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한번은 어머니에게서, 한번은 자신의 심연(深淵)에서

나뭇잎숨결 2023. 1. 20. 14:24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 한번은 어머니에게서, 한번은 자신의 심연(深淵)에서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을 중심으로

 

 

 

1.

 

연중3주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전하는 루카 12,35-40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전하는 루카 12,35-40에서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37)를 중심으로 지금 우리 삶 안에서 <깨어-기다리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35)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40)

 

35절, 36절, 40절에는 <깨어-기다리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어떤 지침이 나오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볼 수 있거나, 그분이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37)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에서 보듯 그분을 <깨어-기다린다>는 그 자체에 엄청난 충족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행복하여라, 행복하다> 는 것은 ‘깨어 있는’ 상태의 어떤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서 완전한 충족감을 느끼는지? 결핍을 느끼는지?가 <깨어-기다리는>는 사람의 영적 진단키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믿는 이들들에게 어떤 영적 차원의 깊이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영적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

 

 

지난주에 이어 인류의 '아담'을 다시 소환하기로 한다.

 

분명 아담은 낙원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충족감 내지는 포만감을 느낄 그런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는 그가 느낀 어떤 결핍감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이들이 느끼는 결핍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느낀 결핍감, 이 후자의 결핍이 <깨어-기다림>의 상태를 진단하는 핵심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라는 삼중의 조건을 갖고 이 세상 순례를 하고 있다. 이 조건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굶어죽어 가는 영적인 가사상태를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더 심하게 말해 이것은 그분의 현존자체를 부정하는 유신론적 무신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 밖에서 그분을 부정하는 것과 교회 안에서 그분을 부정하는 것은 부정의 급수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그분을 표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례참석 후 교회 밖의 사람들과 어떤 차이도 보이지 않는 관심사, 욕망으로 살고 있다면, 교회내부의 자중지란, 그런 모순을 <깨어-기다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깨어-기다림>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라는 점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우리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마음 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결핍과 충족은 마음 수준에서 일어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담(모든 인류)의 결핍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세상에는 네 부류의 결핍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교회 밖에서 ①물질적인 가난으로 배고픈 사람, ②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배고픈 사람, 교회 안에서 ③영적으로 배고프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채, 주님, 주님 부르는 사람, ④어렴프시 알기 때문에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물질과 영적 배고픔을 동시에 맛보는 사람...

 

①, ②, ③의 결핍은 진정한 충족 혹은 풍요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결핍의 이름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④의 결핍은 '영적 게으름'에 해당하는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느낀 결핍은 ④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느낀 결핍, 아담이 느낀 결핍은 잃었던 아들 비유(루카15, 11-32)에 나오는 큰아들의 결핍에 해당한다. 

 

​Ⓔ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다.

 

이 결핍의 이름은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 삶으로 풍요롭게 체험하지 못하는 '영적가난'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말해  ‘영적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적 풍요로움을 간혹 체험한 상태임에도 더 깊이 영적기쁨을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기쁨의 상태를 자기화하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적 기쁨이 없으면 세속의 기쁨으로 쉽게 넘어가는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상태는 사실 영적 풍요로움을 맛보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영적 풍요로움은 다른 풍요로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이 영적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깨어-기다림>에는 어떤 내적 준비가 필요한가? 영적으로 각성되는 길밖에 없다. 영적인 시각, 영적인 청각을 열어두는 일일 것이다. 즉 영안의 상태에 자신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성전을 가꾸는 일이다. 이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은 상태"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35)

 

"띠"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복장에서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봉사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자, 더 나아가 예레미아서 13장에 나오는 띠(1-11)처럼 자신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삶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띠와 동불은 동시적인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봉사하기 전에 먼저 영혼에 불을 켜놓지 않은 상태의 봉사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동주의일 뿐이다. 마르타가 되기 전에 먼저 마리아가 되라는 것은 자기 영혼에 등불을 켜 놓는 상태로 봉사에 임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38-42)라는 마리아의 상태가 바로 띠를 두르고 등불을 켜 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를 요한복음 사가는 “머무르다”(요한복음15, 1-11)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4)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7)

 

<머무름> 혹은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영적 풍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영적 풍요로움은 세속의 풍요로움 못지않게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무름>에는 어떤 지속적인 자기 수련의 과정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머무름>의 시간은 다른 말로 진정한 것을 갈망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흔히 타력종교라고 말한다.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타력종교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관성적으로 전례에 참례하는 것으로, 주님, 주님만 부른다고 그 힘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주식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세상 가치관에 휘둘려 살면서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는 않다.

 

<머무름>이나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그 어떤 수동적인 것 안에서의  적극적인 것, 그 어떤 적극성보다 더 적극적인 내적 적극성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갈망이 타력종교이게 하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을 받을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마음의 표층에서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내적 고요속에서만 들을 수 있다.  내적 고요는 어디에 있나?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다.

 

엘리야가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라고 열정의 꺾임을 경험한 후에, 호렙산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듯,(열왕기상 19, 11-12) 이 세상이 결코 흔들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고요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위, 주님 앞에서 서라,”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4.

 

 

 

누구나 <깨어-기다림>의 시간, 그분과 만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중심, 고요에 도달하는 마음의 길이 있을 것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단계 역시 <깨어-기다리는> 마음의 길에 해당한다.

