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1)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1)
[사 순 제 5 주 일 (다 해) 2022. 4. 3, 요한 8,1-11 ]
1.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
이렇게 아름다운 시의 제목이 있는가?
시를 읽어본다.
①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 유명에서처럼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나 한 마디도 그 뜻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느끼는 건 너희들의 숨소리. 소녀여, 어디에서들 안재하는지. 너희들의 호흡의 훈김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청춘을 느낄 따름인 것이다.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던 것인가? 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 우에선 한 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핏줄을 그리며 구름에 묻혀 흐를 뿐,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 마음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내 생명의 환희를 이해할 따름인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라서, 오후의 산그리메가 밝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 속의 네 개의 바다와 같이 네 소녀는 네 빛깔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소리, ......순네가 아르켜준 상제님의 고동소리, ......네 명의 소녀는 제마닥 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구부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후회와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 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붙잡히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담담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 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 뿐 나보다는 더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여긴 오지 마......애살포오시 웃음 지우며, 수류와 같이 네 개의 수류와 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 두 손, 역시 하늘에는 종다리 새 한 마리,---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마......여긴 오지마......//②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아파 할 때는, 네 명의 소녀는 내 곁에 와 서는 것이였다. 내가 찔렛가시나 새금팔에 베혀 아퍼헐 때는,어머니와 같은 손가락으로 나시우러 오는 것이였다.// 손가락 끝에 나의 어린 핏방울을 적시우며, 한 명의 소녀가 걱정을 하면 세 명의 소녀도 걱정을 하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 상처기는 어쩌면 그리도 잘 낫는 것이었든가.//정해정해 정도령아/원이왔다 문열어라,/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푸른꽃을 문지르면/푸른숨이 돌아오고.// ③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몇 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여 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야 내 소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 것이다. 내 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 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병이 낫기만을,그 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④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는 인간의 근원체험에 관한 시로 읽을 수 있다. 이 근원체험은 유년시절 고향에서 만난 네 소녀와 함께 했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 하는 네 명의 소녀의 뒤를 따라서, 오후의 산그리메가 밝히우는 보리밭 새이 언덕길 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그 소녀들과 함께한 시간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축약된다.
①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②소녀여 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③소녀여. 비가 개인 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④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
고향는 곧 소녀들이었고, 고향에서 만난 소녀들은 화자가 이 세상의 어떤 환란과 격정의 시간에서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이었고, 살고 싶게 만들었고, 시를 쓸 수 있게 했던 바로 그 힘이었다.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돌아오고,/푸른꽃을 문지르면/푸른숨이 돌아오고”
붉은꽃은 붉은 피였고ㅡ 푸른꽃은 푸른숨이었던 바로 그 시간, 사랑은 사랑이었고, 하늘은 하늘이었고, 들은 들이었고...그 어떤 것도 비틀리거나 왜곡되지 않는, 설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시간, ‘근원 체험’이었다. 마치 막달라마리아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해 준 분의 죽음을 예견하고 눈물로 자신의 머리로 그분의 장엄을 씻어주는 바로 그 순간과 동일시된다.
2.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스프노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이리도 살고 싶은가?"
참고 및 재인용
[용서의 완성, 타자에로의 초월(超越)과 타자에로의 열망(熱望)http://blog.daum.net/m-deresa/12389476]/고백하는 자의 모나드엔 창이 있다/없다http://blog.daum.net/m-deresa/12389721] |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타인이 규정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규정하는 그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단지 정체성의 확인에 그치지 않고 나를 계속 살고싶게 만드는 동인에 해당한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되는 것은 결국 내 근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문제와 맞물린다. 내가 저 자연의 원소로 환원하기 위해 하루하루 소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갖든 안 갖든 근원(신)에 대해 묻게 된다.
이 물음은 신을 어떻게 현존하는 분으로 체험하는가와 닿아 있다.
