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우리는 걷고 싶다.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비트겐슈타인)

나뭇잎숨결 2023. 1. 15. 10:18

분이가 보내준 사진1, 하늘, 나무, 눈꽃을 렌즈에 담는 저 시선은 어디에서?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비트겐슈타인)

-Wir wollen gehen, also brauchen wir die Reibung. Zurück in die raue Erde

 

 

 

 

1. 아! / 생각만 해도 / 참 / 좋은 / 당신!

 

 

김용택의 「참 좋은 당신」을 읽어본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기로 /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 / 생각만 해도 / / 좋은 / 당신...

 

 

사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참 좋은 당신’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어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그가 '참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주었는지, 주지 못했는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는 상찬과 비난이라는 양극의 대상이 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 '아련한 사람', '들꽃같은 사람', '참 좋은 당신들'이 있다. 왜 그럴까? 

 

그가 '참 좋은 당신'으로 걸어오는 길가에서 우연처럼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간, 그곳에서, 그는 자기 몫의 어둠을 뚫고, 방금 걸어나와, 가장 좋은 웃음을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그런 시간 속에서의 마주침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나는 모두에게도 '참 좋은 당신'인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충분히 '참 좋은 당신'이 되었다면, 내게 주어진 '상황과 사건과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 '상황-맥락'속에서 '당신'과 비슷한 어떤 자장을 갖고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 생각만 해도 / / 좋은 / 당신...”

 

그렇기에, 나와 당신과의 만남이 서로에게 ‘참 좋은 당신’인지, ‘그냥 스쳐갔으면 더 좋았을 당신’인지는 당신과 내가 그 때, 어떤 ‘상황-맥락’ 속에서 삶을 끌어가고 있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당신과 내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혹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맥락'이 그곳, 그 시간 속에서 참 좋았던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어떤 ‘상황-맥락’ 속에서 '참 좋은 당신'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상황과 맥락에 좌우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어떤 빛, 불기, 환함, 들꽃, 기쁨, 웃음 같은 것, 근본적으로 우리는 원래 그렇게 '참 좋은 당신'으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이가 보내준 사진2, 습설과 햇빛!

 

 

 

 

2.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비트겐규타인)

 

 

 

‘상황-맥락’을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인이 처한  ‘상황-맥락’을 충분히 경험한 다음에, 들뢰즈의 간파대로 ‘상황-맥락’의 ‘바다’에 도달한 후에 바라본 인식의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바다에 도달하기 위해 수없이 거친 땅을 거친 후 그 땅 앞에 <거친>이라는 형용사조차 더이상 쓰지 않게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눈에는 거친 땅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본인에게는 하늘을 우러러,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정직한 시간을 살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 오직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전기철학의 명제로 주로 기억한다. 그런데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는 후기 철학에서 그는 비로서 자신을 훌쩍 넘어선다. 비트겐슈타인이 처한 태생적 화이트칼라의 상황-맥락을 넘어선 것이다. 그때, 그는 죽음조차도 그를 건드릴 수가 없는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은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일반화를 낳았을 정도였다. 

 

그를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을 다룬 실증주의자, 분석철학자로 부르는 것은 모든 이에게 상찬되었던 전기철학의 시대가 아니라 후기 철학에 이르러 스스로 자신을 부정했던 <거친>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언어들의 한계는 나의 세계들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세계와 삶은 하나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논리-철학-논고, 1921)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철학적 탐구, 1953)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원리가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나는 도대체 왜 타자에게 근거들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줄 수도 있다. 근거들 끝에는 설득이 있을 분이다(확실성에 관하여, 1951 )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사용에 무한히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다양성 밑에는 통일된 본질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해질 수 없는(표상)”이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만천하게 말할 수 있었다. 철학자는 당연히 이것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전 철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크게 냈다. 이것이 그가 철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기존의 철학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다 했으므로, 더 이상 철학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골학교 교사 정원사 건축사 등 다양한 경험의 폭이 확대하면서 그는 동일한 언어 사용자끼리 의시소통이 안 되는 이유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안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비로소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확실성을 추구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전기철학의 명제에서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는 후기철학의 명제로 언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달라진 이유에 대해 다양한 계층의 상황-맥락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언어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놀이라고 본 것에 설득 당할 수 있다.

