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자유의지,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귀환

나뭇잎숨결 2021. 7. 16. 00:00

 

자유의지,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귀환

-Liberté de volonté, la détermination du monde à l'espacement du monde

 

 

[연 중 제 15 주 일 (나 해) 2021. 7. 11. 마르코 6,7-13]

 

 



1. 내가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폴 엘뤼아르)
2. 홀론holon,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아서 쾨슬러)
3.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마르코 6,7-13)

 

 

 

1. 내가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 위에, 너의 이름을 쓴다 (폴 엘뤼아르)

 

 

이런 질문으로 글을 연다. 그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강의 참고자료로 삼기위해 가끔 설문조사를 한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가’라는 항목에 학생들 90% 이상이 ‘경제적인 자유’를 원했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도서관 열람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10%의 학생들은 문항에 응답 하지 않고 자기의견을 서술했다. 그들은 결정론과 부분자유론의 입장을 취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기만적인 어휘로 보고 있는 결정론의 입장은, 아무아무개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선택불가능하다는 점, 유전적으로도 운명이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라면, 부분자유론의 입장은 철학사적으로 양립가능론자와 유사한데, 이들 역시 태어났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결정론이지만 삶이라는 트랙에서는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 앞에는 ‘한계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입장과 탄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립론의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가 사랑처럼 인간 실존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막상 그래, 그렇다면 나는 삶에서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행사하고 있나? 나는 내 의지대로 나를 마음대로 처분하고 있나? 내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한 존재인가? 혹시 관념으로 ‘자유의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었던 그 ‘자유’는 곧 ‘자유의지’인가? 혹은 내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를 노예상태로 잡아두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를 나는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자유’ 앞에서 하게 된다.

 

이 글이 바라볼 주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J의 언명이다. 이 언명은 다양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그 ‘아무것도’에서 무한한 자유의 지평을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폴 엘뤼아르(Paul Eluard)는)의 「자유」를 읽어본다.

 

①나의 초등 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②/내가 읽은 모든 책의 페이지 위에 흰 종이 위에 돌과 피,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③부(富)의 허상(虛像) 위에 무인(武人)의 무기 위에 제왕(帝王)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④밀림 위에, 사막 위에 새 집 위에, 금작화 위에 내 유년기의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⑤밤의 경이로움 위에 낮에 먹는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⑥남빛 헌 누더기 위에 태양이 지루하게 머무는 연못 위에 달빛이 환히 비추는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⑦지평선 위에, 수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외진 곳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⑧여명(黎明)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가파른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⑨ 구름의 거품 위에 소나기의 방울 위에 굵고 맥빠진 빗줄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뜻밖의 기쁜 소식을 안긴 창 유리 위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 저 너머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⑩ 파괴된 방공호 위에 무너진 등대 위에 내 권태(倦怠)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⑪ 소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⑫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⑬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①에서 자유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곳은 노트, 책상, 모래, 눈 등으로 상징되는 순수의 세계다. 자유의 본질을 ‘순수’에서 찾으려는 화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②에서 내가 쌓아온 모든 지식과 경험, 앞으로 펼쳐질 모든 역사의 장면위에 무생물과 사멸할 것에 이르기 까지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퍼붓고 싶다는 시적화자의 간절한 바람이 보인다.

 

③에서 화자는 자신뿐 아니라 황금의 조상, 병사의 총칼, 제왕의 왕관 위까지 자유의 이름을 써서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에까지 연민을 느끼며 그들 역시 자유로워지길 바라고 있다.

 

⑧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여명의 시간에 바다와 배위에 가파른 산위에서 자유로 비상하고 자유가 꿈인 그런 ‘숨’을 쉬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⑩, ⑪에서 안식처가 파괴된 불안감을 느낄 때, 희망이 자취를 감출 때, 권태와 무기력과 혼돈에 빠질 때, 부재와 고독과 죽음의 순간에도 자유를 그리워할 것임을 천명한다.

