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

나뭇잎숨결 2021. 5. 20. 21:19

 

사랑,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

- L'amour, l'absence de la présence, la présence de l'absence

 

[주 님 승 천 대축일(니해)2021. 5. 16. Marc. 16,15-20]

 



1.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절정’이 있기 때문이다(릴케)
2.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
3.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마르코16,15-20ㄴ)

 

 

 

1.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절정’이 있기 때문이다(릴케)

 

릴케의 「장미의 내부」를 읽어본다.

 

1.어디에 이 내부에 대한/외부가 있는 것일까? 어떤 상처에/이런 정결한 꽃잎을 얹어야 할 것인가?/어느 하늘이 이 속/활짝 피어난 장미의/안쪽 호수에 비추는 것일까?/그대 근심 모르는 장미여, 보라/꽃잎들 흐느러져 흐느러져 겹쳐 있다./떨리는 손길로 어루만져도/흩어질 것 같지 않다./스스로 견디기가/어려울 것 같구나./장미는 송이마다/넘쳐흘러서/긴긴 여름날이 부풀어 올라/꿈속의 방(房)이 되어/여물게 될 때까지/흘러서 흘러서 내려간다

 

2. 어디가 이 속에 대한/밖인가? 어떤 아픔위에 /그 아마의 천을 놓을 수 있나? /어떤 하늘이/이 열린 장미의/이 무사무념의 장미꽃 호수속에서/비추이고 있나니. 보라 /장미꽃들은 /떨리는 손으로 결코 헝클어트릴 수 없다는 듯./풀어져 흩으러져 있다./장미꽃들은 제 몸들을 제가/가누지 못하듯. 너무 넘치거나/그 속의 공간에서 흘러나와/갈수록 쨍쨍한 대낮속으로 들어가/마침내 온 여름을 한칸의 방으로 만든다./꿈속의 방.

 

천지가 꽃이다. 장미다. 축복이다. 산화공덕이다.

 

릴케의 「장미의 내부」는 모든 문학적 수사의 기저에 있는 ‘현존의 부재, 부재의 현존’을 형상화인 시이다. 특히 ‘부재의 현존’ 그 ‘충만’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릴케시의 전반적인 ‘멜랑콜리’의 정조에서 벗어난 시에 해당한다. 릴케 스스로 장미 정원을 애중지애 할 정도로 가꿨고, 장미가시에 찔려 파상풍으로 죽었다는 설이 난무할 정도로 릴케 하면 '장미'가 떠오른다.

 

「장미의 내부」는 1연과 2연이 대칭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그 내부 청자는 1연이 장미, 2연은 장미를 보는 모든 이들이다. 이 때 ‘장미’는 무엇인가? 거대한 세계 속에서 존재증명을 요구받은 한 연약한 존재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어디에-어디가, 어떤 상처에-어떤 아픔 위에, 어느 하늘이- 어떤 하늘이’로 대응되는 세계를 화자는 바라보고 있다.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세계에 사정없이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 사정없이 끌려가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증명을 할 수가 없다.

 

장미는 이내 세계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장미로 이 세상에 온 자기 본연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저 거대한 세계와 한 송이의 장미, 그 존재의 크기를 초월해, 한 겹 한 겹 꽃잎을 피워낸다. 겹겹의 꽃잎이 피는 것을 마치 ‘흘러넘치고’ 혹은 ‘흐트러져’처럼 폭포수 같기도 하기도 여인의 머리칼 같기도 하다. 호수에 하늘이 담기듯, 하늘이 담긴 꽃잎을 한 겹 한 겹 펼친 그 상태, 자신을 온전히 피워내는 것이 장미에게는 ‘꿈속의 방’인 것이다. 이때 존재증명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그 ‘꿈’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릴케하면 떠오르는 그의 묘비명에서 그 ‘꿈’은 ‘잠’으로 비유된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니고픈 마음이여.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는 릴케 시의 그 극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장미는 수많은 모순을 응축한 산물로 제시된다, 그 모순을 ‘순수한’ 모순이라고 시인은 바라본다. 모순이면 모순이지 ‘순수한’ 모순은 무엇인가? 릴케는 모순의 존재양식을 후천적인 기질지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생득적인 조건으로 보고 있다. 생명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 안에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을 내장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하여, ‘장미가 꽃을 피웠다’는 것은 자기모순을 극복한 상태로 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아픔이나 상처에 꽃잎을 얹을 수 있는, 위로의 아마포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미는 겹겹이 수많은 꽃잎을 지닌 존재로 장미 내부에서조차 모순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의 모순과 장미의 모순, 두겹의 모순을 살아내는 것이 장미의 존재증명이다.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가시를 지닌 존재, 장미!