 

처음 단계는 갈망의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세상의 소리를 걷어내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는 단계다.

네번째 단계는 그분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자기 인생을 쭈욱 복기하여 파노라마처럼 펼쳐보면 수많은 오욕칠정의 무늬, 들뢰즈가 간파한대로 바로크의 주름을 보듯, 가장 행복했던 시간과 불행했던 시간들이 어떤 주름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여기서 불행이라는 것은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내 자신은 물론 내 주위의 사람들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 시간을 의미한다. 진정한 갈망으로 넘어가기 전, 자학과 피학, 세상탓, 운명탓, 에와탓, 뱀탓으로 돌리는 아담의 결핍이 있다. 결핍은 부자유다. 구속이다.  내가 느끼는 결핍이 진정한 결핍인가를 나 자신에게 묻게 될 때, 내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게된다.  내가 무엇으로 충만하려고 했는가를 묻는 시간. 이 결핍의 시간을 줄이는 것은 갈망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경험들 안에서 진정한 행복, 진정한 충만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그때 그 진정한 행복 혹은 충만에 도달하고 싶다는 갈망이 어떤 기도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된다. 더 이상 에고의 목소리나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아진다. 환상에 내 인생을 저당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실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것이자, 내 에고가 속삭이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결단이다. 세상에서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세상에 주고 싶지 않게 된다. 그때 내 마음에는 어떤 층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외부에 쉽게 흔드리는 표층과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심층이 있다는 것을,

 

그 마음의 층을 더 내려가면 세상의 소리가 걷어지면서,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던 선택들,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환상의 실체를 보게 된다. 작은 자아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왜 힘들었는지? 왜 나를 아프게 했는지? 왜 세상에 쉽게 상처받고, 고통을 느꼈는지, 즉 내 에고를 적나라하게, 정직하게 마주하게 된다. 작은 것을 추구하다 중요한 것을 놓친 시간들, 누구의 탓도 아닌 오직 <내 탓이오!>를 인정하게 되는 그런 시간들과 마주한다.

 

운이 없어서 불행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이 뒤죽박죽이라 불행했던 것도 아니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지해서도 아니고, 내 가족 때문도 아니고, 순전히 내 탓, 오직 내 에고가 만든 환상, 세상이 주입한 환상, 집단무의식에 세뇌당하고 휘둘렸던 시간에서 드디어 풀려남, 내 자아의 작은 안간힘들을 과감하게 놓아버림, 자기 인생의 매듭을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 에고가 자신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시간. 자기 성격이 운명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시간, 마음이 아니라 뼛속까지 아프다는 것을 절감하는 시간.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라는 자기모멸을 경험하는 시간,

 

그런데, 깨어-기다림의 시간은 반드시 그런 시간을 거쳐야 한다. 진정으로 가슴을 치는 <내 탓이오!>가 해방의 시그널이다. 그것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의 인증서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의 좌절, 베드로의 무능....여기서 멈추면 그것은 패배의식의 확인이자, 니힐리즘, 진정한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이스카리옷의 죽음에서 보듯,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으로 인해 다시 시작하겠다는 갈망, 빛을 향해 걸어가 보겠다는 일어섬, 무엇보다 그분의 뜻을 묻게 되는 시간, 나 자신의 약함에서 그분의 진정한 능력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아마 이 단계가 그분을 믿게 된 진정한 신앙의 단계일 것이다.

 

그런 상황들을 바라보기 위해, 세상으로 난 문을 닫고 주기적으로 나의 심연으로 내려가야 한다. 글쓰기와 비슷하다. 심연, 마음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타볼산에서 내려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처럼, 피에타의 성모에게 안겨있는 예수의 죽음처럼, 내가 에고의 죽음을 안고, 그때가 바로 내가 두 번째 태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창조되기 전의 심연 같은, 바오로의 회심 장소인 다마스커스 체험같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시간, 그때, 창조의 완성을 나와 그분이 함께 한다는 것, 다시 나를 창조한다는 은총의 경험, 창세기1장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마음에 어떤 층, 마음의 중심, 고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나를 경험하는 고요의 경험, 내 마음의 심연 속에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경험, 그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 누가 자신의 약함에 믿음을 두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가? 그 누가 강함에 자신의 믿음을 두고서 약하다고 느낄 수 있는가?(M47)

 

아마도 요한복음 사가는 그것을 ‘머무른다’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 부분을 ‘행복하여라’ 그분이 오히려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드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의 활동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활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영향력도 다르다. 그분의 영적 기쁨, 영적 아우라와 동행하는 시간이기에. 하느님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시간, 아마도 현존체험일 것이다.

 

<깨어-기다림>은 각성의 시간, 깨달음의 시간, 깨어남의 시간, 하느님의 뜻을 네!라고 받아들이는 시간,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시간, 옛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는 시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을 짓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의지와 내 생각과 내 열정이 꺾인 것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뼈를 깎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나의 무능을 확인하는 패배의식의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새롭게 낳도록 나를 내어놓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니고데모와의 대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간, 바로 예수님 스스로 인간의 모든 무능을 경험하고 그 무능 위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 부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시간이기에, <깨어-기다림>은 행위의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시간, 은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복음을 다시 읽어본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