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행복의 충족이유율;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나뭇잎숨결 2023. 2. 4. 10:23

영화 <Out of Africa>에서

 

 

 

행복의 충족이유율;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를 중심으로

 

 

 

 

 

1.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서정주)

 

서정주의 「동천(冬天)」을 읽어본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冬天))

 

「동천(冬天)」)은 동지섣달 한겨울의 춥고 어두운 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때마침 한 마리 매서운 느낌을 주는 새가 날고 있는 풍경이 전부이다.

 

시인은 그 단순한 풍경에서 천년이나 그려온 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의 모양에서 님의 눈썹을 떠올리고 그 눈썹은 천년의 꿈으로 씻어낸 바로 고운 님의 눈썹이 된다.

 

바로 그 때, 새 한 마리가 초승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마치 님에게 다가가려는 화자의 꿈과 비슷하다. ‘매서운’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 ‘새’는 ‘달’이라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끝내는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한계를 나타내는 동시에, 화자는 님과의 숙명적 격절을 바라본다.

 

「동천(冬天)」)에서 압권은 비끼어 가네’로 인해 달은 그리움의 궁극자인 어떤 절대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동천(冬天)」)에서 보여주는 이 투명한, 그럼에도 한없이 차가운 이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 생에서 비끼어간 것들, 항상 뜨거운 인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차갑고 외로운 인연도 있을 것이다. 님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님에게 닿을 수 없는 외로움. 아니, 님에게 닿을 수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님의 세계를 ‘즈믄 밤의 꿈으로지켜주고 싶어서의 외로움이다.

 

인연에도 크기를 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인연은 대개 비껴간다. 바오로나 베드로처럼.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크므로 서로의 곁에 머물 수가 없다. 스스로 한가로울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동천(冬天)」을 계속 읽다보면, 이렇게 언어가, 시가 투명하게 고고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는 시적기교로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시인이 지닌 어떤 경지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의 자전적 사실보다 더 깊이 내재해 있던 시인의 선험적 영역의 발현 같아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나는 항상 사람의 행동들이 그들의 생각을 가장 잘 해석한다고 생각해 왔다.(존 로크)

 

 

 

서정주의 「동천(冬天)」에서 보듯, 모든 시는 관념의 구체화에 해당한다. 마음에 어떤 관념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달과 새도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관념이 먼저가 아니고 감각, 경험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모든 감각이 관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반성할 수 있는 한에서 사물은 어떤 관념을 지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이상, 진리, 신의 관념 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본유관념론(本有觀念論)"을 부정하고 인간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빈 서판(書板)"을 갖고 태어난다는 본성백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환경결정론이다.

 

이 부분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 빈서판)에 쓴 청춘의 문장들]애서 재인용했다.

 

인류는 오랫동안 삶이 주어졌다는 이 경이로운 사건 앞에서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타블라라사>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 발전, 진화, 창조가 가능한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 고민의 출발점은 과연 인간은 무엇을 갖고 태어나는가? 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미 기입된 서판을 갖고 있다. 덕에 영향을 받은 무언가는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 이전에 지성의 작용으로 인해 잠재적으로 우리 사고 안에 영향을 미치며, 비록 이것이 실재하기 이전에 이에 대한 생각은 우리 사고 안에 같은 방식으로 잠재되어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도 각인되어 있다. 이는 지성이 작동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빈 서판, '깨끗이 닦아낸 서판'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Tabula rasa”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미 기입된 서판’으로 소급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같은 사고는 스토아학파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그 사람은 무언가 쓰일 수 있는 종이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아에티우스)

 

스토아 학파인 아에티우스는 지각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감정에 의해 생성되며 이는 ‘밀봉된 왁스판 위’라는 표현을 한다. 아울러 지각은 이해될 수 있는 것(가지각)과 이해될 수 없는 것(불가지각)으로 나뉜다. 전자는 객체에서 기인하는 사실의 기준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시에 실제 대상과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후자는 어떠한 객체와의 관련성도 없다. 혹여라도 불가지각이 객체와의 관련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는 상응할 수 없고 오히려 애매하거나 또렷하지 않은 상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인간의 지성은 탄생부터 빈 서판을 닮아 있고, 교육과 개인이 알게 될 내용에 의해 작성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아비체나)