 

대부분의 꽃들은 홑겹이다. 그런데 모란과 장미는 겹꽃이다. 겹꽃을 모두 열어 더 이상 열 것이 없을 때, 눈꺼풀이 내려앉듯 ‘잠’에 이르는 존재, 그 잠은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장미만의 유일한 잠, 그 잠은 장미의 꿈이자 그가 이 세상에 온 존재태다. 나르시시즘의 극치라 할 만한다.

 

「장미의 내부」에서는 ‘아픔’과 ‘아마의 천’(쓰라림과 부드러움, 가시가 있지만 아름답다 등), ‘무사무념’과 ‘풀어져 있음’ 하늘과 호수 등의 시어를 통해 장미를 내부와 외부의 대립으로 가득차 있는 모순된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러한 장미의 모순은 부드러움의 힘이 강한 힘보다 더 강해지는 지점에 오면 내부와 외부의 대립은 소멸된다. 장미 자체가 내부를 다 채우고 넘쳐흘렀기 때문에 내부와 외부가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거대한 세계와 연약한 장미의 등치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장미가 보여준 모순의 절정이다.

 

이제 장미의 ‘아름다움’은 그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다. 장미는 그 안에 세계를 안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청명함, 지상의 뜨거움을 모두 담고 있다. 아무런 근심도 없는 듯, 장미의 꽃잎들은 겹겹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이 꽃잎들의 연합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5월부터 장미는 송이마다 부풀어 오르고, 한 송이 한 송이가 연합해 ‘꿈속의 방(房)’을 만든다.

 

세계와 장미의 모순, 장미와 장미의 모순을 모두 극복해야지만 장미라는 한 송이의 꽃을 피워냈다 할 수 있다. 그로인해 장미는 스스로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는 장미다’ 라고 존재증명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절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럼에도 해명해야할 것은 장미가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수 있다. 그것은 자기 모순을 극복한 상태, 칸트가 바라본 무아지경(ἔκστασις)의 ‘숭고미’의 경지까지 이른 상태라 할 수 있다.

 

 

 

뒤러, 〈멜랑콜리아 I〉

 

 

 

2.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

                                 -아주 위대해지거나 아주 위태로워지거나(칸트 & 에리 포퍼)

 

칸트는 『판단력 비판』, 『고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τὸὕψος/sublime/Erhabene)’를 나르시즘, 멜랑콜리, 고독과 연결하고 있다. 모든 멜랑콜리한 존재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melancholy’의 핵심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나르시시즘에 잠기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멜랑콜리는 나르시스트의 특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숭고’는 ‘나르시스트-멜랑콜리-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①멜랑콜리한 우울한 기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곳에서 우울의 원인을 발견하고, 다혈질인 사람이 성공의 희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다혈질인 사람이 단지 표면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데 반해서, 감상적 우울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심연을 침잠한다. 그 심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간 본성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는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 사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멜랑콜리는 고대 의학에 기초를 둔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단지 영혼에만 어떤 개별자의 기질은 종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다. 또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신비스럽게도 영혼과 공동 작용 원인으로서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인 기질은 영혼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에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성’ 즉 ‘나르시즘’에 기반한다.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과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공허한 타자로 남는다. 물론 여기에서 ‘나’란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 주체를 뜻할 수도 있고, 한갓 주관적인 개체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멜랑콜리는 미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발현시키기도 하고 병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멜랑콜리는 ‘나’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고 수렴시키는 나르시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②악덕과 도덕적 위반 자체도 종종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몇몇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이 적어도 우리의 감각적인(sinnlich) 감정에서 현상하는 것처럼 그렇다. 강건한 종류의 모든 정념은 ‘심미적-숭고’인데, 예를 들면 분노, 심지어 절망이 그것이다.

 

칸트는 나르시시즘의 멜랑콜리한 정념을 숭고와 연결짓는 데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멜랑콜리의 핵심에는 고대 의학의 연장선에서 쓸개로 상징되는 분노(절망의 다른 표현)의 정념이 놓여 있으며, 그것은 심미적으로 볼 때, 멜랑콜리의 숭고성을 주조한다고 보았다.

