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상호텍스트성,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s)’이다(화이트헤드)

나뭇잎숨결 2022. 1. 5. 06:57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s)’이다(화이트헤드)

  -'갈망'의 크기는 '기쁨'의 벡터에 비례하고, '자유의지'와 동행한다

 

 

 

[주 님 공 현 대 축 일(다해) 2022. 1. 2. Matthieu. 2,1-12]

 

 

 

 

1.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는 백석의 베아트리체라 불리는 자야와의 사랑, 그 ‘갈망’에 관한 시이다. ‘길상사’를 법정 스님에게 헌납한 ‘자야’와 관련된 일화와 함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시로 애송된다.

 

백석은 1938년 자야와의 사랑의 도피처를 만주로 정하고 오지 않는 자야를 기다리며, 어느 눈 오는 밤, 홀로 소주를 마시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썼다고 전한다.

 

정략결혼과 사랑 사이에 끼인 백석이, 사랑의 도피처로 정한 곳이 이 세상과 단절된 ‘마가리’라는 곳에서, 백석의 낭만적 사랑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는 나타샤와의 사랑으로 모아지는 데 조력하는 외부의 세계가 존재한다. 소주와 푹푹 내리는 눈,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상상속의 흰 당나귀가 나타샤와의 사랑을 극대화 시킨다고 할 수 있다.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릴 수 있겠지만, ‘혼자 마실 수 있는 소주, 푹푹 내리는 눈,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상상속의 흰 당나귀’는 백석 시를 구성하는 사물의 세계로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백석의 시 뿐 아니라 어떤 관념은 사물을 근거로 하여 발생한다. 사물은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실체다. 사랑의 유동성과 사물의 유동성은 그 자체로 동일선상의 유동성은 아니지만, 관념의 구체화를 낳을 만큼, 사랑을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타나토스의 충동까지 촉발시킨다고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백석의 시편들에는 가난, 겨울, 눈, 타향, 음식이 자주 나온다. 사랑이라는 관념의 구체화에 동원된 사물들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의 첫 행과 마지막 행에 나오는 ‘눈’과 ‘흰 당나귀’는 나와 나타샤의 사랑을 운명적으로 만드는 사물의 세계다.

 

특히 제목에 나오는 ‘흰 당나귀’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일상적으로 타고 다닐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백석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모태인 ‘미의 본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2. 모든 사물은 벡터이다(all things are vectors)(화이트헤드)

 

 

이차함수 그래프를 배우던 중학교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물리적인 힘에는 벡터vector와 스칼라scalar가 있다. 수학선생님은 2차 함수 그래프를 그려놓고, 역학에서의 속도, 가속도, 힘과 같이 크기, 방향을 갖는 양을 벡터라 하고. 방향을 갖지 않는 양을 스칼라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시속 100킬로로 달렸다고 하면 크기만 갖는 스칼라이며, 동쪽으로 시속 100킬로로 달렸다고 하면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라고 예를 들어줬을 것이다.

 

지난주 바흐친의 대화주의를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물과는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가? 결론적으로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 벡터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그 사물의 세계는 인간의 배경이 아니라 어떤 힘과 크기와 방향을 갖고 ‘베들레헴 별‘처럼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유형의 사물만이 아니라 무형의 사물 역시 그 벡터의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글이 쓰여졌을 때, 어떤 문화가 형성되었을 때, 이 글이 어떻게 나에게 왔는가? 이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어 우리에게 왔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것에는 변화를 추동하는 어떤 힘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움직이는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 힘을 수학이나 역학에서 벡터와 스칼라라는 개념으로 바라본다.

