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소고(小考)

나뭇잎숨결 2021. 12. 21. 12:30

 

한라산 등산로(사진 오순희 제주산악안전대 구조대장)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소고(小考)

-A Small Study on the Theological Position of the Honor of Maria

 

[대림 제4주(다해) 2021. 12. 19. 루카 1,26-56]

 

 

 

1. 김선우,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글의 본론은 글쓴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논거를 들어)하여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라 한다면, 삶에도 ‘본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또 그렇게 삶으로 본론을 쓴다면 누구를 설득하는 것일까?

 

삶의 본론을 쓰는 그 펜은 우리가 지닌 <몸과마음과영혼>이라는 인간 조건일 것이다. 그 본론은 내가 누구인지 그 존재증명을 하는 일일 터이고, 그 존재증명이란 내가 어떤 사랑(일)을 하기 위해 이 순례를 하는지를 아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사랑은 하지 않는 인류란 없다. 생명 자체가 사랑을 하지않으면 존속할 수 없는 생존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인류가 쓰는 ‘본론’은 표현양식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김선우,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를 읽어본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의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에서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가 네 번 나온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자연과 벗삼아 놀다가 오래도록 ‘그대’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를 잃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만났던 그 모든 자연은 바로 그대였다는 것이고, 그 자연에서 그대의 목소리까지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의미단락에서 자연과 하나되어 노는 것, 더욱이 그 자연에서 그대의 목소리까지 들었는데, 그 사랑은 왜 ‘고단함’일까? 왜 그대는 나의 ‘고단함’을 염려할 것이라고 했을까에 멈춰본다.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의 전반부에는 소녀적 감성에 가까운 자연과 노는 것이 여러 번 열거된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 순수한 정서가 왜 ‘고단함’인지가 이 시를 이해하는 관건이 될 것 같다.

 

김훈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을 ‘미망’이라고 말한다. 뭔가 자연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면 두려워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너머로 넘어가는 ‘문’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김선우의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역시,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의 반복어구가 지시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괜찮다’는 것이 정말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곧 괜찮아 질거라는 자기암시일 수도 있다. 그때, ‘괜찮습니다’는 반어법으로 읽혀진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대라는 사람을 잃을 정도로 자연이 대체제로 다가왔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밖에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도, 사람 안에서 사람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모두 사랑일 터지만, 사랑은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사랑의 정석이기에 그렇다.

 

그때,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 습니다’ 는 사람 밖에서 사랑을 배우는 ‘고담함’이 무엇인지, 왜 ‘그대를 잃은 지 오래’라고 하는지 ‘사랑의 빗물’은 다름 아닌 ‘사랑의 눈물’일 것이라는, 그것을 깨달은 것 자체가 ‘환한’ 각성에 이른 것임을 바라보게 된다.

 

예컨대, 김선우의 시 자연이란 어휘를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대입해 보면 알 수 있다. 일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단순명쾌하다, 그런 맥락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엔 피와 살이 얽혀있어도 그것은 몇 단계를 건너뛴 얽힘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명쾌하지 않다.

 

 

 

 

  2.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아인슈타인)

 

 

 

 

사진부터 보기로 하자!

 

 

1954년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서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쿠르트 괴델(사진 왼쪽)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오른쪽).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혁명적 사상을 인정하는 지적 고립의 감정을 공유했고 결국 각각 탁월한 업적을 이뤘다.(짐 홀트,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소소의책 제공)

 

 