(재인용)우리의 사고의 틀 안에 인간에 대한 존재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든 안 믿든 <신>에 대한 어떤 관념도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설정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스피노자347)
하나의 단자(모나드Monad) 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의 내부에 영향을 받거나 변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라이프니츠)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보았으며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타자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점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조건인 정서는 신을 사랑하는 어떤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어떤 정서(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들까지)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크기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행위의 결과물을 신에게 돌릴 수 없고, 고스란히 자신에게만 돌려준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자기 원인을 갖고 있으며” 그로인해 무한, 영원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 는 라이프니츠의 관점은 신과 인간에 대한 필연적 존재이유를 완전성에서 본다. 모나드에 창이 없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의 필연적 완벽함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나드(단자)인 인간 개개인은 어떤 내적인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 세계의 인과적인 영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설정의 전제가 <신>이라고 보고 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인류가 신중심의 시대에 회의를 품고, 이성의 시대를 꽃피울 때,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어떤 물길을 열었지만, 스피노자를 창이 있는 모나드로 보았다면, 라이프니츠는 창이 없는 모나드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 혹은 창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신과 '동일자'로 볼 것인가 '종속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종속자'로 보는 견해는 겸손이라는 외피로 자기 실현의 상한선을 미리 정하고, 여차하면 언제나 '죄'로 자신을 도피시킬 배수진을 친다는 것이다. '죄'는 한계라는 이름의 윤리적인 울타리치기로 본 것이다. 신을 앞세워 죄책감과 두려움을 팔지 말라는 것이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고 한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물질세계에서 더 쪼갤 수 없는 입자를 원자라고 부른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세계에서도 그런 입자가 있다고 상상하고 이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닫힌 모나드’라 부른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모나드가 모여서 어떻게 질서 있는 세상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를 고민한 라이프니츠는 문이 없는 모나드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 즉 신의 의지를 도입해야 했다. 서로 다른 모나드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처음부터 신에 의해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맞물리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존재자는 구체적으로 개별자들이며 각 모나드 안에는 신이 미리 배려한 조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모나드 사이의 상호작용은 단지 감각적 현상일 뿐이며, 모나드는 이미 자기완결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여기서 모나드(단자)는 '단일의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인간 개개인이라는 모나드가 지금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영적 초기 상태를 사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본 것이다. 현상과 실재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신>을 '자기원인'으로 본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스피노자는 정서와 의지를 지닌 유한의 운명에 놓인 인간은 자기원인이라는 신을 알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영적 진화의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정했다. 종교 안에서의 신에 대한 이해와 같은 맥락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인간은 그 자체로 신을 닮은 완결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신의 모상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신이 준 선물을 신이 제한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신이 그것을 회수라거나 제한한다면 신은 자기모순을 겪는 것이므로) 신은 자기모순을 겪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스피노자의 입장에서는 선악으로 나눠질 수 있는 '과정의 실재'지만, 라이프니츠에게는 오직 모나드의 자기변화의 운동으로 보았다는 '실재의 실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많은 영성가들은 놀랍게도 라이프니츠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서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과 인류를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빛과 어둠을 같은 것으로 바라본다. 빛과 어둠, 빛과 그림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아름다음과 추함이라는 이분법을 마음(에고)에서 내려놓는 순간, 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역설이다.
종교 안에서, 종교 밖에서 신을 바라보는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나눠지는 결절점이자, 바로 인류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진단키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의 본성, <단일체, 통일성, 자율성, 운동성, 완전성>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된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고귀한 헌사 혹은 선취의식에 해당한다. 되어질 것을 이미 된 것으로 바라보는 선취의식! (상호텍스트적인 글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스피노자를 읽은 다음, 들뢰즈를 읽고, 그 다음 라이프니츠를 읽으면 좋을 듯하다)
우리 고백의 과정도 에피쿠로스와 아우렐리우스처럼 이분법으로 나눠진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결합한 인간으로 바라보거나,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인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현상과 실재를 다른 차원으로 라이프니츠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고백의 현주소는 바로 이 가운데 어떤 단계를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라는 이 고백은 너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어떤 틀이라고 할 수 있다.
3.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1-11
무엇을 죄라고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 [고백하는 자의 모나드는 창이 없다/있다]에서 우리가 과연 죄라고 고백해야 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본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죄와 죄책감은 무엇이고, 용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요한 8,1-11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같은 요한 8,1-11을 세 개의 질문으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Q1. 죄란 무엇인가?
