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로서의 믿음과 ‘이해’로서의 믿음
-Glaube als ‘Stehen’ und Glaube als ‘Verstehen’
[연 중 제 13 주 일 (나 해) 2021. 6. 27. 마르코 5,21-43]
1. 몸이 언어와 밀애를 나누면 그 몸은 시가 된다(김경주) 2.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G. 레이코프) 3. 내가 저 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마르코 5,21-43) |
1. ‘몸’이 ‘언어’와 밀애를 나누면 그 ‘몸’은 ‘시’가 된다(김경주)
시인 김경주는 “몸을 관통하지 못하는 언어는 어디로든 데려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몸에 관한 詩적 몽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밀어』에서 마흔여섯 가지 우리 몸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 몸이 하나의 언어임을 들려준다.
「쇄골」을 읽어본다.
쇄골鎖骨에 빗물이 고이는 사람이 있다. 마르고 아름다운 몸의 선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보통 비만인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몸의 리듬은 선과 골격의 리듬이다. 물론 풍만한 몸의 소유자에게서도 선의 미는 발견되기도 한다. 선조들은 오히려 이 풍만함으로부터 선의 매혹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대체로 그들의 균형에 대한 미의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선의 리듬이라는 것은 비균형에서 온다고 믿는 편이다. 예상할 수 없는 선의 비선형성이 주는 매혹, 하나의 육체가 가지는 가장 매혹적인 균형은 역설적이게도 억측이 보기 좋게 들어맞을 경우에 생겨난다. 육체에게 바치는 우리의 탄성은 도저히 그곳으로 뻗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비율을 입고 태어나는 곡선의 질감이다. 육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쇄골」에서 ‘쇄골鎖骨에 빗물이 고이는 사람이 있다’에서 ‘ 대체 쇄골에 물이 고일 정도면? ‘빗물이 고이는’’이라는 관형절은 단번에 언어를 육체화시킨다. 익명의 어떤 여인이 순간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 여인은 극단적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거나, 아님 몸의 최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거나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시인의 시선과 그 문장을 읽은 익명의 시선이 만나 몇 겹의 몸이 만나게 된다.
‘쇄골에 물이 고인다’는 하나의 문장에서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의 전체적인 윤곽을 떠올리는 것은, 간디가 물레를 돌리면서 보여주었던 살과 뼈만으로 이루어진 어떤 사람의 형체에서 품어져 나오는 견고함과 부드러움을 목격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물레를 돌리는 간디의 (최소주의의)몸은 간디가 추구하는 비폭력의 휴머니즘을 즉각적으로 접수하게 만든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몸은 그가 전하고자 하는 치유의 영성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렇듯, 모든 몸은 말하고 있다.
그것을 시인은 빗물이 고일 정도로 패인 쇄골의 비균형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 쇄골이 만들어내는 선은 하나의 리듬이자, 곡선이 되고 몸은 미학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무엇보다 쇄골을 몸 전체에서 분리된 하나의 낱개, 개별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주목하게 된다. ‘육체에게 바치는 우리의 탄성은 도저히 그곳으로 뻗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비율을 입고 태어나는 곡선의 질감이다. 육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라는 것에서' 몸을 전체가 아니라 개별자로 인식하는 그 저변에는 가학증과 피학증을 경계하는 그의 휴먼까지 엿볼 수 있다.
김경주는 “시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산문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겉도는 하나의 선이다. 몸의 선은 그 자체로 숨 쉬는 비율이며 튀어 오르는 정밀한 뼈들을 감추고 있는 이미지다. 쇄골은 육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선線의 풍경”이라고 몸이 하나의 시이자 산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다. 시는 은폐된 채 드러나고자 하는 욕망의 몸이라면, 산문은 드러난 채, 감추려는 욕구의 몸이라고, ‘시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산문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겉도는 하나의 선‘에서 우리 몸은 동시에 욕망과 욕구의 교차를 통해 어떤 미학을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욕구’가 아닌 ‘욕망’으로 보는 것은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욕구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시를 낳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건너야 하지만 건널 수 없을 때, 넘어야 하지만 넘을 수 없을 때, 그 긴장감에서 시가 탄생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나 잔혹극 같은 연극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몸은 단지 생리적 욕구를 지닌 물질성이나 자본주의 소비의 주체로써의 몸이 아니라, 그 이면에 그의 내면 세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나 은유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과 잘 부합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식욕, 성욕 같은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언어로서 표현한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욕구를 언어화함으로써 의식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의 언어적 상징적 표현이 ‘요구’이다. 그러나 이때 모든 ‘욕구’가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남아 있는 욕구(잔여 욕구)’가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을 형성한다. 결국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욕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어두운 심연에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의식적 욕망이다."