 

이 시대를 끌고가는 벡터의 힘은 네트워크적 사유라고 말한다. 네트워적 사유란 사유의 변화, 열려있는 힘에 관한 용어다. 네크워크적 사유의 기본 이론은 인터(inter)와 트랜스(trans)라는 접두어라고 할 수 있다. 인터(inter)와 트랜스(trans)는 분명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문화적인 접두어지만 인류 역사의 여정은 인터(inter)와 트랜스(trans)의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inter)와 트랜스(trans)라는 세계를 거부해 매너리즘이나 매트릭스에 갇힌 이들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인류는 역사는 그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인터(inter)와 트랜스(trans)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의해 그 변화의 성격을 다르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즉 인터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의 단순한 관계 맺기라면 트랜스는 관계 맺기를 넘어서 서로 결합하여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랜스는 인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접두어이다.

 

통섭, 퓨전, 경계 넘기, 크로스오버, 융합의 열풍은 이러한 인터와 트랜스의 문화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인터와 트랜스의 문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이 글의 주제에 관련하여 인터와 트랜스가 어떤 힘과 방향성을 갖고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지만 초점을 맞춰보기로 한다.

 

 

개인의 의식에 언어란 자신과 타자 사이에 있는 경계선에 있다. 언어에서의 단어의 반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모든 텍스트는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다(쥴리아 크리스테바, 시적 언어의 혁명)

 

미하일 바흐친과 쥴리아 크리스테바는 모두 언어라는 무형의 텍스트가 지닌 상호텍스트 성에 대해 주목한 이들이다. 이들은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인식처럼 언어와 주체의 문제가 사랑과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초첨을 맞춘다. 언어는 분리된 여러 이질적인 사유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사유를 생성하는 불가사의한 ‘접면’이라고 본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미하일 바흐친의 ‘상호텍스트성, 대화, 소설의 카니발화’ 등을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바흐친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을 구체화 한 사람이 크리스테바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누군가 정신분석 이론과 종교학, 아방가르드 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널리 펼쳐져 있는 분야의 통찰을 통합하고자 한다면, 크리스테바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지목하는 이유에 해당한다. 그녀는 문학비평과 정신분석 이론, 언어학과 여성주의 철학 등의 지형을 변화시켜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정치적 이론과 허구적 저술 분야에도 과감히 뛰어들었다.

 

이런 크리스테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관류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의 모체는 그녀가 ‘경계인’의 사유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녀의 사유 체계에는 그 자신이 출신과 무관하지 않다. 불가리아에서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추방자(망명자)이자 프랑스의 이방인으로서 겪은 실존적 경험이 그녀의 사유속에 녹아 있다. 추방자이자 이방인으로서의 유목적 경험이 그녀를 경계의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경계선상에 위치지우면서 문학 이론, 정신분석, 페미니즘, 정치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이질적 타자성의 의미작용을 탐색하도록 추동한다. 그녀의 사유가 자칫 무정부주의적인 분열과 해체의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는 달리, 경계의 양 극단 사이의 균형을 놓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롤랑바르트는 다른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을 구현한다.

 

한 텍스트가 가지는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의심할 바 없이 하나의 진리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작품은 저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독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한 사물의 의미는 그 사물 자체가 지니는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사물의 의미는 전체의 체계와 관계에 의해 결정되기에 체계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의미 역시 변화한다. 이러한 구조주의는 소쉬르에 의해 언어학에서 발전되었다. 이는 소쉬르가 언어를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라고 나타냈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물이 표시되는 형식(기표, signifiant)과 그 사물의 의미(기의, signifié)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 사물의 의미는 전체 언어 체계 안에서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이 소쉬르의 언어관이다.

 

절대적 의미를 찾으려는 구조주의는 상대적이고 불안정함을 지적하며 1960년대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e)가 발생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하나의 의미만을 찾으려는 구조주의와 달리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였다. 롤랑 바르트는 ‘해석의 무한성’을 주장한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 주자이다.

