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섭리(燮理),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먼저’라는 이름의 볼텍스(vortex)

나뭇잎숨결 2022. 6. 28. 13:42

 

 

 

 

 

섭리(燮理),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먼저라는 이름의 볼텍스(vortex)

-The vortex of the name ‘first’ connecting the providence, the relative and absolute world

 

 

- [연 중 제 13 주 일 (다 해) 강 론 2022. 6. 26. Luc. 9,51-62]

 

 

 

1. 김사인,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작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이 외로운 떨림으로 해서/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그 떨림의 이 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있는 것이며,//그 나른한 고요의 불빛 속에서/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그러면 석달이나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곁으로/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의 「풍경의 깊이」는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는작은 목숨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시이다. 작은 생명으로 상징되는 풀들의 외로운 떨림으로 우주의 저녁 한때가 저물어간다는 것에서 화자는 이 우주는 무수히 작은 생명들로 이루어진 집합체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풀은 민중이나 민초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자기 생명을 방어할 수 없는 작은 목숨들로 보는 것이 이 시의 흐름상 어울릴 듯하다. 이 시는 실존에서 존재로 넘어간 시로 보이기 때문이다.(민중이나 민초란 지칭은 어느 시대를 특정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생명들(풀들)이 외부의 힘에 의해 그 떨림이 멎은 상태가, 낡거나 어린 고요라는 이름이고, 그 고요는 ‘이 세상은 살만하구나!’ 하는 하나의 불빛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 고요 속에서 백년이나 이백년 혹은 석달 열흘 곤히 잠들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 혼곤한 꿈결 속에서 작은 목숨들이 자기 갈 길을 무심히 지나가게 되는 그런 낯익은 냄새가 실은 ‘그대의 눈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란 것, 그것을 생각하는(갈망하는) 시인이 바라본 ‘풍경의 깊이’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미적 감각이나 윤리적 가치관, 더 나아가 물질적이거나 영성적인 어떤 원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풍경, 수많은 사람들 곁을 지나간다. 때론 전경이 되기도 하고 때론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 풍경 속에서 자기 생명을 방어할 수 없는 작은 생명들에 시선이 멈춘 것처럼, 그 작은 생명들이 진정 고요하기를 바라는 것은 시인의 가치관이자, 그가 자기의 생을 끌어가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살다보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언가에 의해 생의 뿌리까지 뽑힌 것처럼 ‘심히 흔들리오니!’ 그런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본인은 그것을 외부의 힘에 의해서 흔들린 것이라고 끝까지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은 자신이 자신을 흔든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초심-자신의 가치관이나 원칙'이 흔들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자신이 자신을 흔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루카9,51-62)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는 것에도 <어떤 원칙>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전하는 루카 9,51-62을 읽어본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버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주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전하는 루카9,51-62을 통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 따름에 적용되는 원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Q1. ‘~을, 혹은 누구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른다’는 것은 1차적으로 어떤 대상을 표본으로 삼아 그가 했던 일, 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더 들어가면 ‘따른다’는 것은 행위주체가 원래 지닌 속성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카 9,51-62에서 ‘나를 따르라’와 ‘하느님 나라를 알려라’는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고 그 따름을 요구하는 그분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결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따른다’는 행위가 지닌 본질적인 성격을 바라볼 수 있다. 예루살렘 상경기 이전에 이미 그분은 두 번의 수난을 예고한 상태였다.

 

그리고,

 

공간을 중요시하는 루카 복음사가가 예루살렘 상경기에서 첫 공간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한 이유에서,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분이 인륜지대사마저 초월하라는 강력한 요구에서 그분이 알려준 사랑법인 <애주애인> 중에 <애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애주>할 수 있을 때, <애인> 할 수 있다는 사랑의 대원칙을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카 9,51-62에서는 여섯 개의 풍경이 나온다. 그 여섯 개의 풍경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

 

이 풍경은 하나의 풍경(J)에 안겨있는 여섯 개의 풍경(심부름꾼들, 사마리아인들, 야고버와 요한, 어떤 사람,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을 통해 사랑의 완성(예수님을 따른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퍼즐에 해당한다.

 

퍼즐은 어떤 그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조각들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조각들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그 조각들을 <애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맞추는 것이 <애주-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상경기에서 첫 머리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란 실은 예루살렘 수난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는 서술은 그분이 이 세상에 온 이유, <사랑을 완성할 때가 이르자>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루카9,51-62에서 여섯 개의 풍경 속의 인물들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조진국)라고 할 미완성의 사랑의 주체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을 ‘따른다’고 하는 그 사랑의 완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5:5의 합리적인 교환이나 균형으로 사랑은 완성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된 사랑으로 본다는 것에서 사랑의 어떤 원칙을 바라보게 된다.

 

그분은 십자가에 돌아가기 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과 동시에 완성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분이 이 세상에 온 사명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실패한 사랑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사랑법에서, 실패가 완성이라고 하는 그분의 사랑법에서, 사랑의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는 <섭리>가 사랑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에 당신 자신을 맡겼던 그분의 사랑법에서, 그분을 ‘따른다’는 그 지점이 어딘가를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그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燮理)에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맡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섭리란 '사랑의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을 따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도전이자 동시에 큰 위로라고 할 수 있다.

 

 

Q2. 섭리(燮理)가 왜 도전이고 위로일 수 있을까?

 

예루살렘 상경기에 등장하는 심부름꾼들, 사마리아인들, 야고버와 요한, 어떤 사람,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었나?

