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빌라도의 담론이 지닌 순환증식의 원리와 그 종언(終焉)

나뭇잎숨결 2021. 11. 27. 11:00

 

 

빌라도의 담론이 지닌 순환증식의 원리와 그 종언(終焉)

-The Principle of Circulation Proliferation and its End of the Pilate's Discourse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나 해) 2021. 11, 21. Jean. 18,33-37]

 

 

 

 

 

1.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읽어본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우리 안에 나이를 먹지 않는 소년 혹은 소녀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언급한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하라’는 바로 그 명제의 출발점에 서 있는 ‘나’일 것이다. 이는 ‘나’는 ‘나의 운명이다’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라는 필리아의 출발점, 아가페라는 몰아적 사랑의 첫 걸음은 바로 유치환이 「생명의 서」에서 애증의 출발점으로 보았던 바로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이라고 본질 추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바로 ‘나’일 것이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바로 ‘나’라는 운명애를, 내 앞에 법처럼 서 있는 ‘나쁜 소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소년은 소년이로되 그 소년은 ‘나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그런 ‘소년’이다.

 

①에서 화자는 시간의 밖에 있는 시간이란 즉 나이를 잊는 비의에 대해 ‘파편같은 삶의 유리조각들’이 ‘무섭게 반짝’이며 앞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무섭게 반짝’이는 ‘유리조각’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내 안의 ‘소년’이다.

 

②에서 그 ‘무섭게 반짝’이는 것들로 인해 시를 쓰게 되었고, 그로인해 세상이 주입하는 욕망에서 허기를 느끼지 앉았지만, 그 심급에서 화자는 ‘외로웠다’라고 말한다.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토해내는 행위는 ‘외로운’ 것이다.

 

③에서 그 ‘무섭게 반짝’이는 것의 색은 피카소의 ‘청색시대’에서 살아낸 그 ‘푸른색’인데, 그 푸른색은 슬프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고, 소년이게도 했으며,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메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푸른 색’의 상실 앞에서 화자는 서 있다.

 

④에서 화자가 원하는 것은 외로워도 좋으니 그 푸른색의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그것은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푸른 유리조각으로 사는 것이자, 시를 쓰게 만든다. 물론 ‘나’의 목소리를 사랑한 대가로 세상을 ‘저만치’에 두어야하는 ‘격절’을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⑤에서 무섭게 반짝이는 유리조각 같은 것, 나를 시인이게 했던, 그 푸른색은 화자의 생 앞에 ‘법’처럼 서 있는 그 ‘소년‘이다. 그 소년을 만나는 것이 시인이 시를 쓸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이성복 시인은 “위대한 것들은 모두 위독하다”라고 말한다. 그 위독한 것 중에 가장 위독한 것은 바로 ‘나’의 목소리를 상실한 위독일 것이다. 어린시절 보았던 ‘인어공주’처럼 목소리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정말 소중한 것들, 소년(혹은 소녀)을 간직하기가 왜 힘들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 ‘나’를 사랑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운명애일지도 모른다. 네가 맘에 안들면 당분간 너와 거리를 두어도 되지만 내가 맘에 안들면 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사랑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대가라는 말도 된다. ‘푸른 색’의 상실 ‘소년’의 상실, 늙어버린 노회한 자신에 대한 진단을 이상은 「거울」에서 ‘나는 나를 진단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나의 상태를 진단조차도 할 수 없는 '나'란 무엇인가?

 

‘나’의 상실에 대해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겠지만, 그 하나의 진단은 중심부 담론에 ‘나’의 생을 관성적으로 맡겨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

 

 

2. 담론의 구조, 유토피아에서 헤테로토피아

 

 

담론(談論)은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 진리라 부르는 것,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거나 지향하고 싶은 관념 모두를 언어로 구조화한 것이다.

