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여'라는 이름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충족원리
- The five barley breads and two fishes of the absence of the name
[연 중 제 17주 일 (나 해) 2021. 7. 25. 요한.6.1-15]
1.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장승리, 「말」) 2. 결여에서 욕망으로, 그리고 요구로의 전환(스피노자, 자크 라캉, 장 지글러) 3.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15) |
1.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장승리, 「말」)
장승리 시인의 「말」은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어서,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어서, '정확하게' 죽고 싶어서라고 '정확하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시다.
장승리의 「말」을 읽어본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장승리 시인의 「말」은 '정확하게' 사랑받는 자의 기쁨(고통)과 정확하게 사랑하는 자의 고통(기쁨)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정확하게’ 라는 어떤 목표치가 정해진 사랑은 타자에게 ‘사랑받지 않을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다. 반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받는 권리 자체를 포기한 사랑, 사랑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자의 ‘정확하게’는 글쓰기와 사랑의 ‘충족 원리’에 해당한다.
삶에서 ‘정확하게’를 추구하다보면 ‘정확하게’의 근사치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정확하게’가 지시하고 요구하는 그 ‘정확함’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80점을 맞기 위해 100점을 설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확하게’를 요구하면 할수록 그것을 요구하는 자신과 대상에게서 ‘부정확함’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열심히 산 것도 ‘정확하게’와 동행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다 돌연 ‘열심히’와 ‘정확하게’의 기준점이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묻게 되기도 한다.
하물며, 산다는 것 자체가 ‘정확하게’를 실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에 '정확하게'를 요구할 수 있을까? 사랑에 '정확하게'를 요구한다는 것은 지금 하는 사랑도, 받는 사랑도 충족의 원리와는 멀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정확하게'는 무엇인가?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사랑의 구조와 욕망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 지에 주목한다. 여기서 ‘정확하게’가 지시하는 바를 언뜻 바라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결렬하지 않지만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고요하고 단호한 일, 신형철식의 사랑의 논리라면 장승리 시인의 「말」에서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었어’의 그 ‘정확하게’는 ‘있음’의 확인이 아니라 ‘결여’의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만이 그 '정확하게'의 갈망을 수긍하게 된다, 이때 '정확하게'는 '완벽하게'가 아니라 '결여나 결핍, 한계나 유한성'을 인간의 조건으로 바라보는 인식차원의 정확함, 시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확한 말, 정확한 사랑, 정확한 죽음은 ‘정확하게’의 강박증을 내려놓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정확하게'가 지시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글쓰기'라 한다면, 플로베르가 추구했던 ‘일물일어설’에 대한 작가의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고 했던 니체를 거론한 것을 보면 그렇다.
모든 작가는 자기 심장에서 튀어나온 찰라의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한다. 문법적 정확함뿐 아니라 의미전달의 정확함, 여기에 멈추지 않고 독자나 비평가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 즉 내적이며 외적인 문학의 소통구조가 동시에 맞물리는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수사적 표현이다.
그런데, <작가-작품-독자>의 이 소통구조에 참여하는 주체가 다름아닌 ‘결여와 결핍, 한계나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소통의 정확한 갈망 역시 완벽한 소통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용인하는 인식의 정확함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과 글쓰기에서 '정확하게'의 충족원리는 '결핍과 결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원이라는 데서,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는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었어’ 혹은 ‘치열하게 살고 싶었어’라는 의미로 바라보게 된다.
2. 결여에서 욕망으로, 그리고 요구로의 전환(스피노자, 자크 라캉, 장 지글러)
세계적 통계사이트인 월드 오미터에서, 전세계 인구는 2021년 4월 9일 22시 기준으로 약 78억 5천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78억5천개의 별이 지구에 왔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별들은 왜 자주 아플까? 왜 고통을 주고받을까? 영원에 비하면 찰라에 가까운 시간동안 지구에 머물면서 생의 대부분을 왜 기쁨없이 머물다 가는 것일까?
생의 충족원리를 배반하는 그 ‘결여’의 이름은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자크 라캉은 『에크리』에서
“욕망은 요구를 넘어선 곳에서 만들어진다. 요구에 의해서 여러 조건들에 따라 그의 삶이 표출될 때 삶과 욕구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러나 욕망은 요구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캐내질 수 도 있다. 현존과 부재에 대해 제약받지 않은 요구에 의해서 무無를 나타내는 세 가지 형태의 존재의 결여가 촉발된다. 무無는 사랑에 대한 요구,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오, 주체의 탐구에서 무시되는,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요소의 토대가 된다.”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 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 죽고 있는 거야....카림,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배고픔의 저주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된다는 거야.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수백만의 엄마들이 매년 지구 곳곳에서 수백만의 건강하지 않은 아이들을 낳고 있어...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단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
스피노자는 사랑의 문제로, 라캉은 욕망의 문제로, 장 지글러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인간의 결여와 결핍, 죽음의 원인을 진단한다.