 

③대담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는 위협적인 절벽, 번개와 우뢰를 몰고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있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화산, 폐허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위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력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매혹한다.

 

자연의 절대적인 세계의 크기는 연약한 인간에게 가공할만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대상은 자기보존 본능을 두려움이란 형태로 드러낸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크기와 그런 힘에 압도당한 상태는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매혹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는 것에서 멜랑콜리는 심연에서 솟구치게 된다. 

 

④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범용 이상으로 고양시켜 주며 또 우리의 내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의 외관상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릴케의 시에서 ‘장미’로 상징된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세계 앞에서 자기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단초가 제공된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일단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 그런 자연의 힘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상대적인 크기에 유한한 위력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한다. 절대적인 크기의 무한한 힘은 자연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과 절대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현상계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사유할 수 있는 이성만이 멜랑콜리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울에 침잠되지 않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숭고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이런 숭고감정의 반전 메카니즘은 광적인 멜랑콜리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둘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렇듯,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숭고(崇高)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칸트와는 다른 시선으로 인간이 세계의 모순과 자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에릭 호퍼는 『영혼의 연금술』에서 ‘무아지경(ἔκστασις)’이자 ‘광기(μανία)’를 우리 내부에서 같은 뿌리 ‘열정’으로 보고 있다. 숭고의 경지에 이르거나 혹은 광신, 맹신, 열광, 추종이라 불리는 ‘fanatism 파나티시즘’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떤 획기적인 차이가 아니라 사소한 의식구조의 변환이라고 보고 있다. 어떻게 쟌 다르크는 마녀이자 민중의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

 

⑤‘한 열정이 다른 열정으로 바뀔 때 동반되는 혼란은, 그 방향이 정반대로 진행되더라도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모든 열정적인 정신 안에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구조가 있다. 죄인에서 성자로 변신하는 사람이나, 호색가에서 금욕주의자로 변신하는 사람이나, 둘 다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는다.’(영혼의 연금술 10)

 

 

⑥‘자신이 무엇인가에 고통받고 있을 때, 무엇인가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거라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약자의 재능이다. 이들은 달아날 때도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다고 믿고, 열기를 느낄 때도 빛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기피할 때도 선택받았다고 확신한다.’(영혼의 연금술 49)

 

에릭 호퍼는 부두노동자이면서 철학자였다. 자신이 관념에 매몰되거나 빵으로만 사는 존재이기를 거부했던 길 위의 철학자였다. 정신만으로도 살고 싶지 않았고 육체만으로도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인간의 열정은 기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되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 부적응자의 자기혐오나 자기부정은 자기로부터 도피인 셈이다. 몽테뉴조차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병”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찾아내자마자,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강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적당한 대의명분과 목적이 주어지면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통째로 바꾸기 위해 강한 에너지를 발휘한다. 명분과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열정적인 사람들은 종교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민족운동이건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광신적 공산주의에서, 광신적 민족주의자나, 종교적 광신자로 바뀌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파나티시즘Fanaticism; 광신에 빠져들고, 또 맹목적으로 정치이데올로기에 뛰어드는가? 에릭 호퍼는 인간의 자기애, 사회적 약자, 개척자, 인간의 열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에릭 호퍼는 이를 사유할 수 없는 자의 미망으로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라고 말한다. 인간은 정신적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라는 모순된 존재조건에서 이를 바라본다. 자신이 모순적인 존재양태를 갖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이나 업적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존감이 없는 상태에서 가공의 자기, 지도자, 거룩한 대의, 집단적인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일체화시키면서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을 키우게 된다. 이때의 자존심은 본래 자기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그 안에 두려움, 옹졸함, 과시욕이 있으며, 민감하고 타협할 줄도 모른다. 자존심의 핵심은 바로 자기 거부이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가능성의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칸트와 에릭 포퍼의 통찰처럼 인간에게는 모순되는 두 개의 존재양식을 지닌 모순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아주 위대해지거나 아주 위태로워 지거나’ 그 모순을 극복하는 열쇠를 칸트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작동에서 에릭포퍼는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마르코16,15-20ㄴ)

 

그렇다면 신앙들은 어떻게 세계의 모순과  자기 모순을 극복하고, 그분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존재증명 하고 있는가?

