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시학,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마라(르네 샤르)
-Poetics of space, marry your home, or don't marry
[대 림 제 3 주 일 (다 해) 2021. 12. 12. Luc. 3,10-18]
1. 「푸른 밤」 & 「연어의 나이테」
우리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된다. 그 관계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인가에 따라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각인하기도 하고, 때론 완벽하다는 자기고양에 고무되기도 한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우리 앞에 놓인 대상과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인지, ‘나’와 ‘그것’의 관계인지, ‘그것’과 '그것'의 관계인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겠다..
마틴 부버는 『너와 나』에서, 인간관계는 ‘너’와 ‘나’라는 고유한 인격으로만 고양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그것’의 관계로 사물화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헤겔은 『법철학 강요』에서 타인과의 사랑은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이지 않은 인격을 바라지 않게 된”상황에 직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랑을 위해서도 인격완성을 위해서도 ‘너’와 ‘나’는 필요불가결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관계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성가들도 있다.
“관계의 목적이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데 있다”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이라니” 어떻게 이런 통찰을? 읽는 순간 존재 전체에 불이 확 켜진 느낌이다.
관계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두 편의 시를 읽어본다.
나희덕의 「푸른 밤」을 읽어본다.
①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 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사랑에서 치욕으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갈래의 길이었을 것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복효근의 「연어의 나이테」를 읽어본다.
②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길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새끼연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희덕의 「푸른 밤」이 ‘나’와 ‘너’의 애증의 관계를 말한다면, 복효근의 「연어의 나이테」는 연어와 나무를 통한 세계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푸른 밤」은 ‘사랑에서 치욕으로 치욕에서 사랑으로’ 오르내리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에서 보듯 ‘너’와 ‘나’라는 개별자의 인격보다 훨씬 큰 관계로 모아진다.
「연어의 나이테」는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길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로 거대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연어의 완벽함이 형상화된다.
너와 나, 그리고 연어, 그 수렴의 끝은 다르지만, 힘겨운 관계를 통해 ‘너’와 ‘나’는 다름 아닌 ‘사람’이었고, ‘연어’는 다름아닌 ‘연어’였음을 ‘존재증명’ 했다는 점에서 같은 귀결점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증명은 다른 말로 ‘온전함’ 혹은 ‘완벽함’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관계는 ‘결여의 교환’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결여의 교환’이란 실은 ‘완전함’이 있었기에 ‘결여의 교환’이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이 살펴보고자 하는 <기쁨>과 연결하여,
“관계의 목적이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데 있다"
우리는 타자 앞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일부터 낮추지는 않지만, 성찰의 시간 속에 혼자 머물 때, 우리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늘 무엇인가 너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자비’가 아니라면 존재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득 이 세계가 '완전한다, 혹은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Architects _ STIDIO 1408 Year _ 2020 Location _ Balotesti, Romania Photographs _ Cosmin Dragomir
2.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마라(르네 샤르)
우리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는 1차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는 가장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체험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지은 건축물을 보면 완전함에 대한 그 사람의 내면을 흘깃 엿본 것과 같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외곽에 있는 어떤 집에 관한 단상이다. 관광명소도 아닌데 그 집 앞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멈춘다. 집이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할 수 있다. 들어가 보고 싶은 집이다. 일층은 빨간 벽돌로 이층은 흰색대리석으로 마감한 모던한 집이다.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 집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흰색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내 보기에는 흰색의 나선형 계단이 사람들을 끌어당긴거처럼 보인다. 도로면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반쯤 보인다. 일층은 외부인을 위한 개방적인 공간으로 이층은 내밀한 사적 공간으로, 그 분할의 경계에 흰색의 나선형계단이 있다.