 

11세기에 이르러 <Tabula rasa>의 개념은 페르시아 출신의 철학가인 아비체나에 의해 보다 명확해진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추상적 개념을 지닌 객체와 경험적 친근성을 형성하면서 획득된다고 밝힌다. 또한 지식은 이성적인 삼단논법을 통해 발전되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유도하는 하나의 명제 진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

 

13세기에 들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Tabula rasa>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첸나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 그 자체의 완전성을 창조의 근간으로 바라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성 보나뻰두르에 의해 정교화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환경결정론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철학으로 대두된 것은 17세기 경험론자 존 로크에 의해서다.

 

성서학자인 Edward Pococke에 의해 스스로 ‘성장한 철학자’라는 뜻인 ‘Philosophus Autodidactus’ 라는 라틴어 번역본이 출간되는 데, 이는 안달루시아계 이슬람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이븐 투파일의 소설이다. 존로크는 이븐 투파일의 소설에서 ‘백지’ 개념을 도출한다.

 

12세기 아랍의 알모하드의 왕 아부 야쿠브 유수프의 궁정의사와 고문을 지냈던 이븐 투파일의 쓴 〈하이 이븐 야크잔Ḥayy ibn yaqzan〉(1175경)는 철학소설이다. 그는 완전히 고립된 무인도에서 50세까지 생활하는 한 사람의 자기교육과 철학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븐 투파일은 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가 황폐한 섬에서 홀로 지내며 유아기부터 성인기에 이르기 까지 사회적인 고립 속에서 나타내는 심적 발달단계를 묘사한다.

 

이븐 투파일의 소설은 존 로크에게 영감을 주어 추후 『인간 지성론』에서 나타나는 <Tabula rasa>의 개념정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크는 인간 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의 장을 '백지'라고 부른다. 로크의 철학체계 안에서 <Tabula rasa>는 인간은 그 지성적 측면에 출생에서부터 비어있는 서판의 형태로 탄생되며, 이는 선재된 지식이 아닌 동시에 인간의 후천적 감각 경험에 의해서만 지식이 추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Tabula rasa>는 각 개인이 백지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지닌 개인적 자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은 그들이 지닌 고유한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인간의 종적 차이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율적이고도 주체적 자아에 대한 가정은 추후 로크의 ‘자연권’ 사상을 낳는다. 아울러 <Tabula rasa>와 관련한 그의 사상은 종종 토머스 홉스의 인간본성론인 ‘천부인권사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로크의 <타블라라사> 사상은 이후 장 자크 루소와 프로이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루소는 <Tabula rasa> 개념을 이용하여 미래 사회의 복지와 농업에 대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 ‘자기애에서 이타성’까지 나간다. 진정한 자기애만이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채워지지 않은 빈 서판의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대 긍정으로 그는 이를 ‘일반의지’라고 부른다. 루소의 사상은"자연은 인간을 선량·자유·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노예·불행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인간은 일반의지로 인해 진화와 변화, 창조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인간이 반드시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오늘날 복지사회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또한 그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미국혁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백지(Tabula rasa)는 인간이 그 출생에서부터 비어있는 서판의 형태로 탄생되며, 이는 선재된 지식이 아닌 동시에 인간의 후천적 감각 경험에 의해서만 지식이 추가될 수 있다...인간이 지닌 자유란 바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삶이라는 백지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존 로크) 마음은 글자가 전혀 적히지 않은 백지로서, 관념이 전혀 없는 백지라고 가정된다. 이 백지는 어떻게 관념을 갖추게 되는가. 인간의 부지런한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이 그려내는 방대한 지식은 어떻게 축척되는가? 마음은 어디에서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나는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고 대답하겠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외부의 감각적 대상과 우리 마음 내부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성이, 우리의 오성에게 사고의 모든 재료를 공급한다. 이 두 가지가 지식의 원천으로, 우리가 갖는 관념 또는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모든 관념의 원천이 된다.(『인간오성론』)

 

