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향연(饗宴),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나뭇잎숨결 2022. 1. 19. 18:49

 

 

향연(饗宴),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삶은 발효(發效)인가, 발효(醱酵)인가?

 

 

[연 중 제 2 주 일 (다 해) 2022. 1. 16. Jean. 2,1-11]

 

 

 

 

1. 삶은 발효(發效)인가, 발효(醱酵)인가?

 

사전적으로 발효(發效)는 조약이나 법령 등의 효력이 나타남. 또는 그 효력을 나타냄으로 쓰는 명사이자 자동사이다. 발효(醱酵)는 효모·박테리아 따위 미생물의 작용으로 유기물이 분해되는 현상으로 술·간장·초·치즈, 와인, 김치 등을 만드는 데 쓰는 어휘로 명사이자 자동사이다.

 

 

김수영의 『서책(書冊)』을 읽어본다,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신()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된다// 잠자는 책이여 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 된다 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 된다// 지구에 묻은 풀잎같이 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할 때 신이여 당신의 책을 당신이 여시오// 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 이 다음에 이 책을 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1955>

 

김수영의 『서책(書冊)』은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정반대로 갈라지는 시 가운데 하나다. 그 해석이 갈라지는 이유는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된다는 구절 때문이다.

 

이 세계는 거대한 한 권의 책이므로, 이 세계를 해석하는 권한은 오직 신밖에는 할 수 없다는 유신론적 해석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때 사람은 객체, 대상에 머물고, 책은 인간과 거리를 둔 신의 거룩한 성전, 그 때 삶은 ‘발효(發效)’에 해당한다.

 

반면 이 세계는 거대한 한 권의 책이므로 사람이 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덮어놓은 책에 불과하므로, 이 세계는 ‘허사’에 불과하다는 인간 주체적 시선이 있다. 이 때 삶은 발효(醱酵)에 해당한다.

 

김수영은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이라고 썼다. 덮어놓은 책은 잠자는 책이고, 잠자는 책은 잊어버린 책이다. 덮어놓은 책은 누구를 향하여도 열리지 않은 채 던져져 있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일 테고, 이발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다를 바 없다. 읽지 않은 책이란 우리 내면과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물이다.“(장석주, 詩人을 찾아서)

 

김수영이라는 작가와 연결하여 『서책(書冊)』을 읽으면, 관념으로 그친 모든 사유에 대한 거부로 읽을 수 있다. 즉 김수영은 생래적으로 ‘행동을 낳지 않은 사유’, ‘행동하지 않는 지식’에 대해, ‘시여 침을 뱉어라’ 라고 '온몸의 시학'을 부르짖은 바 있다.

 

‘자유에는 왜 항상 피가 묻어있는가'를 물었던 그 연장선에서 『서책(書冊)』에 나오는 '신'은 인간의 삶을 덮어놓은 책으로 만드는 니체적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김수영의 『서책(書冊)』에서 책은 삶이고, 삶은 '발효(醱酵)'로 읽어 볼 수도 있다.

 

 

 

 

 

 

 

 

2.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로이스브루크)

 

 

 

삶은 최상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보았던 이들에게 삶은 ‘발효(醱酵)’ 그 자체였다,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기진맥진한 영혼은 마시지 않고도 취했네! 자유롭고도 취한 영혼이여!, 잊어버린 잊혀진 영혼이여, 마시지 않고도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버린 영혼이여!(로이스브루크, 자전적 주제에 관한 15개의 변주곡)

 

한 아름다운 몸에서 두 아름다운 몸으로, 두 아름다운 몸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아름다운 몸들에서 아름다운 활동으로,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지식으로, 끝으로 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운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플라톤, 향연)

 

고요한 속에서의 고요함은 참다운 고요함이 아니다. 소요한 가운데서 고요함을 지녀야만 비로소 심성의 참 경지를 얻었다 할 것이다. 즐거움 속에서의 즐거움은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 괴로움 속에서 즐거운 마음을 지녀야만 비로소 마음의 참 기쁨을 얻었다 할 것이다.(홍응명, 채근담(菜根譚)

 

①에서 밭터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삶의 양상이 ‘도취’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소외화, 사물화 시켰으며, 세계와 우주와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 매개체를 끊어버렸다고 보았다. 모든 소통의 근저에는 ‘흥겨움’ ‘몰아’ ‘도취’가 있으며, 이 도취의 예술적 형태가 초현실주의라고 보았다.

