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숨결, 그리고 숨을 쉬는 한 희망하라(Dum Spiro Spero)(키케로)
-종교는 우선 멈춤Unterbrechung이다(J. B. 메츠)
[연 중 제 8 주 일 (다 해)2022. 2. 27. Luc. 6,39-45]
1. 박성룡의 「풀잎」
시인에게는 ‘말’이 맡겨져 있다.
시인은 세상의 들판에 흩어져 있는 사물들의 세계에 ‘숨’을 불어넣어, 어떤 존재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말’이란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생각하는 바가 언어라는 몸을 쓰고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들의 ‘숨결’이라 할 수 있다.
‘숨’과 ‘숨결’을 되찾은 사물들은 계절로 말하자면 봄이고, 관념으로 말하자면 희망이고, 내연성으로 말하자면 존재가 된다. 이렇듯 말의 윤리를 넘어, 말의 신학까지 가는 사물들의 세계를 '말'로 포착하는 그 순간, 시인은 어떤 경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박성룡의 「풀잎」을 읽어본다.
1. 너의 이름이 부드러워서 너를 불러일으키는 나의 성대가 부드러워서 어디에 비겨볼 의미도 없이 그냥 바람 속에 피어 서 있는 너의 그 푸른 눈길이 부드러워서 너에게서 피어오른 푸우런 향기가 너에게서 일어나는 드높은 음향이 발길에 어깨 위에 언덕길에 바위틈에 그냥 저렇게 피어 서 있는 너의 양자(樣姿)가 부드러워서 아 너의 온갖 지상의 어지러운 사상(事象)에 관한 싱싱한 추리가 부드러워서..... 2. 꽃보다 밝은 이름 물방울 보다 맑은 이름 흙보다 가까운 이름 칼끝보다 날카로운 이름 풀잎이여, 아 너 홀로 어디에고 살아 있는 이름이여.
이렇게 정갈하고, 부드럽고 날카롭기까지 한 ‘풀잎’이 있을까?
박성룡의 「풀잎」은 김춘수의 「꽃」처럼 어떤 사물의 이름을 불러 주면서 ‘실재의 편린(片鱗)’이 어떻게 존재성을 얻게되는가를 보여주는 시에 해당한다.
‘너의 이름이 부드러워서’ 라고 풀잎의 이름을 부를 때, 한 조각의 비늘 같은 ‘편린’ 이 흩어지면서 ‘실재 전반’이라는 바닥모를 심연의 문이 열린다.
저 아무것도 아닌, 한낱 풀잎이 지닌 부드러움이 산재하는 이 세계가 환하게 문을 연다.
그 문은 "꽃보다 밝은 이름, 물방울 보다 맑은 이름, 흙보다 가까운 이름, 칼끝보다 날카로운 이름, 풀잎이여, 아 너 홀로 어디에고 살아 있는 이름이여"로 수렴되면서 사물이 지닌 내연성을 열어준다.
사물 스스로는 결코 존재의 '내연성'을 얻지 못한다.
시인이 “풀잎이여, 아 너 홀로 어디에고 살아 있는 이름이여” 하고 불러줄 때, 풀잎은 비로소 사물의 영역에서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와 부재하는 것들의 안부가 돌연 넉넉하다는 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아 너의 온갖 지상의 어지러운 사상(事象)에 관한 싱싱한 추리가 부드러워서.” 라고 풀잎에게 거듭 그 숨결을 부여할 때, ‘풀잎’은 봄의 전령처럼 모든 꽃들의 배경이 되어, 무연히 그러나 환하게 어떤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
라틴어 사전. 그라츠 대학 도서관.
2. 그리고 나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Spero, Spera)(한동일, 『라틴어 수업』)
한 잎의 '풀잎'이 사람의 안부를 전해주고, 환하게 가야할 길을 열어준다면 그 '말'은 어떤 이루어내는 힘을 지닌 것일까?
한동일 신부의 『라틴어 수업』에서도 언어의 자장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바라보게 한다. 서강대에서 라틴어 수업 강의가 개설되었을 때, 청강생이 많기로 유명한 강의였다.
