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도서관 환상,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

나뭇잎숨결 2021. 8. 7. 15:26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복원한 카파르나움 전경

 

도서관 환상,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

- Library fantasies, waiting for the morning of a veergaand period

 

[연 중 제 18주 일 (나 해) 2021. 8. 1. 요한. 24-35]

 

 
1.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남진우)
2. 나는 나에게 타자이다(자크 라캉)
3. 티베리아스에서 카파르나움으로(요한 6,24-35/루카 복음 10,13-16/마태오 11,23 )
 

 

 

 

1.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남진우)

 

 

사전적으로 환상(幻想)은 현실성이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空想), 망상(妄想)을 일컫는다, 환상(幻想)은 사상이나 감각의 착오로 말미암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실재하지 않은 것을 실재화 하는 것을 환상이라고 부른다. 환상(幻想)은 환상(幻想)을 먹고 자란다.

 

환상은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출발한 언어로 그 자체로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상태를 지칭한다. 환상은 실존과 본질 그 어떤 곳에도 치우칠 수 없는 유토피아를 찾는 인간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라는 명제가 실존주의를 점령한 후, 환상은 땅에 착지하지 못한채 부유하는 언어가 되었다.

 

나는 ‘도서관 환상’이 있다.

 

도서관, 그러면 아직도 인식의 밤과 새벽이 떠오르고, 아무 생각없이 들길을 걷다가 불쑥 솟아오른 어떤 푸른 성채, 그 공간 앞에 서 있는 내 자신과 이미 한 권의 책을 선 채로 혹은 바닥에 앉은 채로 읽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좋다. 나르시시즘의 탄생이다. 

 

도서관 환상의 바탕에는 누군가가 쓴 책들을 퍼즐을 맞추듯 모두 읽으면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드디어는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한다. '도저한 시대의 아침?' 그런 아침은 어떤 아침인가? 모든 것의  ‘시원(始原)’을 알려주는 그런 인식의 아침 말이다. 

 

그런데 도서관 환상인 “지식애(epistemophilia)"는 필연적으로 ‘자기충족과 희열’ 옆에 그와 맞먹는 ‘배고픔과 목마름’도 만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말하면서 동시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아무리 결론이라고 마침표를 찍었어도, 그것은 ‘그리고’와 ‘그러나’에서 멈춰 있는 열린 결말이다.  누군가에게 떠 넘겨진 미완성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 하지 못한 말, 다 할 수 없는 말들을 남기고 ‘내가 본 것은 여기까지 였음’이라고 퇴장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남진우의 「타오르는 책」을 읽어 본다,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을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타오르는 책」에는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을 꿈꾸는 화자가 경험하는 두 부류의 책이 나온다. ⒜와 ⒝에서 다른 성격의 ‘책’의 경험은 삶이라는 ‘상징의 숲’에서 만나는 생의 어떤 순간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지식과 지혜의 공간에서 인생 전체를 바꾸어줄 화인같은 언어적 체험을, 후자는 그냥 책이라는 사물이 던지는 죽은 언어에 대한 만짐이다. 이 상반된 책의 경험은 언어의 ‘시원(始原)’은 어디인가와 생의 ‘시원(始原)’은 무엇인가를 동시에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적 시원과 생의 시원이 맞물리는 것은 화자의 시간과 시대의 화두가 어떻게 중첩되거나 혹은 비켜서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산다는 것은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이들이 경험하 ‘청춘의 시간’이다. 우리가 생을 열렬히 사랑하는 시간에 그것을 추동하는 어떤 지식애가 동반된다. 이때 세상이 어떻든 화자는 모든 근원의 근원, 그 ‘시원(始原)’을 향해 생의 질주를 하게 된다. 질주하는 자신도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는 질주는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생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어떤 시간에 이르러, 오직 생물학적인 장수, 연장만을 추구하는 노회한 시간 앞에 우리가 서 있다면, 언어화된 모든 지식은 더 이상 우리를 그 어떤 이유로도 추동하지 못한다. 책의 더미는 다만 죽음과 소음의 인장일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요즘 발간되는 책들이 더 이상 생을 추동하지 못하는 죽은 책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세상의 문제는 결국 화자가 어떻게 생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가, 시간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꿈꾸며 질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그런 상태다.

 

‘시원(始原)’은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비롯되는 처음’을 의미한다. ‘시원(始原)’은 모든 근원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도이기에, 사실 책이라는 외적 사물에 의해 시작되고 멈출 수 없는 시간의 이름이기도 하다.

