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Mevnw머무름)’이 있다.

나뭇잎숨결 2021. 5. 6. 22:13

 

 

B(Birth)D(Death) 사이에는 ‘M(Mevnw머무름)’이 있다.

 

[부 활 제 5 주 일 (나 해) 2021. 5. 2. Jean. 15,1-8]

 

 

 1,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희덕)
 2.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사르트르)
 3. ‘죽어야 살 수 있다’와 ‘살아야 살 수 있다’(요한15,1-8/요한 12,20-33)

 

 

 

1.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희덕)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를 읽어본다.

 

①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②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③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는 타자에게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시이다.

 

①1행~6행까지 화자는 타자로 상징되는 복숭아나무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만남이 시작된다. 너무나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로인해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타자에 대한 피상적 바라봄이다. 그래서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치며 거리를 두게 된다.

 

②7행~12행에서 복숭아나무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타자, 그가 누구이든 흰꽃과 분홍꽃 두 가지 색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자신에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것이 타자를 아는 것이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멀리서 바리보게 되고, 수천의 꽃을 피우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욕망이 크다는 것이며, 욕망이 크다는 것은 자기 안의 빈 공간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기에 욕망의 크기만큼 외로웠을 것이라고 바라본다. 외로운 사람은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른다.

 

③ 2연에서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이제 욕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을 때, 타자가 만드는 그늘 밑에 서게된다. 타자의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제는 꽃 필일 하나 없는 복숭아나무, 그 그늘에서 함께, ‘저녁이 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타자와 비껴간 시간의 무늬를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타자를 피상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하게 되면 타자가 누구인지 쉽게 규정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을 때, 글쎄요...라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자가 지닌 수천의 빛깔과 내가 지닌 수천의 빛깔이 만나서 서로의 삶으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래서 기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수천의 빛깔을 이해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2.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사르트르)

 

20세기의 지성,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수천의 빛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의 삶에 ‘스며들고’ ‘머무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커플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지닌 수천의 빛깔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피상적인 이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두 사람의 세기적인 ‘계약결혼’은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은 하되 결혼은 안한다’는 ‘비혼론’의 원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하되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관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자, 관계의 초점이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도 없지만 자유없이 살 수도 없다는 점을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그들의 사랑을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규정했다. 그들 이외의 모든 만남을 ‘우연’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만남이 여타의 만남과 차별화된 ‘필연’을 낳게 한 그 최초의 원인은 그들이 지닌 사유할 수 있는 뛰어난 ‘지성’에 있었다.

 

사르트르는 자서전 『말』에서,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되리라.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나는 선택되고 지명되었지만 재주가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모든 성공이 나의 기나긴 인내와 불행으로부터 태어나리라. 나는 내게 아무런 특성이 없다고 다짐했다. 특성이라는 것은 도리어 사람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사르트르의 읽기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사르트르의 어린 시절은 ‘책 읽기’와 ‘글쓰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키가 작고 몸이 약했으며, 가벼운 사시안(斜視眼) 증상을 보였던 사르트르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사르트르를 구원해 준 것은 바로 양서로 가득한 할아버지의 ‘서재’였다. 문학적 교양을 가장 높은 정신의 작업으로 알고 문학 교수가 되려고 했던 조부의 서재는, 어린 사르트르에게는 일종의 엄숙한 사원인 동시에 정신의 놀이터였다.

 

독학으로 글을 깨친 사르트르는 할아버지의 서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 “세계”를 만났으며, 그 세계 속에서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이 책의 세계가 그가 인식한 최초의 세계며 유일한 세계였다.

 

또한 사르트르의 글쓰기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와 운문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곧 산문으로 기울었고, 그는 그 속에서 행복에 젖었다고 말한다. 처음에 ‘장난’이자 ‘놀이’로 시작된 글쓰기는 곧이어 문학 교수 겸 문사로서의 소양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필연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새로운 자기기만의 작업”으로 바뀌고, 곧이어 “문학을 통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그 결과로 자신을 구원하는” 사제(司祭)로서의 작업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조숙하고 자의식이 강했던 어린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장 폴 사르트르라는 한 작가의 철학과 문학의 토양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동시에 한 인간의 실존과 매력을 드러낸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지성으로 추앙받으며 실존주의, 계약 결혼, 참여 문학과 정치 활동 등 독보적인 행보를 거침없이 펼쳤던 한 지식인의 초상이 담겨있다.

 

1964년 『말』이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을 때, 스웨덴 한림원은ㆍ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르트르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자유정신과 진실 추구사상, 그리고 풍부한 지식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과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노벨상을 거부한 최초의 사건으로서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 사르트르의 명성을 한층 드높여 준 사건이다.