사라진 언어 라틴어,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는 라틴어, 기원전부터 존재하며 인류 문화의 근원지였던 로마의 언어, 라틴어의 잔재는 아직도 유럽의 여러 언어에 남아 있고 로마교황청의 공식적인 문서에 아직도 이 라틴어가 쓰인다.
그러나 일반 학생들이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 라틴어 수업에 매료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나를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숨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지 않아도 세상은 여러 모로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보잘것없게 만드니까요.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마저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대한다면 어느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 가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오(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베오’는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즉 ‘베아티투도’라는 단어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복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단어가 유독 마음에 남는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관이 되어 제게 기억으로 남았고, 제 죽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내일은 저 역시 관이 되어 누군가에게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또 그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할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기억이라는 것을 물려주는 존재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봅니다. 부모님이 남긴 향기는 제 안에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 다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제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기억을 밑거름 삼아 내 삶의 향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들을 각자 저마다의 비행법과 날갯짓으로 하늘을 납니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확히 모르는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나가는 겁니다.
Hoc quoque transibit!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은 ‘바라봄(visio)’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통도, 사회의 아픔과 괴로움도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하지요. 여기가 모든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국적, 성별, 나이, 종교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분명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입니다
라틴어 수업을 들었던 한 제자는 아직 꽃피지 못한 청춘인 20대에 자신은 이 수업에서 ‘꽃’이 아니라 그 ‘뿌리’를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수업이 단순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삶’에 맞닿아 있다는 상찬이다. 책 말미에는 당시 수업을 마치며 저자가 학생들에게 받았던 손편지와 책 출간을 기념해 보내온 제자들의 편지 글이 함께 실려 있음에서 얼마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활발하게 소통을 모색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중간고사 과제로 제출하는 ‘데 메아 비타(De mea vita)’로, A4 한 페이지로 ‘내 인생에 대하여’ 적어내는 일이다. 제자들은 이 과제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과거의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지금의 자기를 인정하며, 미래의 자기를 꿈꿀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수업을 통해 삶의 대한 태도와 방향을 성찰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라틴어 수업』은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 변호사이자 가톨릭 사제인 한동일 교수가 2010년 하반기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진행했던 '초급·중급 라틴어' 수업의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서강대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입소문을 타고 연세대, 이화여대를 비롯해 신촌 대학가를 벗어난 지역 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찾아와 늘 강의실이 만원이었던 저자의 강의 내용을 수록한 이 책에는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그 지평을 바라볼 수 있다.
라틴어 수업은 단순한 어학 수업에 그치지 않고 라틴어의 체계, 라틴어에서 파생한 유럽의 언어들을 시작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 제도, 법, 종교 등을 포함해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된다. 또한 저자가 유학 시절 경험했던 일들, 만난 사람들, 공부하면서 겪었던 좌절과 어려움, 살면서 피할 수 없었던 관계의 문제, 자기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성찰 등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화두들이 함께 녹아 있어 단순한 라틴어 강의가 아닌 종합 인문 교양 수업에 가깝다.
한 예로, 라틴어 ‘도 우트 데스(Do ut Des)’는 ‘네가 주면 나도 준다’라는 뜻으로 로마법의 채권 계약에서 나온 법률적 개념이지만 저자는 이 말을 통해 과거 로마법상 계약의 기준이 되는 네 가지 도식에서부터 유럽의 세속주의와 상호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나아가 상호주의 원칙이 흔들리는 오늘날의 국제 사회에서 이 개념이 왜 과거의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도 중요한지 설명한다. 이처럼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 살아가면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화두들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단초가 되어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고, 이미 열려 있는 길도 닫아버리는 사람이 있다. 『라틴어 수업』은 나는 어떤 길을 가는 사람이고, 나는 과연 그 길에서 만난 이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주는 사람인가를 멈춰서 바라보게 한다.
3.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39-45
루카 6,39-45에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고, 열려 있는 길도 닫아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 먼 사람'으로 비유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글은 [참고:겨자씨 비유의 ‘은폐’와 ‘계시’, ‘신앙’과 ‘믿음’의 갈림길]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39-45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눈 먼’이란 대체 어떤 상태인가를 이해해 보려고 한다.
