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형이상학적 ‘망설임’은 왜 시간으로 나타나 공간으로 수렴될까?

나뭇잎숨결 2022. 5. 2. 15:37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적 망설임은 왜 시간으로 나타나 공간으로 수렴될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19)

 

 

 

 

 

[부활 제3주일 (다 해2022. 5. 1, 요한20,19-31]

 

 

 

 

1. 마야 안젤루, 「나는 배웠다」

 

 

①나는 배웠다/어떤 일이 일어나도/그것이 오늘 아무리 안 좋아 보여도/삶은 계속된다는 것을/내일이면 더 나아진다는 것을/②나는 배웠다//궂은 날과 잃어버린 가방과 엉킨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이 세 가지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다는 것을/③나는 배웠다//당신과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하든/그들이 당신 삶에서 떠나갔을 때/그들을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④나는 배웠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삶을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을/나는 배웠다//삶은 때로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것을/⑥나는 배웠다// 양쪽 손에 포수 글러브를 끼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무엇인가를 다시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⑦나는 배웠다//내가 열린 마음을 갖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대개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⑧나는 배웠다//나에게 고통이 있을 때에도/내가 그 고통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⑨나는 배웠다// 날마다 손을 뻗어 누군가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사람들은 따뜻한 포옹,/혹은 그저 다정히 등을 두드려 주는 것도/좋아한다는 것을/⑩나는 배웠다// 내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것을/⑪나는 배웠다//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 당신이 한 행동은 잊지만/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을//

 

 

마야 안젤루는 「나는 배웠다」를 읽어보면,

 

존재한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도 배웠고, 오늘도 배우고, 내일도 배우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은 다르게 표현해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인연, 모든 사물은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에게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신은 자신의 아들과 창조된 우주를 총 동원했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나조차도 결국 나의 스승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야 안젤루의 「나는 배웠다」를 읽다가 멈춘 부분이다. 나는 배웠다//삶은 때로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것을/

 

사람들은 흔히 삶은 우리에게 적어도, 최소한 세 번의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마야 안젤루는 왜 세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고 했을까? 아마 그것은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이라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 것을 말함이 아닐까.

 

그동안 사람들이 말하듯, 삶은 우리에게 적어도 세 번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거 같다. 그런데, 2022년 부활을 묵상하면서 숨 쉬는 만큼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드로 사도가 야곱과 오버랩되어, 축복을 받기 위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2. 형이상학적 망설임은 왜 시간의 얼굴로 나타날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배우기 위해 사랑의 웜홀이라고 생각하는 그 통로는 모두 다르다. 시간이 사랑의 웜홀, 진리의 본질을 내장하고 있다고 평생 시간을 화두로 삼았던 사유의 대가들이 있다.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나인 그것이자, 나였던 그것이고, 언제나 나일 그것에게]에서 재인용해 시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이미'를 유보하는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과거-현재-미래가 어떻게 '오늘'이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기 위해, 먼저 시간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11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에드문트 후설)

 

 

 

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임마뉘엘 레비나스)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마르틴 하이데거)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⑥에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간을 배워야 할까? 결론적으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를 이해하고, 살기 위해서다. 시간의 얼굴을 보아야 평화가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평화는 부활의 언어다. 즉 죽음을 통과해 우리에게 도착한 인사다.

 

 

 

 

 

 

 

 

 

 

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19)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라고 전하는 요한 21,1-19은 구체적인 삶에서 체험되는 부활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 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 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요한 21,1-19은 부활은 ‘완전히 비워졌을 때 채워 진다’는 "텅빈 충만"이라는 보편종교의 진리로부터 출발한다.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연결되고, 신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예수(사랑)라는 관념이 ‘양(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애인’을 통해 구체화되는 몇 겹의 부활패턴이 티베리아 호숫가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펼쳐진다.

 

부활은 하늘과 땅이 열려 있는 개념이다.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서는 막힌 데가 없이 열려야 한다. 부활1주에 <빈 무덤>을 통해, 부활2주에 <상처>를 통해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부활 자체도 (교리적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통로 역시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부활3주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라고 전하는 요한 21,1-19에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텅빈 시간>이 어떻게 <충만한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즉 베드로의 <시간>이 어떻게 부활의 열린 개념 속에서 ‘영원과 불멸’ 이라는 초시간으로 수렴되는지에 대한 구체화의 비젼이 제시된다.

 

요한 21,1-19에서 베드로의 <시간>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과 베드로와 제자들의 부활이 어떻게 다른듯 그러나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 때만이 우리도 우리의 부활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

 

세 갈래의 길을 따라가 본다.

 

 

(1)텅빈 시간 속에서 듣게 되는 것!

 

 

부활의 목격 증인인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 삶에서 표면적으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텅빈 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예수님과의 약속 뿐 아니라 그 무엇도 채울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출발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을 티베리아 호숫가라는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들은 3년전의 생존현장이자 영적체험의 원체험의 공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나는 고기를 잡으로 가겠네-우리도 함께 가겠소” 라는 대화에는 예수님의 부활로도 채울 수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존재의 배고픔이 느껴진다. 이는 막달레나가 체험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빈무덤’ 체험에 해당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왜 부활의 체험 앞에 이런 텅빈 시간의 체험이 필요한 것인가?