 

예수님의 상경기의 풍경 속에 있는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어느 정도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예수님이 아닐지라도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사랑과는 너무나 먼 사랑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에게 끌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사랑이 오히려 그분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랑으로 인해 사랑의 장애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그들은 사랑이신 그분에게 끌렸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인간이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생명 자체가 사랑에 그냥 끌린다는 것! 생명을 만든 신이 그 생명을 사랑하다 돌아가셨다는 것!

 

이런 난무하는 사랑의 단상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외친 사람도 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차라리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예루살렘 상경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그분의 사랑을 좀 더 쉽게, 빨리 알아보거나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미 그들에게는 어떤 사랑의 관념들이 그들 정신에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는 중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대상을 초월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이나 우리가 사랑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끌리면서 동시에 사랑을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힘든 이유는 대상때문에 사랑의 길을 잃기 때문이다. 대상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는데, 대상 때문에 사랑의 길을 잃는다는 것!

 

그런데, 그분은 그 대상을 초월하는 사랑을 하셨다는 것이다. 대상 때문에 사랑을 철회하거나 대상 때문에 사랑을 더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사랑이 어떤 형태로 응답되든 그분은 당신 사랑의 대원칙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분은 사랑의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된다는 것을 그분은 알고 계셨던 깃이다. 왜?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그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양식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발언에서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어떻게 자유를 억압하는지 바라볼 수 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최측근이었던 야고버와 요한이 갖고 있는 상선벌악의 사랑법은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의 사랑법, 즉 유다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패망시킨 후 북이스라엘 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한 혼혈족이자. 야훼신앙을 변질시켜(이신교와 결합하여) 유일신 신앙을 훼손시킨 이들이다.(집회서 50, 25-26)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만날 유다인들은 야고버와 요한의 사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이름을 얻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일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의 여정이 바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야고버와 요한,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혈질이었고, 누가 하늘에서 첫째냐 둘째냐를 다툴 정도로 그들도 한 때는 '부족함' 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들 생애는 결국 아름다운 사랑으로 완성 되었다는 것이다.

 

깊은 영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요한 복음을 천둥의 아들 중 한 사람이 썼을 리 만무하다고 그냥 제4복음서라고 부르자고 하는 성서학자들이 있을 정도라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이자 희망이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를 위시한 제자들의 부족한 사랑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완성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꿈은 언뜻, 아름답지만 한편 슬픈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있을 때, 그 사랑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상을 초월하는 사랑은 대상의 부재중에 완성 된다는 것이다. 부재중에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은 마치 한바탕 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상경기의 끝이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실 앞에서, 사랑의 진정한 완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랑의 완성은 오직 <하느님 섭리>에 자신을 맡겼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가 했던 사랑을 완성해 주신다는 것! 인간의 꿈을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 이것이 섭리가 우리에게 건넨 용기이자 위로다.

 

릴케는 경이로운 사랑의 기적 앞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기도처럼 왔는가”(릴케)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수많은 결여에도 불구하고 사랑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우리가 사랑은 어떠하다고 논할 수 있다는 자체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에 끌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인륜지대사인 장례보다, 혈연과의 작별인사보다 우선, ‘먼저’ “나를 따르라”고 어떤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하느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은 사랑의 대원칙, 생명의 ‘소용돌이-볼텍스(vortex)’라고 할 수 있다.

 

 

 

 

 

 

 

 

 

3.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하느님의 섭리로,

 

연중 13주일 강론에서 오 신님부님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그 결단은 내려놓는 연습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내려놓는다는 것,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내려놓는 것, 연습이나 준비 없이 한 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기는 할 수 없다고 멈추는 것이고, 내려놓음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로 결단하면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기는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고, 내려놓음은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결정입니다. 마지막 순간은, 마지막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은, 바로 지금의 결정이 쌓이면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D. Bonhoeffer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살았던 그는 부르심을 받고 이미 내디딘 첫걸음은, 그를 과거의 생활로부터 갈라놓습니다. 이렇게 따르라고 하는 그 부르심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기에 이전 상태에 머문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입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죄의 종살이에 매이지 말라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르심은, 매이지 않는 삶으로의 초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 부르심이 예수님의 자유로의 초대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한 가지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섭리를 말합니다.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당신의 섭리로, 우리의 앞날을 걱정해주시는 하느님!’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그런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강론은 네 개의 소주제가 하나의 대주제로 모아진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오면 너희도 결단을 내릴 준비하고 있어라.”->그 결단은 내려놓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 과거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현재와 또 미래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것’->그 무엇에도 얶매이지 않는 자유로의 초대’->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복음과 함께 강론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복음: Ⓐ<-------------------Ⓑ,Ⓒ,Ⓓ,Ⓔ,Ⓕ,Ⓖ

강론: ⒜, ⒝, ⒞, ⒟--------------------->⒠

 

 

복음은 핵심 주제를 맨 처음에 제시하는 연역법으로 전개했다면, 강론은 귀납법으로(결론이 맨 뒤) 전개하고 있지만, 표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라'는 <하느님 섭리>로 모아진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우리는 흔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을 좌우명으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것은 그 순서가 조금 다르다. 먼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난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원칙은 절대적인 원칙 <애주애인>이다. 또 그 <애주애인>을 끌어가는 원칙의 대원칙은 <애주>라는 사실이다. <주의 기도> 전반부가 인간사 후반부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섭리(燮理),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먼저’라는 이름의 볼텍스(vortex)]

 

무엇을 ‘먼저’하느냐는 모든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먼저’라는 ‘섭리(燮理)에 대한 믿음’이 그런 맥락에서,  믿는 이들에게 사랑과 생명의 소용돌이. ‘볼텍스(vortex)라 할 수 있다.

 
 
 
 
 
 
 
 
       한옥과 수국 ----사진 신안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