 

롤랑 바르트는 소쉬르와 달리 기표와 결합하는 기의가 단일한 존재임을 부정하였다. 즉, 하나의 기표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 『저자의 죽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진정한 기의의 객관성을 획득하는 것은 전제된 언어를 버리는 것이다. 전제된 언어를 버리고 나면, 자신이 텍스트에 투영하는 의미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해석이 무한하게 가능한 ‘해석의 무한성’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기의가 사회나 혹은 어떤 집단의 신화로서 채워진다는 것을 간파하였고, 프랑스 사회에 자리 잡은 신화들을 파악하려고 했다.

 

미하일 바흐친, 쥴리아 크리스테바, 롤랑 바르트가 언어를 통한 미시적 상호텍스트성에 주목했다면, 화이트 헤드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시적인 상호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는 유기체철학을 제시한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 헤드의 『과정과 실재』의 기본 이념은 표제어 그대로 '실재는 과정이다'라는 언명으로 요약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행하는 과정의 결실에서 생겨나 새로운 요인을 구현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존재 과정의 밑바닥에는 새로운 종합을 끊임없이 산출하려는 힘인 영원한 활동성이 관통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창조성'(creativity)이라 부른다. 우주는 이 생성의 창조성의 산물들 즉 그 개별적 구현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조성은 그 다수(many)의 구현체들을 새로운 일자(one)로 종합하는 보편적 에너지라고 본 것이다.

 

(4)현실적인 존재는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진 실재적 사물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발견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의 배후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현실적 존재들은 복잡하고도 상호의전족인 경험의 방울들이다. 현실적 존재는 그 자신에 대하여 기능함으로써 그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고도 자기 형성에 있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자기 창조적(self creative)이다. 그리고 그 창조 과정에서 그 다양한 역할들을 하나의 정합적인 역할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생성’(becoming)부정합으로부터 정합으로의 전환이며, 각각의 특정한 사례에서 그 전환이 달성될 때 종결된다. (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생성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인류 철학사의 문제는 생성과 존재의 관련성을 어떻게볼 것인가의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생성과 존재의 문제는 2,500년 전 『숨은 조화』를 쓴 헬라클레이토스와 『자연에 대하여』라는 서사시를 쓴 파르메니데스라는 두 고대 그리스인의 사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헬라클레이토스는 흔히 생성의 철학자로 부른다. 헬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들은 흐르고 머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길을 가며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사물은 흐른다.Everything flows and nothing abides. Everything gives way and nothing stays fixed."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철학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에 대하여』라는 서사시에서

 

"생성은 없고 존재만 있다"라는 생각을 철학화 하였다. ‘있다’라는 길에 관한 이야기(mythos)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이 길에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oulon mounogenes)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ēde teleston)이라는 아주 많은 표지들(sēmata)이 있다"

 

철학사의 두 흐름 가운데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 토스의 주장에 과학적이고 세련된 사유의 옷을 입히기 시작한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헬라클레이토스의 "모든 사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는 주장은, 어떤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인간의 직관이 낳은 막연한 일반화로 보였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헬라클레이토스의 직관에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s)’라고 그 생성의 근거를 채워 넣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2,500여년의 세월을 통하여 축적된 인류의 기술적 과학과 합리적 정신을 활용하여 헬라클레이토스의 그 빈자리를 유기체철학으로 채운 것이다.

 

화이트 헤드는 이를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네 단계로 설명한다. 네 단계는 각각 여건(datum), 과정(process), 만족(satisfaction), 결단(decis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처음과 끝의 두 단계는, 정착된 현실 세계로부터 그 정착이 상대적으로 한정되게 되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이행해 간다는 의미에서의 ‘생성’(becoming)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 여건은 정착된 세계에 의해 ‘결단된다.’ 그것은 새롭게 대체되는 존재에 의해 ‘파지된다.’ 여건은 경험의 객체적 내용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합생은 이 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전망은 양립불가능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마련된다. 최종단계인 ‘결단’은, 현실적 존재가 그 개체적 ‘만족’을 달성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미래의 개척지에다 결정적인 조건을 부가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여건’은 ‘수용된 결단’이며, ‘결단’은 ‘전달된 결단’이다. 수용되고 전달되는 이 두 결단들 사이에는 ‘과정’과 ‘만족’이라는 두 단계가 있다. 여건은 최종적인 만족에서 보자면 미결정이다. ‘과정’은 ‘느낌’의 요소들을 부가해가며, 이로 말미암아 이러한 미결정은 개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현실적 통일성을 달성하는 결정적인 연쇄 속으로 해소된다.