 

텅빈 시간에 대한 질문 자체에 부활은 이 세상의 것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답이 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체험은 언제나 그 텅빈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텅빈 시간’이 은총의 때라고 할 수 있다. 미친 듯이 달려간 곳에서 마주한 그 완벽하게 비워진 상태에서 이 세상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부활의 사랑은 내 힘과 의지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채울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이 무심한듯한 일상적인 질문에, 또한 무심하게 대답하는 일상의 어떤 시간 속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어떤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충만이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그분의 음성을  듣게된 시간의 체험! 내 의지와 힘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소생하듯, 주어진 들음에서 비롯된 충만의 체험! 그결과가 153마리의 고기로 상징되는 풍요로움이다.

 

텅빈 시간과 들음-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완전히 비워졌을 때, 먼저 그분이 '다가와' 들려준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항상 그분의 음성은 우리 곁에 있었다. 다만 세상의 소음과 내 자신의 욕망이 만드는 시끄러움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또한 그 음성은 어떤 특별한 음성이 아니기에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다.

 

이렇듯, 제자들의 세 번째 부활체험은 구체적인 일상안에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기적의 아침-텅빈 밤과 충만한 아침'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세 번의 질문과 세번의 대답!

 

제자들의 두 번의 부활체험은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인식의 차원이었다면, 세 번째 부활체험은 그들 역시도 부활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 앞에 그들도 마주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의 방향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제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님 부활의 목격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의 삶으로 살아야 할 시간 앞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성서해설서들은 베드로의 세 번의 배신을 세 번의 질문과 답으로 치유하신 관계회복의 포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은 예수님의 사랑을 교환적인 우정-필리아의 단계로 본 것이지, 무조건적인 아가페로 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상대의 수용 상태에 따라 사랑을 단계별로 쪼개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탕진의 자유까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준 사랑이었다. 그가 받아서 소화를 하든, 못하든 나뉠 수 없는 아가페라는 유산을 통째로 그냥 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경험을 소환해 보자. 우리의 관계는 여기가 끝이다, 라고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1도 없는 단절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건너갈 다리를 모두 끊어놓은 상태에서, 다시 관계가 회복되는 인연들은 지난날 섭섭했던 것들을 조목조목 재확인하면서 뇌에 저장된 파일을 하나씩 지우면서 관계를 회복하지는 않는다. 또 그렇게 해서 관계가 회복되지도 않는다. 관계의 소중함을 더 많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먼저, 그냥 상대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툭 던지는 말- 밥을 먹자든가, 서점을 같이 가자든가. 산책을 하자든가. 여행을 가자든가 등등 일상의 구체적인 동행으로 지난 시간들을 무심히 패싱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쭈욱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에 어떤 섭섭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할까만 그분에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관심사다.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신 분이 제자들의 두려움으로 촉발된 배신행위를 부활 후에도 잊지 않고 문제 삼았다고 할 수는 없다.

 

고기를 잡고 싶으면 고기를 잡고, 사람을 낚고 싶으면 사람을 낚아라, 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 선택의 여지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던진 것이다. 무엇을 하든 나는 너희들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혹자는 어정쩡한 대답이라고 바라보는 베드로의 세 번의 대답- 베드로의 더할나위 없는 아름다운 대답에서 사랑의 구체화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을 베드로의 형이상학의 망설임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왜 형이상학의 망설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 베드로는 기적의 아침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에 한발 더 다가선 상태다. 예수님 사랑에 다가가면 갈수록 사랑에 '무한'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기에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거 같았던 사랑조차도 실은 그분과 함께 했기에 가능했음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말하는 사랑에 관해 베드로 자신이 다 알지 못했다는 인식이 망설임의 어조 속에 담기게 되고 이제 사랑 앞에서 호언장담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분이 말하는 사랑은  끝없이 배워도 끝이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런 망설임 속에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베드로-예수님'이라는 직선코스가 아니다. '베드로-어린 양-예수님'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사랑 앞에서  불가피하게 형이상학적 망설임을 또 한번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세 번의 질문과 세번의 답에 대한 답 -내 어린양들을 돌보라는 것은 그들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그들이 지닌 사랑의 엄청난 크기와 깊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사랑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분이 다시금 그들에게 상기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앞에서의 망설임은 나 자신보다 더 큰 나를 감당하는 일이기에 그것을 온전히 바라보는 데 걸리는 시간차(망설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한을 유한에 담는 시간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요, 매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시간은 엄밀히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모님의 수태고지와 세례자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와 가브리엘 천사의 대화 참조) 형이상학적 망설임이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기에 그분의 어떤 부르심, 소명, 성소도 희생이 아니라 선물이고 은총이다. 너무 큰 은총이라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 앞에서 우리의 망설임! 내가 그 사랑을 온전히 잘 할 수 있는지? 그런 여러 갈래의 생각 속에서, 그분이 내가 하려고 하는 사랑에 대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래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이 말하는 사랑에 관한한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직관! 

