 주체와 언어는 어떤 굴절과 왜곡의 주범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탄생시키는 생성의 어머니가 된다. 오규원은 날이미지에 대해 나의 의지에 관계하기보다 세계의 의지에 관계한다”(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주체에 의해 명명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자, 동시에 주체가 아닌 세계의 의지로부터 부대하는 것, 그것은 그의 시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순수사건’ 혹은 ‘순수의식’일 따름이다. 사물의 맨얼굴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사물에 덧붙여진 관념을 벗겨내고,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은유적 체계를 내몰고, ‘환유’와 ‘동사’를 쥐고 오규원 시가 도달한 곳은 놀랍게도 ‘순수의식’이라는 사유의 지평이었다. ‘세계, 주체, 언어’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했던 한 시인의 세계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그런 ‘자유’였다.

 

그런 맥락에서, “팩트만 말해! 정서(오욕칠정에서 비롯된)를 말하지 말고!” 라는 말은 자유주의자들의 지침이자 화두에 해당한다.

 

 

 

 

 

 

2. ‘잊음’에 대한 ‘이즘-ism’, 언어의 본성에 대하여(대니얼 헬러-로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건 혹은 의미의 현상 혹은 팩트, ‘순수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사건과 의미에 대한 ‘순수의식’은 ‘사유’의 시작이고, ‘존재이해’의 지평이고, 영성적으로는 ‘지혜’의 문을 여는 것이자, 종교적으로는 신적공간인 ‘자유’와 ‘평화’ ‘기쁨’의 전제임에도 말이다.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순수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왜 망설이는가?

 

무엇보다 순수의식이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을 설사 바라보았다하더라도 언어의 치장을 벗겨내는 일은 고독한 자기투쟁의 결과, 에고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오욕칠정에 중독되어 있고,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자유’를 저당잡히고 얻어낸 ‘탐닉’을 맛보게 한 언어다.

 

많은 치매환자들의 실어증 보고서에서 따르면, 실어증의 발생영역이 뇌의 베르니케 영역이든 브로카 영역이든, 공통적으로 마지막까지 망각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쁨의 언어가 아니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발회되었던 미음과 증오의 언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준다.

 

사건과 의미의 각색은 ‘탐닉’이고, 실어증(치매)의 순간조차도 ‘탐닉’을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탐닉’은 결국 ‘언어적’ 탐닉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사랑은 기쁨과 탐닉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니얼 헬러-로즌의 『에코랄리아스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조효원 역, 문학과지성사, 2015)에서는 ‘언어적 본성-기억과 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찰하고 있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7308 

 

①옹알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 하나의 언어와 이 언어를 말하는 존재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불가피한 일이다. 무한한 소리의 무기고를 상실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가 단일 언어의 공동체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일지도 모른다. (「극치의 옹알거림」)

 

자신을 낳아준, 무한히 다양했던 옹알거림 중에서 혹시 어른의 언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만 메아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존재하는 곳이란 아이의 옹알거림, 적어도 아직 말 못하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던 옹알거림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②신의 계시는 시나이 산에서 토라 텍스트로 전수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들은 첫 두 계명을 표현하는 하나의 소리인 “나”라는 단어를 거쳐, 다시 이 단어의 첫번째 철자 알레프로 압축되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알레프」)

 

신의 계시가 아무도 그 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하나의 철자로 환원된 것이다. 혹시 이 사실을 신학적인 견지에서 다시 고찰한다면 당혹감이 다소 눅여질지도 모르겠다. 신께서 당신 스스로를 인간들이 언제나 이미 망각한 단 하나의 철자로 나타내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신의 말씀의 유일한 재료인 묵음 철자는 모든 언어를 출현시키는 망각을 표시한다. 알레프는 모든 알파벳이 시작되는 망각의 처소를 지킨다.

 

③파리에 도착한 직후 이곳 프랑스에서 나의 독일 이름 ‘하인리히Heinrich’는 곧장 ‘앙리Henri’로 번역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결국 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H와 친구들」)

 

왜냐하면, ‘하인리히’라는 단어는 프랑스인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고 또 프랑스인들은 뭐든지 자기들이 편하고 쉬운 대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앙리 하이네Henri Heine’란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이름은 앙리 엔Enri Enn 씨였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걸 줄여서 ‘앙리엔Enrienne’으로 부르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를 엉 리엉[무無]Un Rien 씨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④언어 역시 기원의 장소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는 한때 그것이 가졌던 부유함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어쩌면 잃었기 때문에? 여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추방」)

 

히브리어 시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가 이슬람 점령기의 스페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즉 히브리어 작가들이 자신들의 고향 땅을 제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때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추방이 언어의 진정한 고향이며, 언어를 망각할 때가 오히려 언어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셈이다.