 

화이트 헤드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논리적․정태적 관계가 아니라 관계, 활동, 이행(transition)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우주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유기체적 관계’이자 그 관계를 떠받치는 것이 ‘벡터의 힘’이라고 본 것이다.

 

 

 

 

3.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오 2,1-12)

 

우리는 바흐친과 크리스테바, 롤랑 바르트가 주목한 상호텍스트성, 혹은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벡터의 힘’을 성서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2,1-12을 읽어본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공현축일 복음, 마태오 2,1-12에서 누구나 묻게 되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

 

Q1. 이방인 동방박사는 누구인가?

Q2. ‘베들레헴의 별이라 칭하는 그 별은 어떤 별인가?

Q3. 그들은 어떤 루트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을까?

 

Q1, Q2, Q3에 대한 논의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을 뿐 하나의 귀결점은 없다. 더욱이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이상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양한 가설에도 불구하고 공현축일의 핵심은 동방박사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정보와, 그들은 그들이 종합적으로 알게 된 별에 대한 정보(상호텍스트성)를 확신하고 있었으며, ‘베들레헴 별’이 실재하는 별인지 동방박사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발광체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 별의 인도로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께 경배를 했다는 사실이다.

 

마태오복음사가가 전하는 내용만으로 추론하건데, 그들은 천문학과 점성술, 지리학, 구약에 대한 상당한 지식체계를 갖춘 이들이며, 그들이 보물상자를 열고 예물로 드린 내용물로 보아 그들은 상당한 부를 소유한 이들임도 알 수 있다. 또한 그 예물의 상징성으로 보아 그들은 조로아스크교 사제직이라 일컫는 일부 논의처럼 영적으로 상당한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케플러로부터 지금까지 논의 된 베들레헴 별에 대한 가설은 대략 다음과 같다.

 

a 유난히 밝게 빛나는 실제의 별, b 왕의 별이라고 불리는 목성, c 목성과 토성이 물고기 모양을 표시하며 결합된 것, d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혜성, e 하늘에 낮게 떠 있던 하나의 발광체,  e 사람의 마음을 인도해 주는 운명과 소망, 소명의 별로 개인에게만 감지되는 빛의 형상 등이다(기독교카페 봉서방네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다양한 가설이 제기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한 가지다. 가설의 숲을 헤치고 중심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동방박사, 그 가설의 중심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체계를 총망라하여 이 세계에 새로운 임금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했다는 것, 그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먼 길을 여행하게 했으며, 그들의 갈망이 그 여행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보다 훨씬 컸다는 것. 그럼에도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함께 있는 그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현축일 복음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모한 여행길을 떠나게 하는 동방박사의 그 <갈망>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가설의 숲을 헤치고 가설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어떤 모멘트임을 바라보게 된다.

 

동방박사의 갈망과 헤로데의 갈망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갈망이 모두 달랐음에서, 결과로부터 그 갈망의 원인을 역으로 추적해 보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놀랍게도 갈망의 바탕에는 <기쁨> 아니면 <두려움>이 놓여있다는 사실 앞에 서게 된다.

 

(1)그렇다면 기쁨은 무엇인가?

 

기쁨은 ‘갈망’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헬렌 슈크만은 『기적수업텍스트』에서 <작은 용의>라고 말한다. ‘작은 갈망’이 아니라 ‘작은 용의’라고 한 것은 ‘베들레헴 별’에서 확인 할 수 있듯, 동방박사의 갈망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 이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는 거대사건임을 목격하게 되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이 갈망은 벡터처럼 어떤 방향성을 지닌 힘이다.

