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대답’으로 주어지는 ‘원초적인 말(Paroles orginelles)’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에서 ‘오늘’은 언제인가?
[연 중 제 7 주 일 (다 해)2022. 2. 20. Luc. 6,27-38]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를 읽어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 를 읽어본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시적 스펙트럼이 넓다. 시인은 역사와 예술의 관계(원심력), 존재와 존재의 관계(구심력)를 총체적으로 규명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확인’에 이르려 했다는 점에서 실존철학을 시로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두 번은 없다」에서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두 번은 없다」에서 전하는 사랑법은 ‘오늘’을 괄호친 그 사랑법이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만 아름답다’는 잔혹한 진실을 독자에게 전한다. 잔혹한 진실은 ‘자기애’가 강하지 않으면 이를 수 없는 직관이다.
타자는 시간의 얼굴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래한다.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바로 자기애이다. 자신 역시 타자 앞에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의 이름으로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괄호치는 사랑만이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기애’의 바탕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작에 해당하는 「충분하다」는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담담한 시선을 통해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나는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에서 말하는 그 잔혹한 진실의 이름이 바로 내일의 사랑, ‘그리움’이다.
시인이 통과한 20세기는 격동의 역사였고 21세기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낭만의 시대였다. 이 화해불가능한 ‘오늘’ 앞에서 시인은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을 접어야지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이 없는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 간신히 연명치료하듯 살아있게 한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의 ‘장미’를 외면하고 어제의 장미나 내일의 장미에 대해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라고 말한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힘겨운 나날들’은 장미의 부재가 아니라 장미의 현존이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장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시인은 내일의 장미를 노래하기에 이른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은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가 다른 것에 대해 결코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장미 자체가 아니라 장미를 감당하는 내 사랑의 크기이자, 오늘의 장미에 등을 돌리는 것이 21세기 생존법이라는 것을 시인은 간파했기 때문이다.
권혁웅 시인이 말한 ‘나중에 우리 밥 한 번 먹자’라고 전하는 '어장관리' 와 비슷한 맥락에 해당한다.
시인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간격’이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실날같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조차 지울 수 없었기에, 다만 오늘의 사랑에는 괄호를 치고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라고 쓴다.
2. 누가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사랑은 ‘오늘’에 괄호를 치는 것일까?
‘사랑할 때는 늘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전하는 임마누엘 레비나스(『시간과 타자』)의 사랑법을 바라보기로 한다.
①일치의 불가능성, 부적합성,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통-시성 안에 주어진 불일치의 형상 가운데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시간은 이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또한 갈증과 기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관념의 실보다 더 가느다란 실, 통시성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실이다.
임마누엘 레비스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말하는 ‘함께’를 문제 삼은 이유는 ‘타자’를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닿아 있다.
하이데거의 대타자가 ‘신’이라면 레비나스의 타자는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타자를 지운 채 ‘함께’를 과연 ‘함께’로 볼 수 있는가를 레비나스는 문제 삼았던 것이다.
레비나스는 철학이나 종교가 사랑을 왜곡하고 훼손시키면서 사랑과 영원을 점유한 점령군이라고 보았다. 이를 타자를 추방한 형이상학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집요하리만치 오늘의 사랑이 실종된 이유를 타자설정에서 찾고 있다. 사랑은 관념의 영역이 아니라 ‘낯선 타자의 맨 얼굴을 만져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타자를 ‘신’으로 국한할 때 사랑에서 ‘오늘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이 없는 영원을 과연 영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그는 물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나와 불일치의 얼굴을 주고받는 타자만이 통시성 안에 가느다란 줄처럼 ‘오늘’을 연결하는 끈이라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로 넘어가 본다.