 

②에서 로이스브루크는 신과 사람이 어떻게 교류할 수 있는가?를 물었던 신비학자다. 그는 형상과 담론의 갈림길에 서 있는 신과 인간의 그 매개항을 ‘사랑’이라는 포도주로 보았다. ‘사랑’만이 신을 저 하늘에 있는 형이상학의 신이 아닌 인간과 교류하는 신으로 바라보는 다리라고 보았다. 인간이 삶에 취할 수 있게 만드는 그 유일한 포도주를 ‘사랑’이라고 보았다.

 

③에서 플라톤은 수많은 해석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데아’ 발현을 ‘에로스(사랑)’에서 찾고 있다. 그는 삶을 향연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데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름다운 몸들에서 아름다운 활동으로,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지식으로, 끝으로 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운 것 자체라고 보았다. 구체에서 관념으로 점진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에우리 안에 있는 본유적으로 지닌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④에서 홍응명은 『채근담(菜根譚』에서 ‘괴로움 속에서 즐거운 마음을 지녀야만 비로소 마음의 참 기쁨을 얻었다 할 것이라며 기쁨을 인간의 성격이나 본성이 아닌 괴로움이라는 구체적 삶에서 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삶은 발효(發效)인가, 발효(醱酵)인가? 서두에서 언급한 사전적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발효(發效)'는 조약·법령 등의 효력이 나타남. 또는 그 효력을 나타냄으로 쓰는 명사이자 자동사이다. '발효(醱酵)'는 효모·박테리아 따위 미생물의 작용으로 유기물이 분해되는 현상으로 술·간장·초·치즈,와인,김치 등을 만드는 데 쓰는 어휘로 명사이자 자동사이다.’

 

발터 벤야민, 로이스부르크, 플라톤, 홍응명 등은 시대와 국적이 다를지라도 그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본 삶은 구체적인 것이었고, 향연이었고 축제였다. 즉 삶은 발효(發效)가 아니고 발효(醱酵)라고 보았던  것이다.

 

 

 

 

 

 

 

 

 

 

3.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2, 1-11)

 

다시, 삶은 발효(發效)인가, 발효(醱酵)인가?를 성서에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고 전하는 요한2, 1-11을 읽어본다.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고 전하는 요한2, 1-11에서 물독에 물을 채워라.” 라는 부분에서 멈췄다.

 

대화를 중심으로 따라가 보면,

 

포도주가 없구나.”->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물독에 물을 채워라.”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카나의 혼인잔치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 일꾼들, 과방장, 신랑,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이다.

 

카나에서 행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예수님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으로 수렴된다. 예수님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은 위로부터의 영성이다. 그런데 그 기적은 인간의 결핍을 예리하게 간파한 성모님의 섬세한 영적 감수성의 전구로 이루어진다. 또한 여인이시여!라는 호칭 속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혈연을 뛰어넘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의 묵상을 발효시킬 준비가 되었다. 성서나 강론을 묵상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우리 삶의 식탁에 차리는 것, 그것이 묵상이나 강론을 발효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듣는다’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이 들어야하는 정취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정취의 상황이란 우리가 들은, 읽은 성서나 강론을 우리 각자의 언어로 독해하고,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물독에 물을 채워라.”에서 왜 멈추게 되었는지,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물독의 기능은 물을 담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 삶과 연결하여, 내 삶에 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라는 부분에서 사랑과 기쁨이 도출되기 위해서 카나의 기적에 동원된 사람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포도주가 없구나.”->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물독에 물을 채워라.”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물이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물의 역할, 물독의 역할, 예수님 어머니의 역할, 일꾼들의 역할, 과방장의 역할, 신랑의 역할, 제자들의 역할, 이 역할들이 마치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처럼 한 몸을 이루어 기적을 일구어냈다.

 

그런데, 그 초점이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기적이 되고, 축제가 되고, 영광이 되고, 믿음이 되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을 듣고 수행한 일꾼들이 어쩌면 가장 큰 기쁨에 동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는 이 전령은 사람이 청취의의 상황에 놓여있다는 암묵지이자, 그것은 우리에게 파토스(pathos), 그 열정의 방향을 동시에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물독은 물을 채우는 일을 하면 된다. 그것이 물독으로서의 완성이고 물독으로서의 파토스라 할 수 있다. 네가 만들어진 목적대로 살아라! 파토스의 원리는 단순하고 자명하다. 그런데 그 단순하고 자명한 원리들이 삶으로 녹아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유컨대, 물독에 다른 것을 채우려하거나, 아님 물을 물독이 아닌 다른 것에 채우려 할 때일 거 같다.

 

여기서 사랑의 원리와 기쁨이 원리 그 종횡의 퍼즐이 맞춰지는 원리가 파토스의 방향성과 맞물리고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무식한 자의 열정은 게으름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완성하려고 할 때, 사랑도 뒤틀리고, 기쁨도 깨어진다. 완성은 그분의 몫이다. 