존 로크는 경험론에 바탕해 인간이 이상, 진리, 신의 관념 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본유 관념론"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빈 서판(書板)" 개념은 역사적으로 세습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뒤흔들었고,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윤리적 보편성을 획득했다. 근대철학의 핵심분야였던 인식론에서 로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 명의 철학자이다. 데카르트 등의 합리론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유관념(생득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지만, 로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그런 본유관념은 없으며 인간은 경험을 통해 관념(지식)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라 주장했다는 점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라 불린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 이후의 경험을 통해 관념(지식)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다. 경험은 외적인 경험인 '감각(Sensation)'과 감각을 내적으로 정리하는 마음의 작용인 '반성(Refle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각은 외부 대상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감지하여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반성은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표상들을 비교, 제한, 결합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이러한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관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반성→관념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인식이다. 여기서 로크는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눈다. 단순관념은 우리가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는 관념이다. 이러한 단순관념은 일차성질과 이차성질로 나누어지는데, 일차성질은 연장, 형태, 운동, 길이, 수와 같은 객관적인 성질이고 이차성질은 색, 맛, 향기와 같은 주관적인 성질이다. 복합관념은 우리의 오성(Understanding)이 단순관념을 서로 비교, 제한, 결합하여 이 단순관념들을 재구성하여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관념을 말한다. 복합관념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체에 의존하는 복합관념으로 시간, 자유, 거리등의 단위등과 같은 '양태'의 관념이다. 둘째, 인과성, 동일성, 무한성, 공간, 시간, 도덕,등 관념들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관념이다. 셋째, 여러가지 실체의 성질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실체'의 관념이다.

 

로크의 논리에 충실하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우선 감각을 통해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확실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를테면 우리가 물컵에 담긴 막대의 굴절된 모습을 본다고 해서, 굴절된 그 모양이 막대 자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감각경험의 내용이 사물의 실재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로크는 인간의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Reality)'를 단정할 수 없었다

 

<Tabula rasa> 개념은 20세기에 들어 사회과학 전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초기 우생학에서는 인간의 지능이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상정했으나, 추후 이 주장은 기각되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은 인종차별주의로 이해되기도 하는 등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촉발했다.

 

"무엇이 한 사회의 주류에 속한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 만드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수천 년 간 지속되어 온 본성-양육 논쟁은 사실상 끝이 났거나 끝이 나야 한다"(스티븐 핑거)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언어ㆍ인지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2002)에서 유전자 지도로 대표되는 20세기 생물학적 발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인간은 "유전자 결정론-환경 결정론" 또는 "본성-양육" 논쟁은 다시 뜨거운 논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진행중인 논쟁으로 떠오르게 했다.

 

<Tabula rasa>를 개괄해 살펴본 대로 "인간의 마음은 빈 서판에서 출발하는가"라는 문제제기는 단지 철학의 논제가 아니라 인류의 오랜 고민, 우연과 운명은 무엇인가? 왜 우리의 삶과 사랑, 행복은 유보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이 땅의 문제, 삶의 문제를 묻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가? 아님 이미 운명이 결정된 존재인가?는 인류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오5,13-16)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 고민을 인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일 뿐이지, 자신이 누군지를 끊임없이 묻기에 우리는 늘 어떤 선택의 상황속에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자신을 최선의 자리에 위치시킨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고민은 무엇이 나의 정체인가 하는 고민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5,13-16에서는 인간의 어떤 정체성을, 소금과 빛으로 선험적으로 규정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을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의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5,13-16을 통해 내가 누군지 알 때만이 나는 세상에서 그 무엇일 수 있다는 본유관념론에서 실천덕목을 끌어낸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앎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소금이 되어라, 혹은 빛이 되어라>는 당위명제가 아니고 <소금이고, 빛이다>는 단언명제에서 <너 자신이 누구인지 알라!>는 이 앎은 우리가 세상에서 일군 캐리어가 아니라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1)이 <정체성>은 내가 누군지 <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만약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 세상에 어둠이 만연해서 불행한가? 사랑이 부족해서 불행한가? 어둠이 만연해서와 사랑이 부족해서는 같은 맥락으로 읽히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진단이라고 할수 있다. 어둠이 만연해서라는 진단은 이 세상의 불행의 요인에 내 탓은 1%도 없고 순전히 세상 탓, 네 탓으로 바라본 아담의 시각으로 희생양코스프레가 깔려있다면,

