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나뭇잎숨결 2021. 9. 3. 15:00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에드워드 N. 로렌츠)

 

 [연 중 제 22주 일 (나 해) 2021. 8. 29.  마르코 7,1-8.14-15.21-23]

 

 

 
1.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2. 아타락시아(ataraxia)와 아파테이아(apatheia)
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1.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읽어본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이 고등학교 때, 모 시인을 사모하여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는 「즐거운 편지」는 일반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길 위의 시다. 길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부칠 곳, 없는 곳으로 보낸 수취인 불명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즐거운 편지’인 이유는 이 시에서 화자는 ‘그대’에게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쓰는 편지라면 당연히 ‘즐겁지 않은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임에도, 하지만 화자는 이런 기다림의 고통을 사랑하는 ‘그대’를 위한 기다림으로 바꾸고 싶기 때문에 ‘즐거운 편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재하는 대상도 아니면서 현존하지 않는, 대상이 없는 사랑이지만, 사랑에조차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의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기댈 수 없어도, 사랑에 기대어 살아내고 싶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소하다’고 말하고, 그 사랑이 언젠가는 ‘그칠 것’ 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사랑이 대상 너머로 넘어갈 수 있음을 바라본 것이다. 길이 없지만 사랑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길도 희망도 없지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에 화자는 대상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기다림의 자세’인가만을 바라보자고 다짐한다. 그래야 살 수 있기에. 그러기에 기다림은 대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을 때 가능한 행위다. 기다림은 시간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가능한 행위이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가 바라본 대로, '사람을 사랑하다 사랑을 사랑하게' 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대상을 넘어선 그 너머의 사랑은 계절이 순환하듯, 자신의 사랑도 그렇게 멈추지 않고 순환할 것이라는 통찰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기다림은 단지 특정 대상을 기다리는 행위에서 사랑 일반으로 그 지평이 넓어진다. ‘그대’에 대한 사랑의 불변성은 ‘사랑, 그 자체의 불변성’임을 바라본 것이다. 사랑은 주체나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서 그 ‘즐거움’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기다림’에 관한 반어적 표현이자, 이면적으로 ‘사랑은 혼자 완성하라’는 릴케나 라즈니스 계열에 속한 영가라고 할 수 있다.

 

 

 

 

 

 

 

 

 

 

2. 아파테이아(apatheia)와 아타락시아(ataraxia)

 

기다림이 하나의 즐거움이라면, 이 즐거움은 아타락시아(ataraxia)와 아파테이아(apatheia) 어느 쾌락에 속할까?

 

아파테이아(apatheia)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가 주장한 정념에서 해방된 평정심, 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를 말한다. 또, 이러한 상태는 정념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삶을 최고의 윤리적 삶으로 주장한 스피노자(spinoza, B.)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는 헬레니즘 시대의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쾌락주의 윤리에 해당한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무제한의 쾌락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을 줄여나가는 소극적이고 절제된 쾌락주의의 모습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인간에게 ‘즐거움’이란 쾌락(快樂)은 초월이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책의 제목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자신의 철학을 논하던 장소가 정원이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와 존경심을 책 전반에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작가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고찰도 엿볼 수 있다.

 

명상록 형식을 띤 이 책은 짤막한 단상, 친구와 동료에게 보내는 서신, 가상의 대상과 나누는 대화 형식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이 글들을 통해 정치, 사회, 언어, 과학, 예술, 종교, 여성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볼테르의 명문장 ‘우리의 정원을 가꾸자’를 자주 인용하며, 반복되는 구체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쾌락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생전에 신의 반열에 오르기보다 인간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 저자의 말처럼 책 전반에서 사람됨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갈망을 표출한다.

