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면형(麵形)의 길, 내가 J에게 가는 길, J가 내게 오는 길!

나뭇잎숨결 2022. 7. 21. 09:15

 

 

 

 

면형(麵形)의 길, 내가 J에게 가는 길, J가 내게 오는 길!

- The way of the Eucharist, the way I go to you, the way you come to me.

 

 

 

[연 중 제 16 주 일 (다 해). 2022. 7. 17. Luc. 10,38-42]

 

 

 

 

 

1. 그리고 따듯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1898)에 실려 있는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를 읽어 본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살갗을 찌르는 꼿꼿한 밀 이삭을 따는 일,/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그리고 따듯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

 

시를 읽고 첫 느낌이 아침 샘터에서 얼굴을 씻은 거처럼 해맑다. 명랑하고 싶다는 갈망, 살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시다. 오늘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픈 마음을 이끄는 시다.

 

프랑시스 잠(1868-1938)은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에서 인간의 사소한 일, 노동을 ‘면형(麵形)’의 차원으로 들어올린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인간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인간이 하는 사소한 일상의 노동이나 일들이 거룩한 전례처럼 하늘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이나 일상, 노동이 위대해지기 위해선 그 자체가 위대하다기 보다는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선한 지향이 모든 사소한 일상을 전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그 선한 지향을 떠받치는 그의 삶이 하나의 제병, 포도주가 되었기에 여전히 큰 울림이 되었을 것이다.

 

프랑시스 잠은 겸손의 상징인 당나귀를 사랑하고 자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남프랑스의 피레네 산맥에 살면서 자연과 동물과 일과 신을 노래한 자연 시인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는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며 간간이 시를 썼다. 그 시를 파리의 여러 시인들에게 보냈는데, 그의 시를 알아본 말라르메에 의해, 『좁은 문』, 『지상의 양식』을 쓴 앙드레 지드에 의해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1898)라는 시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프랑시스 잠의 출현은 난해한 상징주의 시들에서 멀어진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텅 빈 내용과 난삽한 표현을 일삼던 상징주의 말기의 시풍에 그의 시는 천진난만하고 명랑함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위 프랑시스 잠의 시풍을 <잠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자연주의 운동이 일기까지 했다.

 

그러나 프랑시스 잠은 늘 주류문학에서 아웃사이더였고, 평생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과 시를 병행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근원적인 그리움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 근원적인 그리움에서 해맑은 시가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으로도, 신성하다할 노동으로도, 또 시를 쓰는 일로도 온전히 채울 수 없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 형이상적인 병을 앓고 있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서문 중에서)

 

일과 노동을 ‘면형(麵形)’의 차원으로 들어 올린 시인이라는 평가는 그 자신까지 ‘면형(麵形)’의 차원으로 들어올려 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면형(麵形)’은 ‘밀떡이 성체로 바뀐 뒤에도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겉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그 자신은 희생하였으되 아무도 그 희생을 감지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저 사람에게 무슨 고통이 있으랴? 그런 상태!

 

그의 시가 누군가에서 성체를 영하는 듯한 그런 ‘면형(麵形)’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그가 남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에 있다고 모두 자연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일들을 위대하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그의 시선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다시 일어나 걸어가게 만드는 희망을 주었다. 희생과 희망을 그가 삶으로 동시에 연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하나의 ‘면형(麵形)’으로 들어올렸던 그의 삶과 시는 그의 본성이었을까? 은총이었을까?를 묻게 된다.

 

 

 

 

 

 

 

2.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10,38-42

 

 

복음을 읽어 본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39 마르타에게 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 42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전하는 루카10,38-42은 루카복음에서만 전하는 특수사료에 해당한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루살렘의 긴 상경기(9,51-19,28)의 핵심은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였는지(모셔들었다)’가 초점일 것이다. “맞아들임”은 <십자가-부활-승천> 전부를 가리키는 십자신학의 완성을 의미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항상 대립적인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예수님과 갈등 상황에 놓여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면 그들 역시 구원에서 예외적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표면적으로는 대조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의 ‘어떤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마르타이지도 않고 언제나 마리아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존 자체가 일과 기도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0, 38-42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성서학자들간의 이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11장1절에 나오는 베타니아에 사는 라자로의 누이동생들로 바라보는 것이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어디에 살았든, 또 누구의 동생이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왜 마르타는 그분을 자신의 집에 적극적으로 모셔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활동을 위대함으로 들어올리지 못한 것일까가 초점일 것이다.

 

이는 마르타의 ‘어떤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42절에 나오는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왜 ‘좋은 몫’이며,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두 자매의 대조가 활동과 기도 중에 기도에 더 초점을 맞추라는 것인지? 활동하기 전 기도로 무장하라는 것인지? 아님 보다 본질적인 다른 의미로 베타니아의 두 자매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

 

마르타와 마리아는 그분을 맞아들일 정도로 이미 은총 중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은총 중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마리아의 ‘좋은 몫’이 무엇이고 그것을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관건이 될 거 같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기존의 성서해석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다. 