“신은 주사위를 던지기 않는다”(아인슈타인)라는 인과율로 인해 확률론을 주장하던 양자물리학자들과 충돌을 빚었던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이 친애했던, 유일한 동료 과학자 괴델! 그들은 한번 실험실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귀신들이라고 불리웠지만, 그들에게도 '사람'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주 이렇게 동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연구실에 나오는 건 단지 쿠르트 괴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멜빵이 달린 헐렁한 바지 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에 온 지 10년이 지나자 함께 걷는 일행이 생겼다. 스물일곱 살이나 젊은 그는 흰색 린넨 정장에 중절모를 쓴 쿠르트 괴델이었다. 평소에 붙임성이 좋고 웃기 좋아한 아인슈타인과 달리 괴델은 늘 침울하고 고독하고 비관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기름진 독일식 요리를 탐닉했지만 괴델은 월트 디즈니 영화를 좋아하고 병약자의 식단과 유아식, 그리고 약으로 간신히 생활해나가는 병약한 과학자였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연구소로 가는 아침 출근길에서, 그리고 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독일어로 활기찬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 괴델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인슈타인은 그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사상을 독자적으로 내놓은 친구라고 여겼다. 두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길 원했다고 한다. 괴델과 아인슈타인 둘 다 이 세계는 우리 개개인의 인식과 무관하게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결국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이다.

 

지적인 고립의 감정을 공유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귐에서 위안을 찾았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물질세계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 개념을 뒤집은 사람이라면, 괴델은 수학이라는 추상적 세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도 불린다.

 

연구소의 다른 회원들은 이 우울한 논리학자를 찜찜해하고 난처해했지만 아인슈타인만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연구실에 나오는 까닭은 ‘단지 쿠르트 괴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안인슈타인에게 '고독한 산책자의 특권'이란 무엇인가? 고독한 천재들에게도 그들 자아를 위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렇게 말한 이유에는 괴델이 아인슈타인의 명성에 주눅들지 않고 거침없이 반론을 펼치는 태도가 한몫했던 듯하다. 고등과학연구소에서 함께 일한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괴델 박사님은, 우리 동료들 중에서 아인슈타인 박사님과 대등하게 걷고 대화를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나머지 인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서 있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또한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박물관 소장품’이 되고 만 것도 사실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양자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괴델은 수학의 추상적 개념이 모든 면에서 탁자와 의자만큼이나 실재라고 믿었는데, 이것은 철학자들이 순진한 생각이라며 웃어넘겼던 견해다. 괴델과 아인슈타인 둘 다 이 세계는 우리 개개인의 인식과 무관하게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결국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지적인 고립의 감정을 공유했던 둘은 서로의 사귐에서 위안을 찾았다. 연구소의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둘은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길 원했다.”

 

“아인슈타인이 밝혀내기로, 보편적인 ‘지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건이 동시인지 여부는 관찰자에게 달려 있다. 일단 동시성이 무의미해져버리면 시간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져버린다. 한 관찰자가 과거에 있다고 판단한 사건이 다른 관찰자에게는 여전히 미래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분명히 과거와 현재는 마찬가지로 확정적이다. 즉 둘 다 ‘현실’인 것이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현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는 광대한 얼어붙은 시간풍경-4차원의 ‘블록 우주’-이 남았다. 여기서는 여러분이 태어나고 있고, 저기서는 밀레니엄의 도래를 축하하고 있고, 또 저기서는 잠시 죽어 있다. 어떤 것도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흐르고’ 있지 않다. 수학자 헤르만 바일이 남긴 인상적인 말처럼, “객관적인 세계는 그냥 있지, 발생하지 않는다”(짐 홀트,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짐 홀트는 그동안 자신이 가장 흥미로워했던 지적 성취의 주제, 즉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 양자역학, 군이론, 무한대와 무한소, 튜링의 계산 가능성과 ‘결정 문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소수와 리만 제타 추측, 범주론, 위상수학, 고차원, 프랙털, 통계 회귀분석 및 ‘종형곡선’, 진리 이론 등을 다루면서 마치 칵테일파티용 잡담처럼 심오한 개념을 핵심만 들추어내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상쾌하고 즐겁게 전달하고자 한다.