세상의 관계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신앙은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드렸는지가 아니고, 무엇을 받았는지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드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신앙에서는 무엇을 받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받았는지를 모를 때, 무엇을 드리는 것은 오히려 아무 것도 드리지 않은 것보다 더 '무익'하다는 것을 복음은 거듭 알려준다.
무엇을 받았는지를 아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받았는지를 안다면 우리가 드릴 것은 오직 감사의 기도이고 감사의 삶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가 34번의 첫 소절처럼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 속에 산 것은’에서 어떤 은총 속에 살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눈먼 이'는 <은총의 망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인간이 '숨'을 쉰다는 자체가 이미 은총이기에 은총은 상실될 수 없고, 오직 망각 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나 신앙 밖에서 은총을 망각하는 것은 이해가 가나, 신앙 안에서, 그것도 광적으로 열심한 상태가 오히려 은총을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루카 6,39-45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은총과 자유의지’ ‘은총과 죄'. '은총과 피안'의 관계에 대한 정립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왔을 때 은총 받은 ‘눈먼 이’로 던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인도자’나 '환경'을 만나는가에 따라 평생 은총지위를 상실하고 ‘눈먼 이’로 살다 가거나, 어느 순간 눈을 떠 ‘빛을 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눈 먼- 눈 뜲>은 나 혼자만의 삶으로 끝나지 않는 '은총의 고리'에 해당한다.
성서에 나오는 ‘눈 먼’이로 지칭되는 이에 대해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거론한 대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뿐 아니라 예수 이전의 대부분의 인류의 스승은 눈 먼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눈먼 인류가 눈먼 인류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 자신 역시 이미 받은 은총을 망각한 ‘열심한 종교인’은 아닌지? 즉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를 비판하면서 우리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아닌지 물어야 할 이유는 우리는 너무 '열심한' 사람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심한’ 이들에게서 일어나는 이 ‘은총의 망각’ 은 무엇 때문일까?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이 신앙의 자로미터였던 율법이 은총과 분리된 이유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그들의 '열정의 어떤 부분들', 이를 ‘새로운 실존’을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에서 바라보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우리의 ‘새로운 실존’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전적으로 은총을 바탕으로 하며, 은총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서 행동의 규범이자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첫째, 인간이 은총을 받게 준비시킨다. 둘째 기능은 율법이 은총을 올바르게 사용하게 돋는 일이다.(F. 뵈르클레, 『기초윤리신학』,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75)
‘새로운 실존’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지위를 잃지 않은 삶을 의미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그 열정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은총을 받았다’가 아니라 ‘은총을 받을 것이다’라고 미래시제로 진술되는 이유에서도 '은총의 망각'이 본인도 감지하지 못할정도로 예민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은총은 인간학적 이해를 기점으로 출발하여, 성서의 은총메시지와 해후하는 가운데, 교회의 은총론이 하느님의 조건없는 인격적 사랑에 직면한 ‘인간의 자기이해’로서 전개된다. 은총 이해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항시 추구되나 결코 온전히 달성되지는 못하고,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될 수 있을 뿐인 자유임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은총론’은 ‘그리스도적 자유론’이라고 할 수 있다.(기스펠트 그레사케, 『은총-선사된 자유』, 심상태 역, 상바오로출판사, 1979)
이를 루카 6,39-45에서는 네 개의 비유를 통해서 '은총지위'를 잃게되는 어떤 패턴을 제시한다.