우리 몸은 <욕망과 욕구와 요구사이에 놓여 있는 하나의 심연>이다. 이런 심연에 가로놓인 존재인 인간이 자기의 몸을 이해하고 개별자로 바라본다는 것에서 “몸을 관통하지 못하는 언어는 어디로든 데려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육체성을 지니지 않은 몸들은 길을 잃는다. 인간의 비극은 언어를 입지 못한 몸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게 인간을 바친다는 ‘인신공희’란 말 속에는 신에 대한 오독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공존한다는 인간역사의 아이러니가 담겨있다. 신이 순결한 생명을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 요구한다고 보는 것은 숭고미의 절정에 인간의 ‘몸’이 있다는 무의식이 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확대해서 몸을 훼손해서 몸의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러니가 바로 인간 역사인 것이다.
『밀어』에서 몸은 주제이자 곧 형식이다. 작가는 몸의 유기적 관계성보다는 몸의 부위 자체가 지닌 개별성에 주목한다. 특히 전체와 상응하는 듯하면서도 개별적 목적성을 지닌 신체의 각 단어들, 지칭들에 주목하고 각각의 이름들이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그 시원을 상상하면서, 기존 언어가 가 닿지 못한 파격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몸의 언어와 감각의 무한 확장을 꾀한다.
목선은 “잠자는 육신을 공중으로 데려갈 때 필요한 선”이다. 핏줄은 고독해서 몸속으로 숨어버린 살이며, “아직 발견되지 못한 채 물속 깊이 떠다니는 슬픈 대륙의 이미지”이다. 몸이 언어와 밀애를 나누면 그 몸은 시가 된다.
작가는 귓불, 솜털, 뺨, 입술, 쇄골, 유두, 항문, 복사뼈 등 마흔여섯 가지 우리 몸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 언어의 산책로를 내고, 깊이 응시하고 은밀하게 더듬어 때로는 관능적이고 때로는 숭고하게 표현해낸다. 철학, 언어학, 역사학 등 인문적 고찰에서 시작한 글쓰기는 이내 학문 간 경계를 훌쩍 넘어 민속학, 생물학, 의학, 동양의 운기학까지 아우르며 전방위적 고찰로 나아간다.
‘김경주는 말한다. 오래전 ‘우울증은 비밀에 대한 고통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은 몸이 의도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그럴 경우 몸은 뭉클하다. 대개의 경우 환자가 지적하는 통증의 부위는 은유의 화려함에 결정된다는 디알로그는 심층적이다. 몸에 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몸을 관통하지 못하는 언어는 어디로든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몸에게 닿으려는 언어는 비밀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시가 단어 하나 속에서 숨이 차오르는 숨 쉬기이듯이, 시는 육체를 밀월하는 어떤 부위를 나 아닌 누군가의 몽정이라고 부르려는 호명에 가까운 것이다.
밀어密語란 보이지 않는 언어로 떠나보는 여행이다. 네 몸의 어떤 부분으로 떠나는 밀월이다. 시인은 몽롱한 번개 같은 언어를 데리고 ‘살 속의 연’처럼 흘러가보고 싶다. 혹은 속삭이는 번개처럼, 내 몸속으로 들어가 네 몸을 잊어보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 책은 어떤 이에게는 불필요해 보이는 느낌이 될 수도 있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뭉클한 몸처럼 그리운 허구 같은 것이 되었으면 한다. 그건 우리들의 언어에 또 다른 생채기를 남길 것이다. 찰과상처럼.