 

사랑이 부족해서로 바라본다면, 그 진단에는 내 사랑의 부족함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에만 원근법이 적용되는 되는 것이라 문제 진단에도 원근법이 적용된다. 추상적인 접근은 진단, 평가, 판단으로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초점이 놓여 있다. 유체이탈법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접근인 수평적 진단 속에 해결의 실마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서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진단이기 때문이다. 바뀐다는 것은 이미 그런 상태에 있었음을 바라보는 것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는 문형은 다음 세 조건을 전제하고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오직 행복만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빛과 소금의 역할로 행복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고,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충족이유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풀어보면, 너희가 서로에게 소금과 빛이 되어줄 때 그 행복은 배가된다는 의미이자, 너희는 진정으로 행복할 때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오직 인간의 행복만을 원하신다.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든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주 동안 살펴본 <어떤 상황에서도 너는 행복하여라>의 성립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내놓듯, 삼키고 소화시켜야할 명제 중에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추상에 머문다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해도 영적 피드백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피드백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1차적으로 지각으로 이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빛임을 안다는 것이 어떻게 행복의 충족이유율일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5,13-16은 창세기1장3절의 <빛이 있어라>와 이사야58의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시편의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 <나는 세상이다>라고 전하는 요한8, 12-20을 연결하여 바라보기로 한다.

 

이는 <나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너희 역시 세상의 빛>이라는 동격기능은 모든 행복의 바탕생각에 해당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세상의 빛이라는 속성교환의 원칙이 성립된다는 사실이다. 성모님과 예수님만 속성교환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예수님도 속성교환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근원이 곧 그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를 창세기 저자는 창조의 첫 작품이 바로 <빛>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빛이 된다는 것은 창조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고, 창조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선험적조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근원 속에 이미 행복과 자유의 조건들이 다 주어져있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빛이 어떻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기1.3)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 대낮처럼 되리라(이사야58, 7-10)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편36, 10)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 12)

 

너희는 소금이다(13)너희는 빛이다(14)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의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

 

<빛>에 관한 창세기, 이사야서, 시편, 요한복음, 마태오복음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

 

하느님과 예수님이 빛 자체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우리 역시 빛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명하게 알 수 있나? 더우기 종적인 신과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횡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빛으로 확장되어야지만 자신이 빛이 된다는 것. 여기에 이르면 존로크가 바라본 대로 경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불가능한 고지를 설정하고 여기를 넘어야지만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좋은 행복이라해도  화중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2)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소금이고 빛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런데, 빛을 보게만드는 빛의 은총이 이미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빛으로만 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을 알고 그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희망을 갖는 일이다. 그것은 달리 말해 성령을 체험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에서 인용되는 용서는 우리가 빛임을 아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빛-성령-용서-희망-빛> 이 스크럼은 빛임을 알때, 빛이되는 재창조과정이 내 임무이고 역할이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순환 축복의 고리에 해당한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 대낮처럼 되리라(이사야58, 7-10)

 

너희는 소금이다(13)너희는 빛이다(14)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의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는 것. 이것은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행실로 소금이고 빛인 것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소금이고 빛인 것이 내재화되고, 표면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표출된 것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자기증명서라고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안다는 것을 뇌가 인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우리의 앎이 더욱 확실해 진다는 것이다. 획실한 앎은 그래서 힘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금이고 빛인 것을 여러 측면에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지만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행위의 첫 발자욱은 <용서>라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우리가 빛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자기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 <용서>를 통해서 그분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혼란은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분이 누군지도 모름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타자가 나에게 누군지 절대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행복의 시작이다.