Ⓐ눈먼 이의 비유 Ⓑ 들보와 티의 비유Ⓒ 나무와 열매의 비유Ⓓ곳간과 마음의 비유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를 이해하는 것은,
Ⓑ 들보와 티의 비유 Ⓒ 나무와 열매의 비유Ⓓ곳간과 마음의 비유 속에서 알 수 있듯, '나와 나의 관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 ' 즉 '수평적 은총론'이 그 바탕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총은 분명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수직적인 은총' 임에도 불구하고 은총의 망각 여부는 수평적인 관계의 실종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여기서, ⒜의 눈먼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을 가리킨다면 ⒝의 눈먼 이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들을 신앙의 전범으로 따르고 있는 인류, 오늘 우리라고 할 수 있다. 문맥을 통합하면 예수라는 스승의 인도를 받지 않는 모든 이를 ‘눈 먼’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열린 사랑이 마치 닫혀있는 듯한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이 은총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눈먼 이들이 구체적으로 하는 행위란 Ⓑ는 율법과 윤리의 혼재, Ⓒ 행위의 결과로서의 원인, Ⓓ 원인의 원인의 모태인 마음이라는 곳간이라는 것에서 '마음의 행로'가 눈을 뜨게 하거나 눈을 멀게하는 근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 Ⓒ, Ⓓ를 통해 ‘눈 먼’ 이가 왜 은총을 망각하게 되는지 그 내면을 따라가 보아야 할 이유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위선자’ ‘들보’ ‘티’라고 지칭된 것을 윤리적인 죄의 유무라기 보다는 더 포괄적인 '애주애인'의 근본정신의 상실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위선자는 다른 사람 앞에서 선을 과장하는, 선의 근원을 모르는 무지나 절망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에서 은총의 망각인지? 은총상태인지는 그의 행위, 감사인가, 사랑인가? 타자에 대한 판단인가? 비판인가? 연민인가? 변호인가? 윤리적 우월의식인가? 등등을 통해 은총지위의 현주소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은총여부는 그의 입에서 발설되는 그의 언어로 알 수 있다는 것, 즉 그의 마음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는가 아닌가 라는 것에서, 무신론자의 마음에 없는 그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너무나 절대적으로 열심히 부르고 추구하는 열성 신자들에서 망각된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중 8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루카 7장 36절 이하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과 바리사이파 시몬을 연결해 ‘눈먼 사람’에서 눈뜬 사람으로, 혹은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눈이 먼 상태의 결절점이 ‘자유의지와 은총의 관계’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선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죄 많은 여인이 죄를 용서 받는 것! 그것은 분명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은총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그 죄 많은 여인보다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아온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철저하게 계명을 지키고, 단식을 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바리사이 시몬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공로는 자신의 힘으로 쌓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많고 드리고 싶은 것이 많은 반면,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선행과 공로를 쌓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강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죄 많은 여인으로 상징되는 인류와 자칭 의인으로 상징되는 바리사이파 시몬은 은총론의 관점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은 것인가?
죄란 수평적 은총(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과 수직적 은총(하느님과의 관계)을 동시에 상실하게 만든다. 반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은 피안적은총(수직적 은총)을 통해 '창조적은총'을 상실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은총은 죄나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성화은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적인 사랑의 양도(讓渡)에 해당하는 ‘창조은총’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창조은총에 성화은총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레사케의 <은총론>에서 보듯, 그 은총이 세계 안에서(타자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 크로스적인 은총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은총은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직면한 인간의 ‘자기이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창조은총’을 받은 이들이 윤리적인 실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강론과 복음이 제시하는 바로 ‘눈먼 사람’의 상태일 것이다. 즉 ‘자기이해’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이해의 결여란 눈먼 상태이므로, 자신의 의지가 이미 은총임을 망각한 상태로, 은총의 고리가 끊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죄 많은 여인은 분명 죄를 통해 수직적 은총(하느님과위 관계)과 수평적 은총(자신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을 한때 상실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간절한 원의와 그분의 자비로 그녀는 다시 은총지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 시몬은 수직적 은총만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은총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율법정신 없는 율법을 지키면서, 타인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일삼는, 즉 수평적 은총과 수직적 은총을 죄 많은 여인과는 다른 맥락에서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은총의 상실은 상실한 지도 모르는 상실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상실에 해당한다. 복음은 이를 ‘눈 먼’ 상태라고 지칭하고 있다.
죄 많은 여인은 자신이 왜 은총을 상실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바리사이 시몬은 자신은 당연히 은총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총지위를 상실했다는 것!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습, 역사적 환경도 은총의 상실을 알 수 없게 이중의 잠금새가 된다는 것!
