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Q에게
-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20,1-9)
[주님부활대축일 (다 해) 2022. 4. 17, 요한20,1-9 ]
1.안도현, 「강」 & 엘리엇트,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춘수(春瘦)’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 춘수(春瘦)다.
생명이 겪어내는 지독한 몸살이다. 현상이다. 대책없는 자기 운명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피고 지는 꽃처럼, 자기 이름을 부르며 날아가고 날개를 접는 새처럼, 자기 이름을 부르며 흐르고 또 흐르는 강물의 뒤척임처럼 아무도 모르게, 자신조차도 모르게 몸이 마르는 현상이다.
안도현의 「강」을 읽어본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 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안도현의 「강」은 해석이 필요없는 시다. 신은 우리에게 오기 위해 ‘사랑’을 만들었고 나는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랑'으로도 '강'으로도 인간에게 오지 못하고, 너에게 닿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에 대해 T.S 엘리엇트 「황무지 중-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에서 이렇게 전한다.
사월을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살려주었다.
로이드 은행의 은행원이었던 엘리엇(1888~1965)은 1922년 <크라이테리언>이란 잡지를 창간하고 433행의 장시 「황무지」를 발표한다. 이 황무지는 1차세계대전 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청년들의 내면과 전쟁이라는 폭력이 파괴한 세계정신의 상실, 즉 인간이 한 생명으로 걸어갈 힘의 상실에 대한 만가로, 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 등의 시구에 대한 암시와 인용,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웨스턴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 등에 나타나는 성경, 종교적 제의, 성배 등 신화와 종교를 아울러 인류가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춘수(春瘦)'에 대해 전한다.
「황무지 중-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대부분 암송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회자된 부분에서 ‘사월’의 생명력을 견디지 못하는 인류의 집단 ‘임사체험’에 대해 전한다.
이제 죽어볼 만큼 죽어봤으니 살아 볼 일만 남았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설득당하지 않는 인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여전히 “겨울은 따뜻했었다”라고 기억속에서 잠자고 싶어한다.
지난 겨울은 모두에게 죽음과 같은 계절이어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으나, 사월은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라 내가 죽어 있는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계절 앞에서 자기 실존의 현주소를 본 것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 것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활한 자연처럼 오래, 잘, 살고 싶어하면서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삶의 방향이 생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설사 삶의 방향을 알고있다 하더라도 그 곳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즉 보는 것 이상으로 걸어갈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고할 수 있다.
생명을 바라보지 못해서 죽은 사람과 생명을 바라보았음에도 죽은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마치 창문을 조금 열고 또 봄이 왔구나, 벚꽃이 피었구나, 벌써 꽃이 졌구나, 라고 관찰자가 되어 생명의 박탈감을 느끼는 어떤 집단적 임사(臨死)체험에 관한 것이다.
「황무지 중-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바로 이런 질문-생명과 죽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생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설요, 「반속요返俗謠」 )
신이 인간에게 오기 위해 ‘사랑’을 만들었고, 내가 너에게 가기 위해 ‘강’을 만들었지만 아직도 먼데서 오고 있는, 오래 전부터 오고 있는 이 진행 중인, 유예된 만남의 이유를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인 춘수(春瘦)”에서 바라보고 있는 김훈의 명문, 에세이의 한 부분을 읽어보기로 한다.
김훈의 『자전거 기행-꽃피는 해안선』에서,
①13세기 고려 선종 불교의 6세 조사 충지(1226~1292)는 지눌(知訥) 문중의 대선사였다. 송광사에 오래 머무르면서 왕이 불러도 칭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충지는 초봄에 입적했다. 충지는 숨을 거둘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하구나. 너희들은 잘 있으라.”라고 말했다. 대지팡이 하나로 삶을 마친 이 고승도 때때로 봄날의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산사의 어느 봄날에 충지는 시 한 줄을 썼다.