 

⑬에서 화자는 자유라는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라고 호소한다.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오 자유여!라고 호명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화자는 자유에서 오직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은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물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쓰겠다는 것은 곧 모든 사물은 ‘자유’라는 속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자유로워지기를 열망함과 아울러 그 열망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가 이렇게 강력하게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은 시인자신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폴 엘뤼아르(Paul Eluard)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자유」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는 엘뤼아르에게는 정치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시지만 자유는 생명일반이 추구하는 생명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 앞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권력에의 의지’ 와 ‘자유에의 의지’가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에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 심장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다.

 

엘르와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에서」 정치적인 자유인 민주주의에 대해 ‘외로운 눈부신 네 이름 위에, 남몰래 쓴다’라고 했으며, 김수영은 ‘왜 자유에는 늘 피가 묻어 있는가’를 물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올 때 모든 것이 정해진 ‘결정론적’ 존재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왔다고 고백한다. 향주삼덕인 ‘신망애’를 지닌 존재로 왔다고 말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왔다는 것은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자 생명권의 전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완벽한 자유인이다, 라는 고백 앞에서, 너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충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 홀론holon,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아서 쾨슬러)

 

자유의지와 결정론, 자유의지와 예정론은 철학과 종교의 중요한 화두였다. 철학사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입장은 중요한 철학적 담론을 낳았다. 인간은 주어진 운명이라는 트랙을 돌고 있을 뿐이라는 운명론결정론의 입장은 밀레토스 학파, 명가, 법가, 고대원자론, 에피쿠로스 학파, 근대경험론, 구조주의 등이 발전시켰고, 아무리 자유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한계, 환경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자유론과 결정론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양립가능론의 입장은 피타고라스 학파, 키니코스 학파, 스토아 학파, 신플라톤주의, 주자학, 데카르트합리론, 청년헤겔학파,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인간은 자기의 삶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은 스콜라주의(대부분), 양명학, 칸트주의, 주의주의, 실존주의, 형이상학파, 노년헤겔학파, 신칸트주의, 자유지상주의 들로 바라볼 수 있다.

 

[참고1]타블라라사http://blog.daum.net/m-deresa/12389776

[참고2]모나드 http://blog.daum.net/m-deresa/12389721

 

자유에 관한 결정론적 입장이나 양립가능론자의 입장이나 자유론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3의 입장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인간의 자유를 바라본 학자가 켄 윌버일 것이다. 켄 윌버는 생화화학자이자 심리학자로 통합형 학자로 불린다. 그는 인간의 자유는 생물체처럼 각 사람이 각기 다르게 진화중이라는 과정의 자유, ‘진화론적 자유론’을 제창한다.

 

켄 윌버는 『모든 것의 역사』(조효님 역, 김영사, 2015)에서 인간과 세계에 관해 수많은 학자들이 창안한 이론과 해석을 종합하여 인간의식과 물질우주의 진화 과정을 밝하는데 주력했다. 켄 윌버는 초기 트랜스퍼스널심리학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고 통합심리학 분야를 개척하여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천재적인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하여 제시한 통합 이론의 대가답게 철학, 종교, 신화, 과학, 인류학, 사회학, 동서양의 신비사상 분야를 아우르며 진화의 정점을 영성Spirituality’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샤르뎅 신부의 ‘오메가 포인트’와 유사하다.

 

 

⑫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은 독자 자신의 더 심층적이고 더 상위적인 잠재력의 비범한 스펙트럼ㅡ를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지도는 단순히, 독자들이 자신의 의식의 방대한 지형, 자신의 존재와 생성 과정의 거의 무제한의 잠재능력, 즉 자신의 원초적 자각의 거의 무한대의 팽창을 탐구하도록 하기위한 초대일 뿐이다. 그리하여 독자가 결코 떠나본 적이 없는 장소, 즉 독자 자신의 가장 심층적인 본성과 독자 자신의 본래면목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⑬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전통지혜에 따라서 이 진화적 전개의 상위적인 단계들ㅡ말하자면 ‘영’이 그 자신에 대해 의식적이 되고 그 자신으로 깨어나고 그 특유의 진리의 본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상위적인 더 심층적인 단계들ㅡ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위적인 단계들은 흔히 신비적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상상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한층 더 높은 발달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명료하고 매우 실제적인 단계들ㅡ말하자면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가용한 단계들, 우리 자신의 심층 잠재능력인 단계들ㅡ라는 것입니다.

