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한 처음에,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한다는 것!

나뭇잎숨결 2022. 6. 7. 15:22

 

한 처음에,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한다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19-23)

 

[성령 강림 대축일(다해)2022. 6. 12. Jean. 16,12-15]

 

 

1.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어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1926)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거론할 때, 언제나 회자되는 시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일 것이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모를 수는 없다.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로 모아지는 한용운 시의 님은 누구일까?

 

한용운이라는 시인의 인생 편력과 관련하여 그 님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일 수도, 부처일 수도, 중생일 수도, 연인일 수도, 독자일 수도 또는 시인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의 총체일 수도 있다고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님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용운 시에서 님이라는 시적 대상 보다는 화자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시가 어떤 논리적 명제처럼 하나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님의 다의성은 화자가 끊임없는 생성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너의 님은 너의 그림자니라(군말)

 

시인이 님의 침묵에 덧붙인 군말에서 너의 님은 너의 그림자니라(군말)”와 연결하여 읽는다면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을 사랑하다 드디어 사랑을 사랑하게 된 한 한용운의 생래적 그림자 ‘초월(超越)’을 발견하게 된다.

 

한용운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는 불교적 사유로 부재하는 님을 현존하는 님으로 존재케 하지만, 불교적 사유가 아니어도 부재하는 님은 현존하는 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말이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에서 님은 화자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화자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을 정도로 그렇게 절대적이다.

 

사랑의 절대성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만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재하는 님과 화자가 동시에 일상적인 시간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은 인과에 의해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을 때에만 님은 화자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님이 그런 절대성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랑 앞에 드디어 영원이란 초시간 개념이 붙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어떤 이들은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존재의 ‘자기원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2. 나무가 가진 수단에 의해서 나무를 탈출할 수는 없다.(알랭 핑겔크로트)

 

 

 

스피노자는 『에티카』 와 『실천 철학』에서 자기원인 (causa, la cause) , 영원성 (aeternitas, l’éternité), 지속 (duratio, la durée) , 절대 (absolutus, l’absolu)를 인류가 쓰게된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의 주제로 삼았다.

 

Ⓘ“나는 자기 원인에 의해서(par cause de soi), 그것의 본질이 현존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그것의 본성이 현존하는 것으로써 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한다.”(E, I, 정의 1)

 

자기 원인의 정의에 의해서 『에티카』를 시작하면서, 스피노자는 하나의 의도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자기원인의 용어는, 작용인(원인과 구별된 결과의 원인)과 유비(analogie)에 의해서, 단지 파생된 의미에서, 매우 신중하게 사용되었다. 즉 자기 원인은 “마치 어떤 원인에 의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스피노자는 이런 전통을 뒤집어엎고, 자기 원인을 모든 원인성의 원형으로 만들고, 그것의 원래적이고 철저한 의미로 만든다.

 

②절대 (absolutus, l’absolu)란 신의 권능이라는, 즉, 현존하며 작동하는 권능과 절대적 권능이라는, 사유하는 권능과 이해하는 절대적 권능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절대’ 또는 '절대자'는 실체자체 또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부동의 원동자이다. 이러한 의미는 첫째에 속하며 공간적 또는 논리적 추론의 사고에서 나온다. 이에 비해 권능의 절대는 능동성으로서 자기 자체의 현존을 스스로 실행하는 자유의지의 실현태다.

 

③영원성 (aeternitas, l’éternité)이란 현존인 한에서 현존의 성격은 본질에 의해 감싸여져 있다(E, I, 정의 8). 따라서 본질 자체가 영원인 것처럼, 현존은 “영원한 진리”이며, 그리고 이성적 구별에 의해서만 본질로부터 구별된다.