“아침 내내 오는 이 없어(終朝少人到)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杜字自呼名)”
이것은 깨달은 자의 오도송(悟道頌)이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의 봄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이 그리움은 설명적 언어의 탈을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그리움의 길은 출구가 없다. 봄의 새들은 저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울고,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울음은 끝끝내 위로 받지 못한다. 봄에 지는 모든 꽃들도 다 제 이름을 부르며 죽는 모양이다.
②설요(薛瑤)는 한국 한문학사의 첫 장에 나온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그 여자의 몸의 아름다움과 시 한 줄만이 후세에 전해진다. 그 시 한 줄은 봄마다 새롭다. 이 젊은 여승의 몸은 꽃 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을 써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瑤草芳兮春思芬)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蔣奈何兮是靑春)”
한문학자 손종섭은 이 시에 대해서 “아, 한 젊음을 늙히기에 저리도 힘듦이여!”라고 썼다. 이 노래의 제목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노래(返俗謠)>이다. 절을 떠날 때 그 여자는 스물한 살이었다. 속세로 내려와서 그 여자는 시 쓰는 사내의 첩이 되었고, 당나라를 떠돌다가 통천(通泉)에서 객사했다.
충지와 설요의 예에서 보듯, 봄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으로 우리에게 온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어떤 종교적 면벽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속수무책으로 우리를 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7세기의 봄과 13세기의 봄이 다르지 않고, 올 봄이 또한 다르지 않다. 그 꽃들이 해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고, 지금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분명 '꽃이 피었다'는 사실은 자연현상이다. 이 자연현상 속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다. 거시적인 에너지의 약동이 모든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훈은 이렇게 적는다.
“봄은 숨어 있던 운명의 모습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봄빛 속에서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 춘수(春瘦)다.”
우리에게 숨어 있던 운명은 무엇인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무한과 영원과 불사불멸을 구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에 갇혀 있는 그 사랑이다.
3.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20,1-9
성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고 '저 위'에 것을 추구하라고 제언한다. 언뜻 인간을 몰라도 참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다.
누군가는 이 봄을 견디지 못하고 '저 위'를 바라보던 눈을 거두어 세속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요한20,1-9은 <‘빈 무덤’을 통해 본 예수 부활의 세계사적 ‘무게’- The "Height" of the World History of Jesus Resurrection through the "Empty Tomb"? 혹은 <‘빈 무덤’을 통해 본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역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성서는 어떤 부분도 쉽지 않다. 조상대대로 신자인 태중교우이고 뼛속까지 예수쟁이임에도 매번, 너무, 정말 어렵다. 체험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기에 어렵다. 타자의 체험을 내 체험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늘 어렵다.
어떻게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가 부활에 대해 이해하고, 이 세상의 순례를 하는 우리가 늘 '저 위'의 것만을 추구할 수 있을까? '저 위'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요한20,1-9을 읽어본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나에게 예수님 부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해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매해 이 의미가 전부이려니 했다가 다시 새로운 의미 앞에 서게 되면서 예수님의 부활도 내 안에서 완성의 과정을 거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부활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고도 부활을 이해하겠다고 한 것을 생각하면, 부활은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만큼의 사랑을 한 후, 결국 죽은 다음 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부활하면 떠오른 인물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스, 베드로, 바오로 사도’ 네 사람이 그렇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부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에 대한 ‘혈’을 정직하게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와 베드로는 다음주, 그 다음주 묵상의 주제로 남겨두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바오로 사도의 상반된 부활체험에 초점을 맞춰본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리아 막달레나는 네 복음서에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예수님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셨어도, 부활하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다.(예수님의 부활이 죽음을 이긴 사랑이라면 죽음조차도 사랑한 그녀의 사랑은 무엇이라 이름할까?) 그녀는 사랑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류의 상징에 해당한다. 죽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 그녀가 빈 무덤에서 그분의 부할을 만났다는 것,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명'이라는 것을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준 희망의 얼굴이다.