시인 강정은 이렇게 덧붙인다. 신체를 통해 영육靈肉의 조건과 기원들을 탐사하는 일은 어느 개인의 특수한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는 여태껏 오직 단 한편의 시만 써왔던 건지 모른다. 마치 신체의 모든 조직이 같은 설계도를 토대로 반복재생 되어왔듯, 우리는 그저 몸이 가진 단 하나의 기원을 잊지 않으려 그토록 많은 말들을 떠들어댄 건지 모른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저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우주의 파동에 전신으로 반응하는 숨결의 반사체일 뿐이다. 정말 당신이 외롭고 아프고 고독하다면 오래 전 일기장을 들추듯 당신의 몸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마음이 미처 판독하지 못했던 세계의 숨은 질서를 몸이 알아서 대필해줄 지 모른다. 당신이 가장 그리워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의 광활한 육체일 뿐이다.
2.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G. 레이코프)
나의 지인들 대부분 일일일식을 한다. 그들은 몸을 미학의 차원이 아니라 정신의 차원으로 바라본다. 몸을 자신의 서재처럼 아끼고 중시하는 이유는 지성의 칼을 예리하게 갈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식탁에 놓인 한 잔의 커피, 한 접시의 음식은 그들 서가에 꽂힌 한 권의 책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어떤 경지에 이른 노교수님들의 몸은 그 자체로 걸어가는 상아탑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종교지도자들보다도 그들은 몸과 정신을 ‘동시에’ 소중히 다룰줄 안다. 그들은 이성이나 영혼은 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신일원론자들이다.
형이상학은 형이하학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들은 삶으로 우리 인간의 몸에 관하여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 몸의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풍부해지는 삶의 의미와 몸의 의미론적 가치를 과연 올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가?를 자신의 온 몸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이렇듯, 몸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소비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뿐 아니라, 윤리적인 질문이자, 종교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기 정체성을 묻는 인격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김경주의 『밀어』에서 보듯 우리의 몸은 관능이자 숭고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왜 늘 몸을 소외시키거나 왜곡했는가를 성찰하는 것, ‘몸’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철학적 움직임은 인간 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몸의 철학을 부르짖는 이들이 안티테제로 소환하는 인물은 언제나 데카르트였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은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명제이다. 데카르트는 후일 『철학 원리』에서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라틴어 명제를 제시하였다. “ dubito, ergo cogito, ergo sum 두비토, 에르고 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에서 코기토를 사용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확고한 진리의 바탕이 되는 개념으로서 코기토를 사용하였다. 데카르트는 중세 초의 이러한 주장을 근세의 자연 철학을 위해 다시 살려낸 것이다. 이성이 매몰된 시대에 이성을 회복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엉뚱하게 몸을 폄하하는 기계주의를 낳았고, 몸의 철학을 부르짖는 이들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그들은 우리의 <몸>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이 데카르트에 의하여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철학은 몸에 관한 풍부한 인문학적 함의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얼마나 자주 그러한가? 내가 생각할 때에만. 왜냐면 만약 내가 생각하기를 완전히 멈추면 나는 마찬가지로 존재하기를 중지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존재이다” (Descartes, Meditations 152-153)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대부분의 자연과학, 인식론, 심리학, 언어철학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이다. 둘째, 마음은 탈신체적이다. 셋째,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카르트의 이 세 가지 요소는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현상학뿐만 아니라 심리철학 그리고 또 다른 학문분야, 교육, 제도, 마음에까지 파고들었다. 특히 사이보그의 현실화 및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현실에서 이성은 언제나 감성과 몸보다 우월한 그 무엇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드는 이유의 근저를 영성적으로 대변하는 이는 장 뤽 낭시일 것이다. 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아니고 몸이어야 하는가? 에 대해 낭시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이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개방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의 현존을 가시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조차도 인간의 몸을 취하여야 신의 현존을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낭시와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G. 레이코프에게서 우리 시대의 ‘몸’을 왜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레이코프는 자본주의나 형이상학에 매몰된 ‘몸’의 부활을 부르짖는 언어학자다. 그는 노엄 촘스키를 잇는 세계적인 인지언어학자로 캘리포니아(버클리)대학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인지 의미론』, 『몸의 철학』, 『삶으로서의 은유』, 『프레임 전쟁』’등을 통해 끊임없이 ‘몸’의 부활을 주장한 학자다.