 

오신부님은 강론에서 우리 마음 안에, 물을 채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포도주로 만들어 주실 물을 채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네 가지의 묵상주제를 제시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기적을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먼저 혼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기쁨일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기적은, 그 기적이 어떤 기적이든, 그 기적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기적이고, ‘삶의 기쁨과 연관된 기적들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Joseph Ernest Renan(1823-1892)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수 세기에 걸쳐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 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말을 들어준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이 말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내 안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도, 또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실 기적은, 그 기적이 어떤 기적이든, 그 기적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기적이고, ‘삶의 기쁨과 연관된 기적이라는 데서 기적과 삶의 큰 틀, 총론이 제시된다.

 

그것은 달리말해 Ⓗ에서 말하는 축제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에서 ‘들음’의 상황 즉 인류는 청취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때 Ⓖ가 이루어질 수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서‘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도, 또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행복이 곧 축제이거나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의 모든 것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 특히 고통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지혜까지 요구되는 그 지점이다. 축제는 혼자 완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그렇다면, 이 축제의 제언이 왜 우리 삶에는 그렇게 어려운가?

 

빵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발효가 문제이듯,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글을 쓰는 게 문제일 것이다. 발효가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는 그것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빵을 만들고 있어야 한다. 포도주와 와인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포도를 오크통에 넣어봐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글을 쓰고 있어야 한다. 사랑을 알기 위해서 이미 사랑을 하고 있어여 한다.  이런 진부한 충고에서 길을 찾아야 할 듯하다.

 

베드로가 왼쪽으로 그물을 던져야 할지,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야 할지, 베드로적인 생존 앞에서 베드로는 이미 삶이라는 배위에 있어야 하고, 적어도 그물을 갖고 있어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내 방식으로 그물을 던져봐야 생은 허기지고 남루하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기에 ‘왼쪽으로 그물을 던져라’는 그분의 음성이 비로소 들렸을 것이다, 그분은 늘 베드로에게 왼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을 것이다. 욕망의 소리와 세상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1,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생각난다. 수학을 먼저 사랑하라. 수학을 사랑하라고? 남이 알려준 답안지의 답이 아니라 자신이 답을 찾아라, 누군가가 제시한 답안지를 보는 한 수학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답을 찾느라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끙끙 매면서 꿈에서조차 수학문제를 풀 정도가 되었을 때, 수학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수학자만이 철학자였던 이유가 이것이다.

 

예컨대 2, 며칠째 친구가 만든 베이글을 먹고 있다. 친구가 자기 남편과 운영하는 베이글을 파는 커피숍을 열었다. 베이글을 굽는 화덕 난로 옆에 ‘발효는 기다림이고 설렘이라고’ 써 붙이고 남편은 장작을 패고, 아내는 빵을 굽는다. 그들은 준 재벌에 가까우니 이제 빵 만들고, 커피내리고, 3층 건물 청소하는 일은 안 해도 된다. 그들은 돈 때문이 아니라 일이 그들에게는 채워야할 ‘물’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커피와 베이글에 몰입하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진정 아름다웠다.

 

하물며,

 

이런 맥락에서 물독에 물을 채워라.”는

 

첫째, 무엇을 채울까에 급급하기 보다는 자기 삶을 ‘빈항아리’로 만드는 것, 아니 ‘빈항아리’로 인식하는 것이 우선일 듯하다.

 

둘째, 자신이 빈항아리였을 때, 듣겠다는 갈망이 생긴다. 그때만이 들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로서 들린다. 삶이라는 빈항아리에 무엇을 채워야 내 삶이 축제가 될수 있는지 ‘듣겠다’는 간절한 원의, 갈망이 빈항아리인 셈이다. ‘그분을 듣겠다’는 ‘갈망과 원의와 믿음’이 수학문제를 풀 듯, 꿈속에서조차 튀어나왔을 때, 우리가 삶에서 채워야할 ‘물’이 무엇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 채워야 하는 물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축제’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은수자가 되어 완성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의 조각을 퍼즐을 맞추듯 ‘함께’ 완성하는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어찌 보면 세번째가 가장 어렵다.)

 

 

 

                                                   파올로 베로네제 〈가나의 혼인 잔치〉

 

 

 
글을 마무리해 본다.

 

[향연(饗宴),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삶은 발효(發效)인가, 발효(醱酵)인가?]

 

우리 모두의 삶은 선물이다.

 

이 선물을 단지 어떤 기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생명번호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삶을 발효시켜 ‘축제’를 살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나는 너에게 말한다’는 그 정취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지하고(J의 목소리를 들음), 퍼즐을 맞추듯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만드는 축제가 삶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생이여! 기쁨마저도, 고통마저도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