 

짐 홀트는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춰 책을 서술된다. 이 책의 모든 철학자과학자 사상가들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피와 살을 지녔던 해당 사상의 창시자와 함께 펼쳐진다. 종종 그들의 삶에는 어처구니없음의 일면이 그들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인 프랜시스 골턴 경은 외사촌인 찰스 다윈만큼 위대하진 않았지만 다재다능했다. 아프리카의 덤불을 헤치며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고 일기예보와 지문 감정 분야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에 혁명을 가져온 통계적 개념들도 발견했다. 골턴은 조금 속물적이긴 했지만 매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신을 분명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업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우생학, 즉 선택적 번식을 통해 인류를 ‘향상’시키겠다는 과학, 어쩌면 유사과학의 아버지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군이론의 창시자인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스물한 살 생일을 앞두고 한 여성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결투에서 정부 첩자로 의심되는 자의 손에 죽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혁명적인 수학자로 칭송받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키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치열한 미니멀리즘의 옹호자인 그는 돈을 경멸했고 옷도 승려같이 입고 다녔다. 확고한 평화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답게 1966년에 수학계 최고의 상인 필즈상을 받으러 모스크바(그해의 국제수학자회의 개최지)에 가는 것을 거부했지만 이듬해 북베트남에 가서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하노이에서 도망쳐 나온 학생들에게 정글 속에서 순수수학을 강의했다. 거의 평생 무국적자로 지낸 그는 한때 아비뇽의 정치 집회에서 경찰 두 명을 때려눕혀서 체포되기도 했으며, 피레네 산맥 기슭에서 민들레 수프로 연명하며 망상에 빠진 은둔자로 지내다가 삶을 마감했다.

 

무한 이론의 창시자이자 유대교 신비주의자였던 게오르크 칸토어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광신적 사이버 페미니즘의 여신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아버지 바이런 경의 방탕한 삶을 자신이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무한에 관한 이론의 대가인 러시아의 위대한 두 수학자 드미트리 예고로프와 파벨 플로렌스는 반유물론적 영성주의 신봉자라는 죄목으로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쿠르트 괴델은 환각에 시달렸고, 세상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여 “선(善)을 순식간에 가라앉혀버린다”고 음울하게 말하곤 했다.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두려워하여 줄기차게 음식을 거부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성격장애’로 인해 초래된 ‘영양실조와 쇠약’이었다. 컴퓨터의 개념을 고안했고, 당대의 가장 엄청난 논리 문제를 풀었으며, 나치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려낸 앨런 튜링은 무슨 이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짐 홀트는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를 통해 우주, 끈이론, 시간, 무한, 숫자, 진리, 도덕,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서 탄생한 기본 개념부터, 쉽게 이해하기 힘들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까지 새로운 통찰력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파한다. 그는.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Why Does the World Exist?)』의 연장선에서 세계의 그 어떤 업적도 당사자 홀로 이룬 성취가 아님을, 그 관계론을 밝히고 싶어했던 거 같다.

 

한 인간이 인류에게 어떤 업적을 남겼든, 혹은 남기지 않았든 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던 모든 인류는 어떤 관계 속에서 그의 생을 펼쳐갔음이 분명하다. 그가 지닌 개인적 능력 외에 그가 만난 누구인가에 의해, 그가 만난 시대에 의해, 그가 만난 공간에 의해 그의 생이, 그의 소명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 주시다니(루카 1,26-56)

 

김선우가 자연을 만났을 때, 괴델이 아인슈타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만남에 상응하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 태도란, 그가 지닌 존재론적 위치에 맞게 ‘예’를 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리는 것에는 ‘흠숭지례, 상경지례, 공경지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흠숭지례’는 신에게 바치는 예라면, ‘상경지례’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예이며, 공경지례는 성인이나 존경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의 범주를 정하기는 하지만 ‘예’의 범주란 것이 항상 어떤 틀에 맞춰 전개되지는 않는다.

 

루카 1장39-45를 읽어보기로 한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복음 1장 26-56은 5월31일 [동정마리아의 방문축일],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 [대림4주]복음으로 자주 인용된다.

 

루카 1,39-45은 수태고지(26-38), 엘리사벳방문(39-45), 마리아의노래(46-56)는 3단 구성을 통해,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상경지례를 바치는지 그 신학적이며 성서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위치는 교회의 표징, 신앙인의 표상, 인류의 표징이라는 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Q1. 마리아는 왜 교회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에 대한 다양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의의 바탕에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든 은총위에 세워진 신비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가브리엘 천사의 마리아 수태고지(루카 1, 26-38)는 은총의 선물에 의하지 않고서는, 즉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리아 수태고지에서 알 수 있듯, 교회의 시작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의 시작이 사유하는데서 시작한다면 믿음의 시작은 듣는데서부터 온다.

