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 시간,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고 쓴다

나뭇잎숨결 2022. 7. 26. 15:00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 시간,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고 쓴다

 

 

 

[연 중 제 17 주 일 (다 해) 2022. 7. 24.Luc. 11,1-13.]

 

 

 

 

 

1.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 박정대, 「아무르 강가에서」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를 읽어본다.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 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는 현실의 구관조가 아니라 책속의 구관조에 관한 것이다. 화자는 책장을 넘기는 것이 실례가 될 만큼 고요한 도서실에서 구관조 씻기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구관조 씻기는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는 것에서 그 발설과 발화가 시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화자는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이 어느 순간 바뀌는 것을 본다.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두라는 부분에서, 거리가 젖는 것을 보았다. 새에서 인간으로 주체가 바뀌는 부분에서 언어가 어떻게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박정대의 「아무르 강가에서」를 읽어본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밤으로 몸을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발밑의 어둠/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그대 떠난 강가에서/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맹이 하나/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박정대의 「아무르 강가에서」는 그대가 떠난 강가에서, 화자는 그대를 잃은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상태를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까지 쌓인 어둠으로 어둠에 포위당해 있다. 아무르 강엔 국가의 국경은 없지만 ‘그리움의 국경’이 있고,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으면 온통 어둠으로 표현된 쓰라림만 존재한다. 화자는 그 어둠과 하나가 되어 그 어둠을 어떻게든지 감당해 보려한다. 화자는 두 개의 공간을 병치 시켜 그대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리움이라는 번뇌에서 추억이라는 열반으로 넘어가 보려 한다. 그래서 화자는 아무르강과 하늘, 아무르강과 정선의 정암사를 떠올려 본다. 추억을 적멸보궁 같다고 말하는 화자는 아무르강가에서 실날같은 초저녁별을 보면서 그리움이라는 번뇌를 넘어서려고 하는 중이다.

 

아루므강은 중국과 시베리아를 갈라놓는 사람들이 정한 국경의 강이다. 아무르 강엔 국가의 국경은 없지만 ‘그리움의 국경’은 있다. 그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으면 어둠만이 있다. 그 강은.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하여 중국 흑룡강을 거쳐 타타르 해협으로 흘러가는 검은 강이다. 정암사는 정선에 있는 <적멸보궁>으로 한국의 <적멸보궁> 다섯 사찰 가운 데 하나다. <적멸보궁>은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로 보배와 같이 귀한 궁전이란 뜻이다. 여기서 화자는 아무르강을 번뇌의 상징으로 정암사를 그 번뇌에서 벗어난 열반의 상태로 그리고 있다. 박정대 시인의 「아무르강가에서」를 읽으면 화자가 느끼는 정서가 그대로 우리 내부로 스며든다.

 

반면, 황인찬의 시는 고요하고 또 고요하여 그 어떤 정서도 독자와 나누지 않는다. 정서를 나누지는 않지만 고요함의 ‘눈’ 신성에 가까운 ‘있음’은 나눈다.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에는 김춘수에서 시작한 ‘반인주의’ 즉 주지시의 전통을 잇는 시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 어떤 정서의 '도취'도 없다. 다만 도서관의 내부처럼 화자는 한 고요가 또 한 고요와 대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화자의 현실이다. 마치 구관조가 어떤 생태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만 전하는 정보 전달의 책을 읽듯, 존재에 대한 해석은 책장을 넘기는 것만큼 실례가 된다고 말한다. 이는 존재에 대한 지극한 예의다. 함부로 존재의 정서를 짐작하거나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그 존재의 있음, 그 자체를 수긍하려는 배려,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그래서 격앙되는 법이 없고, 어떤 상황에 대해 크게 절망하거나 한탄하는 일도 없다. 담담하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뿐이다. 거기서 존재와 존재 사이의 ‘거리’ ‘격절’ ‘저만치’ '공백'이 발생한다. 이 세계를 지긋이 지켜보는 ‘눈-시선’의 관용이다.

 

황인찬, 박정대, 어떤 시인의 시를 선호하든,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저 두 시의 상태-거리두기와 거리두지 못하기-를 동시에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은 고정된 룰이 정해진 트랙을 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죽고사는 문제가 달린 거라면 거리두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루카 11,1-13

 

복음을 읽어 본다.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고 전하는 루카 11,1-13에서 어떻게 <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향해 올라가는 기도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에는 일곱 개의 찬미가가 아니고 일곱 개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졌다.