 

그런 사르트르가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했기에 보봐르에게 계약결혼을 제안한 것일까? 『존재와 무』에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만이며, 하나의 무한지향이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이고, 따라서 상대가 나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만에 대한 존재론 이전의 하나의 요해가 사랑의 충동 그 자체 속에 주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느끼는 불만족은 바로 거기서 온다. 이 불만족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해온 것과는 달리, 상대에게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직관이 근본-직관에 이를 수 없는 하나의 이상이라는 것에 대한, 암묵의 오해에서 오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는 나의 ‘존재’를 잃고, 나는 나 자신의 책임에, 나 자신의 존재 가능에 맡겨진다. 둘째로 타인의 각성은 항상 가능하다. 타인은 어떤 순간에도 나를 대상으로서 나오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끊임없는 불안정은 거기서 온다. 셋째로, 사랑은 제삼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상대적인 것이 되는 하나의 절대이다. 사랑이 절대적인 귀추축이라고 하는 그 성격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상대와 단둘이서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 대해 생각한 사르트르는 보바르에 대한 평가에서,

 

⒟보봐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이면서, 나보다 더 심오한 지식과 철학을 지닌 완벽한 대학자였다. 그녀의 지성은 나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시몬느 드 보봐르는 어떻게 사르트르의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나?

 

보봐르는 철학교수 자격고시를 준비하던 1929년에 역시 같은 공부를 하고 있던 2살 위의 사르트르와 만나게 된다. 명석한 두뇌와 무서운 노력으로 수재중의 수재였던 보봐르는 사르트르를 만나자 생전 처음 지적으로 누구에게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2년 후인 1931년 교수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가 수석으로 합격하고 보봐르는 21세의 최연소자로서 2등으로 합격하여 철학교수 발령을 받게 된다.

 

서로의 지성에 매혹돼 그들은 만난 지 3개월 뒤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전무후무한 '계약'을 맺는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우리'의 관계는 '필연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 '우연적인' 연애를 경험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요"라고 제안했다. 서로를 가장 중요한 상대로 여기되 자유로운 연애를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계약 기간은 애초 2년이었다. 하지만 공개적 연인 관계는 사르트르가 먼저 세상을 떠났던 1980년까지 장장 51년간 이어졌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에 대해 이런 회상을 한다.

 

⒠내 인생에서 성공한 것을 꼽으라면 사르트를 만난 것이다. 사르트르는 나를 이해하고, 나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고, 그렇게 날 사로잡았다. 우리는 철학을 좋아하고 문학에 빠져 있었으며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마저 그림자처럼 똑같았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화할 수 있었다.

 

보부아르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지금도 읽히고 있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강한 자의식을 드러냈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그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젠더’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렇듯, 자의식이 강했던 두 사람에게, 계약 결혼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모든 남녀간의 사랑이 그러하듯, 배타성이 그들 사이에도 늘 끼어들었다. 사르트르에게는 까미유, 올가, M부인과의 관계가 있었으며, 보봐르에게는 자크, 올그린, 람즈망과의 관계 등이 그것인데, 그러나 그들이 그런 우발적인 만남에서 다시 돌아올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더욱 확고해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몸의 언어보다 정신의 언어를 더 중시한 커플이었다.

 

사르트르의 말년에 대동맥의 이상으로 반 실명 상태에다 차츰 전신의 건강상태가 쇠약해지자 보봐르는 지난날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쇠퇴해가는 지식인"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까지 같은 공간에서 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아파트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그들은 철저히 사랑과 자유, 일과 사랑을 누린 세기의 커플이었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와의 이별 장면을 보봐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르트르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하게 될 사람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붙어있는 『이별의 의식』에서

 

⒢나는 사르트르와 혼자만 있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모포를 걷고 그 곁에 누워있고 싶었던 것이다. 간호부가 그것을 만류했다... 그래서 나는 모포 위에 누웠다..... 간호부들이 다섯시에 와서 사르트르의 시신에 모포와 커버를 씌워 옮겨 갔다."

 

보봐르는 사르트르 사후, 6년후 그의 곁으로 갔다. 그녀는 몽빠르나스의 사르트르 곁에 묻혔다.

 

사르트르는 인간들이 맺는 관계에서 나와 타자 쌍방이 모두 주체성을 지니고 맺으려는 사랑은 끝내 실패로 끝난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 결혼을 통해 맺은 사랑은 인간관계의 이상을 정립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이 이와같은 관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는 다른 문제다. 중요한 것은 50년에 걸쳐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끝까지 두 사람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들 지성의 결합은 그 어떤 결합의 요건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일갈한 것처럼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 그들에게선택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인가? 보봐르에게 페미니즘일까?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가 보봐르를 필연으로 선택하고 보봐르가 사르트르를 운명으로 선택한 바로 그 ‘사랑’일 것이다.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수천의 빛깔을 가진 자신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 수천의 빛깔을 타자 때문에 수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두 가지의 색 혹은 하나의 색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수천의 색깔을 지닌 그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한 것은 ‘사랑, 자유, 지성’ 이었다.

