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다(μενειν),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생각하라!(발터 카스퍼)
- Bleibe(μενειν), Mensch! bedenke deine Würde! (Walter Casper)
1. 서정주의 「석남꽃」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 네가 죽으면 /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해만 더 살아볼거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볼거나
서정주의 「석남꽃」은 신라사람 최항(석남)이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후, 사랑하는 여인에게 석남꽃을 꽂고 나타나 생과 사를 오가며 나눈 사랑을 바탕으로 쓴 설화시다.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볼거나”
죽어서도 살아서 최소 ‘서른 해’만 살아보고 싶다는 이 정한의 인연, 서정주 시에서 ‘서른 해’는 한평생 혹은 인연의 충족, 혹은 영원을 의미한다. 영원이 사랑을 갈망하게 했는지 사랑이 영원을 갈망하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영원히 살고 싶다는 갈망은 신라 사람이든 누구든, 동서고금의 그 누구든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이 시를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다. 사랑만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이 설화의 배경은 아마도 인류 보편의 직관일 터이다.
2. 사랑의 기호, 사랑은 오직 사랑에만 끌린다
사랑만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인류 보편의 직관은 다른 말로 사랑은 오직 사랑에만 끌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이 영원한 삶을 견인할 수 있는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지? 그런 본질적인 질문에 그것은 자신의 원형적인 시간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질 들뢰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무의식적인 기억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기억의 원형이 있고, 그 기억의 원형은 바로 근원적 사랑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호들이 그리는 추억의 궤적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오늘’ 다시 펼쳐지고 있는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끌어당김의 법칙, 마주침의 우연성과 펼쳐짐의 필연성]에서 재인용,
①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기호들과 관계가 있는데,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호들은 즉 우리가 과거의 어떤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지만 그 기억은 동시에 과거를 넘어서는 기재가 된다, 따라서 '찾기'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기호가 방출하는 시간의 스펙트럼 속에서 시간의 통일성과 다원성을 끄집어낸다고 보고 있다.
②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들뢰즈가 바라본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인간은 양육된다고 보고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의 기호, 단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 앞에 예고없이 나타난다. 출몰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 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하고, 해석해야할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있고, 동시에 감싸져 있어서,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기적처럼 펼쳐보인다.
③기호는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 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은 마주침의 우연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잃어버리는 시간-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의 동선을 그린다. 우리 안에 근원적인 머무름의 정체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④우리는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기호가 지칭하는 존재나 대상과 혼동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는 그 마주침들이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을 피해버린다(55)
기호의 해석이 어려운 것은 절반쯤은 대상 속에 싸여 있고, 절반은 우리 자신 속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준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기호가 내뿜는 찬란함, 아름다움, 즐거움을 사유 혹은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무침의 의미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⑤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그것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방출 양태 때문에 이 기호들은 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 외에 다른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이유는 기호들이 방출되어 나온 원천 때문이다. 또한 그 기호들이 절반쯤 대상 안에 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들만의 고유한 전개양식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기호처럼 보인다. 바로 여기서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 종교의 초월성이 나온다.
예술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성하고 그 존재의 고유한 차이를 이해하고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러준다. 대상의 존재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존재의 '차이'에 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의 시작에 해당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박경리의 <토지>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베드로대성당> 건축물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하느님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에게 창조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게 한 것과 같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의 기호는 언제나 세계의 시작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근원적인 시작이다. 그래서 예술과 종교는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초적인 말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제와 시인은 같다고 칼 라너가 바라본 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⑥사랑과 관련해서 진실은 너무나 늦게 온다. 사랑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헛되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이것이 시간의 네 개의 시간선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영원의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이기도 하다.(132)
사랑의 기호는 기호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랑에 빠진 자아가 사라졌을 때에만 어떤 세계가 펼쳐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까지도 드러낸다. '부재의 현존'이 의미하는 트랙이다. 이것은 대상을 환기시키는 어떤 기호를 통해 대상이 차곡차곡 비축해둔 사랑의 의미들을 부재중에 비로소 하나하나 바라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무한히 사랑했고 사랑받았음을 알게된다고 할 수 있다.
⑦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은 그러므로 해석하는 것이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마주침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 그것이다. 기호 속에 감싸여져 있으며, 사유되기 위해 의미 속에서 펼쳐진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들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이 사유의 재료, 그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은 우연성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책 넘기는 소리, 포크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홍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의 맛, 몸을 한쪽으로 귀우뚱 하게 했던 포석...등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우연한 마주침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에서 과거의 어떤 원형적 시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매개로 미래로 넘어간다. 관념으로 떠돌던 영원, 불멸, 사랑, 희망...이런 유령같은 언어들이 자신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세계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과학과 철학에서 지성은 언제나 먼저 온다. 연역으로 어떤 사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이 나중에 오는 한에서 그리고 지성이 나중에 와야하는 한에서 기호는 지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호는 자립적이고 훨씬 더 많이 비자립적으로 우리에게 사유를 원형적 사유를 강요한다.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요받을 때에만 본질들은 사유에 붙잡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연한 사건 속에 있는 필연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사유하는 존재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왜 영원을 견인하는지 그 비의를 알 수 있다.