 

예컨대, 어린아이는 수많은 것들을 믿는 법을 배운다. 즉, 아이는 예컨대 이 믿음에 따라 행위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가 믿는 것들의 체계가 점차 형성되어 나타나며, 그 속에서 어떤 것들은 요지부동으로 확고하고 어떤 것들은 다소간에 움직일 수 있다. 확고한 것이 확고하게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명백하거나 명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확실성은 개인적 자아의 의식을 분석해 들어가서 얻어지는 어떤 하나의 원리이자 나머지 앎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일의 앎 또는 앎의 불변적 패러다임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확실성은 앎의 놀이를 포함한 언어놀이들의 토대이기는 하지만 앎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명시적으로 의식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다수의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며, 사회적으로 성취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황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듯,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 철학 논고』(1921년)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1953년)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뉘면서, 철학은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데 집중된 반면, 후기 철학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초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전기와는 다른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경험의 폭이 확대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비트겐슈타인 자신을 극복해야하는 자기부정의 시간을 감내하면서 상황-맥락의 바다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쓰는 언어는 화이트칼라의 지식인 언어로 불루칼라나 시골 사람들,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와 다시 철학에 몰두하면서 언어의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란 없다는 것, 언어는 단지 놀이에 불과하다고 전기철학의 명제를 스스로 뒤집고 말해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백한 것이다.

 

언어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언어가 발회되는 상황-맥락 속에서 다르게 표현되고 이해된다는 상식의 바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과 다른 언어사용자들의 언어를 거친 땅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고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은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하려 했는지 그의 언어적 윤리의 지고성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다.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시시각으로 다가오는  죽음과 대항하는 어떤 힘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신이 처한 상황-맥락을 넘어선다는 것은 다른 윤리와 논리의 세계, 즉 거친 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으로 자신을 광활한 우주안에서 대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뉴스 데이(Agnus Dei), Jan van Eyck, 벨기에 성 바보(St. Bavo), 

 

 
 
3.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 경배’>, Jan van Eyck, 벨기에 성 바보(St. Bavo) 대성당의 제단화
 
 
 
 
이석규(베드로) 선생이 쓴, 그림 해설을 읽어본다
 

벨기에 겐트(또는 헨트)의 성 바보(St. Bavo) 대성당에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얀 판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년)가 그린 제단화가 있다. 1432년에 완성된 이 걸작품은 절묘하고 세밀한 묘사, 다채로운 소재, 화려한 색채, 자연주의적인 사실 표현,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상징성으로 해서 이내 빼어난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제단화는 여러 폭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 경배’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확실히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인물들과 소품들로 그득하다. 사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에다 비의적(秘儀的)이거나 영지주의적인 주제  또는 상징을 그려 넣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같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도 그러한 성향과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다. 그런 점에서 에이크의 그림에 대해서도 역시 미심쩍은 눈길을 던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크를 비롯한 15세기 플랑드르파 화가들은 그러한 영향을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에이크는 비그리스도교적이고 심지어는 이단적이기까지 한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다르게 가톨릭 신앙 중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신비를 풍부한 상징주의를 바탕으로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하느님의 어린양 ;그림의 중앙에는 황금 성작에 피를 쏟아내는 어린양이 있다. 어린양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어린양은 칼바리아에서 피를 흘리신 분, 오늘날에도 날마다 제단에서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희생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시다.

에이크가 이 제단화를 그리기 얼마 전부터 개신교 혁명의 선봉인 위클리프(1320~1384년)와 후스(1369?~1415년)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제단의 성사 안에 현존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실체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던 터였다. 에이크는 마치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단죄된 이 종교 혁명가들에 맞서기라도 하려는 듯이, 자신의 위대한 작품의 중심부에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미사 성제 때 모든 제대 위에 현존하신다는 교의를 표현한 것이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이제 자신의 희생을 완수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어린양의 관조적이고 현세를 초월한 듯한 눈길에는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다. 어린양의 피는 가슴에서 나와서 그 구속의 값어치를 상징하는 성작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어린양은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시기 위해 피를 흘렸고, 이 피는 단 한 방울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네 곳에서 진행되는 행렬; 제단 위의 어린양은 마치 화폭의 네 곳에서 진행 중인 행렬에 우리도 참여하도록 초대라도 하는 듯이  그윽한 눈길로 그림을 보는 이를 응시한다. 그림의 앞쪽에는 어린양이 있는 제단을 향해 움직이는 두 무리가 있다. 왼쪽 무리에는 무릎을 꿇은 구약시대의 성조들과 예언자들, 곧 구세주 오시기를 기다리고 그 오심을 예고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는 옷차림이며 머리 장식으로 보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는 이교도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있다. 그중에 흰옷을 입고 월계관을 손에 든 인물은 시인 베르길리우스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이 쓴 네 번째 목가에서 구세주가 오실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그 곁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 11,1)라는 예언을 상징하는 작은 나뭇가지를 들고 서 있다.