언뜻 이런 진단은 서로 별개의 논의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생은 먹이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논리와 욕망의 논리와 빵의 논리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장 지글러는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가? 이런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질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등장하는 것일까?를 유엔 식량 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통해서, 빵의 문제는 결국 사랑과 욕망의 문제로,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3.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 6,1-15)
요한복음 6,1-15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표징에 해당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생명의 빵’이 무엇인가에 대해 복음은 몇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동안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는 주로 ‘어떻게’ 이 기적이 이루어졌나? 즉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에 초점이 놓여 있었다. 기적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은, 나눔의 기적이 일어난 사건으로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들은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여타의 기적사화처럼 기적 그 자체로 보아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기적에 난이도는 없다. 기적의 원리는 그 이상의 기적도 가능하다는 것을 늘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에서 그 ‘어디에서’가 초점이다.
이 빵은 ‘어디에서’ 온 사랑일까?를 이해하는 것은 기적의 원리에 초점이 아니라 결여, 배고픈 이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상황, 배고픈 군중과 그 군중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만을 문제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는 제자들(필립보와 안드레아), 군중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가 있다. 모두 배고픈 인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를 예수님 중심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로 끝난다.
이는 군중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치유기적이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담고 있는 능력으로는 즉 예수님의 전능으로는 이들의 배고픔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에서, 십자가 사랑의 필연성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신적 능력이 아니라 어떤 신적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능력의 무능이 아니라 능력의 왜곡때문이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표징은 성체성사의 그 바탕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의 배고픔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알게 되는 자비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만 이들의 배고픔을 채울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선택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고픈 상태다.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으로 만들어 그 실세가 되고 싶어하거나, J에게 다른 신적 표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분명 이천년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라캉의 통찰이나 장 지글러의 보고서처럼 현재진행중인 사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에서 이 아이는 누구인가? 이 아이는 '결여'를 '충족'으로 바꿀수 있는 기적의 표지가 된다. 하느님의 사랑이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보여준 풍요의 표지가 된다.
나아가, 뿌리깊은 배고픔을 안고 있는 이들 가운데서 ‘순수한’ 배고픔을 갖고 있는 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아이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는 배고픔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배고픔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자, 자신의 배고픔까지 봉헌할 수 있는 자, 그로인해 배고픔에서 훨훨 자유로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역지사지로 타자의 배고픔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는 '감사, 미사'의 본질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아이를 통해 순수한 배고픔 옆에는 늘 거짓 배고픔이 있다는 것을 지나치면 안된다. 상상임신처럼 거짓 배고픔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인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가?' 거짓 배고픔을 고착화시키고 부풀리는 것이 필립보가 지닌 물질적 가치관이거나 안드레아의 회의적 영성관이거나, 군중들의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아귀’같은 '허상'의 배고픔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고백성사 때 가장 많이 본 것이 이 ‘거짓 배고픔’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이 세상에 부러운 것도 없고, 추구하는 바도 없다. 어떤 꿈을 갖고 있지만 그 꿈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거나 하는 갈망도 없다. 이루어져도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실 상관없다. 그런데 가끔 '순수한 기쁨과 고요한 평화와 무한한 해방감'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때가 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안고 사막을 건너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쩔쩔매며 경험한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오천명의 군중이 느끼고 있는 저 ‘거짓’ 배고픔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순수한 기쁨과 고요한 평화와 무한한 해방감' 못지않게 주기적인 '사막체험'을 무한히 감사하라는 보속을 받곤한다.)
그대는 그대의 배고픔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순례는 결여와 배고픔의 여정이다. 결여의 여정에서 자신의 배고픔의 이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자신의 배고픔의 이름을 모른다면 ‘아귀(餓鬼:배가 산처럼 크고 목구멍은 바늘처럼 좁아 늘 배고픔의 고통을 당한다고 여겨지는 육도의 중생을 가리키는 불교용어)’가 될 수밖에 없는 욕망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스피노자, 라캉, 장지글러를 통해서 바라보았다. 인간은 자크 라캉이 간파한 대로 ‘결여에서 욕망으로 그리고 요구로의 전환’되는 욕망구조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욕망의 운동장인 우리 마음은 만족이나 충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참고: http://blog.daum.net/m-deresa/12389670)
그렇다면, 진짜 배고픔이 아니라 거짓 배고픔에 시달리는 인류가 과연 그분이 생명을 바쳐 주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주'를 알아볼 수 있을까?
마태오7장 6에서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고 제언한다.
진주는 사랑이다. 개와 돼지는 신학적으로 그분을 알지 못하는 이민족을 의미한다. 거룩한 것, 그 생명의 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분의 십자가 사랑에서 온다. 그렇다면 오늘, 개와 돼지는 누구일까? 아귀처럼 '거짓'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류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굶주림은 진짜 굶주림을 방치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거짓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류에게 계속 영원한 사랑이라는 진주를 던지고 계신 J.
결여 혹은 배고픔이 없는 인류는 없다. 자신이 어떤 배고픔의 상태에 있는지를 알면 사실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배고픔의 상황이 여전히 잔존해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배고픔을 알아야 어떤 이들의 배고픔이 눈에 보인다는 배고픔의 연쇄 역시 알게 된다. 자신의 배고픔의 진단키를 영성가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⑴우리는 모두 하나다.
⑵충분하다.
⑶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존재하기)
'결여'라는 이름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충족원리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공존의식, 그리고 충분하다는 존재의 포만감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며, 그때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장승리, 「말」)라는 문학적 수사는 "정확하게 사랑받고(하고) 있었어"라는 실존의 고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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