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십자가는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1)
-L'amour n'est pas une croix, mais la croix est l'amour
[연 중 제 24주 일 (나 해) 2021. 9. 12. 마르코 7,27-35 ]
1. 문정희 「목숨의 노래」에 나타난 ‘타나토스’의 충동 2.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 8.6) 3.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르코 8,27-35) |
1. 문정희 「목숨의 노래」에 나타난 타나토스의 충동
문정희의 「목숨의 노래」를 읽어본다,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지 않고도 문정희의 「목숨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작아서, 같이 살자는 말이 너무 흔해서...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싶었다..싶었다...죽고 싶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 사랑은 무엇일까?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목숨의 처음과 끝을 알아야하고, 천국과 지옥까지 가 봐야하고, 맨발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이후에야,
문정희라는 사랑주의자가 전하는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 듯하다.
문정희 시인은 “문학의 본질은 질문하는 것...내가 누구이며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란 질문을 계속 던지고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는 문학 없이는 진흙탕을 헤매는 돼지의 삶과 같다”고 말한다,
시인은 또한 “오직, 순간만이 나의 전부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도 이전의 경험으로 인해 익숙해지지는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인생은 철저히 처음인 것이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순간인 거죠. 다행히도 그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선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45년 동안 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살아있다는 건 순간순간 파도치는 것이고 그 파도는 영원히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거죠.”
‘살아 있다는 것은 /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시인의 문학론과 사랑론을 종합해 보면, 목숨을 걸수 있을만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맛보겠다는 생의 의지이자, 천애의 절벽에서 바다에 투신한 한 방울의 '포말'같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때, 사랑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오직 사랑에만 목숨을 걸 수 있다는 답으로 되돌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목숨은 종교에서 말하는 그 목숨이기도 하고, 생물학에서 말하는 그 목숨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그 목숨이기도 하고, 플라톤이 바라보는 그 목숨이기도 하다. 사랑의 열락에서 느끼는 엑스터시(ecstasy)이자,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자기파괴본능인 ‘극단적 파토스’이기도 하다.
2.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 8.6)
문정희 시인의 「목숨의 노래」, 괴테의 『젊은 베드테르의 슬픔』, 김훈의 『남한산성』, 사마천의 『사기』에는 모두 사랑의 대척점으로 죽음이 소환된다.(국가애, 신념체계도 사랑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플라톤의 『 향연』, 프로이드는 『꿈의 해석』에서 말하는 죽음의 충동 ‘타나토스’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듯하다.
왜 모든 사랑의 극단에는 ‘죽음’이 소환되는가?
이를 플라톤은 인간에게 두 개의 다른 사랑, 에로스가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①인간은 두 개의 사랑을 동시에 하고 있다. 열등한 에로스(살의 사랑, 즉 신체의 사랑)와 신성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에로스(정신적 사랑, 소위 말하는 플라토닉러브)가 그것이다. 낮은 정도에서 높은 정도로 모든 만물이 이행하듯, 사랑도 변증법적 방식으로 상승한다.(『향연(Symposium, Banquet)』)
프로이트는 이를 두 개의 충동의지로 바라보고 있다. 생의 충동 즉 자기보존의 생성적 충동을 표현하는 ‘에로스’에 대립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어로 죽음, 파괴를 의미한다)라는 죽음 충동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죽음 충동은 자기 파괴의 경향성으로 또는 외부로 향하는 공격성으로 번역 전환될 수 있으며, 인간은 죽음의 충동에서 생의 긴장을 회피하고자 하며, 결국에는 죽음의 상태인 무아[無我]의 상태, 비유기체적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 충동을 긴장의 이완이나 비유기체적 상태로 이행을 말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칼 융(C. G. Jung)과 결별하기에 이르게 하지만 이를 프로이트가 갖고 있는 ‘절대적’ 사랑론에서 충분히 프로이트 자신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②누구든지 사랑을 하게 되면 겸손하게 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자아도취증의 일부분을 저당 잡힌 것이다. Whoever loves becomes humble. Those who love have, so to speak, pawned a part of their narcissism.우리는 사랑하고 있을 때만큼 고통에 무방비 상태가 될 때도 없고, 사랑하는 대상을 잃거나 그 대상의 사랑을 잃었을 때만큼 무력하게 불행할 때도 없다.We are never so defenseless against suffering as when we love, never so forlornly unhappy as when we have lost our love object or its love.