그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몸’은 이성과 대척점에 있는 데카르트적인 ‘몸’이 아니다. 그는 이성과 몸이 결코 나뉠 수 없는 동체의 다른 표현이라는 데 주목한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과 유사하다. 레이코프의 ‘몸’에 대한 사유는 존슨과의 공동연구 성과를 집약한 『몸의 철학』에서 잘 드러난다.
①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추상적 개념들은 대부분 은유적이다.
②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을 탈신체화된 것으로 개념화하는 은유체계를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탈신체화된 주체라는 환상을 강화하는 지속적인 현상학적 경험을 한다. 그렇지만 인지과학은 우리의 마음이 탈신체화되지 않았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가 방금 보았던 것처럼 인지과학은 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탈신체화되었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③신체화된 마음은 살아있는 몸의 일부이며 그 존재는 몸에 달려 있다. 마음의 속성들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몸과 두뇌에 의해서, 그리고 몸이 일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④더욱이 우리의 합리성이 신체화되어 있는 방식들은 완전 자율성과 같은 어떤 것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의 개념들 중 많은 것이 몸에 대한 내재적 제약, 예를 들아, 공간관계 개념들로부터 발생한다. 둘째, 우리가 개념들을 배울 때 그것들은 우리의 몸의 일부가 된다.
⑤인지과학에는 인간의 자유에 기여하는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적 개념체계가 어떤 것인지,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배우는 능력이다.
레이코프는 『몸의 철학』에서의 인간의 마음은 이미 신체화되어서 무의식층에 자리잡고 있다는 측면에서 칼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과 상당히 중첩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틀은 즉 이미 신체화된 개념들이다. 우리의 정신이나 마음은 모든 인간과 그것을 공유하려는 합리성이라는 보편적인 본질에 더하여,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즉 우리를 나로 만들어 주는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나답게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나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나란, 사회적으로 학습된 개념들을 뇌의 시냅스 층에 항구적이거나 매우 장기적인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이미 신체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개념체계의 대부분은 매우 심도 있게 신체화되어 있어서 적어도 어떤 의지적 해결에 의해서, 그리고 결코 빠르고 쉽게 탈학습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점이다.
레이코프는 만약 우리가 우리의 대부분의 사고가 무의식적이라는 것, 우리가 은유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인지적 무의식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합리성을 갖는다는 가정은 실제로 우리의 합리적 자율성을 제한한다. 그것은 우리를 인지적 노예 상태, 즉 무의식적 은유들에게 대한 의식되지 않고 무비판적인 의존 상태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개념적 자유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대부분의 정신적 삶을 지배하는 신체화된 인지적 무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들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주에 살펴볼 '확증편향'과 상당히 맥을 같이 하는 이론이다.
우리의 개념체계는 지각과 근육운동체계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신경계적으로 사용하며, 그것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된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우리 자신, 타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는 우리의 몸에 의해 형성된 개념들의 관점에서만 틀 지어질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우리의 지식 체계, 영상체계, 근육운동 체계를 사용함으로써 일상 생활에서의 최적의 활동을 표출한다.
이것이 우리 환경의 실재와 최대한 접촉하는 층위로 신체화된 이성, 합리적 추론의 주된 형식들은 감각운동 추론의 사례들이다. 신체화된 진리와 지식, 우리의 관념들이 무의식적인 신체화된 개념체계의 관점에서 짜여지기 때문에 진리와 지식은 신체화된 이해에 의존한다.
신체화된 마음, 개념들과 이성은 모두 감각운동 체계에서 비롯되고, 또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마음은 몸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에 주목한다.