 

담론(談論)은 사회, 정치, 경제가 가담하기는 하지만 담론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군중, 민중, 대중이라 일컫는다는 점에서 권력주체가 행사하는 이데올로기와 차별화된다. 그럼에도 ‘중심부’담론이라는 말은 주체를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주체와 민심이 하나가 된 상황을 일컫는다.

 

미셸 푸코가 간파한 대로 담론은 침묵보다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도 되고 효과가 되는 동시에 권력의 장애물, 권력이 비틀거리며 부딪히는 벽, 저항의 지점, 반대전력의 출발점도 될 수 있는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담론은 권력을 생산하고 전달하며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멸시키고 폭로하며 허약하게 만들고 권력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세상엔 무수한 담론이 생산되고, ‘나’를 망각할 정도로 그 담론이 어떤 방향성을 지닌 채 개인으로써는 넘지못할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를 ‘중심부 담론’이라고 부른다. 이 중심부담론이 지향하는 질서는 대체로 유토피아적 질서에 해당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보르헤스가 구사하는 유머에 따라 웃다가 섬뜩한 마주침을 경험한다고 술회한다. 그 섬뜩한 마주침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디스토피아’도 아니고 ‘헤테로토피아’라고 말한다. 유토피아는 실재하는 장소를 갖지 못하지만 고르고 경이로운 공간에 펼쳐지며 비록 공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지라도 살기좋은 나라를 보여주는데,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은 화제를 메마르게 하고 말문을 막고 문법의 가능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하고, 신화를 해체하고, 서정성을 아예 없애버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푸코는 담론의 생산성이 지닌 단절과 연속성에 주목한다.

 

⑥진리는 세계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세계 내에서 다양한 제약을 통해 생산된다. 각 사회는 그 자체 진리의 체제, ‘진리의 일반 정치학을 가지고 있다. 담론은 대상 영역을 경계짓고, 인식행위자에게 정당한 지각을 정의하고, 이론과 개념을 변화시키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 행위에 의해서 규정된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⑦인식이 합리적 가치나 객관적 형태에 대한 모든 기준과 증대하는 역사보다는 오히려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episteme)인데,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인 것은 지식의 공간에서 경험적 인식이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이다(미셸 푸코, 『말과 사물』)

 

⑧담론이 무한히 증식된다는 사실 안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하여,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담론의 권력과 위험을 제거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제압하며, 무겁고 위험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따라 동시에 통제·선별·조직·재분배 된다.(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푸코가 바라본 최고의 진실은 이미 더 이상 이전에 담론이 그런 것, 또는 담론이 수행한 것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이제 담론은 자신이 말하는 것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것이 각 사회는 그 자체 진리의 체제, ‘진리의 일반 정치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푸코는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담론의 권력과 위험을 제거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제압하며 무겁고 위험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따라 동시에 통제·선별·조직·재분배된다”고 전제한다.

 

푸코는 우선 배제의 절차들을 언급한다. 먼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절차들이 있다. 금지, 분할 그리고 거부, 진실과 거짓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리고 내적 절차들이 있다. 담론의 문형이 만들어지는 바로 주석, 저자, 분과학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 통제에는 또한 세 번째 절차가 존재한다. 말하는 주제의 희소화, 초월적 주체의 철학들, 전복ㆍ불연속ㆍ특이성ㆍ외재성의 네 가지 방법론적 요청들이 그것이다.

 

푸코는 사회적 담론이 만들어지는 내적이며 외적인 구조, 일련의 절차들에 주목한다. 특히 담론이 형성되는 그 토양, 에피스테메(episteme)에 주목했다. 수많은 담론 중에 주류 담론 혹은  중심부 담론이 되는 것은 이 담론을 배양하고 증식하고 순환시키는 어떤 토양위에서 서식한다는 것이다. 그 토양이 인간은 모두 권력, 힘을 지향한다는 점으로 본 것이다. 정치권력만 권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푸코는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해서 근대를 살아가는 ‘주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권력이 근대 주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뛰어넘는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특정 단계에서 특정하게 형성되는 것일 뿐이다.