이태원에 위치한 삼성 리움미술관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물에 해당한다. 마리오 보타, 렘 쿨하우스, 장 누벨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함께 건축한 세 공간이지만, 누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을 보려고 이 미술관을 찾을까? 입구에 리움이라고 쓴 나선형전광판, 그리고 로비에 들어서 천장을 자연 올려다보게 되는데 원통형의 천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자연광, 빛이 반사된 나선형 벽과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어떤 손을 보는 거 같다. 인간 자체는 연약하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다에 방점을 찍은 듯, 그 어떤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네델란드출신 건축가 렘 쿨하우스는 도곡 타워펠렉스, 리움미술관, 트랜스포머, 서울대 미술관 등을 설계한 한국과 인연이 깊은 건축가다. 그는 건축물에 이 나선형구조를 자주 도입한다. 그가 설계한 서울대미술관은 철골 H빔만으로 건물을 지상에서 들어올려 중력에 맞서는 켄틸레버를 보여준다. 내부공간은 나선형계단이 지하3층에서 지상3층까지 연결하여 신체구조처럼 설계했다. 그는 사람의 DNA가 나선형구조라는 것에서 착안한 것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나선형계단이 있다. 나선형 계단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왜일까? 나선형 계단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과 밖으로 무한 팽창하는 힘’ 인간이 느끼는 그 두 힘을 동시에 반영한 구조다. 그 두 힘을 동시에 느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문득, 완전 혹은 완벽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왜소하지만 그러나 왜소하다고만 할 수 없는 그 창조력, 우리는 늘 원심력이나 구심력, 두 힘 앞에서 한 쪽에 쏠려 있는 존재다. 그 쏠림의 힘을 동시에 체감하고, 통제할 때, 어른과 아이를 동시에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는 완벽한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를 개인의 공간에서 본질적인 자기 귀환의지로 바라보는 현상학자 가스통 바슐라드가 있다.
③(오랫동안 구상하고 설계해서 집을 지을 때) 실제의 세계는단번에 사라진다. 꿈꾸는 인간은 사물들의 한 가운데로 사물들의 물질 자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모든 사물들에게 꿈들의 적확한 무게를 줄 수 있을 때, 몽상적으로 거주 한다는 것은 추억에 의해 거주하는 것 이상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④자신의 집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것, 자기 침실의 문도 아닌 한마디로 자신의 집의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느낌이다.(막스 브로드, 『프란츠 카프카』)
⑤우리들이 몸을 담은 적이 있었던 모든 집들의 추억들을 통해, 우리들이 거기서 살아보기를 열망했던 모든 집들 너머로, 그 집들의 내밀하고 구체적인 본질을, ―보호받는 내밀함의 모든 이미지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가치를 타당하게 할 그러한 본질을 추출할 수 있을까?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⑥우리들은 여러 집들에 연이어 살아옴으로써 우리들의 몸짓은 아마 범상해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수십 년의 방랑 후에 옛집에 되돌아왔을 때, 우리들의 가장 미묘한 몸짓들이, 원초의 몸짓들이 느닷없이, 변함없이 완벽한 것으로 되살아옴에 아주 놀라게 된다. 요컨대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우리들 내부에 여러 가지 거주하는 기능들을 서열적으로 새겨놓은 것이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바슐라드는 사물이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이 세계와 이 세계 속에 한 연약한 인간을 해석한다. 그는 어떤 공간은 우리의 내면과 거의 동일시되는 공간이라는데 주목한다. 공간은 고독과 사색뿐 아니라 우리가 보낸 시간에 대한, 앞으로 우리가 보낼 시간에 대한 예의, ‘존중’이라고 바라본다.
오래된 옛집의 지하실과 다락방에 대한 기억을 그는 사색의 자리 ‘구석’이라고 표현한다. 이 우주 속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인간, 그곳은 사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공간은 어린시절 고독과 안정을 주는 그 자신의 조개껍데기였고, 몽상을 위한 구석진 공간이었다. 우리들이 경험한 모든 공간들은 고독에서 들어올려진 기쁨의 공간으로,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원형의 세계. 그 단면도라고 본 것이다.