 

일곱 개의 청원기도가 어떻게 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해가는 기도의 길인지 8절을 중심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8)

 

8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누구나 관계를 맺는 친구, ‘벗’과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부분이다.

 

그 장면을 그려 보면,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빵이 없고 한 사람은 빵이 있다. 빵이 없는 사람이 빵이 있는 친구에게 한밤중에 찾아 가서 빵 세 개를 꾸어달라고 부탁한다. 그것도 자신이 필요해서 부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벗, 길을 떠나는 벗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벗은 듣자마자 거절한다. 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밤중이고 가족들과 잠들기 직전이라 귀찮아서 거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에게 “그가 줄곳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라고 하신다. 기도는 그렇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기도의 제1덕목을 ‘포기하지 않는 항구함’이라고 전한다.

 

만약 현실세계에서 저런 친구관계가 있다면, 참 머리가 절래절래 흔들어지는 관계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관포지교는 아닐지라도 친구는 말로써가 아니라 그동안 나눈 시간, 인격으로 서로를 가장 깊이 읽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어도 넉너히 심중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그런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길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표면적으로 8절을 읽다보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마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와 아빠의 관계와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J는 왜 기도의 비유에 이런 관계를 설정하여 설명하시는 것일까?

 

여기서, 자주 한적한 곳에서 그분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을 떠올려보면, 청원기도가 통과해야 하는 몇 개의 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첫째, 기도는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향해서 올라가는 사랑과 갈망, 존경과 감탄의 끊임없는 속삭임’(루이 에블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기도는 ‘자기의 뜻과 최상의 귀의를 융합시키는 지극히 천상적이고 지극히 지상적인 명제’이기 때문이다.(칼 러너)

 

 셋째, 기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사건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불가피하게 아픔과 고통을 수반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있다. 아들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데에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도가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또 태어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기 때문이다.(루이 에블리,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김병도 역, 가톨릭출판사, 1973)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에 대해, 루이 에블리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설정>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호명이 실제적인 것인가? 단지 호명의 차원인가를 묻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인 것인가? 유보된 약속인가에 관한 것이다.

 

제1독서의 아브라함의 기도는 25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도하는 그 즉시 이루어졌다. 이 상반된 예에서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는 것 뿐 아니라, 기도의 어떤 틀을 발견해 볼 수도 있다. 아브라함과 즈카리야는 하느님의 시간을 인과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이들이다. 그 이야기는 아들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들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같아진 지점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린 그 긴 시간들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신비를 그들이 이해하는 그 준비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신비를 체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청원기도가 함유하고 있는, 궁극적인 축복은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일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 형상을 볼 수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신인 예수님만이 겪어내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도 동시에 겪어내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서 형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불가피하게 고통이라는 과정을 겪어낸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 형식을 띤 기도가 삶이라는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왜 기도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가? 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기쁨으로 응답되지 않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전능이란 바로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랑의 전능이다. (G 하센휫틀, 하느님: 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심상태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3)

 

G 하센휫틀은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전능이 만난 순간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측면은 고통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유한한 자유이다. 하느님의 전능은 무에서의 응답이 아니라 존재에서의 응답이기에, 불가피하게 고통을 유발한다고 보고 있다.

 

자유가 유한하다는 말 자체에 이미 모순이 내포되어 있기에 인간이 존재의 충만에 이르기 위해서 혹은 존재의 결핍을 견디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상황에서 그분을 부르게 된다. 그분의 전능을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응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전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은 우리의 절박한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기도가 이루어졌음에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전능은 존재를 바탕으로 한 전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의 중단, 포기는 기도의 방향이 빗나간 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예컨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기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제가 빵을 나누게 하소서! 혹은 스스로 나눌 빵이 없을 때, 다른 이들에게 빵을 구해서라도 나누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8절에 나오는 친구를 위해 한밤중에 친구집에 가서 ‘줄곳 졸라대는’ 그와 비슷한 상황이 기도라고 본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두 존재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유한한 자유를 가진 인간과 자유 그 자체인신 그분이 만나서 이룬 하늘과 땅의 융합은 그래서 눈물 속에서 핀 꽃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바탕이 누군가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와 같은 즉, <최소의 사랑>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반드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버금가는 것이다. 소화데레사는 가르멜봉쇄수녀원에서 전교의 주보 성녀가 되었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직접 온몸으로 전교의 최선선에 있었다. 두 분 다 전교하면 떠오르는 분들이지만 그들이 봉헌한 최소의 사랑은 달랐다.)