 

①여성들이 어떤 인상을 받을 때 그 느낌은 명확하기보다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감싼다. 여성은 모든 에너지를 파도에 맞서 싸우는 데 써야만 한다. 질투하는 여성은 옹골차고 난폭하게 책략을 세우고 싸움에 임한다. 남자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장육부를 헤쳐 놓을 듯한 질투라는 자극이 여성을 흥분 시켜 마치 경주에 임하는 상태로 내몬다. 

 

②고통과 사랑, 이 둘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무궁무진한 아름다움이 샘솟는 한 쌍의 원천이다. 아파한다는 것, 이 얼마나 신비롭고 신성한가! 우리가 가진 모든 선함,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 고통이 있기에 자비의 마음이 있고 용기가 존재하며 모든 미덕이 있을 수 있다. 

 

③“길거리에서 저런 소란을 피우다니!” 그가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목이 조이는 듯한 소리로 외치고는 경찰을 불렀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봉기에 나서보았기 때문에 변혁의 그림자에 서기를 두려워했다. 혁명을 일으켜본 자들은 후대가 혁명에 나서고 싶어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④모든 범죄의 깊은 뿌리에는 오래된 허기와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데, 좋든 나쁘든 우리 인간은 모두 그것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어딘가 아주 머나먼 곳에서 온 듯하다. 말하자면 숲이나 동굴에서 살던 옛 인류의 안타까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⑤“메니푸스여, 저 죽은 자들은 어찌하여 죽음을 모르는 듯이 말합니까? 또 그들은 왜 아직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운명에 그렇게 확신이 없습니까?”메니푸스가 내게 대답했다.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여전히 인간이자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세계에 들어서면 이제 말도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신들과 같아지니까요.”

 

 

아나톨 프랑스는가『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추구한 즐거움은 에피쿠로스가 추구했던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쾌락은 마음의 평정이고,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볼테르의 명문장 ‘우리의 정원을 가꾸자’라는 명제는 철학자 볼테르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볼테르는 누명을 쓰고 사형된 개신교도 장 칼라스의 사면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면서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 권리가 있고, 잘못된 일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하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수호하는 일이 내게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볼테르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장 우리의 정원을 가꾸자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자는 태도라기보다는 관념에 빠지지 말고,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나톨프랑스가 사표로 삼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쾌락’은 무엇인가?

 

⑥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快)를 욕구하고 쾌를 최고 선(善)으로 기뻐한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피한다. 동물은 잘못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본성(nature)이 흠 없이 건강하게 판단하는 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왜 쾌가 추구되고 고통이 회피되는가에 관해서는 증명과 토론을 할 이유가 없다. 그(=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 사실은 지각되는 것이다. 불은 뜨겁고, 눈은 희고, 꿀은 달다는 것이 지각되듯이 말이다. (키케로, 『최고선악론』 1.29-32)

 

⑦쾌가 축복받은 삶의 출발점이자 끝점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는 중요한 그리고 생득적(生得的)인 선(善)이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선택행동 및 회피행동은 쾌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쾌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을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면서 쾌에로 소급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8-9)

 

⑧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주된 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지하고,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삐딱하게 해석하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방탕한 사람들의 쾌락이나 또는 관능적 즐거움에 속하는 쾌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의 부재(不在)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부재를 의미한다. (…) 어떠한 쾌락도 본래적으로 악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쾌락들의 작용인은 쾌락에 대한 매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31-2, 141.)

 

⑨그러므로 모든 쾌락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선(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고통이 악이지만 모든 고통이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꼭 같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129)

 

에피쿠로스 학파가 바라본 인간고통의 원인은 무지였다. 인간의 삶을 바로 좋음과 나쁨에 관한 무지 때문에 고달파진다. 이런 결점 때문에 우리는 또 최고의 쾌락을 박탈당하며 마음의 극심한 근심으로 고통받게 된다. 분별력이 우리를 쾌락에로 믿음직스럽게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게끔 해야 한다. 분별력으로 인해 두려움과 욕망이 제거되고 헛된 억견들이 추방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지향점은 무엇인가?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자신의 학파를 일구어냈던 저명한 철학자이다. 그는 때로는 비수 같은 언어로, 때로는 따뜻한 설득의 언어로 '쾌락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흔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키레네 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아타락시아(Ataraxia)'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코 7,1-8.14-15.21-23

 

 

그렇다면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기쁨의 차이는 무엇인가? 즉 종교를 가진 사람의 기쁨은 무엇인가?

