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하나의 정답과 천 개의 해답,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나뭇잎숨결 2022. 6. 21. 17:51

 

 

하나의 정답과 천 개의 해답,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1ㄴ-1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다해), 2022. 6.19. Luc. 9,11-17]

 

 

 

1. 로버트프로스트의 「가지 않는(은) 길」

 

 

시를 읽어본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는) 길」(1949년)은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다.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우리도 늘 서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된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할 순간, 기로에 서 있다. 수많은 길 가운데 인간의 선택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그 선택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시간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선택하지 못한(않은) 길을 바라볼 수 있을 데까지 '멀리' 바라보고 있다.

 

2연에서, 화자에게 어떤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두 길이 모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화자가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길이 되고싶었던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을 자신이 선택함으로써 훗날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선택해서 가게 될 것이므로, 선택한 길이나 선택하지 않은 길은 같은 길이 될 것이라고 화자는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3연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기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길이었지만, 끝내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순수라는 가치로 설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남아 있다. 아!라는 감탄사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뒷날을 위해서 남겨두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러나 지금 자신이 선택한 길은 또 다른 길로 연이어 이어지므로, 선택하지 않은 그 아름다운 길을  가게 되지  못할 것임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4연에서 화자는 훗날에, 훗날에 '한숨'을 쉬며,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래의 그 어느날  '오늘의' 선택을 뒤돌아 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화자는 같은 상황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는) 길」(1949년)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선택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선택한 길이나 선택하지 않은 길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두 개의 아름다운 가치가 공존하는 길이라는 데 멈추게 된다. 선택이란 세상의 어떤 가치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시는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되는 그 내면을 성찰하게 이끈다.

 

그것은 선택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하게 된 본질적인 성찰의 태도를 보여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타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어서라기 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는 그 사실까지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가치가 무엇인지 진정 알지 못했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택의 상황 속에서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신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고 전하는 루카 9,11ㄴ-17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고 전하는 루카 9,11ㄴ-17에서 전하는 기적사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현재진형형인 ‘축복’인가? J만 예외적으로 행할 수 있는 상징적인 전례의 차원인가?를 바라보려는 것이다.

 

Q1.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어떤 배부름(배고품)을 의미하는가?

 

어떤 배부름은 어떤 배고품을 전제로 한다. 배고픔이 없었다면 배부름이라는 어휘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흔히 루가 복음을 배고픈 이들, 즉 ‘소외자’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불린다.

 

복음사가는 역사,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이 ‘소외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배고픈 이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포함해 당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이들, 정치 종교적인 아웃사이더, 인간의 숫자에도 들지 못했던 여자들,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던 아이들, 세리들, 죄인들 , 병자들 등 총체적인 ‘배고픔’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총체적인 배고픔(인류의 배고픔)은 예수님이 인간역사에 개입하는 필연성을 낳는 기재에 해당한다.

 

그래서인가? 예수님은 공생활 벽두에 당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였다는 것을 이사야서를 통해 천명 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9-19/이사야 68,1-259,6)

 

J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고향사람들에게마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배척받으신 소외자로 공생활의 문을 연다. 그뿐 아니라 당시의 주류 종교인의 배척에 의해 정치적인 죽음을 당한 소외자 중의 소외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소외자인 그분이 베푼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1차적인 의미는 '배고픔'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실존의 소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즉 배고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는 다만 예수님만 행할 수 있는 과거의 이적사화에 국한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인들 스스로 오해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신앙인이 되면 무조건 주어야 한다는 나눔-혹은 희생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는자-시혜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받는자-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주는자-시혜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받지 못하면 줄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되지 않으면, 결코 내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주는 것 못지않게, 우리가 목마르게 찾아헤메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아 한다는 것이다. 주는 것은 잘 하는 데 받는 것을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피드백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 피드백이 없는 사랑은, 사랑의 도그마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가난한 자이며, 받을(받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신의 배고픔을 안다는 것은 타자에게ㅡ시선을 돌리는 축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Q2.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그 배고픔이 지렛대의 원리로 사용하여 기적의 원리로 작용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의 기적, 그 출발점이 바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에는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이라는 사랑의 원리가 담겨 있다.

