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오늘'의 넓이 , 실존의 '오늘'에서 보편의 '오늘'로

나뭇잎숨결 2022. 1. 26. 17:57

 

 

‘오늘'의 넓이 , 실존의 '오늘'에서 보편의 '오늘'로

-꿀벌은 자기가 꿀을 빼앗는 꽃의 결실을 풍요롭게 해 준다(찰스 비어드)

 

[연 중 제 3 주 일 (다 해) 2022. 1. 23 Luc. 1,1-4, 4,14-21]  

 

 

 

1. 이문재, 「혼자의 넓이」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 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이문재 「혼자의 넓이」에서 '혼자'는 누구인가?

 

①에서 나무는 어느 날 자신의 넓이를 알고 싶어서, 빛 앞에서 자기 키만큼의 반원을 그리면서 자신의 넓이를 가늠한다. 빛 앞에서의 자신의 넓이란 형체의 넓이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나무는 어둠과 하나가 되어 무한정 넓은 자신의 넓이를 확인하게 된다.

 

②에서 사람도 역시 빛 속에서의 자신의 넓이가 형편없이 작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게 작은 혼자가 사랑을 꿈꾸다니, 이건 말이 안된다. 그래서 사람도 나무처럼 다시 혼자의 넓이를 재본다. 어둠과 하나 되어 또 다른 어둠인 누군가를 기다리다 결국은 그 기다림이 무화된 지점, 어둠의 심연 속에서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지점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자신의 넓이를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어둠이 무한한 어둠이 아니라 가장자리를  갖고 있는 어둠이다. 

 

나무와 사람이 모두 어둠속에서만 자신의 진정한 넓이를 알게된다는 것, 시인은 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문재 시인은 ‘혼자’라는 최소단위가 '어둠의 가장자리를 갖고 있는' ,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존이구동(存異求同)하는 주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공자(孔子)의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를 인용한다.

 

이는 완벽하게 혼자의 넓이를 알 때만이 완전히 우리일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역으로 추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사람 안에도 사람이 있”(「사람」)다. “타인과 더불어, 천지자연과 더불어 자기 철학을 세워나가”(「철인삼종경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혼자서는 깨닫기 힘든 혼자의 팬데믹”(시인의 말)의 혼돈 속에서 혼밥과 혼술을 즐기며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결국 혼자 죽어가는”(「노후」) 이 시대의 모습은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 “독거와 독거가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활발한 독거들의 사회」)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시인은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하면서 때로는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혼자의 넓이」)하고, “혼자 있어보니/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혼자와 그 적들」)는 내면의 성찰 속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우리의 혼자」)의 각성에 이른다.

 

시인은 ‘혼자’는 개인이 아니고, 그렇다고 소외되거나 배제된 존재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이탈한 단독자도 아닌. 왜 혼자인지 알지 못한 채, 왜 혼자가 문제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혼자가 된 혼자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혼자들, 자각 증세를 자각하지 못하는 혼자들,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 혼자인 원인과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 자괴, 무기력, 우울을 휘감고 있는 혼자들에게 ‘온전한 혼자’ ‘바람직한 혼자’가 되어야 한다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존이구동(存異求同)하는 주체’가 되는 혼자, ‘타자와 조화롭되 같아지지 않으며, 동시에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진정한 혼자, 화이부동하기도 쉽지 않고 존이구동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지만, 화이부동과 존이구동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균형’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삶의 전환이자 문명전환의 한 방편이 아닐까를 묻고 또 묻는 것이다.

 

 

 

2. "침묵만이 유일하게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파스칼 키냐르)

 

 

 

이문재 시인이 ‘혼자의 넓이’를 추구했던 것은 인간은 철저하게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존재라는 상대적인 고독을 돌파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혼자’는 돌파해야할 상황이 아니라 더 깊이 혼자 안으로 들어가 온전한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단독자’ 개념을 추구한 작가가 있다.

 

『은밀한 생』을 쓴 파스칼 키냐르가 그에 해당한다. 그는 절대적인 '혼자'를 추구하는 ‘반사회성의 열정l'asocialit?de la passion’의 작가라고 흔히 불린다.