 

첫째,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타의 상태, 삶의 '바탕 생각'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적극적으로 맞아들였던 은총 중의 인물이었다. 또, 마르타는 예수님 일행을 영접할 만큼의 경제적인 능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일의 보조가 필요해서 마리아를 거론했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과 마리아를 동시에 겨냥한, 그녀 보기에 못마땅한 현실을 가차없이 항변할 정도의 주체적인 의식의 소유자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둘째, 여기서, 마르타의 항변을 일에 과부하가 걸린 사람의 즉흥적인 표출이  아니라 근본적인  '씻김이 필요한 상태'로 보려는 것은,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표현할 정도의 의식의 저변에 있는 <어떤 상태>를 바라보아야, 마리아의 ‘좋은 몫’이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는 것이다. 마르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또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려 어디로 가시는지도 망각하게 만든 마르타의 <어떤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 마르타를 통한 인간 이해에 조금 더 다가가는 길이기에 그렇다.  

 

셋째, 더우기 루카10,38-42은 루카복음에서만 전하는 특수사료에 해당한다.  루카는 그 어떤 복음사가보다 예루살렘 상경기를 길게 서술하고 있다. 복음사가의 집필의도 속에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맞아들일 수 있는 혹은 맞아들이지 못하는 그 <바탕 생각>은 무엇인가 대한 숙고가 담겨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항변은 단지 활동에 수반되는 태도의 문제냐? 기도의 부족이냐?의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 은총’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은총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은총과 함께는 무엇을 할 능력이 있는가?(기스펠트 그레사케)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자체로 보아 인간 본성은 은총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성이 은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은총에 대해서 무관하고 중립적으로 처신한다(J.B.스투플러)

 

상태는 지속하는 처지다. 인간의 많은 행동들은 외부와 매개되지 않은 채 그의 본성으로부터 튀어나오지 않는다. 행동이 형성된 뿌리가 있다. 그것이 상태다.(아리스토텔레스)

 

인용문, Ⓑ,Ⓒ,Ⓓ,Ⓕ는 기스펠트 그레사케의 『은총-선사된 자유』에서 재인용하였다.

 

Ⓑ는 그레사케가 은총론을 쓰게된 문제제기에 해당한다. Ⓒ와 Ⓓ는 미묘하게 은총론이 갈라서는 지점이다. Ⓕ는 Ⓒ와 Ⓓ를 낳게하는 기저, 어떤 상태, 바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표출된 행동은 즉흥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어떤 지속적인 그 사람의 존재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집에 모셔드릴 정도로 이미 은총 중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르타는 예수님 보시기에 좋은 몫을 알지 못했다는 것!

 

여기서 마르타가 단순히 기도를 적게 했다거나, 활동의 태도가 불손하다거나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마르타의 행동의 기저, 그 상태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마르타의 ‘어떤 상태’란 인간의 자기이해, 본성과 은총을 바라보는 시선에 해당한다. 마르타와 마리아로 갈라지는 이유는 활동과 기도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과 은총을 어떤 상태로 바라보고 있는가로 갈라진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분명 은총을 받았음에도 그 은총이 갈라지는 이유는 본성과 은총을 하나의 질서로 볼 것인가? 아님 은총의 질서가 따로 있고 본성의 질서가 따로 있는가로 바라보야 할 것이냐의 인간이해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는 본성과 은총은 하나라고 보는 견해로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로 열리어 있고 정향(定向)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면, Ⓓ는 인간의 본성이 세계로부터 하느님의 초자연 세계로 들어서라는 요청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 본성은 하느님과의 고차원적인 일치를 위해서 필요할 뿐, 인간을 위해서는 부차적인 존재 양식에 해당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가 마리아의 어떤 상태를 드러내는 은총론이라면 Ⓓ는 마르타의 어떤 상태, 은총론에 해당한다. 전자는 은총과 본성은 같은 것임을 전제하는 명제이며, 후자는 본성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가 다름을 전제하는 명제이다.

 

마리아와 마르타로 대별되는 은총과 본성의 갈림은 교회사에서도 은총론의 오랜 논쟁을 낳았고, 왜 믿는 이들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는지 그 맥락과 같이 한다. 은총을 받은 이들끼리의 갈등과 논쟁의 공통의제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닿아 있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은총과 연결하여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와 Ⓓ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떠올려 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분이라면 굳이 소년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가 필요했을까? 여기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는 인간의 노동을 상징한다. 인간의 노동과 하늘의 축복의 결합, 그것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낳았다. 노동은 인간의 의지다. 축복은 하느님의 의지다. 이것을 다른 질서로 바라보느냐? 하나의 질서로 바라보느냐가 은총론이 갈라지는 지점일 것이다.