 

루카 9,11ㄴ-17의 그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루카 9장 1-9절 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거 같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앞에는 세상에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한 일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제자들의 파견의 행위와 오쳔명을 먹이신 기적 안에 흐르는 일관성을 바라보아야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이라는 사랑이 왜 기적의 원리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신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이라는 사랑의 원리를 보여준 것이며, 십자가의 신학 역시 이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이라는 사랑의 원리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9장 1-9절에서 열두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을 주신다. 표면적으로 타자를 위한 행위에는 엄청난 <힘과 권한>을 주셨지만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거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의 그 '아무 것도'는 물질적인 것이지만, 하느님의 섭리 자체에 자신을 맡기라는 암묵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암묵적인 의미에서 배고픔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작동원리라는 것을 바라보는 기재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자들 자신들이 병자나 마귀들린 이들에게 행사했던 <힘과 권한>의 근본 원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의 파견은 단지 결핍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시혜자의 위치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 역시 받아야 하는 것이 있는 수혜자임을 바라보는 길이었다. 제자들의 파견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출발점에 해당한다. 이는 게세마니동산에서 당신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고팠던 그분의 마지막 배고픔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신조차도 배고팠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배고픈 존재이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우리 자신의 배고픔을 안다는 것이 어떤 기적의 최초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9,13)는 것은,

 

발화의 맥락은 다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사랑의 논리는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순례 자체가 배고픔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배고픔의 이름은 다르지만 인류 모두 다 배고픈 중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배고픔이 진정한 배고픔인가? 혹은 거짓 배고픔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장 지글러의 유엔보고서에서 120억이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는데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거나 죽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질적인 배고품을 야기하는 정신적인 배고품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 무서운 배고픔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배고픔은 공동체가 해결해야할 배고픔이라면 후자의 배고픔은 본인이 각성되지 않으면 오히려 인류의 배고픔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행사했지만, 그분이 준 <힘과 권한>이 빵의 기적 앞에서는 행사되지 못했던 이유는 제자들이 지닌 배고픔의 이름을 그들 스스로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를 묻게 된다.

 

복음해설서들은 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를 두 측면에서 바라본다. 하나는 순수기적의 원리로 바라보기도 하고, 하나는 나눔의 기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순수기적의 원리리든, 나눔의 기적이든 기적의 원리는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그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라는 것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를 ‘나눔의 기적’으로 바라본 듯하다. 50명 정도는 초면일지라도 한 그룹으로 묶여지는 순간, 식별가능한 이웃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인류를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에서 식별가능한 배고픈 이들에게 우리가 가진 최소의 것을 나누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적의 원리다.

 

그 나눔의 방식은 바로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은 것으로 만든 그 기적의 원리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리 두 마리’는 12제자가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ㅡ

 

‘그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는 행위’ 에서 이 땅의 최소의 작은 것들은 저 하늘에서 내려주는 축복과 만난다. 이 땅에 아주 작은 것이 하늘과 연결되는 것이 기적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를 루카 복음은 ‘축복’,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은 ‘찬미’, 요한복음은 ‘감사’라고 전한다. <축복=감사=찬미>는 이 땅에 아주 작은 것이 하늘과 연결되는 기적의 매개체라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르는 행위, <축복, 찬미, 감사>는 자신이 배고프지 않으면 결코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사랑이다. 하늘만 남은 기적도 없고, 땅만 존재하는 기적도 없다. 기적은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작은 사물들이, 우리의 갈망들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처럼 충분한 배부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은 공평하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줄 것이 없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부자라도 받아야 할 것이 없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최소의 것을 나누는 것을 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최소를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 각자가 지닌 그 최소의 것이 어떻게 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모르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3. 삶에서 정답은 무엇이고 해답은 무엇인가?

 

 

시편을 방불케 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 이렇게 전한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 목요일은, 수난 시기이기 때문에, 이 축일을 기쁘게 지낼 수가 없어서, 성주간이 아닌 다른 날을 택해서 따로 이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체성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날, 오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8년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는 인간의 배반 위에 세우신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인간의 사랑이 합쳐지고, 더해져서 이루어진 성사가 아니라, 인간의 배반 위에 하느님께서 홀로 사랑을 쏟아부으시면서 만드신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그 제자들 모두가, 크게 또는 작게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럼에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그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인간의 배반 위에 하느님께서 홀로 당신의 사랑을 쏟아부으시면서 만드신 성사라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지난 주일 강론에서 말씀드린 사랑은 실망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망하지 않는 사랑, 성체성사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 포기를 모르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그리고 그 사랑이 표현된 희생을 통해서, 그 슬픈 만찬, 또 비참한 만찬일 수밖에 없었던 그 최후의 만찬을 아름다운 만찬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최후의 만찬은 그저 비참한 만찬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만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비참한 만찬을 아름다운 만찬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예수님의 그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그 사랑이 표현된 희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희생, 최후의 만찬의 의미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희생, 그렇게 모든 것의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반을 사랑으로 답하고, 배반한 사람을 위해서도 자신을 내어줄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반에 대한 답이, 보복이나 복수라는 답 이외에, 사랑과 희생이라는 다른 답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 성체성사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의 답, 그리고 정해진 답만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공식처 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답은 하나이겠지만, 해답은 여러 가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대한 정답은 하나이겠지만,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해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정해진 답만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정답보다는 해답이 필요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노력한다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답과는 다른 해답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 상황 앞에 놓여 있다. 그 상황을 이자까지 붙여서 되돌려줄 수도 있고, 그 상황을 하늘과 연결시켜 ‘축복’으로 되돌려 줄 수도 있다.