 

마르코 7,1-8.14-15.21-23은 성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은 아니다. 성서해설서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트집잡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정결례와 예방의학, 그리고 혐오문화를 빌미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는 사건으로 바라본다.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 복음사가들은 공간과 시간 표기를 자동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르코 7,1-8.14-15.21-23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해하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요성이란 일찍이 테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가 간파한 대로 인류는 예수라는 오메가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맥락이자, 집단무의식에 묶여 있는 인간의 상태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7,1-8.14-15.21-23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코 7,1-8.14-15.21-23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정결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 군중들에게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는 정결례와 예방의학과 혐오문화가 결합된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차별의 매트릭스가 만들어지는 기재에 해당한다. 오늘날 신의 자리에 돈과 건강이 자리하게 된 그 맥락을 추정할 수 있다.

 

Ⓑ와 Ⓒ는 이런 차별의 매트릭스의 공간이 다름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지적한 부분이다.

 

여기서 묵상을 좀 더 확장해서 우리 삶의 작동방식과 연결하여 이제 우리 자신을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가 됐다는 측면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그것이 믿는 자의 기쁨의 한 원천일 것이기 때문이다. 

 

Ⓐ에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는 유대인들과 바리사이의 지적은 인류 역사에서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계급구조가 만들어지는 그 저변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순탄하게 살라’는 제언이 실은 같은 맥락의 가치관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월은 가톨릭에서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보낸다. 순교자들의 삶은 순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고, 굴곡진 삶이었고, 질곡의 삶이었다. 목숨을 초개와같이 버린 삶이었다.

 

그들을 보건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직선 코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불운하고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들일까?

 

그동안 <길 위의 미사>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한 바,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3중의 존재로 이 순례를 하고 있으며, 이 순례의 여정은 대략 ‘소유하가-행하기- 존재하기’의 그 어디쯤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성가들은 바람직한 삶의 패턴으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처럼 ‘존재하기-행하기- 소유하기’의 패턴으로 전환하라고 충고한다.

 

Ⓐ의 바라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같으며, ‘하늘나라에 자신들도 못 들어가면서 남도 못 들어가게 막는 원흉’으로 질타받은 인물들이다.

 

당시, 물이 빵만큼이나 귀한 땅, 마실 물도 없는 데 외출하고 돌아와서 정결례를 하기 위해선 물을 살 돈이 있어야 한다. 바이사이파와 유대인들은 정결례를 할 수 없거나 병이 든 사람들을 성전으로 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들만의 배타적 교리를 전통으로 만들 수 있는 빌미를 만들었다. 하느님을 팔아서 가장 하느님적이지 않는 분리의 배타주의 장벽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그들은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선민의식, 윤리적인 우월성까지 몽땅 챙겼다.

 

여기서, 마르코 7,1-8.14-15.21-23을 세관장 자캐오(루카 19,1-10)와 부자청년(마르 10,17-27) 의 비유와 함께 바라보기로 하자.

 

루카 19,1-10에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간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캐오가 일어나 주님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들어보세요! 저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구를 속인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하였다. “오늘 구원이 이 댁에 내렸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보면 소유하기 자체를 비난받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자청년의 비유에서(마르 10,17-27) 청년의 재산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영적인 것과 대척점이 되는 것처럼 서술된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지녔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자캐오는 구원을 받고,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간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캐오는 오직 물질적인 것만 취하고 살던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축적한 재산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 자신이 하느님 앞에 의인이라는 정신적인 우월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단적으로 이 둘의 상황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단지 물질의 추구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서 샤르뎅 신부의 진화의 원리를 적용하면 인류의 진화는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부자청년-즈카리야-자캐오-마리아의 순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몸의 진화가 아니라 마음의 진화임을 복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는 철저히 물질주의다. ⒞는 말씀과 사람의 분리다. ⒟는 말씀과 사람의 (자캐오식) 일치다. ⒠는 말씀과 사람의 온전히 하나가 되는 사건이다.