 

평론가 강계숙은 남진우 시에 대해 이런 평설을 부친다. “남진우의 시선은 지상에서 사라진 원초적 신비와 신성의 자취를 더듬는다. 때론 고통스럽게, 때론 강렬한 희열에 사로잡혀, 태초의 이미지에 닿으려는 그의 언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란 상상된 관념의 것이 아니라 거기 있었으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것임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남진우의 시적 도정은 외롭고 고독하며, 경건하고 의지적이며, 투명한 비애로 가득 차 있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꿈꾸는 ‘시원(始原)’에 대한 질주는 한없이 뜨거운 시간이자 한없이 망막한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의 시간이든 열정, 파토스의 얼굴은 ‘외롭고 고독하며, 경건하고 의지적이며, 투명한 비애’가 함께 수반되는 역설의 시간이다.

 

「타오르는 책」에는 이런 상반된 시간을 통과하는 화자의 체험을 언어화한다. 환상과 사실, 관념과 경험의 영역을 넘나들며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불타는 책’이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의 경험이다. ‘시원(始原)’은 ‘환상’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가 지닌 환상만큼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환상만큼 미망에 헤메일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릎 쓰고 말이다. ‘위험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는 것에서 그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 역시 어느 정도의 환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책」에서 이 환상은 ‘불’로 표현된다. ‘불’은 1차적으로 책에서 영감 받은 영혼의 울림과 마음의 동요를, 지적 흥분이나 예지의 움틈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독서 행위와 경험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불’을 가득 품은 책은 상투적이고 빛바랜 말이 아니라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는’ 언어로 읽는 이의 머릿속에 꿈과 희망, 의지와 열의를 북돋우며 한바탕 ‘불놀이’를 선사한다.

 

그렇기에 「타오르는 책」에서 책은 다만 물체가 아니다. 이때 ‘불’은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고, 삶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며, 뜻밖의 길로 사람을 움직이기도 하는 그런 힘이다. 내 안의 간절한 욕망이 책의 내용과 하나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과거의 것도, 저자의 것도 아니다.

 

그렇게 책에서 ‘읽은 모든 것이 불’일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타오르는 책’은 밝게 빛나던 젊음을, 열렬했던 청춘의 시간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런데, 영원히 타는 불이 없듯, 순수한 열정으로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는 청춘은 영원히 가능한가? 

 

‘식어버린 죽은 말들’ 곁에서 ‘내’가 느끼는 지극한 슬픔은 더 이상 진실한 책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을 불태우듯 읽던 순진무구한 힘과 열렬한 열정이 사라졌음을 깨닫는 데서 비롯한다. ‘시원(始原)’은 있다고 달려갔던 청춘에서 ‘시원(始原)’은 없다고 고백하는 노회한 일상으로 돌아온 자신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이는 환상을 제조했던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을 다 봐버린 것 같다는 고백은 환상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복원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외관

 

 

 

2. 나는 나에게 타자이다(자크 라캉)

 

 

환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환상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환상의 ‘형식’ 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환상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지만, 환상이 그 원심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때, 그곳에선 어떤 관념이나 욕망, 집단무의식이라는 ‘현실’이 발생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프로이트-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이 계보는 ‘무의식’과 ‘물신주의’를 통해 집단무의식이  만들어지는 형식의 상동성을 추론한다.

 

⒜ 꿈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프로이트, 『꿈의 해석』)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자크 라캉, 『에크리』)

 

⒞화폐의 물질적 성격에 따른 신비화는 화폐가 숭고한 대상이고 이런 화폐의 다른 몸, 비물질적 신체성, 신체 안에 있는 신체를 믿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라캉은 자신을 ‘프로이트주의자’로 자청했고, 지젝은 ‘라캉주의자’라고 표명하면서, 프로이트와 라캉을 해석, 보완, 수정, 반복하면서 내용의 상동성이 아니라 형식의 상동성을 추구하였다.