 

그럼 이러한 권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푸코는 개인의 몸에 작용하는 일정한 관계망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살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이 단순히 금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작용할 대상을 일정하게 형성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권력을 수행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즉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Ecce Homo!. 1896, Oil on canvas, 403 x 650 cm, Déri Museum, Debrecen

 

 

 

 

3.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3ㄴ-37)

 

그렇다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는 사도신경의 기도문이 적시하는 바, 역사 속의 예수는 어떤 담론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았는가를 살펴볼 차례다.

 

요한 18,33ㄴ-38과 19장10절을 읽어본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19,10Ⓔ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여섯 개의 질문으로 구성된 빌라도의 신문은 예수의 공생활 3년을 집약하는 ‘통사’에 해당하는 것이자, 인류가 존재하는 한,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재맥락화하여 순환-증식하여 만들어지는 담론 구조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빌라도로 대표되는 <중심부 담론>과 예수로 상징하는 <사랑의 담론>과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요한복음18 28~19장,16절 까지는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에서 알 수 있듯, 표면적으로 공시적 역사 속에서 예수의 <사랑의 담론>은 패배로 결정된 듯 보인다. 그러나 통시적 역사로 본다면 예수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승리란 중심부 담론이 사라진 완전한 승리는 물론 아니라는 점에서 담론의 시작과 끝은 단절과 영속성 속에 여전히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빌라도로 대변되는 중심부 담론은 빌라도의 여섯 개의 질문에서 담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이 담론의 구조는 이천년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담론이 어떻게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배하고 끌어가고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그 초점이 놓여있다.

 

Q1.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Q2.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Q3.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Q4. 진리가 무엇이오?

 

Q5. 당신은 어디서 왔소?

 

Q6.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Q1~Q6은 1,3,6과 2,4,5의 두 질문으로 나누어진다. 1,3.6의 질문은 집단무의식이자 중심부 담론에 해당한다. 2,4,5는 빌라도의 개별적 본성에서 나온 질문이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개별적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개별적 본성에서 우러나온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에서 중심부담론에 편승했음을 알 수 있다.

 

발라도로 대표되는 십자가사건은 ⒜주체, ⒝수혜(이익), ⒞단절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담론의 주체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군중들-빌라도> 세 그룹이다. 이 세 그룹이 만들어내는 담론의 구조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 사건은 이 세 주체가 지배력을 나눠 행사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푸코가 바라본 대로 담론이 지닌 어떤 ‘힘’을 추정할 수 있다. 십자가사건의 최초의 진원지인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십자가사건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힘을 필요로 했다. 동조할 민심과 그것을 집행할 권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과 빌라도는 그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위협적인 힘을 제거하려던 것이었지만, 정작 군중들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무엇인가? '호산나- 죽여라', 이 광적인 낙차에서 군중들이 얻은 이익은 무엇인가?

 

<고발자-군중-집행자>이 담론이 만들어지는 구조는 담론이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매커니즘에 해당한다. 고발자는 자신의 의도를 정의(혹은 거룩함)로 포장한다. 그 정의는 군중들의 욕망을 선동할 수 있는 정의여야 한다. 군중들을 선동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결핍을 외부의 탓으로 전가시켜야 한다. 집행자는 군중들의 결집여부에 따라 고발자의 의도를 승인한다. 그들은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그들의 담론을 관철시켰다. 여기서 고발자와 집행자가 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론형성에 동원되는 것이 군중들이다. 고발자와 집행자는 실제적인 혜택의 수혜자들이지만, 군중들은 ‘심리적’인 혜택의 수혜자들이다. 군중들은 신을 지킨 거룩함에 편승한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그들은 각자의 몫을 챙긴 것이다.