김훈의 『남한산성』에서는 역사 앞에서 ‘죽음’에 대한 다른 논의가 피력된다.
③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p143)’
명분을 내세워 청나라와 전쟁을 주장한 주전파 김상헌은 죽음이 삶보다 가볍다고 말한다, 실리를 앞세워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은 죽음은 가볍지 않음으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치욕스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죽음보다 얼마나 더 처절한 것인가에 대해,
④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사마천, 『사기』)
이 모든 죽음의 논의, 그 이름은 치열한 고민과 성찰 끝에 이르러 그것이 삶을 선택하든, 죽음을 선택하든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 8.6)’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앞에두고 선택한 그 모든 선택의 바탕에는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⑤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경우에만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 사랑이 죽음보다 위대해지려면 그에 앞서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야만 한다. 사랑이 의향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랑의 힘이 단순한 생물세계의 힘보다 높고 후자를 지배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요셉 라칭거)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에서 발췌한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경우에만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는 이 통찰이 함유하고 있는 무한한 자유를 사는 것이 우리 순례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3.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코 8,27-35)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 8.6)’는 것을 ‘십자가 신학’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우리가 통과해야할 자유의 문이 무엇인가를 적시한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전하는 마르코 8,27-35을 읽어보자.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코 8,27-35은 ‘십자가신학’이 ‘강생의 신학’을 완성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을 연결하는 그 모멘트가 바로 ‘십자가’다.
그런데 십자가신학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가 통과해야할 두 개의 관문이 놓여 있다. 이것은 십자가 신학이 곧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학으로 수렴시킬 수 없다는 난관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점이다. 강생의 신학이 지닌 함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관과 통찰이 그 사랑을 수렴하기에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를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L'amour n'est pas une croix, mais la croix est l'amour.”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개의 해명해야할 명제(신학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워)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Q!. 왜 사랑은 십자가가 아닌가?
Q2. 왜 십자가는 사랑인가?
Q! 왜 사랑은 십자가가 아닌가?
결론적으로 사랑은 이 우주의 근원을 밝히는 '총론'이라 한다면, 십자가는 그것을 알게하는 '각론'에 해당한다. 사랑이 존재의 원리라면 십자가는 상황 논리가 적용된다. 사랑은 선택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선택의 문제를 내포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랑의 현존'이라고 대체할 수 있다. 신의 사랑은 예수님의 공생활 본론에 해당하는 십자가신학을 포괄하는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바오로사도가 전하는 고린도전서 13,13에서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에서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에서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수 있는 때 사랑은 죽음보가 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부활신학에서,
모든 영성가들이 바라보는 ‘사랑을 아는 것은 신을 아는 것이며, 영원을 아는 것이자, 나를 아는 것이자, 너와 나는 하나’라는 직관에서,
또 우리 자신의 기억과 망각의 역사에서 이를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무한의 영역이자, 영원의 무대라는 점에서 사랑은, 삶은 십자가에 국한시킬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오해를 무릎쓰고 십자가를 포괄하는 삶의 원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랑은 오욕칠정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함한 그 이상의 이름이고. 이 우주의 근원을 규정할 수 있는 알파와 오메가이다. 사랑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영승 시인은 사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전한다.
"사랑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절필동의 사랑은 만절필동의 사랑을 만나서만이 비로소 만절필동의 사랑으로 온전히 함께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미완성입니다만 사랑은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이 아닌 사랑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랑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을 내팽개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9273)
Q2. 왜 십자가는 사랑인가?
그렇다면 왜 십자가신학은 필요한 것인가?
십자가는 사랑을 알기위해 우리가 통과해야할 문이다. 십자가를 모르고는 강생의 신비, 그 사랑의 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우리의 현실이다.