데카르트, 장 뤽 낭시, G. 레이코프의 같은듯 다른 <몸>에 대한 논의에서, 지나치게 몸을 숭배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몸을 폄하하는 것은 같은 무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에게 형성된 어떤 개념들은 이미 우리 몸에서 우리화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죽어도 안 바뀐다, 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왔다. 이 세 조건을 지니고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로 신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이레네오 성인을 말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영혼>은 안티-테제가 될 수 없다. 이를 반 퍼슨은 『몸.영혼. 정신』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육신은 영혼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영혼은 육신과의 결합 속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가 육신이며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3. 내가 저 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마르코 5,21-43)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전인적 존재로 이 세상 순례를 하고 있다. 믿음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기적사화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우리의 영혼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치유의 기적은 단적으로 <몸과마음과영혼>의 '제자리찾기'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5,21-43을 읽어본다.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마르코 5,21-43에는 두 개의 치유기적 사화를 교차해 예수는 누구인가? 치유는 무엇인가? 를 보여준다. 그 치유이야기에서 ‘몸’ 가운데 ‘손’을 무엇인가?
‘손’이라는 단어가 다섯번 나온다. 우리의 신체 중에 기적에 동원되는 ‘손’은 무엇인가? 모든 원시종교에서부터 하늘과 신의 축복은 인간의 손을 통해 전해진다고 믿고 있다.
예수님의 치유기적 사화에서는 이 원형적인 축복의 상징인 무드라(Mudra)에 대한 보편적 전통을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된다. 모든 기적 사화의 중심은 사실 ‘손’이 아니라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통해 ‘믿는다’는 것은 어떤 태도와 이해를 요구할까?를 묻게 된다.
⑴“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12년간 하혈병을 앓고 있던 그 여인은 몸과 자신의 소망을 보통 이상으로 소중히 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을 정도로, 이때 그 여인은 가시의 세계와 불가시의 세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진 것을 다 잃었을 때, 그분의 소식이 귀에 들렸다는 그 부분에서 멈춰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절망하거나 체념으로 끝난다. 그녀의 믿음의 발판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진 것을 다 쏟아부은 그 다음에’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그녀는 그분에게 다가간다는 그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분의 소식은 여인이 여기저기 자신의 병을 고치러 전전할때도 들렸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여인은 어떻게 그분을 '구원을 주는 분'으로 믿게 되었는가? 소유와 믿음은 대척점이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소유와 믿음이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작용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소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믿음이 비틀거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혹은 가진 것이 너무 적어서일 때이다. 우리 자신안에 세상적인 그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 때, 그분의 음성을 듣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물질화되어 있는 이 세계 역시 그분의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 물론, 소유가 많아도 소유에 얶매이지 않을 수도 있고, 소유가 없어도 소유에 매일 수 있다. 그러나 소유가 넘칠 때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란 정말 쉽지 않다. 부자와 낙타의 비유에서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처럼' 이라는 비유가 동원된 이유를 바라보아야 한다. 소유가 주는 포만감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유하되 소유의 재배치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의 믿음사건을 통해 '소유의 재배치'가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소유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때 <소유의 재배치>란 <들음의 재배치>와 같은 맥락임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2서 8장에서 ‘풍요와 궁핍’의 대비를 통해, 풍요와 궁핍이 같은 차원에 이르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풍요로운 자가 궁핍한 자를 채울 수 있지만(상식의 차원), 궁핍한 자가 풍요로운 자를 채울 수 도 있다(영적 차원)는 것이다.
이 여인은 ‘비자발적인 자발성’에 의해 자기 소유의 바닥을 보았다. 물질과 육체로, 가시와 불가시의 세계, 소유의 구분이 분명해졌을 때, 그분의 소문을 듣게 된다는 것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모든 소유에서 놓여났을 때, 그분의 옷 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여인은 그분을 믿었기에 기적을 체험했다. "기적은 먼저 믿음이 있어야 일어난다. 기적을 청한다는 것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헬렌슈크만)
우리는 12년 동안 몸으로, 물질적으로 몸으로 아팠던 한 여인을 통해 우리의 손이 무엇을 만지려고 하는지? 무엇에 닿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다. 이는 회당장의 딸을 통해 재차 확인 하게 된다.