 

그 다음,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를 생각해 본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의지나 본성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그분의 의지대로 하느님 나라를 강제로 주입시키지도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하라>, 혹은 <청하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개입된 은총론에 대한 권유다. 그러기에 <회개하라>는 것은 흔히 죄와 관련하여 바라보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 마리아처럼 바라보라는 언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이란, 은총과 본성을 하나로 일치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은총과 본성이 일치된 것이 왜 ‘좋은 몫’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 자신이 희생이자 희망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들은 사람 역시 희생이고, 사랑이고, 희망인 삶이 필연적인 존재이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토마스 아퀴나스)

 

그런 맥락에서, Ⓒ를 이해하는 것이, Ⓐ를 바라보는 ‘어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타의 '어떤 상태'는 마리아의 '어떤 상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여정에 있다고,  마르타를 이해하고 기다려 줘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은총은 본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 때만이 마리아가 선택한 그 은총과 본성의 일치를 아무도 빼앗을 수 없게 된다.

 

마르타의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본성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가 병렬관계로 놓여 있다면, 은총은 인간에게 부채의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에 의해서 취소될 수 있는 ‘가현설’처럼 ‘가-인간’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가짜 인간은 세상을 표류하게 되므로 자신의 불안한 존재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의 고통과 불행, 그 결핍의 이유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 밖을 배회하다, 가장 만만한 타인에게 불안의 요인을 전가시킬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길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돌아가 본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루살렘 긴 상경기(9,51-19,28)의 핵심은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였는지(모셔들었다)’가 초점일 것이다. “맞아들임”은 <십자가-부활-승천> 전부를 가리키는 십자신학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여정을 바라본 마리아의 몫은 왜 좋다고 볼 수 있나? 그리고 그것을 누가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루카10,38-42에서 마리아는 당시에 금기시 되던 남녀칠세부동석을 넘어 그분의 발치에서 <무엇을 들었을까>를 묵상하다보면, 떠오르는 단어가 ‘면형(麵形)’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듣는 사람 역시 ‘면형(麵形)’의 길을 가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이천년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길이 바로 '면형(麵形)의 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은 마리아의 길 역시 ‘면형(麵形)의 길’일 것이다. 

 

“면형(麵形)”은 밀떡이 성체로 바뀐 뒤에도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겉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면형(麵形)하면 무아(無我)와 연결하여 ‘면형무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면형(麵形) 안에 이미 무아가 있기에 면형(麵形)이라 부르겠다.

 

그 길은 분명 희생과 고통의 길이다. 그런데, 그 희생이 희생으로 그치는 길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문을 여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프랑스시 잠의 시에서 바라보았다. 예수님 스스로 '면형(麵形)의 길'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면형(麵形)의 길'은 우리 순례의 여정 중에서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좋은 몫'은 우리의 '본성과 은총이 함께'할 때만이 알아들을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먼저 '면형(麵形)의 길'을 통해 진정한 희망과 사랑의 이름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볼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죽음의 강을 건너려고 하는 누군가에게 희망과 사랑의 이름이 될 수 있었다면, 이미 '면형(麵形)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을 은총으로 완성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유일한 존재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3. 성경이 손에 있는 사람과 성경이 마음에 있는 사람

 

연중 16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예루살렘 상경기의 여정 중에 만났던 마르타와 마리아의 <맞아들임-영접>을 통해 그들이 전해준 희망의 이름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물론 강론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동안 오신부님의 강론을 3년 동안 들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다. 그동안 들은 강론의 큰 줄기는  '절망을 모르는 현실인 예수님'과 연결하여,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법'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바쁘고, 또 어떻게 바쁜지에 대해서는 한번 정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단순히 바쁘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외모를 살피려고 거울을 수시로 보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살피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우리는 때로 내 영혼을 돌볼 시간을, 스스로가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생각이 들 때는, 몸이 바빠서 마음까지 바빠진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바빠서 몸까지 바빠진 것인지를 우리는 가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몸이 바쁜 것은,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방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것은,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예루살렘을 향한다는 것은. ‘골고타 산를 향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긴 여정의 틀 안에서, 또 마지막 여정의 틀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최후를 준비하는 예수님에게, 마리아와 마르타의 영접 중에 어느 것이 더 예수님께 필요했을지는, 또 어느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접이었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이 모습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시려는 예수님께, ‘저는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마리아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접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떻게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을 생각을 한 것일까?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 이전에 그분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선택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네! 라고 알아들었을 것이다.