 

그렇듯, 하느님의 사랑의 전능을 이해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센휫틀은 말한다. 존재를 바탕으로 사랑을 하시는 그분과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생존양식 안에서 <침묵>이라는 벽을 통과하는 과정이기에, <기쁨> 보다는 <고통>을 먼저 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 사랑에는 오로지 무죄한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느님의 나라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7)

 

이를 기독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사랑은 항상 고난당하는 사랑이다’라는 더 깊은 명제를 던진다. 모든 사랑에는 ‘무죄한 고난’이 존재한다는 통찰이다.

 

진정한 사랑은 왜 ‘무죄한 고난’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 몰트만은 <창조의 신비>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창조 자체가 인간의 유한성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과 사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그 자체에 <유한-죽음>이라는 근원을 두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모든 형체를 갖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운명이라고 본 것이다.

 

형체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빛과 어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고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유한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생명체는 스스로 무한하려는 본능을 표출하게 되므로 갈등과 투쟁, 전쟁과 소유를 유발할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그가 빛과 공존하는 어둠이라고 보지 못하고 어둠만 보게 될 때를 의미한다. (왜 창조 자체에 갈등의 소지를 남겨놓았는냐고 무신론자론자들이 신을 부정하는 제1이유이자, 신을 믿는 이들을 우매한 백성으로 바라보게 되는 지점이다)

 

그 다음,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표현은 인간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하늘을 나는 새를 가장 새답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새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다, 라는 단순 명제다. 창조의 선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신의 자기 족쇄에 해당한다.

 

하느님이 지극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동료 인간들을 주었지만 인간은 생존본능에만 집착해 사랑보다는 소유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조자체가 사랑이기에, 사랑이라는 관념이 어떤 형체를 취한다는 것은,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는,  이미 고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몰트만의 '사랑은 모두 무죄한 고통이다' 라는 명제는 묵상을 더 필요로 하기에 다음 주제로 넘긴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랑의 전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디나 계시지만 어느 곳에서도 전능자로써 인간에게 <나는 여기 있다>는 신 존재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는 기도가 왜 아픔과 고통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신학자들의 직관이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든, 타자를 위해 기도하든, 세계를 위해 기도하든, 기도는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루이 에블리가 간파한 대로,

 

기도가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또 태어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3. ‘기도는, 은총은 은총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나의 삶에 의미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

 

 

연중17주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이것이 은총이다,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간의 흐름과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기도의 축복’를 살기 위해 넘어야할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으신다.

 

이것이 은총이다. 또는 이것은 고통이다.’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때로 시간의 흐름과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동시에, 시간이 흐른 다음이 아닌, 그 당시에, 또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무엇이 은총이고, 또 무엇이 고통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삶이란, 때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야 그 시간의 의미를 깨달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현실적인 요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청원기도로 대별되지만 실은 삶의 의미는 시간이 흘러봐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어떤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고, 이어서 기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내용입니다.(,,,)얼핏 보기에는 하느님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기도에 대한 이 말씀은, “청하는 대로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기도할 수 있어야 포기하지 않는 항구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다. 그것이 항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1차적인 요건이고, 기도를 떠받치고 있는 궁극적인 요건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청하는 사람이 먼저 지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청하는 사람이 주시는 분 보다, 먼저 지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청하는 사람이 먼저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기도가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항구한 기도를 못하는 것은 청하는 사람이 주시는 분보다 먼저 지쳐서 포기하는 경우이다. 항구한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 번째 요인은 기도의 간절함에 있다. 사실, 간절함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만든다.

 