⑵“내가 너에게 말한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딸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더 깊은 <들음>을 요구한다. 그는 회당장이니 어느 정도 믿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아이를 치유해 달라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예수님 당시에도 치유사들은 많이 있었다. 원격치료를 하는 주술사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회당장의 딸은 라자로처럼 소생사화, 삶과 죽음이라는 더 큰 틀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주재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인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경각을 다투던 소녀는 죽게 되었고, 모든 이들은 이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예수님은 잠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소녀여 일어나라! 는 이 들음에 멈춰보자, 우리가 꿈 속에서 잠 속에서 듣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무의식이다.
회당장과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음성은 무엇일까? 우리의 믿음은 명상도 아니고 참선도 아니고 ‘너(그분)’을 통해서 믿는 비로 그 믿음이다. 너(그분)를 듣는 것이다.
‘나-너’의 관계는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서 삶과 죽음으로 나눠지는 분기점이다. 삶은 ‘나-너’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은 <나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듣고 있느냐?> 라고 물을 때, <네 제가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년동안 앓았던 여인이 들어야 하는 상황과 야이로와 그 딸과, 제자들, 군중들이 들어야 하는 상황은 다르지만 <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같다. 듣는 것이 믿음이고 치유의 기적이다. 너(예수)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너는 누구인가? 불멸의 사랑이다. 죽음을 넘어서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랑이다. 또 그 말을 듣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너의 현존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믿는 너(그분)눈 누구인가? 를 정립하는 것이 믿음이고 기적의 체험이다.
믿는다는 것은 <너>라는 그분과의 상봉이다. <인격과 위격>의 상봉이다. 그 상봉은 단지 그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 뿐 아니라, 듣고 있는 나를 안다는 것이다. 그분 앞에 서 있는 분명한 <나>, 너로 인해서 존재하는 나, 그로인해 우리가 믿는 그 <너>는 만유의 근원이자 근저임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잠이 되는 그 상봉이다.
⑶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왜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을까? 군중 속에서도 여인의 믿음은 공식적으로 드러내면서 소녀의 소생설화에는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1차적으로 그분이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제자들과 군중들로 상징되는 인류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적사화가 갖고 있는 환상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신이라 일컫어지는 우상들은 바로 신적 환상이었다.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태도와 이해여부에 의해 환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환상이다. 종교적 무신론의 근원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적이 되는 분수령이다. 환상은 여타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죽음과 분리를 가져온다. 그릇된 희망이나 적을 만들게 된다.
정치적, 종교적 적을 만드는 게 기적사화가 갖고 있는 환상이자 왜곡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은 단지 그 분의 말씀에 감동받아서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영적 육체적으로 배고픈 이들이다. 배고픈 이들에게 기적사화가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권능으로만 보이게 된다면, 그것은 다시 구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어제>와 <오늘>이 갈린다고 볼 수 있다. 권능이, 사랑을 가리게 되는 시간 후퇴. 또한 이는 기적의 원리에 대한 왜곡을 낳는다. 기적은 우리가 지닌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다. 치유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재배치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코 5,21-43의 기적사화는 단지 인간의 병과 죽음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믿음의 여정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존재인 우리가 만나게 되는 세 개의 심연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베네딕또16세 교황님이 추기경 시절에 쓴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요셉 라칭거,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4, pp.19~54)에서 ‘태도’로서의 믿음과 ‘이해’로서의 믿음-Glaube als ‘Stehen’ und Glaube als ‘Verstehen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릎쓰고’ 믿음이 있으며, 비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그리고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믿음은 가시와 불가시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에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심연이 겹쳐진다... 그것은 다시 현실이 무엇인가에 이해를 통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에 의존하고 이 뜻을 아무 두려움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땅으로 받아들임을 말한다."
믿는다는 것은 <가시와 불가시 사이의 심연>,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심연>, < 몸과 마음과 영혼의 심연>을 건너 <몸과 마음과 영혼>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몸에 대한 예찬이나 몸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정당하게 마음과 영혼의 동반자로써 <몸>의 자리를 찾게되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문재의 「손의 백서」를 읽어본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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