 

참고:[사랑, 가장 깊은 곳을 보면서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영안]

 

하느님의 빛=그리스도의 빛=나의 빛=타자의 빛=성령의 빛

 

빛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씨앗처럼 내장되어 있는 축복이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의 씨앗을 해방시키는 행위로부터 그 근원을 바라볼 수 있다. 빛을 해방한다는 것은 실은 빛의 근원인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빛을 해방시키는 행위가 바로 용서와 자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니게 되는 환상과 세상이 주입하는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 이것이 바로 용서가 우리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키워드가 필요한 이유에 해당한다.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기방어를 작동하는 것이자 완곡한 공격이자 한결같은 두려움이자, 어둠의 투사다. 투사나 공격은 자신의 나약함을 세상에 유포하는 것이다. 이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서로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짓밟고 짓밟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짓밟는 사람은 곧 짓밟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는 서로가 누군지 알게되는 빛의 여로라 할 수 있다. 내가 빛이고 타자가 빛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투사와 공격은 세상을 공격함으로써 실은 우리의 상처를 키우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한 아픔을 멈출 수 있는 길이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함, 긴장감, 피로감, 소외감, 박탈감, 죄책감, 두려움, 상처, 아픔, 자기우상 등에서 우리를 풀려나게 하는 것이 용서다.

 

우리는 상처 입을 수 없는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확인케 하는 것이 바로 용서다. 용서는 생각의 반전을 가져오고 인생의 반전을 가져온다. 용서는 세상의 빛으로써의 우리의 고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게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라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김수환추기경님 생전에 내탓이오! 티셔츠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또 정진석추기경님의  행복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길이라고 누누히 강조하셨던 것도 기억난다. 두 분의 통찰은 오늘 이 글의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내 탓이오'를 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산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덕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용서와 행복은 같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서 하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시혜적인 어떤 정신적 탕감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용서는 죄의 크기를 초월한다. 그러기에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분이 하는 것이다. 용서는 간과, 모든 오류를 지나치는 오버룩이다. 그들이 하는 행위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했음을 바라보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기에 그렇다. 그런 상태로 상대를 바라보면 의식의 반전을 경험하게 된다. 타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를 바라보게 되고 정작 용서받아야할 사람은 세상을 단죄하고 평가했던, 어떤 윤리적 우월감에서 타자를 죄의 프레임에 가뒀던 나였음을 성찰하게 된다. 타자가 죄가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평가하는 것이 지은 죄보다 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면 나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된다. 그 것이 용서의 반전이다. 이런 내적 충돌의 과정을 거치면서 충분히 자기를 용서했을 때, 더 이상 용서할 것이 없을 때까지 용서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타자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드러난 모습만으로는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연민과 측은지심이 생긴다. 타자를 사악하다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많이 아픈 사람이구나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과 타자, 그리고 나를 더 이상 용서할 것이 없을 때까지 용서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이었음을 드디어 바라보게 된다. 그분에게 드렸던 모든 찬미가 실은 나와 공유되는 축복이었음을 알게 된다. 미사전례에 나오는 모든 기도문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세례, 축복으로 들리게 된다. 용서는 마음을 대청소하는 기제이다.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만 우리는 상대를 어떤 프레임에서 진정 놓아줄 수 있다. 그 놓아줌은 결국에는 상대에게서 나를 해방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안의 빛인 예수를 해방시켰음을 드디어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용서다. 

 

그때, 모든 이들 안에 나와 같은 빛이 있음을 보게 된다. 사회적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신음하는 빛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자비가 무엇인가도 배우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빛을 해방시키는 행위가 내가 바로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제 존재자체가 생명의 빛임을 알게 해 주십시요! 저는 그 무엇이기 보다 진정 그것을 원합니다!라는 기도는 인간의 본유관념론과 경험론은 충동하는 사유가 아니라 그 둘을 아우르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충족이유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

 

우리는 구체적으로 안면이 익숙한 이들과만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교감한다. 모든 생명은 그 창조의 근원이 같은 빛이기 때문이다. 공존의 원리란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서로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빛을 주고 받는다. 이때,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 모든 사람, 사물, 하물며 초록의 숲에서도 스톤피치로 치유를 받기도 한다.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것은, 그렇게 빛의 체험에서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빛으로 빛을 본다는 것! 이 세상을 만드신 그분께 드리는 찬미의 노래는 우리 모두가 빛이라는 인식을 갖게한 그 빛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넘어서는 모든 이에게 태양이 비추듯, 하느님 나라의 보편적인 찬미가라고 할 수 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의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준 축복의 메시지를 다시 들어본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을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의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