 

“믿음은 듣는 데에서 온다”(로마서, 10, 17)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은 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 ‘무엇을 듣는 것인지’ 그 내용을 알려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려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1.28)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 30)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노를 덮을 것이다(루카1, 35)

 

교회의 시작은, ‘삼위일체’ 사랑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위일체’ 사랑이 마리아에게 선물로 주어진 은총임에서, 교회는 순전히 선물로써 존재하는 신비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교회의 시작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기에, 그 곳에서 <네>라는 수락이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을 교회로 볼 것인가>에 관해 수많은 교부들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은총과 네>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그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보이지 않는’ 지상의 모든 교회는 선물로써 주어진 은총과 그것을 들은 인류의 <네> 라는 응답속에서 성립한다.

 

교회는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장사치가 될 수도 있으며 창녀가 되어 몸을 팔수도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하느님의 보존, 구원, 사죄하는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부임에는 변함이 없다 (한스 킹, 교회란 무엇인가?)

 

‘아래로부터의 교회’와 ‘위로부터의 교회’는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는 한스 큉의 <교회론>은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교회가 아닐 수 없다고 전한다. 그것은 교회의 극단적 모순을 가정한 것이지만, 한스 큉은 교회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선물로써 은총으로 세워졌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라는 호칭과, <저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응답의 ‘ 교호(交好)’ 속에서 교회는 선물로써 주어진 신비체이며, 그 신비체임을 제일 먼저 경험한 마리아는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교회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Q2. 마리아는 왜 신앙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나?

 

마리아로 하여금 나자렛에서 헤브론 산악지대까지 160킬로미터를 걸어가게 한 그 힘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보이는 교회’로 확장된다. <삼위일체의 사랑>에 대한 <은총과 수락>은 그것이 절대적사랑이기에 그 자체로 확산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진리와 사랑은 진리와 사랑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되기 위해’ 부단히 길 위의 여정을 멈출 수가 없다. 세계 속으로 부단히 걸어가게 된다.

 

이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오18,20)라고 전한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함께’, 즉 ‘보이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첫 사건이 된다. 이는 달리말해 ‘말씀은 말씀을 알아보고, 사랑은 사랑을 알아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니피캇, 사람의 본론은 어떤 펜으로 쓰는가]에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의 의미를 ‘사랑의 현재성과 하늘과 땅의 결합’이라는 두 측면에서 바라본 바 있다.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는 성부와 성령이 함께하는 오롯한 ‘말씀’이다. 신앙인은 1차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을 잉태하고, 드디어는 그 말씀을 어떤 형태로든 낳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루카1, 39-45)은 말씀을 낳는 사건에 해당한다. 그것은 달리 ‘다가가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서둘러 ‘다가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씀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무엇인지, 신앙인들이 어떤 사랑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단적인 표상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또한 교회는 자기확장을 하기 위해, 같은 소명을 받은 누군가에게 그 정체성을 확인받으며 힘을 얻기도 한다.

 

우리는 엘리사벳의 인사에서 다가가는 사랑이란 실은 주면서 동시에 마리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되는 확신과 위로임을 바라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되기 위해 정체성의 증명을 스스로 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교회의 존재증명의 한 전형에 해당한다.

 

자신이 선물로써 받은 은총을 타자를 통해 확인하면서 우리는 은총이 어떤 기적을 낳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다가가는 사랑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은총 속에 머물고 있는지, 이 세계가 어떤 원리에 의해 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타자는 누구인지, 타자는 어떤 은총의 선물을 받은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표지이자 ‘눈에 보이는 교회’의 표지에 해당한다. 이렇듯, 마리아는 보편사도직과 특수사도직을 포괄하는 신앙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인에 대한 규정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모든 다양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은 ‘은총의 상태를 유지 확장하는 은총의 보유자, 관리자’라는 측면에서 마리아는 진정한 ‘신앙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Q3. 마리아는 어떻게 인류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나?