 

우리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길을 가거나 혹은 남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길을 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쁨’ 때문이다.

 

어떤 길을 호기심만으로, 혹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좀 보자, 그런 마음으로 어떤 길을 시도는 할 수 있겠지만, 끝까지 가게 되지는 않는다. 또 여기까지 오느라고 들인 노고가 아까워서 그 어떤 길을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기쁨만이 모든 길을 가게 한다. 기쁨은 걸어갈 수 있는 벡터의 힘이다. 파토스의 핵심은 기쁨이다. 기쁨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있다. 이 땅의 순례에서 외부에서 어떤 기쁨이 주어지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은 자기 내면에서 솟구친 이 기쁨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길을 가야하나? 혹은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상황에 놓여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 상의하거나 사실 기도 중에 묻을 필요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이 길이 기쁨인가 아닌가? 자기 심장에게 물으면 된다. 내가 ‘순수하게’ 기쁘다면 하늘도 기뻐하고 땅도 기뻐하고 산천초목도 기뻐할 것이다. 갈등하면서, 의심하면서 어떤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기쁨’은 ‘아이처럼’ 순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기쁨이 내재해 있기에, 어떤 길을 가는데 마주치는 돌발 상황 앞에서, 예기지 않은 난관 앞에서, 고단한 일이 지뢰처럼 매복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길을 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기에 마음은 울고 있을 수도 있다. 몸과마음과영혼이 함께 기뻐하는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것이 축복이고 지복이고 하늘이 준 복이다. 이 축복은 누구나 예외없이 받는 축복이다. 몸과마음과영혼이 통합된 기쁨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갈망?으로 알 수 있다.

 

예컨대, 새들을 어깨에 얹고 다니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해보자. 프란치스코 성인 하면 자연과 하나가 된 성인, 평화의 도구, 그런데 성인의 이력 앞에 형용사처럼 가난을 사랑한 성인이라는 말이 붙기도 한다. 성인 앞에 이런 형용사를 붙인 최초의 그 누군가는 사람들이 가난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을 초월할 만큼의 기쁨을 먼저 살았던 것이지, 가난극기의 결과물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쁨이나 평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길을 가는 우리가 기쁨이 내재해 있기에 어떤 길을 가면서, 마주치는 돌발 상황 앞에서, 예기지 않은 난관 앞에서, 고단한 일이 지뢰처럼 매복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을 왜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태오 2,1-12에서 동방박사가 어떤 기쁨을 갖고 그 길을 갔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 기쁨을 확인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공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현축일은 단지 신의 현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기쁨을 기쁨이라고 알고 이 순례의 여정을 하고 있는지, 그 기쁨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기쁨이란 하늘의 메시지를 땅에서 체험하는 일이다. 자기 믿음에 대한 자기 인증 절차에 가깝다. 성호를 긋는 것이 기쁨의 과정, 그 축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의 메시지가 땅에서 확인되는 과정을 통해 신의 현현, 공현의 의미뿐 아니라 모든 실체의 민낯, ‘드러남’, 그 다성성을 통해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기쁨과 두려움으로 나눠지는 결절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항구하게 기쁨을 간직하지 못하는 것인가?

 

누군가에게 기쁨의 별이 누군가에게 두려움의 별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성서에 365번이나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명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모든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또 우리의 생존조건이 두려움을 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아직 이 땅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확인키라고도 할 수 있다.