 

⑭아마도 결국 진화의 순차적 순서는, 정말로 사물로부터 신체로 마음으로 혼으로 나아가 영에 이르기까지 각각 더 깊은 깊이와 더 깊은 의식으로, 그리고 더 폭넓은 포섭으로 각각 초월하고 내포하는 그런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화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아마도 각 개체의 의식은 무한성ㅡ전체 ‘온우주’와의 전면적인 포섭ㅡ을,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참된 본성에 따라 깨어나는 ‘영’으로서의 ‘온우주’의식을 정말로 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⑮당신의 정체성이야말로 진정한 ‘전체자’이고, 당신의 주변이 아닌 바로 당신 속에서 전개하는 ‘전체자’와 더불어 당신은 더 이상 그러한 진화적인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조류입니다. 별은 더 이상 저 밖에서 빛나지 않고 여기 이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초신성超新星은 당신 가슴속에 존재하게 되고 태양은 당신의 자각 안에서 빛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섭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궁극의 ‘전체’란 없고 오직 끝이 없는 과정만 있을 뿐이고, 당신은 곧 전체 과정이 전개하는ㅡ끊임없이 불가사의하게, 항구적으로 경쾌하게ㅡ통로이거나 소통로이거나 순수한 ‘공’인 것입니다.

 

⑯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분면들이 인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의 4분면의 진화를 따라왔고,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들은 스스로 이러한 분면들에 관해 성찰하고 그것들에 대해 사고하고 그들 자신이 그것들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이제 막 알아차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려고 하는 이런 시도 속에서 다양한 지식의 탐구와 진리의 탐구를 창출해내고 있습니다.

 

 

켄 윌버의 물질・생물・정신・신성을 아우르는 범우주적 시선으로 인간의식의 발달과 진화 과정을 밝히는 통합 이론은 각국의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21세기 비전으로 논의되고 있다. 대학생들의 필독서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역사』는 20세기를 지배했던 이원론과 이성 중심의 서구 세계관들이 해체되면서 혼미 속에 도래한 21세기는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으며, 이에 윌버의 통합적 사유가 정교한 지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켄 윌버는 ‘마음과 세계는 어떻게 태어나고 어디로 진화하는가’라는 명제로 인간과 세계에 관해 수많은 학자들이 창안한 거의 모든 이론과 해석을 종합하여 인간의식과 물질우주의 진화 과정을 밝힌다. 물질·생물·정신·신성을 아우르며 범우주적 진화 패턴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 속의 인간의 위치를 조망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변용을 위한 우리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 ‘잠재적 가능성’이 우리에게 소여된 ‘자유의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켄 윌버는 인류는 물질 중심의 과학주의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소외시키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으며, 물질과 세계와 주체를 분리된 것으로 규정하여 인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축소시켰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우리가 불행한 것은 그 때문이며, 이는 그러한 소외와 분리로 인해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경계를 넘지 못한 데서 기인한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윌버는 인류의 위대한 전통지혜인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간이 결국 도달해야 하는 지점으로 영성Spirituality’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영성이란 무엇이고 Spirit’이란 무엇일까윌버가 모든 것이 출현하고 진화해온 역사를 통해 드러내려는 핵심은 바로 영성에 있다고 보았다.