시인이나 소설가뿐 아니라 모든 문학연구가들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에서 ‘오늘’이 실종되는 이유에 대해 스피노자는 레비나스와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스피노자는 ‘나’의 충족이유율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②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정리41)
자기는 당연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랑은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사랑은 순전히 이유없이 공덕으로 주어진 것임을 바라볼 때, 즉 비평가 신형철 교수의 표현대로 자기 ‘결여’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유일한 교환구조를 알 수 있다고 보았던 바로 그 맥락이다. 사랑에 교환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결여’의 교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③우리들은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려고 하며, 그대로 우리 자신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정리25)
사랑이 기쁨과 슬픔으로 나눠지는 이유 역시 사랑의 충족이유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스피노자는 다르게 표현한다. 기쁨은 오직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면 슬픔은 사랑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 충족이유율을 묻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④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정리44)
사랑의 충족이유율은 다시 사랑과 증오를 역전시키는 묘약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저 거리에 스치듯 지나가는 제3자에게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구체적 대상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기대가 없었다면 증오라는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결핍’이라는 어떤 충족이유율이 있을 때 시작된다. 즉 언어화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사랑은 시작되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충족이유율이 배타성으로 질주할 때, 결핍은 증오로 바뀐다고 본 것이다.
사랑이 배타성으로 질주 한다는 것은 자신이 결여 혹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결핍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앞에서 알면서 모르게 되는 이 상황, 결핍의 이름을 알지 못할 때, 배타성이란 방어가제가 증오로 표출되나, 그 증오가 사랑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결핍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사랑 자체만을 바라보게 된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여나 결핍으로 인해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그 결여나 결핍은 타자가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타자의 사랑은 내가 사랑의 불꽃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울 뿐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가장 고귀한 신적인 행위이기에 결여와 결여의 만남은 그 불꽃을 불어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일뿐, 불꽃이 모든 것을 태울만큼 커지기 위해선 신적인 사랑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은 오직 신만이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채워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흔히 스피노자를 신에 미친 철학자라고 한 이유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신적행위이기 때문에 타자의 부재나 현존이 사랑의 궁극적인 충족이유율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타자는 다만 신의 사랑을 대리보충 시키는 불꽃의 매개자라고 본 것이다.
사랑 앞에서 ‘오늘’이 실종되는 이유를 레비나스는 ‘타자’를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로 보았다면, 스피노자는 결여와 결핍의 이름으로 그 충족이유율이 무엇인가로 바라보았다.
3.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27-38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27-38에서 두 번이나 거론되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는 당위 명제는 사실 본능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의 명제에 해당한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이 명제의 표면과 심층을 관통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지난 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여라’는 것이 존재의 차원이라면,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것은 존재와 행위, 그리고 소유의 차원, 모두를 통합한 총체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오늘’의 사랑을 하라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이 담지하고 있는 그 ‘오늘’의 사랑법을 바라보기 위해 세부분으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너희는’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성서학자들은 27~28절은 그분의 말을 ‘듣고 있는’ 그분의 제자군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29~30절은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할 그 주체임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너'로 치환할 만큼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일반적인 사랑의 명제는 아니다.
여기서 ‘나’라는 주체를 ‘너’로 대상화 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사랑법, 그 단초에 해당한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 자신을 '너'라고 지칭한 유일한 상황에서 추론할 수 있는 '너'를 듣겠다는 것이 바로 그 '오늘'의 사랑이다.
사랑이 존재하기와 행하기와 소유하기를 동시에 포괄하기 위해서 1차적으로 '청취의 상황'에 있지 않다면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는 그 사랑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인간의 마음을 지우고 아버지의 마음을 들어야 했다면, 우리 역시 우리 마음을 지우고 그분의 마음을 들어야한다는 청취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사랑이란 '너'를 듣기위해서 ‘나’를 지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에서,
그분의 말을 듣고 있는 그 너희인, 우리는 그분을 듣기 위해 내가 지워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듣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의 첫번째 관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온 마음을 다해 듣는다는 것은 내가 지워져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말을 경청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육성을 듣는다는 것이자, 그분의 육성을 세상에 되돌려 준다는 이중의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지워지지 않으면 들음의 순환고리는 이어질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본능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본능적인 사랑은 내가 주체로 각인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번째 들어야 하는 '너'는 바로 나의 생존을 방해하는 '원수'로 지칭된 그 '너'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을 듣겠다는 원의가 '나'를 지우고 그 주체의 자리에 그분을 두는 것으로부터 ‘오늘’의 사랑은 시작되고,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제언하는 ‘오늘’의 사랑법이라면, 이 들음은 그분을 듣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데 그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면 실은 '너'가 누군지도 듣게된다는 것이다. 그분을 들었는데 너를 듣지 않았다는 것은 진정한 들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다. 너를 듣는다는 것은 나와 같은 너의 실재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는 인간이고 너는 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너도 너 자신에게 실은 피해자였음을 바라보게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듣는 대상은 그러니까 셋이면서 하나인 셈이다.