 

⒜프로이트는, 꿈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에 존재하는 무의식이 어떻게 '억압, 전치, 압축'으로 나타나고,  필연적으로 꿈은 이중구조를 통해 현실을 왜곡해서 표출하는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의 무신이었을 때, ‘나는 어젯밤 서까래 세계를 짊어지고 가는 꿈을 꾸었다’라고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한다면, 꿈 해몽에 능란한 신하는 ‘아! 서까래 세 개와 등을 연결하면 임금왕자가 될 것이니 이는 하늘이 이성계로 하여금 임금이 되라는 예지몽’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만약, 프로이드가 이 꿈을 해석한다면 ‘당신은 임금이 되고 싶은 무의식을 꿈이라는 형식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고 해석할 것이며, 라캉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를 거쳐 실재계에서 당신의 욕구와 요구는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고 싶어한다’라고 했을 것이며, 지젝은 ‘당신은 자신의 환상조차 객관화 시켜 권력이라는 우상숭배가 탄생하는 물신성, 물신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꿈을 타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만이 자신의 무의식과 욕망과 환상을 알기에 스스로 꿈을 해석하면 된다. 꿈은 자기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꾼 꿈을 누군가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꿈의 내용이 아니라 ‘무의식까지 공유하자’는 초대에 해당한다.

 

⒝에서 라캉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을 다르게 소환한다. 이것은 인간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 그 자체를 인간 욕망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고, 욕망이 인간의 의식적인 지배를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에서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종합해 무의식이 우리의 심리 안에 내재된 것으로 보지않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억압에 의해서 다른 무대로 밀려난 무의식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의식으로 들어오기 위해 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그 내용이 아니라 '억압, 전치, 압축'을 통해 꿈으로 그것이 표출되는 양상에 주목했다.

 

이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환상이 주조되는 어떤 형식이나 어떤 일정한 패턴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형식은 사고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고 바깥에 있는 것,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으로 이것은 '물신성이나 물신주의'가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패턴에 해당한다.

 

예컨대, 화폐, 돈이 우리 시대에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유가 그렇다. 돈은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이고 그냥 사물이라는 것을 거의 누구나 인정한다. 심지어 ‘나는 돈에 관심없어’라고 자부하기조차 한다. 그런데 사물을 교환하는 행위에 가담하는 순간, 행위자는 그 돈의 크기만큼 자신(상대)의 위상을 격상시키거나 폄하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돈의 '물신성과 물신주의'가 만들어진다. 돈 앞에서 생각과 행위가 분열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환상은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행위 영역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부자의 축의금이 가난한 자의 기도보다 더 고맙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젝은 환상은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하여금 현실을 재구성하고 주체들이 무의식으로 무엇을 열망할지를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지시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개인적 환상 뿐 아니라 사회적 환상도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려면 어떤 욕망의 좌표를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집단 무의식이 생존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신의 대체물로 찾아낸  물신성과 물신주의가 만들어지는 패턴이다.

 

이는 역사속에서 프로이트가 바라본 대로 ‘전치- 압축-억압’이라는 구조로 대의명분은 획득하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우리 꽃길만 걷자, 저것만 사라진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다, 는 정의라는 이름의, 공리라는 이름의 목표치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나에게 타자이다’라는 라캉의 명제는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물신성과 물질주의'의 욕망을 낳게되는지, 그 근원을 추론하게 하는 형식이자 패턴에 해당한다.

 

 

 

 

 

 

 

 

3. 티베리아스에서 카파르나움으로(요한 6,24-35/루카 복음 10,13-16/마태오 11,23 )

 

 

 

 요한 6, 24-35에는 신에 대한 집단무의식이 어떻게 물신성과 물질주의에서 비롯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표출되는지 4개의 문답에서 드러난다.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Q1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Q2“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Q3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 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Q4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Q1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군중들의 배고픔은 그분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절정에 이른다. 언제, 이곳에? 라는 군중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군중들이 당신을 애타게 찾아서 카파르나움까지 온 이유를 알고 있다. 빵과 표징에 대하여, 썩어 없어질 양식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의 대비를 통하여, 군중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그 결핍의 이름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그런데, 이천년전 군중들의 이 배고픔과 목마름은 우리 시대에도 메두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메두사의 이름은 슬라보예 지젝이 바라본 신의 자리에 자본으로 대체한 '물신성'(物神性:사람과 사람의 사회적인 관계가 재화와 재화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 혹은 프로이트가 성 도착증으로 바라본 '물신주의'(物神主義:인간이 상품이나 화폐 따위의 생산물, 성을 숭배하는 현상)와 상동성을 지닌다.