 

⒞이제, 빌라도로 대변되는 중심부담론의 단절과 연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빌라도의 담론은 빌라도 그 시대의 담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빌라도식 담론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21세기식으로 재맥락화 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빌라도시대의 담론의 단절을 의미한다. 예수는 누구에게나 열린 세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 열린세계가 내장하고 있는 담론은 이 세상과 진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다는 '혼혈담론'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담론>은 여전히 착지하지 못한 부동의 담론에 해당한다. 그것이 빌라도식 담론의 연속성이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도 속하고 진리에도 속한 사람이라는 경계가 무너진 담론, 여전히 이 시대에도 세상을 끌어가는 '힘'을 누구나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담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18,33ㄴ-38/19,10은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어떤 세계에 속한 사람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속한 사람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희망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사랑을 하려는 사람인지, 어떤 행복을 살려고 하는 사람인지, 어떤 기쁨을 기쁨이라고 하는 사람인지? 어떤 진리 때문에 자유로운지?

 

강론은 그렇다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우리가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어떤 담론에 복무해야 하는가를 엄중하게 묻고 있다.

 

그분은 십자가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신 분이셨고, 그러면서 십자가의 힘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인의 희망인 그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희망을 만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희망은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Esperant contre toute esperance)’이었습니다.(...)‘희망을 거스린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우리는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왕!’ 예수님께 붙여진 이 왕이라는 칭호는, 사실 십자가에서의 패배가 실제로 승리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의 패배는 사랑 때문이었고, 사랑은 결코 패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기억하는 사람,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알아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자신이 사랑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할 줄은 아셨지만, 십자가를 이용할 줄은 모르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왕과 진정한 왕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담론에 우리 인생여정을 같이하려면 우리에게 ‘희망’ 이라는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Esperant contre toute esperance)’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때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 된다.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 무엇이며, 이것이 이 시대에 어떻게 가능한가? 이 답은 제자들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오직, 사랑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 가능한 그 희망이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라는 사실을...('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에 대해 개인적으로 더 묵상할 필요가 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서 성서의 맥락으로는 이해가 가는데, 영혼으로 이해가 더 필요하다) 

 

강론에서 인용한 ‘고통받는 교회돕기’ 창시자인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덴 신부님의 말씀을 재인용해 본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시험받고 있습니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습니다. 하지만 박해받지 않는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간직한 우리들은 우리가 믿음뿐 아니라, 사랑을 지녔다는 것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할 때, 그때 ‘희망을 거스린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바라볼 수 있으며, 그 희망은 '나'라는 개별자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임을 알 수 있다.

 

그때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랑할 줄은 아셨지만, 십자가를 이용할 줄은 모르셨던 분이라는 데서, 우리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랑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희망-사랑-십자가'의 의미가  하나로 우리 삶에서 연속성을 지닐때 우리는 <사랑의 담론>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 끝날까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란, 실은 우리가 사랑의 담론과 함께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정리해 본다.

 

 

<빌라도의 담론이 지닌 순환증식의 원리와 그 종언(終焉)>은 누구의 선택인가?

-The Principle of Circulation Proliferation and its End of the Pilate's Discourse

 

우리는 세상이 유포하고 있는 물질중심주의 담론의 한 가운데를 <사랑을 담론>을 지닌 채 통과하고 있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있다. 빌라도로 상징되는 권력의 담론이 순환증식되는 것도,  또 그 담론이 종언되는 것도 실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물질은 그 자체로 우리 생을 존속케하는 중립적인 도구지만, 그것이 ‘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을 끌어갈 때, 우리는 여전히 빌라도의 담론을 순환-증식시키는데 일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사랑의 담론>은 현재진행형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온 이유를 역사상의 실존인물이었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빌라도로 상징되는 세상의 담론이 어떻게 <사랑의 담론>과 여전히 겨루고,  얽혀있는가를 계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심부 담론 앞에 당당했던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는 <사랑의 담론>에 우리 생을 맡길 수 있을 때, 그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선택은 자생적인 '의지'라기 보다는 '맡김'이라고 할 수 있다. '맡김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