 

 

(3)네가 원하는 곳-네가 원하지 않는 곳!

 

 

요한 21,1-19에서 말하는 사랑의 구체화의 최종지점은 18절과 19절로 모아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

 

요한 복음 사가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19)라고 덧붙인다.

 

베드로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저 부분을 읽어보면 스승이 제자에게 참 무서운 소명과 미래를 알려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욱이 복음사가는 ‘어떠한 삶으로’가 아니고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는지, 라고 서술하고 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최후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순교, 사도들의 최후를 모두 알고 저 문맥을 집어넣었으리라.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군에 대한 최종수행은 사도로 이어지는 교회의 청사진이자 사랑의 구체화를 통해 인류가 걸어가야할  거대한 구원여정의 트랙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베드로의 입장에서 과연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네가 젊었을 때는 ---> 원하는 곳으로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후서3.8, 바빌론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처럼, A.D 64년 네로박해 때, 바오로와 함께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도행전, 바오로 서간문- 갈라디아서, 베드로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존 폭스의 순교사 등을 참고해 볼 때 베드로는 교회 안팎의 불화살을 뚫고 그분의 양들을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돌보았다고 할 수 있다.(이 글을 쓰면서 베드로 사도에 대해 언급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베드로 사도의 통역관 역할을 했던 마르코복음 사가, 그리고 베드로 후서에 사랑하는 이라고 붙인 바오로 사도, 교회 내부의 자리다툼, 여전히 존재하는 율법주의, 재림의 요구 등등에서...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지켜주었던 사도 요한의 펜을 쥔 손이 보이는 듯했다)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베드로가 하느님의 집에 도착하는 여정에서, “평화가 있기를!”에서 말하는 그 ‘평화의 공간성’을 바라볼 수 있겠다. 복음 사가가 말하는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의 그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니다.  영원과 불멸의 초시간성의 다른 이름이다.

 

영원과 불멸은 시간이나 사건이 사라진 초시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시간이나 사건,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공간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집,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이다.

 

평화의 상태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고 전하는 데이비드 호킨스와 영원과 불멸은 바로 초시간의 ‘오늘’이라고 말하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전언을 들어보기로 하자.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순수한 지각만이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빛으로 를 비춥니다. 그때 는 몸이라기 보다 그것인 것같이 됩니다. 보편의 체험입니다.(데이비드 호킨스, 의식혁명)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것이다. 당신은 춤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가정한다. 그 마음을 넘어야 현존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때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이 모든 실체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한다.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NOW)

 

 

 

그동안 평화는 어떤 시간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2년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평화는 어떤 공간성이라고 말하는 영성가들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건넨 인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사 중에 "평화가 있기를!" 이 인사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인류가 죽음의 강을 건너면서 여전히 불같은 삶을 꾸리고 있는 인류에게 건넨 축복의 인사다. 죽음 저 편에서 건너온 인사다. 사실 조건없이 주어도 받기 어려운 은총의 상태가 평화다. 내가 이제 하느님의 집에 있구나! 내가 태울 수 있는 불을 다 태웠구나! 라는 그 공간성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내적 상태가 평화이기에 그렇다.

 

요한 21,1-19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세 번째 부활의 체험, 그분을 만났던 '티베리아 호숫가'는 그렇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연결된 ‘비움과 충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 밤새 천사와 싸운 그 베텔처럼 하늘과 직결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정리해 본다.

 

 

[사랑이란 이름의 형이상학적 망설임은 왜 시간으로 나타나 공간으로 수렴될까?-“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19)]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19)

 

이 질문은 베드로만 받는 질문인가? 아니다. 인류 모두가 저 질문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인생에서 적어도 세 번, 우리는 저 물음에 답한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분이 알려준 사랑때문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세 번 이상은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세 번인가? 저 질문이 내 앞에 도착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그렇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처럼 제자들이 경험한 그런 '텅빈 밤과 충만한 아침'을 동시에 경험하는 부활체험은 사실 세번으로도 충분하다.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들을 원점으로 돌리고 완전히 자신의 빈손을 본, 그런 비워진 상태에서 채워진 충만이기에 그렇다. 

 

사랑은 관념이다.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그 형이상학은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처럼 형이하학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부활하신 그분은 제자들을 통해 거듭해서 우리에게 전한다. 사랑이라는 하늘의 양식이 나라는 땅에서 그렇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형이상학의 망설임'이 놓여 있다.

 

자연의 인과적 질서에 익숙해진 우리가 인과를 초과하는 사랑의 양식을 동시에 살려고 할 때. 이것은 우리 힘과 의지만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양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과적이면서 동시에 인과적이지 않는 삶을 그것도 동시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살아냈다는 자체가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십자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래서 요한 복음 사가는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ㅡ 라고 서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사느냐가 이미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랑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 앞에서 늘 자신없고, 자주 망설인다.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를 자주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즉시성은 갖은 은총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또 우리가 그 사랑을 그분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 자체를 과소평가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듯, 우리도 사랑앞에서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자신 없어하거나 망설이는 자신을 보게된다. 그렇듯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분이 알려준 사랑은 우리 '의지와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하늘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신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