요한 8,1-11에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용서(치유)로 모아지는 다섯 개의 대화 속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온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위의 다섯 개의 대화는 인류와 예수님이 ‘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전반부) --------------------->ⒸⒹⒺ(후반부)
전반부는 인류(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가 지닌 죄에 대한 개념이라면, 후반부는 예수님이 바라보는 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죄의 개념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전반부가 부분적인 죄라면 후반부는 상당히 포괄적인 죄에 해당한다. 예수님에게 있어 '죄'의 스펙트럼은 포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라는 말씀에서 ‘죄’는 분명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예수님을 분명히 하신다. 남이 아는 죄가 있고 남이 모르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남은 자신을 포함한 포괄적 타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죄란 항상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죄의 유무로 인류를 구분할 때, 자타가 인정하는 자명하게 죄 있는 사람과 드러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뿐 아니라 타자에게 ‘단죄’의 잣대를 들이대는 인류 모두가 죄인이라는 포괄적 죄를 분명히 하신다.
그럼에도 죄는 존재하지만 단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에서 '죄'와 ‘단죄’ 와의 관게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죄는 있지만 단죄하지 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산다는 자체가 죄와 무관치 않다는 의미일 것이고, 모두가 죄인이라면 누가 누구를 단죄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내포한다. 단죄는 주체와 대상이 있는 개념이다. 주체도 죄인이고 대상도 죄인이라면 그 죄의 경중을 무슨 기준으로 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간음이라면 상대 남성이 있을 터인데 왜 이 여인만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가만 보아서도 단죄자인 고발당자들이 이미 죄인임을 고백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인에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권유에서 다시 죄의 유무가 삶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의 단죄유무와 낙인효과와 무관하게 죄는 본인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8,1-11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전에 죄가 과연 무엇이기에, 또 무엇을 죄라고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 죄가 단죄와 용서를 어떻게 유발하는 것인가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리 때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해 보자. 토마스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는 ‘칠죄종’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인간을 이해한다. 그것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 앞에 놓여 있다는 인간의 실존상황에 대한 상황이해 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교만, 인색, 음욕, 탐욕, 시기 분노, 나태>라고 말하는 칠죄종은 몸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마음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음상태가 몸으로 표출된 것, 즉 물질화된 것이 인류는 그동안 ‘죄’라고 단죄했고. 공동체의 질서나 물질적 혹은 신체적 피해를 입힐 때 공공선을 내세워 법적인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몸이나 물질로 표출된 죄는 공동체의 이익질서에 파탄을 낳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간과하면 그 사회는 도덕의 무정부상태 아노미상태에 빠지고 결국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행위이전의 어떤 사람의 마음상태까지를 죄라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라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몸으로 표출된 것, 즉 명명백백하게 표면화 된 것을 죄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협의의 의미로 죄를 국한시켰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드러난 죄, 즉 성서에 나오는 간음 한 여인은 물론이거니와 예컨대, 아무도 모르게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하거나 밤새도록 포르노영상에 감염된 정신적 간음상태까지를 예수님은 죄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장자의 제물론에서 호접지몽(장주지몽), 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심리학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은 나비와 나를 혼동한 것은 나비를 욕망했기 때문에 내가 나비와 착시현상을 일으겼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은 꿈으로 표출된다는 꿈의 해석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마음과 행위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고백의 기도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에서도 그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위를 낳는다는 것. 단지 행위로 표출된 것만을 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도처에 죄지을 기회다. 남편보다 멋있는 남자, 부인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으로 수도 셀 수 없는 정신적 간음을 범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마치 정신적 간음자가 행위적 관음자를 단죄하면서 죄의 옷을 껴입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위로 표출되지 않은 유예된 마음의 상태까지를 죄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죄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의 바탕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진다. 또한 그 말을 알아듣고 떠난 그들 역시 그들의 마음상태까지, 즉 남 몰래 지은 죄까지를 그들 역시 죄라고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나는 좌인이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라는 모순적인 자기이해의 딜레마를 한평생 겪는다. 자신이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론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그 딜레마가 무엇인가. 죄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자신의 마음상태까지를 바라본 것이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표출된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Q2. 그렇다면 죄책감은 무엇인가?
우리는 죄를 싫어하면서 왜 죄를 짓게 되고 그것이 왜 문제인가? 성서에 나온 간음 당사자와 그들과의 인연이 문제인 것이지 왜 간음이 사회의 문제인가? 죄를 ‘중심에서 벗어남’, ‘과녁에서 빗어남’이라고 할 때, 그 중심과 과녁은 무엇인가? 오늘 성서를 바탕으로 보자면 그것은 ‘자기애’의 결여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 아닌 것(쾌락)을 자신에게 축적시킨 것이 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의 행위가 반복될 때 그것은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자기인격의 혐오를 낳고 인격의 혐오는 타인에 대한 방어기제를 낳고 그 끝은 유다의 예에서 보듯 죽음에 이르는 병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죄책감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는 것은 남이 알게 죄를 짓는 것도 남이 모르게 죄를 짓는 상태와 행위 모두가 ‘자기애’라는 중심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므로 자기를 진정으로 다시한번 사랑하라는 권유라고 할 수 있다.