 

켄 윌버는 먼저 ‘온우주kosmos’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도입한 것으로, ‘물질권・생물권・정신권・신성의 영역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우주’를 뜻한다. 이 책 제목인 ‘모든 것의 역사’란 바로 이 ‘온우주’의 역사를 말한다. 윌버에 따르면, 온우주는 홀론holon’으로 구성되어 있다. ‘홀론’이란, 헝가리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아서 쾨슬러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기 위하여 만든 용어로, 윌버는 모든 것들이 각기 하나의 전체이기만 하거나 부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체이자 부분즉 ‘홀론’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하나의 온전한whole 원자는 하나의 온전한 분자의 부분이며, 분자는 하나의 온전한 세포의 부분, 세포는 온전한 하나의 유기체의 부분인 것이다. 하나의 ‘상징’도 그렇고, 또한 하나의 ‘이미지’와 하나의 ‘개념’도 그렇다. 그러한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다른 어떤 것이기 전에 하나의 홀론이며, 따라서 세계는 원자나 상징이나 세포나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홀론들이 온우주의 각 영역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들 모두가 드러내는 공통 패턴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윌버가 제시하는 진화의 패턴이다.

 

켄 윌버는 온우주가 물질matter생명life마음mindsoulspirit’의 단계로 진화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많은 진화론자들이 주창한 이론으로 창조론과 그 출발점에서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각 단계는 필연적으로 그 자체에 본래 내재된 한계에 봉착하고, 이는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동인이 된다. 즉 홀론으로서 각 단계는 하나의 전체인 자신을 ‘초월하지만 하나의 부분으로서 다음 단계에 포함되고’, 동시에 이전 단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속성을 추가한다. 그렇게 홀론의 정체성은 온우주의 더욱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위하여 확장된다.

 

결국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추론할 수 있는데, 인류는 자기초월을 통해 정체성이 확장되는 과정에 있으며최상위 단계인 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화의 정점이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그것은 이 세계를 전적으로 넘어서지만그러면서도 이 세계 내의 모든 개개의 홀론을 남김없이 포섭한다. 모든 것 너머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이때 각 객체의 의식은 무한성즉 전체성으로의 온우주의식을 접하게 된다무한하고 전체적인 온우주의식이란 현현하는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바탕이라고 본 것이다. 모든 것들이 그려질 수 있는 흰 도화지, 기독교로 말하면 영원, 불교의 ‘공空’인 것이다. 이는 온우주가 진화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최종 목적지이자, 동시에 처음부터 모든 단계에 바탕으로서 내포되어 있는 온우주의 참된 본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영’의 단계에서 깨닫게 될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이라고, 켄 윌버는 말한다.

 

켄 윌버는 이러한 진화의 패턴과 각 단계의 속성 및 한계를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 문화의 발달 과정을 통해서도 설명해낸다는 것이다. 즉 홀론으로서 각 단계는 개체적인 면과 집합체적인 면, 그리고 그것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개체적인 것의 내적 측면이란 ‘나’의 ‘의식과 정신’의 영역을, 개체적인 것의 외적 측면이란 ‘나’의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을, 집합체적인 것의 내적 측면이란 ‘우리’의 ‘문화적’인 영역을, 집합체적인 것의 외적 측면이란 ‘우리’의 ‘사회적’인 영역을 말한다.

 

윌버는 이러한 네 가지 영역을 ‘4분면’의 형태로 정리하고 있다. 결국 진화란 새로운 행동 패턴(개체적인 것의 외면)을 지니는 새로운 양식의 자기감(개체적인 것의 내면)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집합체적인 것의 내면)을 수반하고 새로운 기술경제적 기반(집합체적인 것의 외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과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개의 학문들이 상이한 진리를 말하는 듯 보이는 것은 각각의 분면에 해당하는 영역에 한정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윌버는 그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의 지도 위에 그려놓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인 지도가 정치, 비즈니스, 교육, 건강 관리, 법률, 생태학, 과학,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온우주의 진화 과정을 통해 켄 윌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결국,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하여 어디에 도달해 있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는 전적으로 새로운 변용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걸어온 길에서 만나게 된 사건들 중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한 필연성으로 인해 모든 사건들은 일정한 단계를 거쳐 조율되고 화해되고 끝내는 통합될 것이다. 이 과정 전체가 바로 온우주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 ‘영’이 스스로를 전개하는 방식이며, 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이원적인 전체로서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인간현상』(양명수 역, 한길사, 1997)에서 전하는 ‘인간은 오메가 포인트(J)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켄 윌버가 바라본 ‘홀론holon’과 샤르뎅 신부가 바라본 ‘오메가포인트Omega point’는 우주의 진화 정점은 영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연구나 통찰의 바탕에는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지’ 실현의 최대치를 예표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각자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만약, 인간에게 결정론의 운명만 주어졌다면 인간은 진화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잠재가능성이란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획일적인 어떤 삶을 살다 가면 된다.