 

동방박사의 여행 루트가 어떤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동방박사의 여행루트에 대한 가설적 논의를 종합해 본다면 적어도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여행을 떠난 지 3개월에서 1년 쯤 걸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는 그들이 떠난 여행길에서 한 번도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보면 그들 역시 임금은 당연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했던 별이 항상 그들의 앞길을 가리키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별을 보고 떠난 여행에서 돌연 별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무엇을 간직하고 그 길을 계속 갔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오 2,1-12)라는 부분에서 그들 역시도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한 가운데 맛본 그 기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이 끝까지 유다인의 왕을 보고자 하는 그 갈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기쁨>은 좀 더 내밀한 것임도 바라보게 된다. 순수한 기쁨은 감성이 아니라 ‘의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성의 기쁨이 아니라 걸어가게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가 기쁨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어떤 길을 간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체현되는 기쁨이 아니라 영혼으로 기뻐하고 있는 그 기쁨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기에 기쁨은 내면의 빛, 즉 영혼의 빛이다. 기쁨은 빛이기에, 모든 것을 보게 만든다. 빛은 모든 것을 동과한다. 동시에 빛은 모든 것은 감싼다.

 

빛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 드러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보게 만든다. 하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도 낱낱이 보게 만든다. 또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상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늘의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것에서 이 갈망은 하늘과 연결된 끈임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기쁨은 영혼의 빛이다. 빛은 모든 것을 비춘다. 세상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우리 내면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만든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서 우리의 <영과 혼>을 갈라놓았다는 것이 무엇이지 알게 된다. 기쁨의 본질인 갈망을 싸고 있는 부수적인 것도 낱낱이 벗겨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방박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헤로데의 사악함만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수석사제와 율법학자의 전모, 예수살렘 시민들의 숨겨진 마음까지 몽땅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별을 따라간 동방박사의 ‘낭만적’ 여행계획도 가차없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공현의 실질적 주인공은 예수다. 그 예수는 마리아와 함께 있는 예수다. 또 다른 주인공은 동방박사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로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다. 하늘이 알려준 임금을 보면서 임금의 탄생이 가진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사건, 왕궁의 임금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유의 임금을 보게 되는 반전의 드라마다.

 

여기서 기쁨과 두려움으로 나눠지는 그 결절점이 무엇인가?

 

순수한 기쁨은 보고자 하는 실체만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별이 가리키는 왕만 보게 한다. 반면, 두려움은 그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벡터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비추어 보게 된다는 점이다. 즉 주변의 배경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탄 때 ‘가난한 구유’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과 같다. 주변을 보는 연민의 감상성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은 하늘이 알려준 왕이었지만, 그들이 본 것은 상식을 뒤집는 왕의 모습이자 그것을 마주한 그들 각자의 내면의 모습, 갈망의 정체성이었다.

 

마태오 2,1-12의 주어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공현의 주인공인 예수는 한번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객체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카메라의 포커스로만 본다면 공현의 의미는 우리가 그 공현을 드러내는 사람인가? 공현을 덮는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현은 동방박사가 아니어도 언젠가 만천하에 드러날 빛이기 때문이다.

 

 

(3)기쁨과 두려움은 어떤 벡터를 갖는가?

 

동방박사를 통해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를 세상에 드러나게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방박사에게 사명 혹은 소명이라 할 수 있다. 별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를 보았고, 예수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동박박사가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그들의 지혜였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비추어, 다시 우리의 행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확신을 갖고 길을 떠나 보게 된 것이 항상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그때 우리는 누군가의지혜를 빌려야 한다. 길을 물어야 한다. 상호텍스성의 필요, 네트워크적 사유가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데 한 몫을 한다. 그들은 기원전 8세기 예언자 미카의 예언을 들려준다.(미카서5. 1-5)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런데, 여기서 두려움은 정보를 모르는데 있지 않고, 정보해석의 왜곡이 낳은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두려워만 했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본다는 것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으로 결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은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심리적 반응이다. 이 심리적 반응은 어떤 방향성을 지닌 힘으로 드러난다.

 

2021년에 이 두려움의 정체를 자유의지의 상실(반납)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글을 올린 바 있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 빈서판)에 쓴 청춘의 문장들 | http://blog.daum.net/m-deresa/12389776

 

그렇다면 두려움은 어떻게 빛을 살해하는가?