 

⑤언어학자들이 해당 언어를 사용한 공동체보다 먼저 소멸 여부를 판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그 언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렇다. (「문턱」)

 

예컨대 골 지방의 주민들이 더 이상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표현하기 전까지,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이미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고전어와는 아주 이질적인 표현들로 기록된 자료들을 찾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준은 역사적인 연구에서는 기껏해야 근사치 결과를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우연히 우리 손에 들어온 자료들에 기록되기 전에 먼저 그 사람들에게 언어 변화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⑥“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헤엄칠 수 있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예전에 내가 헤엄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한때 헤엄칠-수-없었음].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나는 헤엄칠 수 없다.”(「부족한 동물」)

 

이 짧은 텍스트의 익명의 화자는 프로이트의 실어증 환자가 언어의 영역에서 취한 것과 똑같은 입장을 수영에 대해 취하고 있다. 카프카의 표현을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실어증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혹은 있었다. 즉 그들은 “예전에 그들이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혹은 “한때-말할-수-없었음”)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기억력은 엄청나게 좋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억은 모든 개인의 삶의 시작을 알리는 옹알이하던 갓난아이 시절까지 가닿는 것이니 말이다.

 

⑦우리가 쓰는 언어가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를 배우고 잊어버리든 관계없이 다른 언어에 열려 있지 않은 언어는 없다는 사실,(「후드바」)

 

완전히 ‘네이티브’인 언어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언어도 진정 ‘모[국]어’일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짜 내 어머니의 언어라 해도. 이는 ‘잊음’에 대한 ‘이즘-ism’, 언어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니얼 헬러-로즌의 『에코랄리아스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조효원 역, 문학과지성사, 2015)는 다양한 형식의 언어 상실, 나아가 언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깊고 넓은 성찰을 담고 있다.

 

책의 제목인 ‘에코랄리아스’는 ‘언어메아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비록 저 자신은 망실되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치 메아리처럼 다른 언어의 틈새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의 ‘지층’이 되는 언어의 특성을 암시한다.

 

그는 언어적 망각의 여러 형식들을 탐색하며, 언어가 사라지고 잔존하는 형식, 효과, 그리고 그 궁극의 귀결에 대해 숙고한다. 말과 글, 기억과 망각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나가는 동시에 망각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특별하고 독창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가 망각한 것은 옹알거림이라는 것이다.

 

 

 

 

 

 

 

3.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루카 24,35-48)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어코 생선 한 토막을 잡숫게 할 수 있었던 제자들의 ‘기억과 망각’의 책을 열어보자. 그들의 언어에 덧붙여진 탐닉의 언어는 무엇이었나?

 

성서의 숲으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복음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읽은 것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설득하는 예수님의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사랑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에서 확인되는 부활 사건들은 모두 구체적인 것들이다. 길, 빵, 보고, 듣고, 먹고...그렇게 구체적으로 부활 사건을 경험하고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의 영역으로 넘어간 ‘유령’이었다.

 

에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는 모든 감각의 구체적 총합에 이른다. 오신부님은 강론에서 이를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당신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시면서, 최후의 만찬 이후 처음으로 제자들 앞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바라본 ‘선한 신은 디테일에 있다'(Le bon Dieu est dans le détail )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부활의 사랑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선물이고,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사건이다.

 

이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 는 부활의 상태이자,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은 평화의 상태를 바라보고 살게 만드는 선체험에 해당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구하는 평화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표현될 정도로 우리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모든 욕망들을 다 태워버린 이후에야 맛보는 ‘내적평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마음과 눈이 영적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상태가 평화다. 성경에 쓰인 문자를 우리 스스로 해독할 수 있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기억을 되돌려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떠올리는 것이 부활의 공간에서 우리가 무엇을 태워야 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11,2-11)라는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질문은 세례자 요한의 질문이자, 제자들의 질문이자, 오늘 우리의 질문이자, 모든 관계의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가 기다리는 대상이 어떠해야한다는 관념을 이미 형성하고 있는 상태다. 이때,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대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동성을 포기해야만 대상을 볼 수 있다. 이 망각은 다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떠한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제자들에게 어떤 차원의 관계를 요구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구세사의 두르마리의 바톤이 왜 제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는지? 부활은 제자들에게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묻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복음(루카 24,35-48)과 부활3주 오신분의 강론에서 욕망과 환상이 낳은 ‘꿈과 희망’의 죽음이 있은 연후에, 실재의 ‘꿈과 희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열어준다고 보고 있다.

 

11제자들이 모여 있던 ‘다락방’은 부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의 오욕칠정에서 비롯된 ‘꿈과 희망’이 죽어야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꿈과 희망’이 그들에게 부활사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 건너는 강을 ‘레테의 강’, 망각의 강이라고 부른다. 신화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살아서 죽음을 체험한다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듯하다.