 

그런 맥락에서 생존의 공포에 가까운  결핍이라는 집단무의식은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소유의 역사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신성은 우리 시대의 자본에 대한 숭배를 낳게하는 환상의 고리, 그 패턴의 반복에 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Q2.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다시 묻는다. 그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이 대화구조에서도 어떤 동일한 형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중은 행위에서, 그분은 존재에서 그 답을 찾는다. 하느님과의 관계설정은 어떤 인과적인 행위가 아니라, 다만 믿고 받아들이는 존재 상태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doing상태의 마르타와 being상태의 마리아의 갈등은 인류가 지닌 해묵은 오해의 이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무신론자인 지젝이 현실을 만드는 바탕이 '사유인가? 행위인가?'라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의 통로가 누구인지 속단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Q3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과 같은 동어반복의 질문에 해당한다.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 존재하기라면, 믿음은 어떤 표징도 필요치 않다. 있음에서 있음으로 하나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중들은 계속 배고픈 상태의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믿음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현실, 현실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두 개의 빵을 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이 간파한 대로 믿음조차도 화폐의 가치처럼 물신성, 물질주의로 바라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카파르나움으로 달려온 군중들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준 모세를 끌어들였지만 그들은 모세로 상징되는 율법의 본질인 '애주애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는 싸르트르즘의 원조인 셈이다.

 

 루카 10,13-16과 마태오 11,23 에서는 ‘카파르나움아! 너는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다, 소동과 고모라보다 너희는 더 큰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강력한 경고가 이어진다. 윤리적인 타락보다 물질적인 소유욕망을 더 강력하게 경고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구약에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믿음의 결과가 재물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서술되거나, 물질적인 부도 하나의 축복임을 감안할 때, 소유욕과 축복으로 갈라지는 재물에 대한 재배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윤리적 타락은 본인에게 국한되는 상대적 분열증이지만 소유의 욕망은 타자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절대적 분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부의 축복은 부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축복이라는 점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결여가 윤리적 타락보다 더 큰 벌을 초래한다는 경고,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기 힘들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소유에 매이다보면 평생 '참된 기쁨과 참된 평화와 참된 해방'을 모른채 노예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밖에서 울부짖으며 생에 끌려다닌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비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Q4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군중들은 그 빵의 의미를 아직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첫 번째 답으로 돌아간다.

 

반복하자면, 믿음은 사람에 대한 축복이지 재물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에 대한 축복이 재물에 대한 축복과 동일시되는 이런 사태는 카파르나움의 그 군중들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려는 물신성과 물질주의는 생존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또 다른 표출에 해당한다. ‘프로이트-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이 바라본 것처럼 '물신성과 물질주의'가 '목마름과 배고픔'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위의 네 개의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질문으로 자기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질문에 해당한다. 그것은 그들이 정말 배고픈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고 믿음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물질을 재배치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까닭이다. 정말 현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질문을 했다면  '어디에서' 이 답을 얻을 수 있는지부터 성찰해야 한다. 모든 답은 고요하다. 양손에 빵을 들고 이것을 먹을까, 저것을 먹을까 갈등하는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답이 주어져도 답을 알 수 없기에 답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들이 카파르나움까지 16킬로미터를 마다않고 찾아온 것을 보면, 그들은 진정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로 내몰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카파르나움’은 어떤 곳인가?

 

카파르나움(כְּפַר נַחוּם, 가버나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장(마태 9,1), 예수님의 집이 있는 곳(마르 2,1)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공생활과 밀접한 곳이다. '나훔의 동네'라는 뜻이 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다(마르 1,16-20; 요한 1,35-42).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오)도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마르 2,13-14; 마태 9, 9; 루카 5, 27-28).

 

카파르나훔은 어느 곳보다도 예수님의 많은 기적이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 치유(마르 1,29-31),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마르 5,35-43), 악령들린 자의 치유(루가 6,6-11), 중풍병자의 치유(마르 2,1-12), 고관의 아들을 낫게 하신 기적(요한 4,46-53)등,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가파르나훔에서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신 곳이다.

 

카라진과 벳싸이다와 소돔의 멸망보다 더 큰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는 카파르나움의 운명은, 역사적이며 지질학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가 영혼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가장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에서 말하는 바로 그 상태를 의미한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새벽 혹은 아침을 경험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는 순수의식의 시간이다.

 

따라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 전언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인들에게 국한된 언명이 아니라, 세세대대 생명을 지닌 존재의 생존에 관한  언명이다. 

 

그냥 간단히 오늘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은 참 힘드네, 혹은  오늘 참 행복하네, 라고 할 때, 빵이 없어서 그런가? 설사 절대적인 빈곤에 내몰린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누군가의 사랑의 결핍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장 지글러의 보고서에서처럼 빵으로 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랑으로만 인류의 절대 빈곤을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은 그분이 알려준 '그대'라는 이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