 

1996년 1월, 소설을 집필 중, 키냐르는 갑자기 심한 출혈로 죽음을 경험한다. 그는 기적적으로 다시 삶으로 귀환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했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총체적인 모든 것(사상,소설,삶,지식 등)이 포함된 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죽음 체험을 통해 철저하게 ‘혼자의 넓이’를 알고 싶어했던 작가이다. 자신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기만인줄 그는 보았고, 타자의 평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 프랑스어 클레리에르clairiere’는 녹음이 짙은 숲속에 햇빛이 살짝 들어와 어슴푸레하게 눈부신 작은 빈터를 뜻하기도, 천의 올이 성긴 부분을 뜻하기도 한다. 키냐르는 이 단어를 매우 사랑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

 

에스키모의 한 작은 공동체에서 어느 노르웨이 인류학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십니까?” 모든 에스키모인들이 그에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언어와 두려움의 기원에는 어떤 주저함이 있다. 죽음과 언어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은밀한 생)

 

 

사랑은 외적인 것, 타인 안의 타인에게서 느끼는 황홀감이다. 그것은 나가기의 출구이다. 독서는 오히려 내적인 것, 자기 안의 타인에게서 느끼는 황홀감이다(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는 글쓰기의 두 극단인 플로베르(지우기)와 프루스트(덧붙이기) 사이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지우고-덧붙이기’는 그의 텍스트가 자기 안으로 끝없이 침전하다 느닷없이 세계속으로 튕겨져 나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키냐르는 글을 쓸 때 늘 “작은 구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적 세포 구멍” “리듬적 세포 구멍”으로 들어가 글이라는 피륙을 짜는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했던 그의 책은 올이 성긴 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글의 이데아를 형상화할 때도 이를 자주 환기한다. 비어 성기면서도 원기를 찾아 질주할 수 있는 트인 공간. 빈 것 같으면서도 힘이 있는 부드러운 파격의 선율, 이것이 키냐르의 텍스트가 지향하는 세계다.

 

키냐르의 파편적인 글쓰기는 작품의 불연속성을 제안하는 것이고, 흰 여백 사이에 매혹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이는 모든 혼자가 경험하는 ‘고독한 사색과 독백’이 가는 길에 해당한다.

 

맥락을 잃어버린, 의미를 차단하는, 파편 같은 명사와 어구와 문장들은 시와 소설과 철학의 장르를 허무는 대답 없는 자의 공간, 곧 홀로 있는 자의 공간에 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제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는 듯하지만, 결국 키냐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었다. 자기기만의 대표적인 도구가 언어라고 보았던 것이다.

 

키냐르는 의식이란 그저 획득한 언어가 메아리치는 방에 불과하고 독서의 원천은 잃어버린 목소리이며 따라서 독서란 곧 그 옛날 목소리가 생기기 이전의 듣기만 하는 상태로 퇴행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쌓인 언어들을 끝없이 게워내고 또 새로운 언어로 채워 넣으면서 극에 이르러 아무 배움도 없는, 혼자의 넓이를 체험하는 ‘침묵과 고독’의 상태로 침전하기를 욕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읽기)와 저자(쓰기)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기에,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하는 연인처럼,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키냐르는 말한다. 소통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계속 쓰면서도 자신조차도 자신이 스스로 쓴 것을 도저히 읽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의 고백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인간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과 그 욕망은 대체 어느 방향으로 꿈틀대는지, 말과 언어, 읽기와 쓰기에 관한 한 편의 긴 독백의 미로를 따라가는 거 같다.

 

이렇듯, 키냐르의 글들은 말에 대한 말인 셈이다. 이 말들에 빠져 정신없이 책을 읽다 보면 키냐르는 온 데 간 데 없고 독자에게는 화장터에서 미처 타지 못한 유골을 수습하는 것처럼 앙상한 화두만 남는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처럼.

 

그것은 키냐르가 의도한 궁극의 “황홀경”, 언어로부터 멀어져 오롯이 홀로되는 경험과 다르지 않다.

 

글쓰기란 자기 안에 담긴 세상의 모든 말을 토해내는 행위, 그때, "침묵만이 유일하게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파스칼 키냐르)는 그의 말은 찻잔처럼 우리 곁에 조용히 놓이게 된다.

 

 

 

 

3.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1-4; 4,14-21)

 

 

이문재 시인이 ‘혼자의 넓이’를 추구하는 것, 파스칼 키냐르가 자기 안의 말을 모두 퍼내어 ‘침묵의 넓이’를 추구하는 것은 ‘오늘-듣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단초에 해당한다. 이때 ‘이해한다’는 것은 성서의 내용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그 차원까지를 의미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전하는 루카 1,1-4; 4,14-21을 읽어본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1,1-4; 4,14-21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를 중심으로 ‘오늘-이루어졌다’는 그분의 메시야 선언과 희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대의 서막을 이야샤서 가운데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는 것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그분이 말하는 ‘오늘’은 무엇인지, 희년의 메시지를 읽는 하나의 길을 열어 보자!