 

이처럼 영원성은 비록 무한정일지라도 지속(la durée)과는 대립된다. 지속은 양태의 현존에 자격을 부여한다.영원의 형상에서, 형상은 언제나 개념 또는 인식으로 귀착한다. 영원의 상 아래서 어떤 신체의 본질을 또는 사물들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형상이 아니라 관념이다. 그 본질들 또는 진리들이 그것들 자체로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인에 의해서 영원하지 그것들 자체로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은 원인으로부터 파생된 영원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원인에 의하여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형상은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형식과 관념, 형식과 개념작용과 동반한다. 

 

 

인간의 '자기원인'을 신의 '자기원인'에서 바라본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글을 재인용해서 더 읽어본다.

 

우리의 사고의 틀 안에 인간에 대한 존재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든 안 믿든 <신>에 대한 어떤 관념도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설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④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스피노자347)

 

⑤하나의 단자(모나드Monad) 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의 내부에 영향을 받거나 변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모나드는 창이 없다(라이프니츠, 단자론)

 

 

④의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보았으며 ⑤의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타자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점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조건인 정서는 신을 사랑하는 어떤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고 보았다인간의 어떤 정서(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들까지)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크기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행위의 결과물을 신에게 돌릴 수 없고, 고스란히 자신에게만 돌려준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자기 원인을 갖고 있으며 그로인해 무한, 영원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 는 라이프니츠의 관점은 신과 인간에 대한 필연적 존재이유를 완전성에서 본다. 모나드에 창이 없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의 필연적 완벽함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나드(단자)인 인간 개개인은 어떤 내적인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이 세계의 인과적인 영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설정의 전제가 <신>이라고 보고 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인류가 신중심의 시대에 회의를 품고, 이성의 시대를 꽃피울 때,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어떤 물길을 열었지만, 스피노자를 창이 있는 모나드로 보았다면, 라이프니츠는 창이 없는 모나드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 혹은 창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신과 '동일자'로 볼 것인가 '종속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종속자'로 보는 견해는 겸손이라는 외피로 자기 실현의 상한선을 미리 정하고, 여차하면 언제나 '죄'로 자신을 도피시킬 배수진을 친다는 것이다. '죄'는 한계라는 이름의 윤리적인 울타리치기로 본 것이다. 신을 앞세워 죄책감과 두려움을 팔지 말라는 것이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고 한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물질세계에서 더 쪼갤 수 없는 입자를 원자라고 부른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세계에서도 그런 입자가 있다고 상상하고 이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닫힌 모나드’라 부른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모나드가 모여서 어떻게 질서 있는 세상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를 고민한 라이프니츠는 문이 없는 모나드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 즉 신의 의지를 도입해야 했다. 서로 다른 모나드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처음부터 신에 의해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맞물리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존재자는 구체적으로 개별자들이며 각 모나드 안에는 신이 미리 배려한 조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모나드 사이의 상호작용은 단지 감각적 현상일 뿐이며, 모나드는 이미 자기완결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여기서 모나드(단자)는 '단일의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인간 개개인이라는 모나드가 지금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영적 초기 상태를 사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본 것이다. 현상과 실재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신>을 '자기원인'으로 본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스피노자는 정서와 의지를 지닌 유한의 운명에 놓인 인간은  자기원인이라는 신을 알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영적 진화의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정했다. 종교 안에서의 신에 대한 이해와 같은 맥락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인간은 그 자체로 신을 닮은 완결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신의 모상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신이 준 선물을 신이 제한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신이 그것을 회수라거나 제한한다면 신은 자기모순을 겪는 것이므로) 신은 자기모순을 겪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스피노자의 입장에서는 선악으로 나눠질 수 있는 '과정의 실재'지만, 라이프니츠에게는 오직 모나드의 자기변화의 운동으로 보았다는 '실재의 실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많은 영성가들은 놀랍게도 라이프니츠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서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과 인류를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빛과 어둠을 같은 것으로 바라본다. 빛과 어둠, 빛과 그림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아름다음과 추함이라는 이분법을 마음(에고)에서 내려놓는 순간, 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역설이다.