오른쪽 무리에는 신약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인 12사도들이 있고, 그 뒤에는 교황들, 주교들, 성직자들이 있다. 삼중관을 쓴 세 명의 교황은 아마도 교회에 화해와 개혁에 크게 기여한 마르티노 5세, 그레고리오 7세, 알렉산데르 4세인 듯이 보인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모여 있는 세 인물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역사상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분열 대란 시대(또는 대립 교황 시대; Western Schism)를 가리킨다.

그림의 뒤쪽에도 두 무리가 있다. 왼쪽 무리는 남성들로 신앙의 증거자들, 고위 성직자들, 수도원장들, 수도자들이다. 오른쪽 무리는 여성들인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화관을 쓴 여성들은 동정 순교자들이다. 이들 중 몇몇 성녀는 그 상징물을 보고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가령, 어린 양을 품에 안은 이는 성녀 아녜스, 탑을 손에 든 이는 성녀 바르바라, 화살을 든 이는 성녀 우르술라다.



이 네 무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6),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화가는 마치 묵시록의 한 구절, 곧 “그분(어린양)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17,14)라는 구절을 그림으로써 풀이해 보여준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양이 있는 제단 주변에는 무릎을 꿇은 천사들이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들, 곧 그리스도께 매질을 가하기 위해 그분을 묶어 세웠던 기둥, 그분의 손과 발을 꿰뚫었던 못들, 식초에 적신 해면을 손에 들고 그분을 경배한다. 제단 앞에 두 천사는 무릎을 꿇고서 향로를 흔들어 향을 피워 올리면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친숙한 가르침, 곧 하늘나라에서는 천사들이 끊임이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영광과 흠숭을 드린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에는 철철이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있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피를 흘리러 오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뒤로 멀리 보이는 높고 신비로운 건물들은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인 가톨릭교를 상징한다. 이렇게 교회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바탕으로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하늘의 비둘기는 인류에게 은사와 은총을 내리시는 성령을 나타낸다.


맨앞 가운데의 분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정 같은 물방울들은 영원한 은총의 근원인 생명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나타낸다.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 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제단에 새겨진 글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는 구절인바, 하느님의 어린양은 참으로 구원되어 늘 그분을 경배하고 찬미하는 이들에 둘러싸여 제단 위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렇듯이 이 그림 안의 모든 것은 저마다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양 경배’를 포함한 이 제단화에는 얽힌 이야기가 있다.


1566년 종교 혁명을 일으킨 무리가 이 위대한 작품을 ‘가톨릭의 과도한 우상 숭배의 본보기’라 여겨 불태워 버리겠다며 몰려와 대성당의 문들을 부수었을 때 민첩한 가톨릭 수호자들은 이 작품을 해체하여 대성당의 탑에 숨겨 제단화는 훼손되지 않고 무사히 보존되었다. 그 뒤 몇 세기에 걸쳐 겐트 제단화는 나폴레옹 전쟁 통에 전리품으로 약탈되었다가 되돌아왔고, 몇몇 작품들은 이 성당의 한 성직자에 의해 탈취된 후 몇 차례 팔려 넘어간 끝에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베르사유 조약 이후 대성당으로 되돌아왔다.



 

 

 

 

 

 

 

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글은 다음 두 글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테사라코스테'(40일, 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고백하는 자의 모나드(Monad)는 창이 없다(있다)]

 

 

요한, 1, 29-34을 읽어본다.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 29-34에서 29절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절)를 중심으로 신의 강생을 좌우할 만큼, 신과 인간의 분리를 공고히 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려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를 신학적 교리적으로 바라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죄는 철저히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어둠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죄는 무엇보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바라보면 될 듯하다. 단적으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았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진 분리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성서에서 죄라는 이름이 붙은 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이 애주애인과 관련된 것, 빛과 분리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빛으로 가는 삶인가? 어둠으로 가는 삶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3, 9-10)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기4, 9)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사무엘하, 11, 1-12,1-21)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8, 1-11)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오18,6/마르코9, 42.48/루카17, 1-2)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9,3)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1-9/루카 5. 17-24/마르코2, 1-12)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루카 17, 4/마태오18, 21.2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23,34)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나라에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마태오11, 20-24)

 

Ⓐ~Ⓙ에서 죄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죄든, 그것은 Ⓐ의 아담이 지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종적인 죄와 Ⓑ의 카인이 지은 죄인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진 횡적인 죄로 모아진다. 애주애인이 깨진 것이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육체적인 병조차 죄라고 보았던 것은 유다인들의 공동체 존속을 위한 위생학적 배제의 원칙보다는, 육체의 병으로 인해 실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 때, 타자에 대한, 나아가 신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죄의 범주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에서 보듯, 무엇보다 용서 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서의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덮을 만큼 그런 죄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죄를 바라보는 궁극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지난 시간에 대한 죄책감을 주기위한 복기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추스리는 멈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용서나 관용은 하느님 창조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누구도 결코 빛의 근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리도덕적인 죄까지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까지도 '무지의 행위'로 보았지만,

 

특이한 점은 Ⓙ에서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 Ⓙ는 Ⓔ와 연결해 약자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하느님 나라의 걸림돌인지 알 수 있다. 코라진, 베싸이다, 카파르나움은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행선언은, Ⓗ에서 일흔일곱번이라고 용서하라고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맥락과 배치된다. 