 

[주님승천대축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행보는 놀라움의 놀라움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어떤 일관성을 지닌다. 예수님의 승천축일에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의 급격한 변화양상, 제자들이 지닌 입체성이라 할 수 있다.

 

주님 승천은 부활사건과 연장선에서 예수님 지상생활의 끝이 교회의 시작이라는 예수님 사랑의 완성이자, 무엇보다 추종자의 입장에 있던 제자들이 구세사의 무대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사건이자, 제자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누구일 수 있는지 알게 된(살게된) 대 사건에 해당한다. 예수님 강생과 십자가 신학의 종합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구세사의 방향성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 주님 승천축일이다.

 

그렇기에 주님의 승천은 전례의 반복이 아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광의의 의미를 묻는 사건이자, 예수님+제자+교회인 우리, 모든 것이 합쳐져 ‘교회의 존재 이유’ 즉 ‘교회정체성’을 질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마르코16,15-20ㄴ)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열한제자-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은 1차적으로 교회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명은 무엇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명은 생의 선물이다. 장미로 말하지만 꽃을 피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유다’를 잃었으니 이제 ’열한제자’라는 사실도 유다에게는 비극이고 우리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희망이 된다. 비극마저도 타산지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완수하는데 100% 성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길위에 섰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우리가 어떤 이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그런데 그 이름이 하늘과 땅의 주인임에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일들을 흔쾌히 네! 하고 수락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믿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징, 그것은 그분의 이름에 대한 확신의 표징이다. 기적의 원리를 바라보는 것이자 믿음의 힘과 교회의 존재이유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에서 그분이 오른쪽에 앉으셨다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증하나? 열두제자와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가 그것을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성서공부를 한 이들은 마르코 복음이 16장8절에서 끝났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 뒷부분은 2세기 경에 제자들의 전승과 모든 복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덧붙여진 서술이다. 이를 통해 복음사가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분을 믿는 이들이 그분의 ‘강생신학과 십자가 신학’을 완성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강론에서 자주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 ‘이 세상은 인간 없이 창조했지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에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다. 복음의 주제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분의 말씀이 어떻게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랑은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는, 한계가 없다. 나도 할만큼 했다,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지만 그래서 사랑은 위태롭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그분의 이름이 그분을 빛나게 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의 승천은 ‘현존에서 부재, 부재에서 현존으로’라는 이 글의 주제는 자칫 문학적 수사에 머무를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교회인가? 우리 믿음이 어떤 표징들은 생산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그렇다.

 

주님승천대축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는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옆에 계시는데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했던 삶과 앞으로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 이 두 가지 삶 중에, 자신들을 더 힘들게 하는 삶은,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는데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했던 삶,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던 그 삶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 그 힘든 삶에 대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부족함을 사랑했던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족함이, 예수님과 자신들을 연결시켰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부족함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오실 수 있었던 그 공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에서 예수님 없으면 은 복음에서 예수님 이름으로와 같은 맥락이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것은, 언제나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과 함께했을 때,  가능하다. 그 완성의 도구가 제자 즉 오늘 우리라는 사실이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늘과 땅의 축복을 여는 존재란 사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분이 주신 사명의 완성 여부는 강론의 주제인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이 세상이 그분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더 큰 그림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 혹은 소명을 감싸고 있기에 위로이자 격려라 할 수 있다. 사명과 선물과 위로는 늘 함께 하기에.

 

Ⓕ에서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는데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했던 삶을 어떻게 성찰하느냐의 여부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흔히 지렛대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족함을 통해서 부족함에서 벗어나기, 영성가들은 그 부족함이 신의 현존을 바라보는 ‘문’이라고 전한다. 우리는 장미가 모순을 극복하듯, 칸트와 에릭 포퍼가 간파했듯 우리는 모순의 존재양태를 갖고 이 세상에 왔고 살고 있다. 그러기에 그분의 현존에서 오히려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미망이, 부재를 현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문이 되기도 한다.