 

사실 제자들이 부활을 선뜻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신학적의미라기 보다는 존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단적으로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런데 살아서 자기의 죽음을 맛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죽음 이후의 사건인 부활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한순간에 믿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제자들에게도 오늘 우리들에게도 은총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도 죽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도 우리도 믿기위해서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우리도 부활이 무엇인가, 누군가 짚어주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자명하게 그 지평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그들이 꿈꾸었던 ‘희망과 꿈’이 죽었던 다락방이다.

 

‘꿈과 희망’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존재케 하는 것이라 할 때,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강론에서는 이를 이렇게 자세히 풀어주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과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욕심들을 버릴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진정한 꿈과 희망을 다시 꿈꾸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죽은 존재였다가 서서히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는 중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존재였다가 서서히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인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 모두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남아 있는 시간을, 다시 살아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도 살아있게 해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들을 두려워하거나, 남아 있는 시간들이 짐처럼 느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거나 짐처럼 느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있는 삶’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부활절의 세 번째 주일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강론Ⓕ ~Ⓙ에서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있는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꿈과 희망’의 죽음 다음에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꾸기 시작한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살아서 죽음 역시 레테의 강을 건너는 망각이라 할 수 있다. 망각만이 우리 마음을 가난하고 고요한 빈 공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를 바라보기 위해, 대니얼 헬러-로즌의 『에코랄리아스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 말한 ‘잊음’에 대한 ‘이즘-ism’, 언어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복기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본성은 존재의 본성이자, 관계의 본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를 존재의 차원인 ‘망각’이라 부르고, 무엇보다 존재의 경험 그 자체는 ‘망각’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아니 무엇을 망각했다기 보다 존재 자체가 이미 망각이라고 “존재는 또한 망각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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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망각이란, 관계에 언어가 개입하기 이전에 ‘보이는 대상’과 ‘보는 자’ 사이의 사건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즉 보이는 대상이 보는 주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만약 보이는 것이 단지 보이는 그대로 ‘명석판명’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결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원히 대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대상을 보이지 않는 것(어떤 느낌, 정서)과 함께 경험한다. 즉 대상이 느낌을 통해 우리 내부로 들어오는 사건을 경험한다. 존재에 대한 일차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또한 시간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져 간다. 그 사라져 가는 느낌은 대상의 변질이 아니라 관계의 과정이다. 어떤 정서적 느낌들이 우리 눈앞에서 증발하여 공백의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이제 정서의 차원에서 변형되어 내면화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모든 것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망각은 1차적으로 고통스럽다. 보는 내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대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동성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망각은 다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떠한지’ 감각하는 수동적인 행위, “어떠한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거친 관계는 드물다. 외로워서 맺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관계란 존재자체를 내면화하여 받아들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없이 망각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받은 관계는 언제나 대상 그 자체로부터는 돌아서서, 그 대상에 대한 말(규정, 파악)을 다시 지워야 한다. 그것은 ‘봄’을 통해 포착된 대상을 결코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는 살해한다”(헤겔, 『인간현상학』)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만이 가능하다. 즉 ‘봄’과 ‘말함’ 사이에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심연 속에는 ‘침묵’과 ‘결핍’이 있다. 존재를 경험하려는 이는 그 심연 속에서 존재를 ‘듣도록’, 그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현전하는 가운데 그 존재를 감각하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오규원이 도달하고자 했던 순수의식에서 나온 언어들, 모리스 블랑쇼가 바라 본 “존재는 또한 망각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에서, 그리고 대니얼 헬러-로즌이 바라보았던 ‘언어는 ‘잊음’에 대한 ‘이즘-ism’,이라는 언어의 본성이 있음‘에서 고찰되었던 바로 그 지점, 시공을 초월한 곳에서 이루어졌던 사유의 궤적이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 집착과 과장과 에고의 ’망각‘임을 볼 수 있다. 망각하기 위한 망각이 아니고 기억하기 위한 망각이다.

 

강론에서 제언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있는 삶’이란, 모든 영성가들이 도달한 지점, 순수의식에서 비롯된 사랑의 상태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 복무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란 사건과 사건, 의미와 의미가 충돌했던 전쟁같은 사랑 속에서 ‘고요함의 지혜’ 속에 머무르게 된 사랑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타자(세계)에게 기대하지 않은 사랑의 길에 접어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고요함의 지혜’는 우리가 쓴 삶이라는 책, ‘기억과 망각의 책’의 재배치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원’ 이라는 ‘시야’를 갖게되고 비로소 사물들과 사건들의 그 본연의 빛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 누구의 언어도 아닌, 우리 자신의 언어로 ‘기억과 망각의 책’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무엇보가 기도중에 청해야 하는 것이 '고요함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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