자기애는 최초의 사랑의 출발점이다. 예컨대, 밤새도록 야동이나 포르노영상을 보고,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이튿날 자신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소임, 이타적 행위를 할 수는 슈퍼울트라가 과연 있을까?. 숙면을 취하는 것, 과식이나 과음하지 않는 행위 역시 자기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죄의 포괄성이란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개인적 습벽까지 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애에서 벗어난 사람이 이타적 행위를 할 리도 없고. 신의 사랑을 알리도 없을 것은 뻔한 이치다. 사칙연산도 하지 못하는 학생이 미적분을 풀 수는 없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친구에게 진정한 우정을(조폭이 아니고서는)행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랑은 분리가 없는 상태, 모든 것과 이어진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죽었다깨어나도 사랑할 수 없는 원수인데, 너만은 사랑해!라는 고백 역시 실은 외로움과 배타성의 표현이지, 사랑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죄란 과도한 쾌락이나 욕망을 자신에게 쌓아서 자신을 자신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동양 철학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중용의 덕>과 연결해 일괄해서 바라보기도 한다. 이 세상의 사물과 사람에게, 즉 욕망과 칠정에 균형감각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덕의 상실, 죄의 경향으로 기울어진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지나침은 죄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수신'의 경계다.
Q3.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이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보다 더 그 여인의 인격을 소중하게 다뤘다는 것에서 용서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게 만든다. 신학적 종교적으로 용서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겠지만 성서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인에 대한 ‘바라봄’은 여인이 미처 바라보지 못한 그녀 자신에 대한 인격에 대한 바라봄에 해당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그분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표출된 행위(부분으로)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로 바라보는 것이 용서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영성가들은 용서란 타자에게 ‘영원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영원은 무시간 개념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오늘’만 보는 행위란 그에게 영원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에 초점을 맞춘 시간개념으로는 용서라는 지평을 결코 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판단이나 평가가 개입된(과거) 평가는 단죄이지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는 달리 말해 타인에게 ‘오늘-영원’이라는 무시간성의 문을 열어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행위자 본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의 아름다운 창조의 원천을 ‘오늘’ 바라보게 돕는 행위,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은 ‘용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적행위’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 칼 러너는 『영성신학 논총』에서 지향과 행위의 이중일치에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의 행위를 보고 타자가 누구인가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용서는 흔히 나로부터 누구에게로라는 흐름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저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에서 용서의 궁극은 내가 누구인지와 그가 누구인지를 동시에 규정하는 신적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용서는 그분의 현존을 알 때만이 할 수 있는 신적-행위라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서정주)
우리는 언제 살고 싶은가?
자신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원형체험을 할 때일 것이다. 이 원형체험은 단지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정하는 그런 차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안 사람은 네가 누구인지도 알기 때문이다.
이렇듯, 용서는 너와 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동시에 바라보는 원형체험을 하게되는 신적 행위에 우리가 동참하는 일이다.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현존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는 용서가 마치 조건부적인 문맥으로 제시되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타자의 축적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 그리고 영원히' 변치않을 원형을 바라볼 때, 나의 원형도 비로소 보게 된다는 원형인지의 메커니즘이 '용서'라 할 수 있다.
용서가 미처 ‘뉘우치거나 통회할 순간도 없이, 감히 청하거나 청할 수도 없는 순간에’ ‘은총’으로 주어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천사고 너는 악마일 수 없다. 개과천선을 한 다음에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규정이 곧 나에 대한 규정이기에 그렇다. 그의 과거가 아니라 그의 영원한 원형이 바로 나의 원형임을 바라보는 것이 신적 행위에 동참하는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Q에게 (0) | 2022.04.17 |
---|---|
별이 빛나는 밤에 열일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생각함 (0) | 2022.04.10 |
'있음'의 근원, ‘현존’이란 이름의 '4월의 크리스마스’ (0) | 2022.03.31 |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그의 반(半)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0) | 2022.03.25 |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0) | 2022.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