네 복음서는 그녀가 빈 무덤 앞에서 계속 떠나지 않고 있음을 전해준다. 그녀는 울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계속 찾고 있다. 여기서 '빈 무덤'이 그녀에게 부활을 깨우쳐주지도 못했고, 그녀를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사랑이 ‘빈 무덤’ 앞에서도 멈추지 못했던 것! 그녀가 찾아 메헤면서 그 '빈무덤'을 통과했다는 사실만이 참으로 중요하다. 목마르게 찾아 헤멨던 사랑이 어떻게 사랑으로 완성될 수 있는가를 그녀는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이 부활했어도, 부활하지 않았어도 상관없는 인물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전서 15장에서 피를 토하듯 토로한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이자, 바오로 사도의 존재이유에 해당한다.
바오로 사도의 다마스커스 체험(사도행전9장)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는 바오로의 예수님 부활체험은 그분이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바오로를 통해 보여준 사건이다.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모든 면에서 안티-테제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박해한 행동대장이었던 그에게 느닷없이 그는 예수님 부활(현존)을 체험 한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폭풍처럼 당도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알려준 ‘하나니아스’를 만나기 전 까지 눈이 먼 채로 다마스쿠스 유다의 집에서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도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에서 자신의 ‘빈 무덤’을 목격한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 예수님의 부활
바오로의 다마스커스 체험<---------------예수님의 부활
막달레나와 바오로의 예수님 부활(현존) 체험 앞-뒤에는 ‘빈 무덤’이 있다. 그것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이 목격하게 되는 신앙의 빈 무덤이자, 파토스를 지닌 이들이 자신이 추구하던 길에서 만나게 되는 '빈 무덤'이다. 누구도 그 빈무덤을 스스로는 통과하지 못한다. ‘빈 무덤’을 통과하는 현존의 매개항은 공통적으로 그분에게서 온 ‘사랑’이었다. 그 현존 체험은 막달레나나 바오로가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다가옴’ 이었다는 데 있었다.
이 '다가온' 부활(현존) 체험에 대해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그들에게 닥쳐오고 그들의 회의를 무릎쓰고 그들을 압도하여 확신을 갖게끔 한 사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다보면 타자가 나를 채워줄 수 없고, 내가 타자를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어떤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관계의 ‘텅 빈 무덤’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랑은 그분이 완성시켜준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그래서 아예 사랑이라는 이상한 가역반응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이별이다.
롤랑바르트는 이를 ‘비소유의지’라고 부르고 프로이트는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사랑함에도 충족이 연기된 이유에 대해,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임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시간 저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는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신의 부재는 더 이상 무한을 향해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울 향햐 문을 여는 것이다. 신의 부재는 신보다 더욱 위대하고 더욱 신적이다”(사르트르, 『윤리에 관한 노트』)
위에 예로든 막달레나, 바오로 사도, 신학자, 철학자 모두 ‘신’이든 '사람'이든 사랑의 체험은 ‘밖으로부터’ 온 것임을 전하고 있다.
‘밖으로 온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철저하게 ‘빈 무덤’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밖으로부터'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 현존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부활과 빈 무덤'과의 관계, '빈 무덤'은 이 세계의 물질의 질서를 벗어난 사건이다. 그러기에 ‘빈 무덤’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신앙과 믿음이 갈라지는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으로 나누어지는 지점. 신자와 비신자로 나눠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빈 무덤은 인정하지만 구세주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빈 무덤은 그냥 빈 무덤일 뿐이다.(마태오 27장, 28장)
장 뤽 낭시는 『나를 만지지마라』에서 빈 무덤이 왜 ‘신앙과 믿음’으로 갈라지는 결절점에 해당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그 만짐은 너를 떼어 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안에서 (사랑과 진리)그것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말라』)
낭시는 예수님만의 부활을 ‘성서적+교리적’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행위를 ‘신앙’이라고 보았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구체적인 삶에서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힘 ‘바깥에 있는 것’을 깨닫는 행위가 바로 '믿음'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했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이고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그분의 현존체험을 '믿음'이라고 본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 모든 있음의 근거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고, 불사불멸, 영원, 무한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근원을 바라보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앙과 믿음으로 갈라지는 이 ‘바깥의 힘’을 체험하는 것이 ‘빈 무덤’ 체험이 내재하고 있는 함의라고 할 수 있다.