 

강론은 그 축복의 시작을 ‘사람이 아름다우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인간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희생’할 수 있는 선택에서 찾고 있다.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모습이 희생이라는 것(...)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

 

여기서, 누군가에게 희생으로 보이는 행위가 행위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희생인 줄도 모른다는 데 잠시 멈춰야겠다. 희생이라면 당연히 그것이 희생인줄도 몰라야 그것은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나 봐라, 바로 이런 것이 희생’이라고 하셨다면 십자가 희생은 고통의 소비로, 그 의미가 희석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선택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그 어떤 방향성도 제시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타자에게 희생으로 보이는 것이 행위 당사자에게는 그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상황 속에서 <자유의지>로 내린 자유인의 해답에 해당한다.

 

성체성사는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아름다운 성사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 삶에서 멈추지 않고 육화되기 때문이다.

 

강론은 성체성사가 삶으로 연결되는 이유를 우리 삶의 여러 상황에서 ‘정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하는가를 계시한다고 제언한다. 예컨대, 지난주 묵상중에 삼위일체 교리로 아리우스파를 설득하려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그 자신을 설득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문제에 대한 정답은 하나이겠지만,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해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정해진 답만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문제에 대한 정답과 해답은 무엇이 다른가? 문제의 정답은 예수님이 내려준 <애주애인> 이다. 모든 문제 상황에 대한 정답은 이미 그분이 내려주었다. 그런데 그 <애주애인>을 삶으로 펼쳐가는 길은 천갈래 만갈래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해답은 문제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 상황에 딱 하나의 길만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선물로 준 <자유의지>는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 딱 하나의 길, 딱 하나의 정답만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정말 숨막혀 죽을 수밖에 없다. 들꽃이 하나라면 6월의 들판은 얼마나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것인가?

 

그런데, 정답은 하나지만 해답이 천갈래 만갈래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성체 성혈대축일]이라고 한 이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정답은 이미 예수님이 내려놓았지만, 해답은 <자유의지>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타인이 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기에 성체는 거시적인, 보편적인 <애주애인>의 표징으로 다가오고 성혈은 우리 각자가 선택의 과정에 직면하여 흘리는 피땀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스스로 피땀을 흘리며 내린 답이 해답이다. 정답은 그분이 이미 내려놓았다. 해답은 우리가 정답을 보고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기에 그 해답은 사랑에 대한 앎의 표출이자, 하느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믿음에 대한 의연함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사랑이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타자의 눈에 ‘희생’처럼 보이는 그 길은 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희생, 그러면 남들이 감탄할 만큼 영웅적인 행동을 떠 올릴 수도 있다. 물론 범인이 할 수 없는 행위는 마땅히 희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나누는 것에 희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또 사랑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히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용어가 우리 시대에 부끄러움을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희생이라는 상찬 자체가 행위 주체에게 부끄러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이유는 상대가 요구한 것을 나눈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정답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해답을 이해시키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나누는 것은 최소의 것을 주는 것이기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익숙해져있는 이 시대에 최소를 봉헌하거나 나눈다는 것은 또 다른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최소의 것'을 나누는 그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고,  어쩌면 그 '용기'를 희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희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포기를 모르는 사랑이 비참한 최후의 만찬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찬으로 바꾸었듯이,

 

포기를 모르는 사랑과 희생, 그렇게 모든 것의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실망하지 않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란 우리가 지닌 <최소의 것a minimo>과 하늘의  <축복>이 만나  <오천명이 먹고도 남을 배부름>으로 이 땅에서 현재진형형인 기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