오늘 제 1 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 약속을 하신 지 25년이 지나서, 아브라함이 백 살이었을 때에, 비로소 아내인 사라를 통해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에 이사악을 주시면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항구한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세 번째 요인은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이 기대하는 시간의 충돌이다. 하느님의 침묵을 하느님의 부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응답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의 때를 정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청하는 사람이,(...)기도의 응답의 시간까지를 스스로 정해 놓기에 우리의 기도를 멈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포기는 간절함과 시간의 충돌로 야기되지만 그 저변에는 기도의 응답, 그 시점을 미리 정해놓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위격과 인격의 만남은 그 시간이 하느님의 몫이라는 데 있다. 기도의 응답에 대한 시간의 몫이 하느님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권력화된 사랑의, 전제적인 휘두름이 아니라 전능한 사랑이 인간에게서 받아들일 그릇을 준비할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도하는 자의 간절함과 그 주변의 모든 상황이 전제된 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얻었는데 누군가는 상실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우리가 청할 수 있는 것만도 은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찾아보아도 길이 없는 거 같은 상황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분에게 우리의 내밀한 그 모든 것을 개방 할 수 있다면, 이미 <기도의 은총, 기도의 전능>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맥락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맥락까지 동시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때는 대부분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일 것입니다.(,,,) 절박함이 간절한 기도를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절박한 상황이, 오히려 먼 훗날, 은총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총은 은총대로, 또 고통은 고통대로 나의 삶에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 그런 깨달음을 주는 힘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기도를 낳았지만, ‘은총은 은총대로, 또 고통은 고통대로 나의 삶에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 그런 깨달음을 주는 힘’을 체험하는 것이 기도의 힘이라면. 그 힘은 사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좋았다’ 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린 다음의 평화 같은 상태일 것이다. 아마 이 경지가 청원기도를 넘어선 지점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저에게 기도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기도는, 은총은 은총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나의 삶에 의미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진정한 기도는 우리를 과거에 매이지 않게 하고, 미래도 걱정하지 않게 해주는 힘(...)기도는 현재를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은총과 고통이 같은 이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를 과거에 매이지 않게 하고, 미래도 걱정하지 않게 해주는 힘(...)기도는 ‘현재를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기에 이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투지 않는다. 아마 이 지점이 청원기도의 정점인 아들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같아진 지점일 것이다. 

 

어느 시인(폴 발레리)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하면, 사람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살지 못해서 사는 대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살지 못해서, 사는 대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이 단락은 다음 단락과 연결해 바라본다면 굉장히 묵직한 성찰 주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청원 기도로 시작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청원 기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의 변화!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변화는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그 힘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꿈꾸기가 쉽지 않은 변화입니다.

 

 

강론은 기도의 축복, 그  궁극적인 지점을 다음과 같이 도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도식은 고통의 힘을 알 수 있는 마지막 단락으로 모아지므로 역설적인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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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기도는, 은총은 은총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나의 삶에 의미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며, ⑵진정한 기도는 우리를 과거에 매이지 않게 하고, 미래도 걱정하지 않게 해주는 힘으로 기도는 ‘현재를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며, ⑶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의 변화!’가 우리가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에 ⑷청원기도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청원기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제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다는 것, 우리가 아직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의 기도는 언젠가는 그 청원 기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청원 기도에 멈춰 있다면, 우리는 기도 를 통한 삶의 변화를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원기도를 넘어서야 하는 지점, 우리는 흔히 청원기도하면 관상기도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청원기도를 넘어선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내가 가장 원하는 바로 그 뜻이자, 내가 원하는 것이 자명하게 하느님도 원하는 바로 그 삶이라는 분리 없는 확신, 그래서 그분이 알려준 사랑이라는 정답만 보고 걸어가는 혹은 겟세마니 기도까지 할 수 있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의 변화!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고, 그 변화는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힘을 깨닫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는 제언이 강론의 주제인 듯하다.

 

일필휘지로 쓴 글은 일사천리로 읽게 된다. 강론의 모든 맥락을 마치 내가 말하고 있는 듯, 강가를 산책하는 것처럼 유유하게 따라가다가, 마지막 단락에 와서 딱, 멈췄다. ‘변화를 꿈꾼다는 것은, 고통의 힘을 아는 것’ 이라는 마지막 단락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강론에서 전하는 '변화와 고통의 힘'과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통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보충)삶의 변화를 꿈꿀 수는 있겠지만, 고통의 힘은 무엇이고, 그 고통의 힘이 어떻게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시대와 공간과 인연과 혈연이 얽히고설켜서 나눠진 고통이 있을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무죄한 고통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는 그 고통이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가를 규명하기 보다는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고통이 지닌 힘을 이해하는 관건일 거 같다. 