 

그렇다면,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을 향한 분노가 담고있는 그 죄란 무엇인가? 이 세 도시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죄의 이름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19, 23-30)>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물질적인 부는 타자의 1차적인 생존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유무보다 생존의 유무가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루카 4장에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르마리를 펴시고 희년을 선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이 인간역사에 개입한 결정적인 필연성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다. 즉 약자배려의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기에 Ⓜ과 Ⓙ에서 거론된 이들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물질적인 소유욕망이 그 어떤 타락보다, 그 어떤 윤리적인 죄보다 더 하느님나라에서 멀다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타자를 모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모든 죄의 그 근본원인은 자신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의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에 해당하는 '무지의 상태'가 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죄는 Ⓐ의 아담이 지은 원죄의 고리가 무엇인가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죄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때가 차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이 인간 역사, 즉 나의 역사에 개입하신 이유를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죄는 사랑의 분리이고, 어둠은 빛의 분리이다. 죄, 어둠, 죽음은 블랙트리오다. 모든 죄는 사랑의 분리와 빛의 분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둠의 상태였을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라는 시편 36장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 12)

 

 

첫 인류 아담은 누구인가? 아담이 하느님과 그리고 그분의 창조물과 더불어 외적으로 가장 완벽한 상황에 있었음에도 아담은 죄를 지었다. 이를 아담의 불순종이라 규정한다면 아담 개인의 개별적 죄로 치환하는 추상적인 진술이 된다. 아담은 누구인가? 바로 오늘, 우리이자, 나다. 아담이 그분과의 분리를 낳은 이유가 무엇인가?는 나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진단키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저지른 오류는 단적으로 아담이 빛과 어둠을 동시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은 빛만큼의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우리 마음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삶의 방향은  <하느님은 빛이고, 나는 그 빛 안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M44)는 것, 빛과 어둠을 감당할 시선을 재정립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빛을 창조하신 그분은 왜 어둠을 묵과했을까?

 

창조라는 말 자체는 양날의 칼과 같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창조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의지가 사랑과 자유이듯, 그분이 창조한 모든 세계에 이 창조의지가 내재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선물로 받았고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그 <자유의지>는 어둠의 위험을 무릎 쓴 사랑이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바라본 대로 <나는 믿나이다>라는 로고스의 본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 32>라는 그 ‘자유’를 말함인데, 그 '자유'란 '어둠을 무릎 쓴 사랑'이라고 바라본 그 맥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은 무엇보다 단순한 물질과는 반대되는 로고스의 우위를 말하는 결단이다. <하느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이 즉 생각, 자유, 사랑이 종말에만 있지 않고 태초에 있다는 사유의 소산이라는 판단이다(...)모든 존재의 태초에 어떤 의식을 보는 대신 자유를 창조하는 창조적 자유를 보는 것이다(...)세상은 자유의지들의 터전이면서 악의 모험을 같이한다. 그러한 세상은 자유와 사랑의 위대한 광명을 위해 암흑의 신비를 무릎 쓰는 것이다. (p.120)

 

아담을 위시한 인간의 죄란 바로 빛과 어둠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허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자유의지를 쓸 줄 모르는 인간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셨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하느님이 인간을 믿는 그 믿음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장 완벽한 사랑을 하는데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다려주는 그 믿음이다. 

 

이제 여기서 인간역사에 개입한 그분의 뜻을 세례자 요한이 바라본 대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예수의 전 생애를 희생제물이라는 차원을 넘어, 신성을 내려놓은 채, 인성을 취한 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지의 가장 완벽한 실현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실존이라는, 상황-맥락을 넘어서, 삶보다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이 자유의지의 궁극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위의 생각을 종합해 본다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 6-7)

 

그분이 걸어가신 사랑의 길, 그분이 알려준 하느님 나라의 진리, 그분이 죽음을 뚫고 보여준 부활을 보면 그것이 바로 빛의 여정, 한 인간이 보여준 가장 완벽한 자유의지의 실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의 완성이란 곧 자아의지의 완전한 실현과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빛>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위가 사랑인가? 자유인가? 죄인가? 죽음인가?는 우리가 빛 속에 살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J라는 빛 속에서 걸어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도 영원한 사랑으로 수렴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세례자 요한을 통한 축복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29)‘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33)’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