 

 

 

 

 

 

 

 

3.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마르코 6,7-13)

 

 

? ‘자유의지를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귀환’(Liberté de volonté, la détermination du monde à l'espacement du monde)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차례다.

 

마르코 6,7-13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복음을 묵상하거나 전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앎의 고백이자 삶의 실천이다.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만큼 살고, 알고 있는 만큼 사랑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 6,7-13을 성서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가 아닌, 자유의지와 연결하여 네 층위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먼저, 마르코 6,7-13을 읽으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지침일까? 또는 예수님을 믿는 특정 종교인들만의 지침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제자들에게 첫 파견의 저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부터 들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의 최대치를 미리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스승의 무한한 사랑을 믿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코 6,7-13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완벽한 관계를 바라볼 수 있다. 제자들의 잠재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첫 파견은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살아야할 순례의 방향이자나아가 인류가 나아갈 이정표에 해당한다.

 

여기서 '아무것도'의 의미를 무엇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자기정립이 필요할 듯하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상태란 복음 그 자체인 기쁨만을 바라보는것이자, 그들이 전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만으로 너무나 충분하다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순교라는 이름으로 귀결될지라도, 그것은 명령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신념에 의한 자유의지로 선택한 기쁨이라는 점이다.

 

복음이 기쁨인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다는 것은 모순 중에 모순일 것이고, 또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제자일지라도) 인간을 도구화한다는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특정 기독교인의 삶의 방향이나 이정표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삶'이기에 모든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보편적인 길일 것이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 어떻게 보편적이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마르코 6,7-13은 Ⓐ와 Ⓑ, 두 부분으로 나뉘어 바라보기로 한다. 이 부분을 구약의 탈출기와 신명기, 그리고 루카 복음의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과 연결하여 묵상할 때, Ⓐ를 광야의 삶이라 한다면 Ⓑ는 ‘(이집트)’의 노예상태로 비유될 수 있다.

 

Ⓐ는 Ⓑ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의 상태로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기본적인 생존권과 생명권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해방과 공존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는 Ⓒ의 상태에 있을 때에만 Ⓑ에게 그 길을 열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의 상태란 무엇인가?

 

마르코 6,7-13에서는 이를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를 신명기와 루카복음과 연결하여 묵상할 때, ‘광야의 여정에서 가나안의 삶의 방식을 살아라’, 또는 ‘ 네가 신의 현현이 되라’ 또는 ‘네 삶의 항아리에 이미 포도주가 가득한 삶을 살아라’ 또는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그러니 ‘의사여, 너 자신의 병부터 먼저 고쳐라’ 등으로 바라볼 수 있다.

 

광야의 삶은 생명기본권에 대한 물질주의가 지배적인 곳이다. 우리의 순례의 여정은 표면적으로는 광야가 분명하다. 그런데 가나안의 삶의 방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광야의 목마름이 아니라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그 풍요로움을 이미 살라는 의미에서만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 기쁨일 것이다. 

 

이는 제자들과 인류에게 이 세계의 삶의 패턴에서의 '초월'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와의 '간격'이다. 세계와의 간격의 목적은 이 세계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를 치유하고 보듬기 위함이다이 세계와 가장 멀리 간격을 유지했을 때, 이 세계를 치유하고 보듬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가 보여준 ‘어리석은 사랑’의 실체다.