 

바리사이든, 율법학자든, 자캐오든 부자청년이든, 즈카리아든 마리아든 우리의 순례는 절대적인 세계로 넘어간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간과하면 안 된다. 우리는 물질주의의 세계인 상대적인 세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수없이 반복했지만 영적인 순례를 하기 위해서라도 ‘물질의 재배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창조와 진화는 ⒜~ ⒢로 이행되는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 역사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역사의 궤적이기도 하다.

 

마르코 7,1-8.14-15.21-23에서 언급된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세분해 보면,

 

불륜과 간음은 육체적이고 성적인 문제, 도둑질과 탐욕, 사기는 소유나 물질에 관한 문제, 살인은 생명에 관한 문제, 악의, 중상, 시기, 교만, 어리석음은 정신적 우열의 문제다. 이 결과들은 모두 쾌락원칙이 추동하는 ‘타자와의 분리’를 조장하는 물질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물질주의는 우리 순례에서 대척의 관계인가? 하는 점이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이 주는 즐거움이 있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서의 기쁨도 있다. 문제는 물질주의가 주는 쾌락과 영적인 기쁨 사이에는 분리와 일치라는 간극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를 부자청년과 자캐오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자청년은 하느님과의 율법에는 철저했지만 타자와의 관계는 상관하지 않는 분리주의자였다. 애주는 했지만 애인은 하지 못했다. 자캐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타적인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애주애인의 길을 자기가 아는 만큼 가려 했다는 그 차이일 것이다.

 

여기서, 물질이 악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주의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악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의 소유여부로 카테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마르코 7,1-8.14-15.21-23, 세관장 자캐오(루카 19,1-10)와 부자청년(마르 10,17-27)의 비유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이나 물질주의에 머물러 있는 삶은 진화와 창조와는 거리가 먼 삶이다. 진화와 창조와 멀어진 삶은 하느님과 상관없는 화석화된 삶이다. 인류가 지구에 생명체로 존재하던 초기상태에 머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인류의 발전단계의 초기상태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종교의 거룩함이란 위선의 옷이라면 그 옷을 벗으라는 것이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나 부자청년의 비유는 바로 이런 위선적이고 배타적인 이중구조를 지적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주의가 주는 배타적 쾌락에 머물러 있는 원시인이면서, 최고의 진화상태인 선민의식을 선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나 부자청년은 진화의 초기상태인 물질이나 형상에 머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물질단계의 인간이 창조나 진화를 하기 위해선 그 동인인 ‘쾌락의 원칙’이 동행한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물질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아는 것은 단적으로 감사할 수 없는 심장에서 만들어진다.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돈이나 물질적인 재산일 뿐일 때, 본인이 진화의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과 쾌락을 추구한다. 그것이 어떤 쾌락에 근거하는가가 문제다. 아타락시아(ataraxia)냐, 아파테이아(apatheia)냐의 구분을 하지 못해도 인간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게 하는 힘은 그것을 추동하는 쾌락, 즐거움이거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쾌락이 일치를 주구하는 것이냐? 분리를 추구하는 것이냐에 대해서, 영성가들은 '망각(분리)-기억(하나)'이 돌리는 운명의 수레바퀴로 바라보기도 한다. 인간의 진화는 이차함수가 아니라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수레바퀴는 물질적인 지점을 밟아야 정신적이거나 영적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물질적인 단계를 취한 후에 다시 정신적이고 영적인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물질-영혼-물질-영혼----의 단계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물질주의는 점점 작아지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이 커지는 것이 진화의 단계라는 것이다. 물질은  영혼이 자신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하다는 제언이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이고, 그  반복이 최고 상태에 이르러, 물질적인 고리를 십자가로 끊어낸 분이 예수라고 본 것이다. 