너(삼위일체하느님)---->너(원수로 지칭된 너)----->너(듣고 있는 나)
이 들음의 고리에 대해 칼라너는 ‘보편사제이자 시인’이 되는 것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칼 라너는 『영성신학 논총』(김대식 역, 가톨릭출판사, 1983)에서 그분의 육성을 ‘원초적 말(Paroles orginelles)’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말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사제’이자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제는 ‘원초적 말씀’을 발설하는 몸이기에 ‘시인’으로 닦아져야 하지 않을까?
원초적 말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로고스처럼 들으려는 사람에게 창조의 순간을 되돌려주는 것을 일컫는다. 칼라너가 ‘말씀-로고스’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원초적 말’이라고 한 것은 사랑은 사랑의 대상과 주체가 영원한 질문에 대한 그 답을 듣고 그들의 창세기를 ‘오늘’ 다시 쓰는 일이라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답을 들어야 하는 정취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우리가 사랑해야할 ‘원수’로 대상화된 그 '너'의 '무지' '혼돈' 까지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너와 나에게 동싱에 오늘을 되돌려주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오늘은 되돌려주는 것은 나와 그에게 영원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의 실재와 나의 실재가 동일하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제언하는 바로 ‘오늘’의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것이 아니고 무지와 두려움으로 덮여있는 너의 심연까지 듣는 것! 그로인해 너의 실재와 나의 실재를 동시에 알게 되는 것!
⒝‘원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원수'가 누구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히틀러가 원수인가? 아님 유다가 원수인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가 원수인가?
‘원수를 사랑하라’
도대체 원수로 지칭되는 그 사람이 누구일까? 내가 하느님의 사람처럼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은 이들이 원수일 것이지만, 만약 내가 하느님 사람처럼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면 내 원수는 누구인가? 나인가? 아님 신인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삶으로 얽히고설켜서, 서로에게 문제상황을 일으킨 이들을 원수라 부르기도 한다. 서로의 인생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 예측불가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관계를 원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남편(아내)이 아니고 원수다. 자식이 아니고 웬수다. 부모가 아니고 웬수다. 친구가 아니고 웬수다. 친척이 아니고 저건 웬수다...등등)
여기서 원수라고 지칭하게 되는 관계란 1차적으로 서로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상황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체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 관계의 바탕에는 ‘희생과 상실’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즉 관계의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해결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바라보는 것이, 원수의 존재를 무화시키거나 기정사실화 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영원히 대답되어 다시는 어떤 형태로도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일어나고 또 일어날 것이다. 문제가 영원히 대답될 때 비로소 문제에서 해방된다. 성령은 우리가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2성령에게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똑같다. 형태가 무엇으로 보이든 문제는 우리가 얻으려면 누군가는 잃고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3아무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상황이 해결되면 문제는 사라지니, 문제는 지각상의 오류였고 이제 교정되었기 때문이다. 4성령은 모든 실수를 똑같이 쉽게 진리로 가져온다. 5실수는 오직 하나, 즉 상실이 가능하며 누군가의 상실로 누군가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이다.(헬렌 슈크만, 『기적수업』)
문제 상황 속에 내재한 ‘희생과 상실의 원리’를 바라보면 우리가 원수라 부르는 관계들은(사회적 이슈가 되는 엽기적인 사건들을 제외한) 무지이거나 과잉 의미부여의 방어기재였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희생과 상실의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사실 우리에게 원수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냥 결핍된 나와 타자가 있을 뿐임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1차적 의미의 원수는 그런 관계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원수'는 다른 차원의 지칭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제3자에게 지각가능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바이러스처럼 감염된 상태, 잠재된 행위이기도 하다.(표출된 행위와 그 근본원인이 다름에도 정작 본인은 그 원인을 모르는 상태) 이는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몰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 조차 자신의 심연을 모르는 자가 본능적으로 표출한 절망의 행태가 포괄적인 문제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타자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가게 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유발한 타자가 자신조차도 모르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대신 변호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수님의 두번째 사랑법이다. 이는 역지사지를 넘어 타자가 들어야 하는 것을 대신 듣는 영적 행위 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원수로 지칭된 타자란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그냥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를 ‘간과(overlook)’하라는 말이 나온다.