 

마르타 또한, 자신의 집에 오신 예수님을 환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마르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방문하신 시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최후를 맞이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마르타는, 몸이 바쁘고 또 마음이 바빠서 이 점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르타가 갖고 있는 문제는, 마르타는 몸이 바빠지면서, 마음까지 바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음이 바빠지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말씀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바빠지면 자신의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대부분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에는 대부분 그 성경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과 루드빅 시크 대주교님의 말씀을 연결시켜보면,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 성경이 손에 있는 사람과 성경이 마음에 있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듣는 통로는 수없이 많지만,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성서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성경이, 우리에게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성경이 손에만 놓여 있습니까?’ 아니면 ‘그 성경을 마음 안에까지 담고 있습니까?’

 

 

어느 날 시인이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점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돼서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또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고,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그 돈을 다 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염려하느라고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도 미래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결국은 결코 잘 살아본 적이 없이 무의미하게 죽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인터뷰)

 

마음이 바쁘다는 것은 자기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하는 기재이다. 마음이 바쁜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공허의 빈틈을 깊게하고 그것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곳으로 밀고 가기도 한다. 그 다음 수순은 언제나 타인에게 그 공허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평가의 우를 범하게 자신을 더 멀리 밀고 간다.

 

밀라노 대교구장이셨고, 유명한 성서학자이신 마르티니(Carlo Maria Martini 1927- 2012) 추기경님의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짧은 묵상을 소개해 드리면(...) “마르타도 마리아와 같은 것을 구하고 있으나, 그것을 분주한 접대를 함으로써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종종 위험이 따릅니다. 그것과 달리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필요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기울인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의 영접이 종종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은 영접의 본질을 그녀가 놓치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의 충만에 이르는 길, 본성과 은총의 이별을 의미한다.

 

반면, 마리아가 한 순간도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 길이 인간이 충만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충만에 이르는 길인지를 헤아리는 것이 우리 일상을 살피는 일일 것이다. 여백이 없다면 살피고 싶어도 실피지 못한다. 그래서 몸이 바쁜 것인지 마음이 바쁜 것인지?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사람은 마음이 바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생각이 들 때는, 몸이 바빠서 마음까지 바빠진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바빠서 몸까지 바빠진 것인지를 우리는 가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몸이 바쁜 것은,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강론에서는 몸은 바빠도 마음까지 바쁘면, 그분을 들을 수 없고, 그분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가꾸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 성경이 우리의 손이 아니라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현재를 살 수 있는 여백을 갖는 일일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강론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차이는

 

성경이 손에 있는 사람과 성경이 마음에 있는 사람의 차이로 보고 있다.

 

영혼을 돌볼 시간을, 스스로가 만들 수 있을 때

 

그때,

 

바쁘게 살면서도 성경이 마음 안에 있고, 현재를 놓치지 않을 만큼만 바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게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희생과 희망의 이중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발치에 앉아서 마리아가 되어 들은 것, 희망 없이도 희망하는 법, 그래서 희생이라고 쓰고 희망이라고 읽게 되는 순례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쓰고 나니 세상이 음식으로 보인다. 배고프니까 음식 사진만~~~

 

 

 

글을 마무리해 본다.

 

글의 제목을 세 번을 바꾸면서 썼다.

 

3. [면형(麵形)의 길, 내가 J에게 가는 길, J가 내게 오는 길]

2. [면형(麵形)의 길, 희생과 희망의 이중주가 들려주는 존재이유]

1.[면형(麵形)의 길, 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

 

면형(麵形), 그러면 먼저 희생을 떠올린다. 그러나. 면형(麵形), 그러면 동시에 희망도 떠올려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기쁜 소식일 수 있겠는가?

 

복음은 언제나 희생을 통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죽음을 통한 부활을 말하고 있다. 희생이면서 동시에 그 길이 희망인 길을 가기 위해서 그분을 듣는 시간-<은총과 본성이 일치>해야 하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즉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본성과 은총이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희생과 고통과 죽음만 보게 된다. 즉, 마음과 몸이 우리 생을 끌어가게 된다. 우리 생을 끌어가는 것은 영혼이다. 본성과 은총이 일치하면 우리가 몸과 마음만 갖은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보게 된다. 희생과 고통과 죽음 너머를 보게 되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고통이 크다면 영광도 크다는 것은 십자가의 정석이다. 그분의 발치에서 들은 것이 크다면 그의 삶도 면형(麵形)의 길이 되는 삶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죽음의 강을 수없이 건넜으리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여기 있소, 라고 대령하진 못했으리라. 친구가 많아도 영적인 것을 말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뼈시리게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게세마니아의 예수님 곁에 자주 땀흘리며 함께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욥인줄 알았으리라. 그래서 욥인 것을 받아들였으리라. 그래서 울면서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삶은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울기는 쉽다. 그러나 웃기는 어렵다. 절망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희망을 보기는 더 어렵다. 희망을 안고 걸어가는 것은 더 어렵다. 따라서 더 많이 기도하라는 것은 더 많이 희망하라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