 

‘오늘- 이루어졌다’는 선언은 그분의 ‘오늘’과 우리의 ‘오늘’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그 여로를 따라가는 것에 해당한다.

 

그 어느 날도 아니고 그분의 기쁜 소식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성서해석의 범주가 아니라) 온전히 우리 삶으로 가져오기 위해, 그 문장을 낱낱이 분해해서 다시 재조립하기로 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은 언제인가?

 

‘오늘’을 이해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라보는 키워드라고 할 때, 도대체 실존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물어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밤새도록 싸워야 하는 대상은 어둠이 아니라 야곱처럼 그분의 메신저인 빛(천사)이다.

 

‘오늘’은 어떤 ‘오늘’ 인가? ‘ 오늘’ 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간이자. ‘이루어졌다’를 낳는 시간이다.

 

1차적으로 ‘오늘’은 이사야서 61장의 텍스트가 읽혀지던 갈릴레아의 회당이자, 우리의 실존이 펼쳐지는 이 현실이자, J의 음성을 듣게 되는 개별적인 시간 등으로 구획이 가능하다.

 

이 구획은 우리의 실존이 펼쳐지는 구체적인 ‘오늘’, 우리 각자가 어떤 실존의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알게 되는 그 ‘오늘’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 J의 ‘오늘’로 다가가는 일이다.

 

이는 다시 ‘이 성경말씀’이 지시하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분이 메시야선언의 포문을 자신의 유년시절의 공간으로 되돌린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성경 말씀이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성서학자들이 전하는 바, 이사야서는 시대적 배경, 내용적 측면, 그리고 문체상 특징으로 인해 제1.제2이사야로 나누기도 하고, 시대적 배경을 축으로 제1, 제2, 제3이사야로 나누기도 한다. 제 1이사야(1장-39장)은 아하즈와 히즈카야의 통치시절(기원전 735-687)로 이스라엘의 위기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단호한 어조와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가, / 제2이사야(40-45)는 다윗왕조의 몰락과 예루살렘 파괴를 가져온 바빌론 유배시절(기원전 686-539년)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제를/ 제3이사야(46장-66장)는 바빌론 유배 이후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기원전 539-500년)시간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미신적 예식을 비난하는 한편 메시아 시대에 새 예루살렘이 가지게 될 광의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했을 때, 왜 이사야 61장 일까?

 

‘유배 전-유배 중-유배 후’에 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다르듯, 이는 다시 우리의 ‘오늘’과 연결하여 우리 삶의 스펙트럼 그 크기의 다름을 바라보는 일로 연결된다.

 

우리의 실존 역시 유배전의 그 위태로움일 수도 있고, 유배중의 그 처절한 울부짖음의 시간일 수도 있고, 유배후의 그 상실의 시간을 회복하는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적인 유배를 경험한 것이 아님에도, 어떤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유배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일때, ‘오늘’이 어떤 날인지 그 의미가 분명해질 거 같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다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가 듣는 상황은 모두 같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오늘’로 돌아가야 한다. 77억9,500만명(2020년 통계청Kosis기준 세계인구)은 모두 같은 상황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두 겹’의 들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실존의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존상황과 함께 하는 메시야인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일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상황이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눈먼 이들/억압받는 이들/ 마음이 부서진 이들/ 슬퍼하는 이들...그 어떤 상황이든 정상적인 실존의 상황이 무너진 상황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적 유배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유배, 그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 그분과의 ‘분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라는 현실인식에 해당한다.

 

이루어졌다.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이루어졌다’와 십자가상의 죽음 앞에서의 ‘다 이루었다’(요한19, 30)와 연결하여, ‘오늘’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가 본다.

 

십자가상의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의 ‘다 이루었다’는 실존의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 몰린 바로 그 상황에 해당한다. 오늘이 철저하게 붕괴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의미는 텍스트의 ‘오늘’도, 실존의 '오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무시간) 속에서의 온전한 하늘나라의 실현태, 그  ‘오늘’까지를 포함하는 ‘오늘의 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넓이'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영혼의 어둠밤, 혹은 유배나 사막체험을 하게된다고 성서학자 B.W.앤더슨은 말한다. 역사가 찰스 비어드의 말을 빌려 “꿀벌은 자기가 꿀을 빼앗는 꽃의 결실을 풍요롭게 해 준다”(찰스 비어드)라고 비유한다.