 

 

마리아를 교회의 표징, 신앙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인류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마리아의 노래>(루카1, 46-56)에는 절대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인류에 대한 두 겹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노래> 전반부는 절대 사랑을 경험한 마리아라는 인류의 기쁨에 대해, 후반부는 절대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인류에 대해 자비를 비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1, 46-50)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루카1, 51~55)

 

⒟에서처럼 절대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영혼과 마음이 동시에 기쁨에 차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적인 영적 충만의 상태다.

 

그러나 ⒠에서는 교만, 통치자, 부유한 자의 반대편에 비천한 이, 굶주린 이로 이분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동물들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위치의 전도’라는 생존의 논리가 적용된다.

 

그 단적인 예로, 장 지글러의 『세계의 절반을 왜 굶어죽는가』 속에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인간론이 제기된다. 현재 인류가 생산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은 120억이 먹고도 남을 자원이지만 그러나 인류의 절반이 굶주려 죽는다는 이 단적인 표현 속에는 마음과정신과영혼이 갈갈이 찢어진 방황하는 인류가 있다는 고발이기도하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인간은 사랑을 구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파괴하거나 사랑에서 도피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행태를 고수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파스칼과 니체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이중성을 <사이 존재>라는 데서 그 원인을 분석한다.

 

우주속에서의 인간이란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무한자와 견주어보면 무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견주어 보면 모든 것인, 이를테면 무와 만사 사이의 중간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연약한 하나의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가 인간이다.(파스칼, 팡세)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위험천만한 돌아봄이며, 위험천만한 도상에 있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전율이며 정지함이다.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가 다리일 뿐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과도이며 쇠퇴한다는 점이다.(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파스칼이 간파한 대로 인간은 ‘무와 만사 사이의 존재’이기도 하고 니체가 바라본 대로 ‘동물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밧줄’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이기에, 그냥 선물로써 주어진 사랑조차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선물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은총이라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는 주어진 은총을 알아듣고, 응답하고 확장하면서 인류가 공존의 길을 가야하는 이유를 설득한 진정한 인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림4주 강론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평범해 보이는 이 두 여인을 예수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산속의 수많은 나무들 중에, 산을 지키는 가장 큰 나무는, 가장 못생긴 나무라고 합니다. 구원 사업에 커다란 역할을 하셨던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여인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아기를 가짐으로써 고통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과 아기를 가짐으로써 이제 고통이 시작되는 여인으로, 그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어머니의 모태가 자신의 무덤이 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도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은총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신비! 이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으로 상징되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써의 은총에 대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의 근간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에서는 그 은총이 마리아에게는 고통의 시작을 엘리사벳에게는 고통의 끝일 수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되기 위해, 스스로 은총의 보유자인 교회임을 이 세상에 존재증명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에서는 은총이 고통일 수는 없지만 고통이 수반되는 이유에 대해 은총이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신비! 이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신비였음에 주목하여,

 

파스칼과 니체가 간파한 대로 ‘사이’ 존재인 인간이 은총과 은총 아닌 삶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서는, ‘희생’이라는 사랑이 필요함을 제언하고 있다.

 

'희생' 역시 은총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겹의 '은총' 상태를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은총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고, 그것에 <네>라고 수락할 수 있고, 은총을 확장하기 위해 길 위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름다운 사랑은 그렇게 아픈 것이기도 하다.

 

 

 

 

 

글을 정리해 본다.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소고(小考)]은 은총론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교회의 표징이며, 신앙인의 표상이며, 인류의 표징이라는 세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를 소략하여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에서 그 표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 첫 단락에서 '글의 본론은 글쓴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논거를 들어)하여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라 한다면, 삶에도 ‘본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또 그렇게 삶으로 본론을 쓴다면 누구를 설득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진 바 있다. 

 

우리가 삶으로 쓰는 본론은 마리아처럼 1차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설득했을 때,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누군가를 설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의 주제이자 제목에서 <신학>이 아니라 <신학적>이란 표현을 쓴 것은 ‘신학’ 은 <신론, 교회론, 인간론>을 모두 아울러야 하겠지만, 소고(小考)이기에  <신학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생략-전제로 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