바슐라르의 표현으로 빌리자면 몽상을 위한 '구석'이 우리가 어떤 근본적인 공간을 꿈꾸게 한다고 말한다. 집안의 자기 공간에 들어앉아 평화로움 가운데 있다는 의식은, 그 에너지를 주위로 전파한다. 우리들은 구석에 몸을 피하고 있을 때, 스스로가 잘 숨겨져 있다고 믿는 우리들의 몸 주위에 하나의 상상적인 방이 건조된다. 그늘은 이미 벽이 되고, 가구는 울타리가, 벽포는 지붕이 된다. 부동성의 공간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실존의 공간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되는 존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완전하다’ ‘완벽하다’는 개념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한다. 어떤 풍경 앞에서, 어떤 공간체험에서, 어떤 관계에서 이런 완전함과 완벽함을 느낄 때가 있다. 또 자신의 인생전체를 바라볼 때 어떤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완전하다 혹은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어떤 공간에서 그런 체험을 할 때가 많다. 진정한 건축가는 완벽한 우주를 재창조한다, 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르네 샤르는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집과 하나가 되었을 때, 집에 있으면서도 집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의 상반된 운명에 대한 시적은유다.
3.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루카 3,10-18)
완전하다 혹은 완벽하다는 것을 성서에서는 ‘기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제1독서 <주님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니야 3,14-18ㄱ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제2독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피 4,4-7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제1독서에서 기쁨을 전하는 스바니야는 남유다 16대 국왕 요시아(기원전640-609)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다. ‘기뻐하라’고 호칭한 ‘시온,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남유다로 넘어온 이들을 포함한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총체적인 난국 앞에 서 있던 종교적인 디아스포라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회의와 실의에 차서 이런 탄식에 젖어있는 이들이었다..
Ⓔ“(스바니야 예언자 시대에)과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 그분이 과연 역사의 주인이신가? 역사는 그저 힘쎈 자들의 손에 의해 엮이는 것인가”(김영선 루시아수녀,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스바니야 예언자가 전하는 기쁨은 어떤 상황 앞에 내몰린 이들에게 전하는 ‘기쁨’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스바니야 예언자가 전하는 기쁨은 상황의 기쁨이나 근육의 미소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필리비인들에게 전하는 기쁨 역시 “늘” 기뻐하라하는 전언 속에는 상황을 초월한 그런 기쁨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초대교부들이 전하는 바에 의해 바오로 사도의 두번째 감금의 상황에서 필립비인들에게 쓰여진 편지로추정한다.
편지에 나타난 고도의 발전된 교회론, 임박한 죽음이 편지에 녹아 있음. 바울의 1차 투옥 보다 더욱 가혹한 형편에 처한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전하는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타자성’과 관련된 기쁨의 의미는 무엇일까?
타자의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기쁨이라는 이 함의는 ‘자선’ 그 자체의 표면적 행위에 머무르는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이 경험한 세 공간을 통해 ‘가우데떼(GAUDETE, 기뻐하여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은 타자와의 교류의 공간이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예수살렘성전의 부흥을, 바오로사도가 그리스도공동체를 간절히 갈망했던 것에서 이를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이 경험한 ⒜광야- ⒝요르단저지대-⒞사해동쪽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플라비우스 유대고대사)이다.
광야와 요르단 저지대에 있던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는 포효가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에서 <오시기로 하신 분이 당신이십니까?> 로 바뀌었음에서 공간의 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나’와 ‘그분’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나’와 ‘타자’라는 사실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와 타자는 언제나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다. 타자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기쁨과 타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의 기쁨은 엄연히 신앙상태의 현주소가 달리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인간을 위한 것이 궁극에 하느님을 위한 것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나 오르단 근처에서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예언자적 소명을 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나’와 ‘너’의 관계가 가능했던 공간이다. 그러나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에서 ‘그것’과 ‘그것’의 관계로 전락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나’와 ‘그분’과의 관계도 흔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공간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8, 20)
예수님에게 공간이 아예 없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지탱했던 공간은 십자가다. 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성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즉 인간의 공간을 무화시키기 위해 ‘나’와 ‘너’라는 실존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한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진단하는 바, 오늘날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기쁨없이 살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위적인 기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깨어진 채로 자기도 깨면서 또 자기도 찢어진 채로 자신도 찢으면서, 해체되면서 또 자기도 그 해체 작업에 한 몫을 거들면서 분열되고 또 자기도 분열을 추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총체적 분리불안 속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기쁨이란 일회적인 기쁨, 원하는 상황이 충족되었을 때, 짓게되는 근육의 미소일 뿐, 영속적인 기쁨의 상태는 아니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나 복음에서 전하는 그 기쁨은 현실과 유리된 단지, 초월론일 뿐인가?