 

종교 안에서, 종교 밖에서 신을 바라보는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나눠지는 결절점이자, 바로 인류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진단키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의 본성, <단일체, 통일성, 자율성, 운동성, 완전성>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된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고귀한 헌사 혹은 선취의식에 해당한다. 되어질 것을 이미 된 것으로 바라보는 선취의식! (상호텍스트적인 글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스피노자를 읽은 다음, 들뢰즈를 읽고, 그 다음 라이프니츠를 읽으면 좋을 듯하다)

 

우리 순례의 과정도 에피쿠로스와 아우렐리우스처럼 이분법으로 나눠진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결합한 인간으로 바라보거나,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인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현상과 실재를 다른 차원으로 라이프니츠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20,19-23)

 

요한 20,19-23을 읽어본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라고 전하는 요한 20,19-23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묵상해 보기로 한다.

 

Ⓐ, Ⓑ, Ⓒ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확연히 달라지면서 제자들은 그들 자신이 누군지 드디어 알게 된다. Ⓐ와 Ⓒ의 용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신적행위에 해당한다. 한 단락으로 제시된 요한 20,19-23은 인류의 어떤 상태, 영적 진화의 상태를 보여주는 Ⓑ의 빅픽쳐-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로 모아진다.

 

도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도식은 순환의 도식에 해당한다.

 

(1) Ⓐ------------->Ⓑ<-------------- Ⓒ

(2) Ⓐ------------->Ⓑ--------------->Ⓒ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1. 39)라고 기술할 정도로 시간에 대해 예민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한 복음 사가는 ‘한 처음에’ 라는 태초의 시간으로부터 복음을 시작한다. ‘한 처음에’ 라는 시간부사가 모든 장과 연결되어 있고, 특히 20장과 구체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바라보면, 복음사가가 바라보는 순례의 여정이 결국은 ‘한 처음에’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영원은 초시간의 개념이다. 복음 사가는 영원 앞에 찰라에 가까운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서 '한 처음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흔히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신성에 초점이 놓여있다고 바라보기도 하는데, ‘한 처음에’는 20,19-23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지,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신적정체성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처음'에는 예수님의 '한 처음'이자 제자들과 복음을 묵상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한 처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파견의 진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문장을 예수님의 육성으로 들릴 때까지, 한 백번 정도 노트에 써보고, 자신에게 그 이상으로 들려줘 보자. 저 문장이 예수님의 육성으로 들릴 때, 사랑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며 동시에 사랑이 얼마나 큰 기쁨인 것을 마주하게 된다. 유한한 우리 자신이 신성에 동참하는 행위는 이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하는 그 사랑을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기쁨이지만 해야하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라>라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힘까지 그분은 우리에게 주신다. 해야하는 사랑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사랑이었으면! 해야하는 사랑이 얼마나 기쁜 것이었으면!

 

요한 20,19-23을 두 가지로 도식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두 얼굴 '두려움과 기쁨'이 어떻게 공존하는가를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그 유다인으로 상징되는 실체는 이 세상의 힘이다. 그분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이 세상의 힘에 우리 실존이 좌우된다. 그 두려움의 대상을 유다인으로 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정작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 때문이다. 그들이 믿었던 것들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이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기뻐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기 비로소 정립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 그것이 사랑의 상처인 것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분을 배신한 그들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오직 '오늘'이라는 사랑밖에는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1절에 이르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엄청난 파견의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인간이 신의 메신저가 되는 순간이다. 메신저와 메시지는 같아야 한다. 

 

이 부분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는 순간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 내 자신이 그렇게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이 주입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근원적 힘,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일에 해당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이 파견은 위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사유의 근저에서 나온 '자기원인'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파견의 첫 번째 문이 타자에 대한 용서라는 데서 우리는 다시 기쁨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어떤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누구의 죄든지’에서 타자와의 관계가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 나와 나와의 관계를 규정하고 완성하는 것임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는 신적 행위이기에 <성령을 받아라>에서만 가능한 행위임도 알 수 있다.