 

호세아 예언자의 예언처럼 야훼는 당신 백성을 사막- 단순한 불모의 땅 사막이 아니라 절망의 사막인 버려진 땅-으로 불러내어 그들의 가슴에 대고 말할 것이다.(B.W.앤더슨, 구약성서의 이해3, 이성배 역, 서강대종교신학연구소, 1984)

 

‘이루어졌다’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왜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이때, ‘사막’으로 상징되는 극한의 상황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왜 우리에게 ‘사막’이 필요한 것인가? 왜 그분은 우리를 ‘사막’으로 불러내시는가?

 

이는, 십자가 사건의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는 결정적 음성에서 ‘오늘의 넓이’를 바라보는 일로 수렴된다.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시간에서 존재론적 시간으로의 <오늘>을 듣는 것이 희년의 궁극적 의미와 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2월1일이 설날’이라고 말하는 분절화된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영속성, 그 ‘오늘’의 크기를 이해하고 바라보기 위해선 우리가 처한 실존의 치장을 모두 다 걷어낸 상태, 즉 사막에서만 비로소 그분의 음성을 심장으로 듣게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의 극한에서 실존 아닌 것을 듣게 된다는 이 들음의 역설, 이것이 믿는 이들이 듣기 위해서 통과하는 ‘사막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들은 날이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듣지 못한다면 오늘은 그냥 분절하된 시간, 그 '오늘'일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분이 펼친 이사야서의 61장의 내용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예언의 어조와 문체상의 변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는 유일한 현존인 ‘나를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는 인류의 ‘응답’을 요구하는 그 '오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말해, ‘만유위에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우리 앞에 당도한 첫 질문으로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게 되는 원체험, 가장 배타적인 질투의 하느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막체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분의 현존, 현현, 십자가의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언어놀음에 가까운지를 알게된다.

 

 

 

 

 

 

예컨대,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나의 어머니여!’가 아니고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으로 넘어가는 그 ‘오늘’을 이해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관계에서 ‘보편적 오늘’ 그 넓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부연하자면, '오늘'은 단지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혼자의 넓이' 즉 '관계의 넓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아들의)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다. (하느님의)사랑이 있으니까! 즉, 예수님이 내 아들로써만 존재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 아니라, 인류의 주님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 마리아 역시 인류의 어머니, 사랑의 모후가 된다. 아들(사랑)의 상실이 아니라, 아들(사랑)의 확장이다.  글의 서두에서 이문재의 '혼자의 넓이'란 어둠의 가장자리를 확인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빛의 넓이를 확장하는 여정,  '희년'을 사는 무수한 '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이라는 '실존의 넓이'란 다름 아닌 '보편의 넓이'로 넘어가는 결절점에 해당한다.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란 77억9,500만 명의 하느님을, 주님을 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당신은 나의 님이 아니라 우리의 님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게마저 사로잡히지 않는 이 사랑의 확장은 얼마나 자유로운 지평인가?

 

그런 맥락에서 ‘오늘-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라는 거시적인 스펙트럼은 ‘보편적 사랑’의 넓이와 크기를 바라보는 일.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오 신부님은 강론에서 고립이 아닌 고독경청을 위한 침묵에서,

 

철학자 Blaise Pascal(1623-1662)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방에 홀로 머무르지 못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또 이탈리아의 Luigi Maria Epicoco 신부님(1980-)자신의 고독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지옥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독은 고립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독은 고립이 아니어야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고독이 현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라면, 침묵은 말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침묵은, 단순히 말을 멈추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침묵은 말을 멈춤으로써,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침묵의 목적은 경청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립이 아닌 고독’과 ‘경청을 위한 침묵’은 실존적 유배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사막체험 속에서 우리가 어떤 ‘오늘’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지 갈피를 더듬어, 체험하는 일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희년’을 선포한 그분을 이천년전의 역사적 인물로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있는 ‘임마누엘’로 그분을 현존케 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때 ‘보편적 오늘’은 추상이나 관념을 훌쩍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실존과 보편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존과 무관한 보편이 아니라 실존을 품는 보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분이 선포하시는 ‘은총의 해’, ‘희년’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졌다’고, 진정한 해방의 음성을 죽은 '문자'가 아닌 살아있는 '육성'으로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