그것은 기쁨의 근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을 외부적인 충족이유율로 볼 것인가? 아님 우리 내부의 근본적인 존재태로 볼 것인가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가 ‘기쁨’과 연결되는 필연적 이유에 대해 강론은 이렇게 전한다.
Ⓖ(내 자신이 회개를 통해서 변화될 수 있다는) 그 변화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만큼 큰 기쁨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서 얻은 기쁨은, 다른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기쁨일 것입니다. 사실 내 자신이, 지금 부족함이 많다 하더라도, 내 자신이 회개를 통해서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 확신은 그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 되고, 내가 살아가는데, 내게 그만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기에 회개는 기쁨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나 자신이 변화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은 다른 그 어떤 기쁨보다도 크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렸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그런 ‘기쁨’을 보류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강론에서는
Ⓗ회개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는, ‘익숙해져 버린 삶과의 이별’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오는 그 변화’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이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가 회개하려는 노력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 답을 찾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이 우리 앞에, 그 답을 불러 앉히기도 할 것입니다.(,,,)그렇듯이 우리도 우리의 회개가 완성되기를 노력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다릴 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회개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과의 관계설정에서 시작되듯, 기쁨 역시 그곳으로부터 시작 된다고 하겠다. 타자가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라를 것을 스바니야, 바오로, 세례자 요한은 모두 강조하고 있다. 즉 기쁨의 표출은 타자를 횡단하고 나온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림-기다림이란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서로 서로 기다려주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란 없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는데 어떤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그분을 받아들인 나의 자세, 나 자신이거나 타자일 경우에 해당한다. 스바니야, 바오로 사도가 ‘늘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 이유일 것이다. 실존의 상황을 보지 말고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만 을 바라보았을 때 나오는 영적인 기쁨이다.
결국 회개는, 대림은, 나를 기다리고 타자를 기다려주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 하며,
공간의 시학,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마라(르네 샤르)
-Poetics of space, marry your home, or don't marry
타자는 언제나 나와 공간이라는 동질성 속에 머무른다. ‘너’와 ‘나’는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거나 나눠가진 존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저 미국 혹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무리 금시초문의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을 금방 망각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대상, ‘백번 잘해주다 한번 잘못해준 관계’만이 애증의 대상이 된다. 이렇듯, 타자는 모두 동질적인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 설정의 궁극에 대해 이글 서두에서 살펴본 대로 이런 제안을 하는 영성가들도 있다.
“관계의 목적인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데 있다”(닐 도날드 윌시)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데이비드 호킨스)
여기서 전자의 완전함이란 인격의 완전함이라 한다면, 후자의 완전함은 우리가 지닌 존재태의 완전함이라 할 수 있다. 너와 내가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존재태의 완전함을 지니고 있기에 이 세상 역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타자와 공유한 공간과 각자 지닌 인격의 차이로 인해 일치하든, 불화하든 ‘사랑’이라는 프리즘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완성에 수반되는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기쁨은 상황이나 조건 충족에서 비롯된 미소, 근육의 미소가 아니라 자신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체험하는 순간에서 나온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지으려는 것은, 온 우주가 그분의 성전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한 억만분에 일로 축소한 투시도이자, 기쁜소식을 더 완전하고 더 완벽하게 영원히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과 '알곡'의 실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신 (루카 3,10-18)" 그분을 바라보고 '늘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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