 

<예수님-나-타자>라는 이 사랑의 삼각형은 다음 주에 살펴볼 삼위일체의 삼각형과 무척 닮아 있다.

 

Ⓐ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회복되는 부분이다.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첫번쩨 용서다. Ⓑ는 제자들이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부분이다. Ⓒ는 제자들과 모든 이들과의 관계 회복에 관한 것이 두번째 용서다.

 

그런데, 이 관계를 두 가지 도식으로 살펴보았다.

 

(1)Ⓐ------------->Ⓑ<-------------- Ⓒ

(2)Ⓐ------------->Ⓑ--------------->Ⓒ

 

(1)은 요한 20,19-23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로 수렴되는 빅픽처이다. 이는 <J-타자-나>라는 삼각형을 그린다.

 

(2)는 시간 순서에 따라 타자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J-나- 타자>라는 삼각형이 그려진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성찰이자 경험이다.

 

절대적인 사랑의 삼각형은 (1)에서 말하는 <J-타자-나>라는 삼각형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도 나이고, 타자를 사랑하는 것도 나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도 분명 나인데, 그분이 말하는 사랑에서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나는 세번째 순서라는 것이다. 내가 지워지지 않으면 그분이 말하는 사랑과 용서를 결코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지워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고, 조금도 속상하지 않고, 자존심이 내 앞을 막아서지 않을 때, 나아가 죽음조차도 순리로 받아들일 때, 빈손이 두려워지지 않을 때, 사랑의 삼각형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 처음에>란 태초의 시간만이 남는다.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오로지 사랑만 남는다.

 

 

 

 

 

 

 

성령강림 대축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이렇게 전한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힘에 더 이상 의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들의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사랑의 힘을 다시 일깨워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마음의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헛된 것을 사랑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면, 마음이 허전함을 느끼고, 그것이 고독을 만들고, 절망을 낳습니다.”

 

Lourdes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벨라뎃다 성녀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주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더라도, 예수님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랑을 전해 주셨지만, 고통을 피해 가시지는 못하셨습니다. 또 고통을 피해 가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랑은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능력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용서나 사랑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또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도 없습니다. 그것이 왜 사랑이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시다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예수님을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고통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는 두 개의 사랑으로 모아진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로 모아진다. 그 맞은편에 <헛된 것을 사랑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는> 이 놓여 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를 이해하기 위해서 <헛된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아픈 사랑은 있어도 나쁜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1코린토 9, 22) 된 사랑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 본다면 사랑할 사람과 사랑하지 말아야할 사람으로 나눠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순례 중의 사랑의 표현방식에는 절제와 분별심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사랑’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는 <한 처음에>로 수렴되는 중임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허전함을 느끼고, 그것이 고독을 만들고, 절망을 낳는' 아픈 사랑을 하지말고, '마음의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좋은 사랑을 하라는 제언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꺼리고 기피해야할 사랑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이 본능적으로 끌리거나 하고 싶지 않은 사랑일 수 있다는 함의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마치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진 것처럼 우리에게 절제와 분별심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사랑'을 하자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이에게’라는 원심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는 구심력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분의 사랑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론에서는 사랑은 불가피하게 <고통, 희생, 용서>라는 십자가가 동반된다고 보고 있다. 하고 싶은 사랑과 해야하는 사랑이 분명한 경계를 그을 때, 그것은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이름으로, 타자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 순례 중에 해야 하는 사랑은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가르쳐주신 바로 그 사랑에 가깝다.

 

나는 너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주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별의 선물인 <평화와 성령>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부활의 사랑으로 통합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물은 하고 싶은 사랑과 해야 하는 사랑의 경계를 우리 힘으로는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평화와 성령은 박제품이 아니다. 평화와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니 이 짧은 순례의 여정에 왜 그렇게 힘든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답이, 우리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거짓으로 살다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예수님을 위해서도, 타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도 아니고 살아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안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그것이 나라는 것을 또 어떻게 알 수 있나? 그 답을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그 답을 불멸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서 찾고 있다. 애초에 우리가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애타게 그분 보시기에도 참 좋은 사랑을 찾아 다니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할 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강론에서는 이런 기도를 제언한다. “내 안에 잃어버린 사랑을 능력을 되찾게 하시길! 또 사랑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길!” 