 

 

 

 

 

 

 

3,  ‘죽어야 살 수 있다’와 ‘살아야 살 수 있다’(요한15,1-8/요한 12,20-33)

 

 

그렇다면, 우리 역시 수천의 빛깔을 가진 존재일진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mevnw. remain.)’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종교의 일원이 되면 당연히 그분 안에 ‘머무르는’ 그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복음(요한.15,1-8)을 읽어본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부활5주 오신부님의 강론을 읽어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은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범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범하게 들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평범한 시기에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 고별사를 하시기에 앞서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당신을 잃고 난 후에 앞으로 겪을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를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고통을 겪을 때, 그리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당신과 제자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기를 바라시고, 또 다시 한번 깨닫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이 담겨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교만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자신 있게 살아갈 때에는 교만 때문에 예수님께 머무르지 못하고, 또 죄 중에 있을 때에는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께 머무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께 머무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요한.15,1-8)과 강론은 ‘다가간다- 붙어있다- 머무른다’로 도식해 바라볼 수 있다.

 

복음과 강론에서 강조하는 바,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알고, 그분을 추종하는 상태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복음에서는 ‘머무른다’는 것과 ‘붙어있다’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붙어있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에 끌리어 다가가고, 그분의 능력을 보고 추종하는 단계라면, 그 단계란 언젠가는 잘려나가 태워질 가지에 불과하다.

 

반면, ‘머무른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상태, 생명의 상태를 의미한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생명은 죽음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곧 생명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것!

 

사순5주에서 복음(요한, 12,20-33)에서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묵상했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9815

 

‘죽어야 살 수 있다’와 ‘살아야 살 수 있다’는 이 충돌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머무른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물러야’ 죽을 수도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 살 수도 있다. 이때 머무름 상태에서 죽음과 삶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죽음과 생명으로 나뉘어지는 그 상태의 결절점을 부활 5주 오신부님은 강론에서는 ‘겸손의 결여’로 바라보고 있다. 즉 ‘교만과 죄책감’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교만은 유아독존의 상태, 즉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죄책감은 그분의 사랑이 크기가 얼마나 무한한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분의 전능이 사랑임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두 상태는 필연적으로 그분과의 ‘분리’를 낳는다. 교만과 죄책감은 그분에 대한 ‘앎’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겸손은 단지 자신을 낮추는 동양적인 겸양이 아니다. 성서에서의 겸손은 그분의 ‘뜻’에 네!라고 할 수 있는 ‘수락’의 의미다. 이 ‘수락’만이 ‘애주애인’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수락이 수락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교만과 죄책감의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분은 결코 원하지 않을 거라는 왜곡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밖으로 나간 무신론이라면 후자는 안에 있는 무신론이라 할 수 있다. 안이든 밖이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왜곡을 낳는다는 점에서 이 무지는 죽음의 상태로 몰고간다. 사랑이 없는 삶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는 창세기 설화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즉 신은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존재하는 신은 인간을 위한 신이 아니라 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신의 자족적 실체 개념이자, 반면, 신은 신경증적인 잣대로 인간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히스테리적 신 개념이다.

 

이 두 무신론은 인류의 집단무의식인 ‘바탕생각’이라고 접근한 이들이 있었다. 원심력을 견디지 못한 집단무의식의 정체는 융의 심리학에서 '겸손'의 필요성을, 구심력을 견디지 못한 개인적인 무의식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에서 '죄책감'의 단초를 바라볼 수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분석심리학논문집-초인격적인 무의식의 우상들』에서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시간의 우주에 대한 모든 경험의 축적물이며,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여러 세대 동안 형성되어 온 우주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이미지가 이 이미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소위 우성인자(dominants)입니다. 이 우성인자들은 지배 세력, 신들입니다. 즉 뇌가 세속적인 과정의 결과로 받은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평균적인 규칙성으로부터의 법률과 원칙을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표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우성에서 우상이 만들어지며, 이 우상의 타파에서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서, 삶에 대한 '겸손(humble)'을 중요하게 언급한 바 있다.

 

반면,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에서 ‘죄책감’의 근원에 대해

 

“종교, 도덕 그리고 사회적 감정은 원래 동일하다. 이것들은 아버지 콤플렉스에서 계통 발생적으로 습득된 것이다. 즉 종교와 도덕적 억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사회적 감정은 그 당시 젊은 세대 구성원 사이에 남아 있던 경쟁 심리를 극복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나왔다. 여기서 삶을 향한 본능(Libido)과 죽음을 향한 욕구(Thanatos)가 동시에 생겨난다.