타자 자신도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타자를 원수라는 카테고리에 가두지 말하는 제언이다. 누군가를 언어적으로 규정해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은 바로 그 언어의 감옥에 나 자신을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를 가둠으로써 나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것. 여기서 판단하지 마라, 심판하지 말라는 제언은 타자만을 위한 제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랑하여라’는 어떤 사랑인가?
'원수'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육성만 듣는 것이 아니라 타자 자신도 못 듣는 그의 심연까지 들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점에서는 타자가 표출한 행위가 타자에게는 최선이었다는 것, 그 이상을 알지 못하기에 그 행위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신적 행위’에 해당한다. 모든 인류의 문제에 내재해 있는 '희생과 상실'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제언하는 그 ‘오늘’의 사랑법은 '원수'라는 지칭부터 지우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연중7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이 '백지같은' 사랑을 <창조적인 사랑, 창조적인 용서>라는 말로 집약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도저히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곳에서도, 또 사랑을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도 사랑처럼 창조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용서를 찾아볼 수 없는 곳에도, 용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의 용서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는 이 말씀은, 달리 번역해 보면, “무슨 은총이 너희를 위해 있겠느냐?”라는 말씀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과 ‘미워하는 삶’을 달리 표현하면, ‘은총 속에 머무는 삶, 은총이 함께 하는 삶’과 ‘은총 밖에 있는 삶’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힘들어도 우리가 ‘은총이 함께 하는 삶’ 속에 머물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소망이 담겨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보상을 바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힘든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 <창조적인 사랑과 용서>라고 집약한 그 사랑은 우리가 '은총의 상태'를 이미 살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오늘’의 사랑법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도저히 사랑을 느낄 수 없는 곳에서도, 또 사랑을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랑이며, ‘더 이상 용서를 찾아볼 수 없는 곳에도,용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예수님의 용서' 이다. 이 한계를 정하지 않은 사랑과 용서는 이미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인식의 대전환을 했을 때만 가능한 행위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행위가 표출되기 전에, 인식이 각성된 상태가 아니고는 불가능 하기에 그렇다. 인식의 각성 역시 우리 혼자 이룬 것이 아니기에 그 자체가 또한 '은총의 상태'가 주어져야 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창조적인 사랑과 용서>는 두 겹의 '은총 상태'에 있어야지만 가능한 사랑이고, 용서이기에 이미 그 자체가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자 보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과 용서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은총의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는 '감사'에 해당한다.
글을 마무리 해 본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기도한다. 그 양식이 단지 물질적인 양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생명체다. 오늘의 사랑이 없다면 살지 못하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적으로 사랑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산다는 것은 사랑의 여정일 수밖에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랑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질문에 대한 영원한 답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제로 돌려주었다.
[‘영원한 대답’의 토대를 마련하는 ‘원초적 말(Paroles orginelles)’]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것은 수많은 질문에 대한 영원한 답에 해당한다. 달리 표현해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먹으라는 제언에 해당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은 우리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이루어내는 힘을 가진 ‘그분의 육성, 원초적인 말’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은총'이 아니고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절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연중 8주 은총론에서 부연)
J가 인간의 본능만으로는 하기 어려운 사랑의 숙제를 내 준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능히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고귀한 가능성에 순례의 방향을 잡으라는 이 제언은, 은총 속에 살라는 이 제언은 '순례의 모든 순간이 바로 '나(사랑)'가 되게 하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실재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그처럼 장엄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적 사랑과 용서'는 우리 자신에게는 진정한 자유일 것이며, 그분에게는 행복일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의 주제가 내 영성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커서 묵상이 막힐 때마다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을 수없이 들었다. 가사 중에 "너의 모든 순간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과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이 사랑이 아니라면 원수는 고사하고 그 누군들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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