‘빈 무덤’을 통해 ‘부활’을 성찰하는 것은 두 개의 질문을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것과 같다.
Q1.‘빈 무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할 수 있는가?
Q2. 아님 부활하셨기 때문에 ‘빈 무덤’이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그 방향에 따라 성찰의 방향이 달라진다.
‘빈 무덤’은 예수부활과 관련해 세계사적 의미를 바라보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예수 부활이 단지 기독인의 축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빈 무덤’이 예수부활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상황적으로 막달레나의 경우처럼 완전히 비어버린 ‘빈 무덤’과 같은 실존의 경험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고, 바오로 사도처럼 존재론적인 빈 무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빈 무덤'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빈 무덤'을 그분과 연결하여 바라보고 인지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빈 무덤과 부활을 인과적으로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따라 신앙과 믿음으로 갈라진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그 결과로 무덤이 비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무덤이 비어있으니까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부활을 부인한 이들도 무덤이 빈 사실만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비어있는 무덤을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간 결과라고 여전히 예수의 부활을 빈무덤과 연결하지 못한다.(마태오27,62-66/28,11-15) 그들은 아직도 집단무의식이라는 ‘빈 무덤’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라고 치부해야 할까? 이님 그 마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바라보아야 하는지?
다시 정리해 본다.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가 ‘빈 무덤’을 통과하는 매개항은 그분에게서 온 ‘사랑’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 '사랑'이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사랑'의 최종 완성자는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1에 그분의 99가 담겨 무한이라는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바오로나 막달레나를 통해 우리에게 온 부활의 희망은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분이 완성시켜 준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가 ‘저 위’를 추구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장소적 하늘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그 '사랑의 근원'을 바라보라는 제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부활을 통해 우리가 믿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저 하늘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고서는 죽음을 이긴 부활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을 [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Q에게]라고 했다.
부활은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빈 무덤'을 통과한 이들이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그 축복은 우리가 하는 사랑이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걸어가려고 할 때, 느닷없이 푹풍같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는 일이다.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춘수(春瘦)'를 스스로의 사랑으로 이겨내려 했던 한 젊음이의 충족의지를 그린 소설이다. 그는 붙같은 사랑을 했지만, 그 불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타버린 이카루스의 날개, 우리 안의 영원한 젊음 혹은 질풍노도에 대한 초상이다. 베르테르는 스스로의 열정으로 사랑을 완성하려 한 미완의 파토스에 해당한다.
2022년 부활에 대해 이런 단상을 적어본다. 사랑을 하는 것도 부족하고 사랑 받은 것을 알아보는 것도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이지만...그럼에도 사랑하려고 했던 날들, 그리고 늘 목말랐지만 사랑 받았던 날들을 찬찬히 다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2022년 부활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했던 사랑이 우리를 채워주지 못했다면, 분명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 그만큼 크기 때문임을 역설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었다. 또한 그 사랑은 우리 힘만으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본 시간이기도 하다. 하여, 이 순례의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이 알려준 그 사랑,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을 사랑으로 알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79억 5천만명의 Q(인류)가 각자의 '빈 무덤'인 '춘수(春瘦)'에서 벗어나 저 지천으로 꽃들이 피고지는 들로 자주 나가갈 기도한다. 우리 각자가 그분께 얼마나 소중한 생명이며(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줄 만큼), 사랑받은 생명인지,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인가를 바라보았음 좋겠다! 그곳에서 우리 각자의 막혀있는 생의 문제들에 대한 매듭도 그분의 사랑으로 명쾌하게 풀리길 기도해 본다. 무엇보다 건강을 잘 챙기시길!!!
ⓒ 이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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