십자가만이 사랑을 알게 하는 문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인류 역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거듭거듭 증명해 보여주었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희생의 차원을 넘어서는 명제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희생이라는 측면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십자가의 육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십자가는 실존의 문제이자 존재의 문제이다.(예수님 강생의 신학에서 가난한 구유에서 태어난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우리 각자의 삶의 여정에서 십자가가 무엇이고 그것을 왜 져야하는가는, 사랑을 알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는 것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사랑을 알지 못하면 신을 알 수 없다- 신을 알지 못한다면 나를 알 수 없다- 나를 알지 못한다면 당신이라는 타자를 알 수 없다. 이 순환의 고리는 사랑을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있다. 오직 빵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동물적인 생명이 우리가 한 생명으로 온 까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코 8,27-35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위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한 즉 신앙정체성에 관한 것이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포괄적 가르침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J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십자가’에 관한 분명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자, 인간보편에게 주어진 생의 열쇠에 해당한다.
신앙공동체인 우리는 분명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을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베드로의 생각과 같은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거듭거듭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이 사람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고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에서 그분은 사랑이시며, 나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인류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 안에서만 신의 사랑을 볼 수 있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를 통해 행위와 실천의 이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를 고민해야하는 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말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에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을 '꼭 붙들고' 베드로가 반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 구세주 혹은 메시야는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권능’의 하느님이다.(예수님을 꼭 불들고 반박하는 베드로, 이 부분이 참 좋다. 베드로는 집단무의식에 감염된 분이었지만, 결코 교과서적인 언어로 말하는 앵무새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분은 결국 예수님처럼 사랑에 목숨을 걸게된다.)
베드로가 그분을 따르면서 목격한 바, 예수님의 행적에서 추론하고, 이해하고, 희망한 그리스도는 권능의 옥좌에 앉아계신 하느님이자 이스라엘의 민족적 숙원을 풀어줄 그런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시적인 행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실천없는 믿음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고 있는 우리가 겪는 딜레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적,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사순5주 강론에서(개포동홈페이지에서)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느님은 계시지만, 전능한 사랑은 없습니다”(참고:http://blog.daum.net/m-deresa/12389815)
'전능하신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 '무능하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강론의 역설적 전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실패와 나약함, 좌절과 슬픔, 아픔과 고통이라는 십자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행위와 그 행위의 의도까지도 간파해야 한다는 점이다. 행위만을 문제삼을 때 그것은 힘과 능력에 초점이 놓이게 된다. 행위의 의도, 혹은 그 바탕생각까지 문제삼아야 한다는 기로에 서게된다.
따라서, 전능함에 초점이 맞춰진 베드로의 그리스도 이해는 오늘 우리 믿음의 현주소가 무엇인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하겠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탄은 무엇인가? 사탄 (Satan)은 Saṭänä; 아랍어: شيطان, Šayṭān, Ge'ez: ሳይጣን Sāyṭān, 터키어: Şeytan)에서 따온 말로 ‘야훼’에게 대항하는 영적(靈的)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 사탄(하 사탄, Ha-Satan) 역시 같은 존재를 일컫는데, “고발하는 자”혹은 "참소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신(사랑)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자가 '사탄'이라 할 수 있다. 사탄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믿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엄중한 질문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 '알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안다'는 안셀무스의 통찰은 가히 예언적이다. 어떤 면에서 '무지'야말로 진정한 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베드로 자체가 사탄이 아니라, 신의 정체성을 ‘사랑’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종교적 카테고리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에 해당한다.
십자가 신학은 그래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알지 못하고는 나를 알 수 없고, 나를 알지 못하고는 당신이라는 타자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과 나와 당신을 알지 못하고는 사랑을, 삶을 알 수는 없다, 삶과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죽음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바로 총체적인 사랑을 아는 신비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무겁거나 덜 무거운 십자가란 없다. 십자가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십자가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생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 십자가이기에 '희생'이라는 관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살다보면,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자신의 ‘십자가’를 강하게 알게되는 사건이나 사람, 소임을 만나게 된다. 때론 자신의 꿈이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이건 내 경우에 비추어, 소임이 꿈인지, 꿈이 소임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죽을 거 같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사건이나 사람이나 소임을 통해 '주여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조금 더 알게되는 은총의 시간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정리해본다.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지만, 십자가는 사랑이다.L'amour n'est pas une croix, mais la croix est l'amour.”
이 명제를 이해하는 것은,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이런 의미에서만 비로소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활은 그 자체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인 것이다.(요셉라칭거)를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르코 8,27-35)에 대한 답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체험된, 우리 각자의 언어로 '예수님 당신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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