 

⒞ 그렇기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을 때, 그 행복은 자유의지에서 나온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라도 자유를 원하는 이유는 그 자유가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실현이란 ‘내적자유’의 체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유로운 자만이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자유의 확산성이다. 자유의 확산은 개별자인 우리의 내적자유로부터 시작된다. 내적자유가 외적 자유를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켄 윌버는 인류는 자기초월을 통해 정체성이 확장되는 과정에 있으며최상위 단계인 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말한다다시 말해 그것은 이 세계를 전적으로 넘어서지만그러면서도 이 세계 내의 모든 개개의 홀론을 남김없이 포섭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 너머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이때 각 객체의 의식은 무한성즉 전체성으로의 온우주의식을 접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영성Spirituality’의 상태일 때, 자신의 잠재능력의 최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자기실현의 장을 열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타자에게 필요한 삶의 환경을 아무런 조건 없이 조성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이고 Spirit’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출현하고 진화해온 역사를 통해 드러내려는 핵심은 바로 영성Spirituality’ 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체험하듯우리도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물질은 영성의 대척점이 아니라, 영성의 상태에서 모든 사물, 나 뿐 아니라 타자의 존재이유를 제자리에 놓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다.

 

⒟ 자유이지를 산다는 것은,  자유의 두 속성을 산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종적인 자유와 횡적인 자유가 통합된 상태이다. 성호를 긋는 것과 같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 이 두 자유가 통합되었을 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이 세상의 순례의 방향을 진정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G, 그로사케는 『은총; 선사된 자유』에서 인간의 자유란 하느님과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종적인 자유(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이렇게 전한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되고 있다. 인간은 자유자체로서의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자유로운 피조물로 파악된다. 인간은 전존재적으로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관통되어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개별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인간이 사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독립적으로 처분하는 자유는 그보다 앞서 주어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요청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지닌다.”

 

심상태 신부님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에서 인간의 자유는 불가피하게 역사적인 횡적인 자유로 수렴되고 귀환(무엇에로의 자유)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의 자유는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결단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며, 이 기본결단으로부터 구체적 행동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순수한 내적 자유를 기초로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구체적인 자유를 성취해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그 자체로 역사이다.”

 

⒜, ⒝, ⒞, ⒟를 종합하면 마르코 6,7-13이 전하는 ‘빈 손의 역설’은 파견된 자의 고행이나 청빈 뿐 아니라 ‘축복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데 그 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자유와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직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청빈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진화의 정점까지 바라보는 예지의 덕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사는 것이다. ‘빈손의 역설’을 사는 것이다. 이는 특정종교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이들이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온 축복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길라잡이라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물질주의로부터 포기가 아니라, 물질의 재배치에 해당한다. 인간 삶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만이 우리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전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과 축복을 대척점으로 바라보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도 사랑일 것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사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랑과 권능’과의 관계, ‘사랑과 물질’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는 우리에게 아무도 어떻게 살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생명권의 정립까지 포함된다.

 

어차피, 아무리, 무엇인가를 웅켜잡으려 해도 인간은 빈손이다. 그런데 그 빈손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빈손은 가난의 상징이고 두려움이라는 무의식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쉬웠다면 제자들에게 디테일의 빈손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요구하셨을까? 철저하게 빈손인 상태에서 전한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발밑의 먼지까지 털어버리라는 사랑과 빈손의 관계에서,   

 

빈손의 자유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해방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최후의 자기 충만에 이르고, 자기실현의 장을 완성하는 것이 자유라는 점에서, 자유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대, 부디 피 흘리지 말고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하여,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J의 언명은 21세기 학자들이 바라본 진화의 정점이자, 잠재능력의 최대치이자, 자유의지의 실현으로, 그 자유의지란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귀환’(Liberté de volonté, la détermination du monde à l'espacement du monde)이라는 데서 그 방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육사의 <청포도>를 부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흠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