 

일단, 우리는 고통 앞에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고통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 이유는 고통이라는 글자만 들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은 쾌를 좋아하고 고통은 본능적으로 기피하고 싫어한다. 누가 고통을 잘 참아야 한다고 하면 되묻고 싶은 심정 같은 거다. 어떤 고통을 겪으셨나요??? 라고.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더 정직하게 고통이 두렵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기도한 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소서!>라는 기도는 사실 그 의미를 묵상하면, 얼마나 무서운 기도인가? 무죄한 고통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제2의 마리아가 되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고통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시간 앞에 서 있게 되는 때가 있다. 하나의  고통이 끝나고 쉴 틈을 주고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통이 나에게로 몰려들온다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이 구약의 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여도 고통 앞에서 쓰러지고 또 쓰러질 때가 있다. 고통에는 힘이 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고통 앞에서 쓰러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때 우리는 고통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인간이 유한자이듯, 인간이 초래한 고통 역시도 유한하다. 인간의 오욕칠정이 유한하다. 그래서  모두가 결국은 다 지나간다. 그 누구에게도 이 고통을 위로받을 수 없고, 누구의 고통도 대신 져줄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그분의 수난의 의미를 비로소 바라보기에 이른다. 그때, 이 고통을 치워주소!라는 청원 기도를 드리지 않게 된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십자가를 과감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인지, 아님, 그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고통인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고통을 지렛대 삼아 고통을 넘어서기에 이른다. 고통을 이기는 도구가 고통이다. 아니 고통을 이기는 도구는 사랑이다. 삶과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는 고통이 지닌 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통이 지닌 힘만큼 고통을 극복했을 때는 그만큼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고통과 사랑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그런 시간이 흐른 이후에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삶의 변화 속에서 개별적이고 특별한 사랑에서 보편적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모든 날들이 좋았다고 말하게 된다. 고통 앞에서 쓰러지기도 하겠지만, 그런 시간을 통과하면서  풍랑이 친 바다위를 걸어가는 예수님처럼 단단해 지고, 고요해지기도 한다. 고통이 주는 힘이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의 변화!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변화는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그 힘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꿈꾸기가 쉽지 않은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마지막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 <루이 에블리, G 하센휫틀,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성모님의 일생, 야곱과 다윗의 기도,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를 함께 묵상하였다.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 기도의 마지막 시험인거 같다. 그때 ‘고통의 힘’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글을 마무리 해 본다.

 

 

이번주에도 제목을 몇 번 바꾸면서 글을 썼다. 제목(주제)이 정해지지 않으면 글을 못 쓴다.

 

4.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 시간,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고 쓴다

3.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좋아하세요? 바흐의 카논을 좋아하세요?

2. 촛불의 미학, 아들의 용서에서 아버지 부재 존재증명을 너머

1. 사랑을 통해서만(기도) 형상을 볼 수 있다(응답)(토마스 아퀴나스)

 

제목을 정하는 데, 딸이 한몫했다. 강론의 마지막 단락 그 너머를 통과한 이후에, 그 시간을 박정대 시인의 시에서 화자가 느낀 '정암사의 적멸보궁'과 같은 편안함, 될 수 있으면 그런 상태를 드러내는 부드러운 제목을 선택했다.

 

딸은 피아노를 잘 친다. 어려서부터 음감이 뛰어났다. 초등학교때부터 어디서나 반주를 했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주관적으로  <리차드 클레이드만> 못지않게 잘 친다. 딸이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치고, 나는 내 서재에 있을 때, 두 손이 저절로 모아질 정도로 행복했다. 그때 문득 모든 날들이 좋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모든 날들이 좋았다. 모든 날들은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다.

 

그래서 글 제목을 서정적으로 정했다. 청원기도를 넘어선 지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왜 그 길로 가면 고통인데 그것이 고통인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자꾸 걸어가게 되는지에 대한 완곡한 비유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을 넘어 고통 너머가 있다는 것을 흘깃, 보았거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 시간,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고 쓴다]

 

세계의 인구 79억 오천명은 모두 걸어가는 한권의 자서전이다. 고통의 크기와 은총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다 절대적인 은총과 고통의 크기를 갖고 순례를 한다. 구구절절한 사연과 은총과 고통을 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백세 전후로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감사했던 날들보다는 고통스러웠던 날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론에서 언급하듯, 은총의 시간과 고통의 시간이 분명히 나눠져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시간의 무늬는 은총과 고통의 겹주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총 속에 고통이 고통 속에 은총이 있었다. 은총과 고통이 그리는 겹주름 속에서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동행이다.

 

마치 딸과 한강변을 산책하는 것과 같다. 그때, 우리는 말만 하지는 않는다. 긴 침묵으로 걷기도 한다. 그저 가끔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의 혼과 영을 갈라놓으실 수 있는 분과 동행이기에 무슨 침묵인들, 무슨 대화인들 나눌 수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