여기서 종교윤리나 율법만을 통해 수직적 은총을 추구할 때, 이것은 비세상적이요, 비구원적이며, 무신론적 행위로 넘어가는 은총망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불타는 하느님에 대한 지향과 의지가 오히려 은총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바오로 사도는 조건 없이 받은 ‘은총’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대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그것을 받았다면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무엇을 자랑하는가?(고린토전서 4,7)
여기서 ‘은총지위’를 산다는 것은 은총을 받았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우리는 그것을 자주 망각하는 것일까?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은총이 빗나가는 이유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조건없이 받은 은총이 왜 은총을 망각하게 만드는가를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은총을 받고도 은총을 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은총’과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와 나란히 경쟁하는 원천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인간이 자유를 구체적으로 가능케 하고 해방시켜 주는 자유로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자유는 고도로 자립할 수 있도록 정립된다(요한 밥티스트 메츠, 『세상을 위한 신학』)
하느님이 인간을 철저하게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은총의 망각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이 자유의지로 자신을 부단히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지가 은총을 가리게 되는 이유는 의지 자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바라볼 수 없다는 데서 그 1차적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의지 소유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물을 수 없을 때, 자만과 경쟁과 배타적인 어떤 고리속에 갇혀 수직적 은총을 망각하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부르면서 하느님을 망각하는 사태, 이 은총의 망각이 필연적으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못하는 이해의 결여를 낳고, 타자와 늘 경쟁관계를 유발하는 수평적 은총의 망각을 불러오고, 그것은 결국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의지가 은총을 가리게 되는 2차적 원인은 '은총의 즉시성'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강론에서 이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많다, 라고 미래시제로 은총을 사후보상으로 바라보는 그 자체가 오늘 받은 은총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 2차적 원인이 1차적 원인을 유발하고, 사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이 '오늘' '이미' 받은 은총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오늘'의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오늘의 사랑, 은총을 바라본 것 안에 모든 해방과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그분은 '오늘'의 은총과 사랑을 살기 위해서, '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사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뿐 아니라 예수 이전, 이후의 대부분의 인류의 스승은 눈 먼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눈먼 스승이 눈먼 제자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이를 복음사가는 눈먼 이의 비유를 통해, 은총을 망각한 사람이 은총을 망각한 사람을 끌고 가는 형국이라고 전하고 있다.
루카 6,39-45에서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전하는 그 마음에는 자신이 얼마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인가를 망각한 것에서 비롯된 '텅 빈 공허'가 담겨있다.
그 마음에 하느님이 있었다면 하느님이 주신 은총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은 담겨 있는 것을 우리는 밖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드러나든가, 내(텅빈 공허)가 공격적으로 드러나든가! 따라서 마음에 담긴 나라는 에고가 부여하는 '공허'가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들보’와 타자의 ‘티’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 해 본다.
[숨, 숨결, 그리고 숨을 쉬는 한 희망하라(Dum Spiro Spero)(키케로)
-‘은총’과 ‘자유의지’는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까?]
은총의 망각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은총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도 어떤 패턴이 존재할 것이다.
자신이 은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길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숨-숨결-희망>이라는 패턴을 가동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숨'은 우리가 생명으로 왔을 때 지니고 온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육체적인 '숨'이기도 하고 '성령'이기도 하다. 우리는 두 개의 '숨'을 쉬는 존재다. 두 개의 '숨' 가운데 하나만 쉴 수 없어도 은총은 망각된다.
두 개의 '숨'을 쉴 때(하느님과의 관계-수직적 은총) 그 '숨결'을 나눌 수가 있다. (나와 나와의 관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수평적 은총) 진정한 나눔은 나눈다는 의식조차 없이 나눠지는 것이다. 내 존재 자체가 그분이 불어놓은 '숨'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을 쉴때 나 지금 숨쉰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 존재가 실은 은총의 파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숨결'이 모든 관계가 지닌 축복의 문을 연다고 할 수 있다.
‘숨을 쉬는 한 희망하라’는 라틴어 격언은 그래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세상을 위한 신학』에서 “종교는 우선 멈춤Unterbrechung”을 제언한다.
우리가 받은 은총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늘 숨쉬기 위해서 우리는 걸어가는 그 시간만큼 멈춰야 한다는 제언이다. 멈춘다는 것은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때만이 우리가 사랑과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마중물인, '기도-단식-자선'은 무엇인가? '기도'는 그분과의 관계 정립인 수직적 은총을 바라보는 시간이라면, '단식'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자선'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수평적 은총을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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