 

그 기도를 우리가 진정으로 간절히 원할 때, <한 처음에> 우리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도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기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자기원인이 사랑인 줄 모른다면 가장 올바른 사랑에 대한 갈망 자체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개인적인 이야기다. 올해도 성령강림대축일에 대성전 입구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지식>의 은사를 '진지하게 어느 정도 긴장하면서' 집었다. 받았다.  난 절대로 이런 행위를 장난 삼아 혹은 연례행사로 하지 않는다. 내 믿음의 행위를 스스로 가볍게 만들고 싶지 않다. 성전 안에 들어가 손을 펴보았다. <지식> 의 은사다.  ‘지식’의 은사에 대해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시는 분임을 깨닫는 것’이라는 해설이 덧붙여 있다.

 

해설대로 살자면, 이 지식의 은사는 지난주에 바라본 ‘머무름’에 초점이 놓여 있는 은둔적인 은사에 해당한다. 이해하고 깨닫는 것, 그 이해와 깨달음이 다른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우리에 대한 갈망을 그분이 채워준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 은사는 소란한 세상 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해야 할 일도 만만치 않게 주어여 있다. 그리고 그 만만찮은 일들이 이미 지식의 은사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지식의 은사는 2022년에 비로소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분터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은사와 현실에서 하는 일이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강의 일정도 조정해야 하고, 묵상도 하고 그 묵상을 글로 써보고, 문맥도 다듬지 못하고 오타 수정도 못한 글을 올리고, 한편으로 현실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강의록을 작성하고, 강의를 하고,  그런데 전자의 일이 더 즐거운 이유가 무엇인가? 주어져 있는 일들이 점점 더 힘들게 느껴지고, 시들해 지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 무엇이고 저 지식은 무엇인가? 전자의 지식은 존재의 문제이고,후자의 지식은 실존의 문제다. 존재와 실존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나. 이것은 분리가 아니라 포함의 문제고, 충족의 문제다. 전자가 후자를 끌어가는 이유다. 이런 잠정적인 답으로 나를 이해시킨다.

 

그때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떠올리거나 모든 은사에는 절제의 은사가 있음을 기억하려고 한다. 또 어떤 은사든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이며, 또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은사도 아니라는 것으로, 머무르고 싶은 지식과 떠나야 하는 지식에 균형점을 잡으려고 애쓴다. 

 

여기에 이르러,

 

이 세상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으며, 이 순례 중에 행하는 그 누구의, 그 어떤 은사도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라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에 이르러, 모든 이가 받은 은사가 모두 고귀하고 평등하다는 것에 끄덕인다. 

 

그 순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신적 사랑이라는 것! 한없이 튕겨져 나갈 수도 없고, 한없이 심연에 잠겨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거 같다.

 

부활 후에 그분이 이별의 선물로 인류에게 남긴 <평화와 성령>의 선물은 우리에게 이 ‘신적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 신적 사랑의 능력이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한 처음부터 있던 근원을 되찾는 선물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기원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라칭거 추기경(내 존재의 근원적 힘)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해서 부재하는 님을 현존한다고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부재하는 님이 현존한다는 것은 님을 바라보면서, 실은 우리 자신의 <자기원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 근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요한 20,19-23을 묵상하면서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이 세상에 파견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원인>에서 찾아보았다.

 

[한 처음에,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19-23)]는 것과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1코린토 9, 22)]이 되는 것은 존재와 실존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한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에게 파견의 소명으로 주어졌다.

 

이 소명은 어깨에 띠를 두르고 지하철 역으로 나가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삶으로, 마치 잘 맞는 옷은 입은것처럼, 그렇게 그분의 사랑을 입고 기쁘게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