 

동방박사들이 별의 실체를 확인하고 기뻐할 때 누군가는 별의 실체를 알고 두려워했다. 기쁨이 끝까지 걸어가게 한다면 두려움 역시 정서적 측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쁨과 두려움은 방향성을 갖고 있는 벡터이기 때문이다. 동방박사가 기쁨의 끝을 보았듯이 두려움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이다. 동방박사는 그들이 본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면, 두려움은 갖고 있는 이들은 두려움을 없애려고 두려움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헤로데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행위에 대해 우리가 모두 관찰자시점으로 비판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것이 우리의 내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방박사이면서 동시에 헤로데일 수, 수석사제나 율법학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쁘거나 두려워하거나.

 

우리는 지금, 기쁨과 두려움을 주는 순례를 하고 있는 노마드다. 내면의 별이 가리키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혹은 우리 가운데 있는 별을 알아볼 수 없다면, 사실 우리 역시 별이 가리키는 그 실체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에 멈춰서야 한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명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두려워한다는 것은, 단지 감성이나 정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빛(무죄한 아이)을 살해하는 것이자, 누군가의 빛(무고한 아이)의 정체를 매장시키는 벡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공현대축일 강론은 이렇게 전한다.

 

그렇다면 그들이(헤로데나 수석 사제들, 또 율법 학자들) 그 별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에도, 그 별을 따라나서지 않았던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 별의 존재가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그 별은,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또 피곤하게 만드는 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삶에 변화가 있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은 별을 따라나설 수도 없었고, 또 그 별을 따라나서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늘의 그 별이 자신들을 어디로 인도하고, 또 자신들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 별이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끝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동방 박사들은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때로 두려움은,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결정과 선택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그렇게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삶의 변화란 없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삶은, 훗날 후회가 많이 남는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John Henry Newman 추기경(1801-1890)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산다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완전하다는 것은 여러 번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만물유전’의 법칙은 헤라이클레이토스, 화이트헤드, John Henry Newman 추기경의 통찰에서 본 대로 인류에게 준 선물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 공현대축일 강론에서 ‘변화’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훗날 후회가 많이 남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함이다. '변화'는 떨림이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후회’란 무엇인가? 단지 정서적인 자탄인가?

 

성서에서 보면 그것은 자탄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헤로데처럼 누가 봐도 적극적인 악이 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즉 성서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도, 즉 열심한 기독인이면서도, 그들의 앵무새적인 신앙이 무엇을 낳았는지 3년 후에 그 결과들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데 있다.

 

헤로데의 적극적인 악이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기를 죽였다면, 소극적인 악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3년 후, 백주대낮에 예수를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아님 유다처럼 자신을 서서히 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 것만 후회할 일일까?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을 어떤 후회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런 맥락에서 공현대축일을 보내면서, 기쁨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리와 함께 있는 진리를 가리키는 그 ‘별’이 대체 무엇인지? 동방박사만 그 별을 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 것인지?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보내진 ‘별’은 대체 무엇인지? 또 그 별이 가리키는 삶은 무엇일까를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사유하고 묵상하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해 본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s)’이다(화이트헤드)]

 

동방박사는 철저하게 상호텍스트성을 받아들인 네트워크적 사유의 표본에 해당한다. 그들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하나로 모아 가장 숭고한 것을 보겠다는 <갈망>을 하늘에 띄워 보냈다. 갈망은 하늘에 띄우는 우리의 연서다.

 

동방박사가 본 별이 목성인지 토성인지 발광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하늘이 ‘별’이라는 사물로 응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과 속>이 결코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엘리아데의 통찰과 맥을 같이한다.

 

‘공현’은 신이 자신을 드러낸 사건일 뿐 아니라 공현의 한 축을 ‘갈망’이라는 인간의 순수하고 ‘작은 원의’에 하늘이 응답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감사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벡터로 돌려드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