 

프로이드는 인간은 세 개의 자아의 발달과정을 거치는데 이드(id)·자아(ego)·초자아(superego)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동안에 부모의 명령을 동일화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부터 발달되는데, 이 과정에서 초자아는 부분적으로만 의식적이며 이드로부터 자아로 향하는 공격적인 요소를 빌려와서 ‘죄책감’을 들게 한다. 그 '죄책감'은 자존감 제로의 상태에서 죽음을 향해 조용히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의 7개의 선언 가운데 마지막 선언에 해당한다. ‘나는 무엇이다.’는 것은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I am that I am)와 같은 맥락의 신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지’의 여부, 그 '사랑'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있는지?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는지 알 수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라는 사랑의 무한 개념을 안 상태에서 나온 신망애의 기도인지 아닌지에서 말이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15,7)

 

영성가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도 원한다고 직관한다. 우리의 뜻이 결코 신의 뜻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 신의 무한한 사랑을 믿고 있다. 그들은 죄를 단지 교정할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마치 이 우주에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지’ 그분에게서 얻는 기도 패턴은 다음과 같다.(블로그 개설하고 이 패턴에 관한 글도 많이 올렸다) 삶의 패턴은 기도의 패턴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하기-행하기- 존재하기’의 기도와 삶을 지향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그분에게서 얻는 이들의 기도와 삶의 패턴은 다르다. ‘존재하기–행하기-소유하기’의 패턴을 산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후자의 패턴에 해당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를 생각해 보자. 그분은 소년이 내어놓은 물고기와 보리빵을 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다(존재하기). 이 감사의 기도는 아직 오천명이 먹을 빵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런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행하기),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에 가득했다(소유하기) 그분은 도무지 아버지가 당신 자신의 기도를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신다.

 

(예컨대, 내가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소유했을 때 내가 어떤 상태이기를 바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지금 사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기-사랑, 기쁨, 평화, 행복, 자유...-다. 이것은 선취의식인데, 성서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은 모드 이 패턴을 따른다. 그 존재하기의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행할 때, 내가 소유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 또는 소유에서 자유로워진다.)

 

만약,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분의 뜻에 배치되고, 우리의 소망은 늘 거절당하고, 우리의 기도는 유보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지 그분안에 '머무른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추종하기’ 즉 ‘붙어있음’의 단계에서 우리와 그분의 ‘분리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결핍이나 죄를 통해 그분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존재하기)를 통해 그분과 우리를 바라볼 수 없다.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 힘들다면, 우리는 아직도 전자의 상태, 신의 사랑을 배우지도, 알지도, 믿지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에 대해 말하고 갈망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사랑에서 조금 더 나아간 그 정도의 사랑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분의 사랑이 무한하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제한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못 믿는 것이다.

 

그래서 끝내 복음에서 말하는 ‘무엇이든지’ 그 사랑의 무한을 경험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주겠다는 데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우리 사랑의 그릇은 그렇게 작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부족한 우리 자신이 아니라 신의 무한한 사랑이다.

 

왜 그럴까? 죄를 피하려고 했지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사랑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랑 앞에서 늘 망설이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그래서, 우리가 경험한 작은 사랑, 상처주고 상처받은 받은 작은 사랑, 죄책감을 유발시켰던 사랑의 경험에서 아주 조금 나아간 것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신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은 아예 그 한계를 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했던 사랑, 그 죄책감이 먼저 떠오른다는 것이다. 각인효과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배우지 못한 것은 '신의 사랑'이다. 신의 사랑을 알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인류는 십자가에 신을 죽이고도 신의 사랑을 배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도 얼마나 많은 신의 사랑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있을까를 충분히 추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분 안에 ‘머무르는’는 최종 지점은 어디일까?

 

신의 무한한 사랑을 어느 정도 직관하고도 그것을 살기가 어렵다는 데서 그 지점을 바라볼 수 있다. 강론에서 바라본 교만이나 죄책감과 더불어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그분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현실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존의 두려움이 1차적인 이유이고,  죄 자체가 아니라 죄의 개념에 사로잡힌 관성의 법칙이 두번째 이유이다. 

 

이 생존의 두려움은 요한15,1-8을 요한 12,20-33과 연결하여 묵상할 때에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머문다’의 궁극적인 지점은 ‘죽어야지만 살 수 있고, 살아야지만 열매 맺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에 관한 모든 그릇된 개념이 죽어야지만 비로소 신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현실에서 이런 무한한 사랑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알기에 자신이 매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그 사랑을 알기에 죽음이 억울하지 않다. 머무르는 사랑은 억울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멀리 바라본 사람이 조금 바라본 사람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도 억울하지 않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사르트르가 바라본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선택)가 있다” 는 것을, 신앙인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mevnw머무름)’이 있다"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 강론 서두에서 언급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우리와 우리는 어떤 관계인지?' 그 관계의 이름을 자신의 언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