 

(아이도 ‘부재의 현존’을 안다. 아이가 뒤에 엄마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조금만 넘어져도 울고 걷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절대 울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원하는 그 길을 씩씩하게 잘 간다.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 잔인한 노릇이지만, 어떤 사명이 주어진 이들에게 생은 늘 짓궂고 꽤 잔인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엄마가 계속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청개구리 동화에서)

 

Ⓖ에서 그들의 그 부족한면이 오히려 예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공간, 고리이었다는 점이 무엇을 말함인가? 강론의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많은 이들이 사랑은 ‘결여’와 ‘결핍’의 산물이라고 바라본 그 맥락과 같이한다. 평론가 신형철 선생은 ‘결여’가 유일한 사랑의 교환구조라고 말할 정도다. 우리는 아무런 인격의 부족함을 찾을 수 없는 이들(과연 완벽이란 용어가 인간에게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즉 완벽주의자들이 사랑의ㅡ 도그마에 빠지는 예들을 알고 있다.

 

Ⓗ는 강론의 주제인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이 부분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과연 신앙인에게 '용기'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용기'란 단지 마음의 위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분의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완성한 그 삶을 이제 우리가 살아내는 일이 용기라면,  우리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협조자 성령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은총의 그릇은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론을 묵상하다보면, 우리는 축복과 미망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절정이 있기 때문이라면,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그 사랑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연한 축복의 선물이 당연하게 우리에게 수용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씻음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의 부재중에 미망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이 부재의 현존으로 인해 그분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주님 승천 앞에서, 제1독서가 전하는 "갈릴레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장11절)를 좀 더 예민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어떤 상태를 겪어내면서 수용하고  있는지, 우리가 신앙의ㅡ 여정에서 무엇을 겪어내고 있는 그 상태들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의 승천으로 제자들의 '거듭남'을 기계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이다. 현존의 부재를 겪던 그들이 곧바로 부재의 현존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재의 부재, 그 망연자실의 순간을 겪어내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열정의 죽음과 멜랑콜리의 심연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가 무엇인지,  어느 시점에 전 인격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강론에서 말하는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혹은 ‘부재, 현존의 다른 이름(김혜윤 수녀)’ 혹은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는 어느 정도 철학의 출발이나 문학적 수사를 내장하고 있다. 철학적 출발이나 문학적 수사는 단지 표현방식의 외적 의장이 아니라 당대를 끌어가는 가치관, 어떤 감상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실존주의는 이 '없음'에 방점을 찍은 철학사조라 할 수 있다. 철학사조를 모른다 해도 우리의 실존 양식이 이 '없음'을 극복하는 물질주의 내지는 형태주의, 감각주의에 기반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물질주의,  감각주의 형태주의를 자본주의는 먹고 성장했고,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적 양식에 길들여진 삶을 살고 있다.

 

수없이 많은 신자들의 영성을 잠식하는 것이 이 물질주의 형태주의의 '없음'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 외적으로 열심해 보이는 그 영성의 바탕에 이 '없음'의 구조가 어떤 트랙처럼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두려움의 원천일 것이다. 신앙과 실존양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박탈감을 '없음'으로 인삭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없이 ~와 함께 하는 삶’은 "갈릴레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장11절)에서 즉,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굉장한 멜랑콜리를 경험하게 한다. 분명히 '없음' 안에는 '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없음'에 방점을 찍고 더 오래 그 상태에 머무르려는 감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로인해 ~없이 에서 ~함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모든 부재하는 것들을 소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이 수사에 낚이면 멜랑콜리한 시를 쓰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이 수사는 우리에게 어떤 감상적인 나르시스의 위로를 던진다. 그런데 이 위로는 걸어가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주저앉게 하는 위로,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하는 위로이다. 그 감성적 위로에서 벗어나 진정한 위로를 발견하는 것이 강론에서 말하는 '용기'일 것이다.

 

릴케, 칸트, 에릭 포퍼, 그들을 사유하는 자의 아름다움이라 부를때. 그들이 자기 심연 속에서 어떤 지혜를 발견했던 것처럼.  릴케가 바라본 장미의 모순, 칸트와 에릭 포퍼가 바라본 인간의 모순된 존재양식에서 벗어나야 하듯,

 

우리도 부재의 심연에서 그분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 이름에서  용기와 위로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모순과 영적 모순, 두 겹의 모순을 극복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치관의 전환이자 감성의 재배치에 해당한다.

 

그때 '나는 사랑이다' '나는 그분의 현존이다'는 것을 기쁘게, 우리의 존재이유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혹은 ‘부재, 현존의 다른 이름’ 혹은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는 그분에게서 오는 진정한 ‘용기’와  ‘위로’의 그 근원을 바라보는 일이며, 오늘, 지금, 시간 안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이 순례의 여정을 다할 것인가를 깊이 성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