 

이를 헤겔이나 들뢰즈나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의 정반합 혹은 차이와 반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불교는 여기서 윤회의 수레바퀴를 설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처의 547번의 전생얘기가 바로 어떤 생의 반복을 통해 최고의 영적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거나,   명상이나 요가에서 우리 몸을 일곱 챠크라로 설정한 이유등에서 우리는 진화의 단계를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배꼽 밑의 하위의 에너지인 물질적인 차크라가 정수리부분의 정신적인 부분으로 상승하고, 그 상태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다시 하위의 차크라로 돌아가고, 그것은 다시 상위의 차크라로 넘어간다는 에너지 흐름의 원칙이다. 또한 모든 사건 사고나 범죄의 단계는 바로 물질적인 쾌락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에서 이를 추론해 볼 수 있다 )

 

그 기억(일치)-망각(분리)의 역사에 개입하는 것이 ‘즐거움의 원리, 즉 쾌락원칙’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닐 도날드 윌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이를 ‘power vs force’의 대결로 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위력(force)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드러나있지 않은 근원에서 나온, 자신에게 아무런 통제권이 없는 힘(power)에 지배당합니다. 힘은 노력이 필요 없는 까닭에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움직입니다. 위력은 감각을 통해 경험되지만, 힘은 내적 앎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동시킨 엄청나게 강력한 끌개에너지 패턴에 정렬됨으로서 현 상태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은 순간순간 위력의 에너지에는 구속당하고 힘의 에너지에는 추진되면서, 현재의 진화 상태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의식의 바다에 떠있는 코르크와도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며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끝없는 의문속을 헤매고 세기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power vs force> 서문 중에서.

 

이 글의 논의를 종합하면,

 

우리의 순례의 여정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그분의 여정을 따라 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를 경험하는 길위의 여정을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강생의 신비)

⒢사람이 말씀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십자가신비)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진화의 단계를 우리가 임의로 조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 주에 살펴볼 치유의 기적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원하는 이들만 치유를 하신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인류는 21세기에도 이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종이 정착하기 시작한 고대의 원시인이 느꼈던 그 생존의 두려움과 쾌락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고 아등바등거렸던 어느 시점, 그 물질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4차혁명이란 말이 이 시대를 이름짓는다 해도 그건 결국 물질주의가 발전된 형태지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발달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뚫고, 인간 최고의 창조와 진화의 정점인 ‘사랑’을 알려고 이 순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비효과를 보는듯하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에드워드 N. 로렌츠)”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의 이론으로 초기 값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개념은 이후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되었고 경제학, 정치공학, 사회학, 심리학의 흐름을 바라보는 이론이 되었다.

 

사랑의 논리는 이 나비효과를 닮았다. 오늘의 초기값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길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상은 누가뭐래도 ‘돈과 건강’이다. 돈과 건강은 물질이 그 기반이다. 그런 거대 담론앞에 서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미시 담론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나비효과를 믿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다. 

 

사랑은 연약한 나비의 날개짓과 다름없다. 골리앗을 상대로한 다윗의 손안에 들려있는 작은 돌멩이에 해당한다. 그 사랑이 담긴 그릇인 우리 마음은 또 얼마나 연약한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쾌락의 카테고리를 뛰어넘거나 재배치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런 길 위에서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고백하고, 바라보고, 걸어가는 연약한 갈대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믿는 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히 남을 그 사랑이고, 우리가 지킨 것이 곧 우리를 지킨다는 그 희망일 것이다. 그것이 믿는 자의 분명한 기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