3.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요한4,5-42
사순3주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예수님을 일컬어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라고 전하는 요한4,5-42에서 40절을 중심으로 ‘머무름과 참 생명’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40절의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는 ‘머물다, 살다, 묵다, 함께하다, 일치하다, 소통하다, 깨닫다, 보다, 듣다, 감화되다, 교감하다, 섬기다, 충만하다, 채우다, (사랑을)느끼다’ 등으로 해석되며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에 해당한다.
요한4,5-42에는 세 개의 <머무름>이 나온다. 이 <머무름>은 공간적인 머무름과 시간적인 머무름을 아우르는 것으로 영적 소통의 채널이라고 할 수 있다.
머무름은 다른 말로 소통의 채널을 작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 두 개의 소통방식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실존의 소통방식과 존재론의 소통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실존의 소통은 생물학적인 생존과 관련되어 에고가 그 기능을 담당한다. 에고의 소통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에 지배를 받기에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소통을 중단한다. 적자생존 법칙에 종속되는 방어적이고 선택적 소통에 해당한다.
반면 존재론적 소통방식은 영적 교감으로 영혼은 자신의 창조주와 완벽하게 소통하기에 그분의 모든 창조물과도 완전히 소통이 가능하다. 종과 횡을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소통방식으로 여기서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수신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요한4,5-42 에는 이 두 개의 소통방식의 어떤 전형을 보여주는 세 개의 머무름이 나온다.
[1] 사마리아 여인의 머무름------------
물을 길으러 나왔던 사마리안 여인이 물동이를 내버려 두고 갈 정도로,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유다인 남자에서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주고받은 대화는 실존에서 존재론으로 넘어가는 대화의 정석, 어떤 전형을 보여준다. 이 소통은 예수님의 다가감으로 시작된다.
물-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상극의 관계, 여자와 남자의 유별한 관계- 영생의 물- 야곱의 우물- 남편- 예언자- 예배- 그리스도, 등 그 소통의 범위가 존재론으로 확대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라고 자신의 과거를 과감없이 그냥 드러낸다.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두 번이나 외친 것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있음에도 <남편이 없다>는 여인의 말에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는 예수님의 통찰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고달픈 삶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대화를 기점으로 여인의 화제가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실존의 소통에서 존재론의 소통으로 넘어간 이유가 그녀가 상처를 치유받았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공전하는 대화를 처음 대하는 사람과 길게 나눌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머무름의 힘을 바라볼 수 있다. 머무름은 근본적으로 지난 시간에 대한 치유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치유되는 것이 이 세상을 치유하는 길임을 사마리아 여인의 머무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머무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문제의 본질을 보게되고 그곳에서 어떤 답을 얻게된다.
[2] 제자들의 머무름----------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라는 것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한 제자들이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완전한 소통이 없어도 그분이 그들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또한 제자들 역시 그 분 곁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순 3주 복음의 초점이 사마리아 여인에 놓여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제자들의 머무름에 포커스를 맞춰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고 있었지만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이 신원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사마리아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통념에 입각해 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아직 세상의 주입한 소통의 어떤 카테고리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양식>과 그분이 생각하는 <양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머무름의 축복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실존과 존재론이 뒤섞인 소통의 과도기적 상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무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수 있었을까?를 묻게된다. 이것은 신비이며, 자비이고, 겸손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떤 소명 자체가 기능이 아니고 신비라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즉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구원받았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은 신비, 자비, 겸손, 감사일 뿐이다.
분명이 예수님 곁에 머무는 은총중임에도 완전히 지각을 치유받지 못한 과도기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제자들 역시 은총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들 역시 성화은총을 받아야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면서 동시에 좋은 것을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 온전히 은총상태에 있지 않아도 은총의 매개자가 된다는 사실 등을 바라볼 수 있다.
은총지위란, 온전한 머무름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지와 메신저가 일치하지 않아도 메시지는 담겨 있다는 것. 그것이 뿌린 적도 없는 수확을 거두는 농부로 비유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분의 그릇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 쓰이면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에서 머무름은 겸손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이 우리와 세상 끝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겠다는 그 함께(머무름)라는 것이다.
[3] 사마리아인들의 머무름------------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고 전하는 것에서 우리는 머무름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의 증언만으로도 예수님께 함께 머무르기를 청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분과 머물기 전에 이미 머무름의 진정성, 들음의 힘에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들음의 힘이란 그들에게 영적 목마름이 있음을 의미한다. 영적 목마름이 없었다면 그들에게 여인의 증언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의 증언만으로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함께 머물기를 청했다. 그리고 그분은 기꺼이 그들과 이틀이나 머무르셨다. 목마름과 갈망의 시간은 그분을 메시아로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영적 목마름이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삶이 녹녹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쩌면 이런 기도를 했을 수도 있다. 주님 당신이 또 이기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당신이 저의 승리자가 되어 주십시오, 저는 당신 안에서 이젠 좀 쉬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가 그냥 새어나왔을 때, 기적처럼 예수님이 그들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증언자를 통해서가 아니고 그분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머무름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머무름의 영적 체험을 하고 싶다면 주님 제게 말씀하소서! 오직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듣고 따르겠나이다! 를 갈망하면 된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만큼 절절히 그분을 듣기를 갈망하면 들리고,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4]여기서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가 의미하는 존재론적 소통이 어떻게 창조와 연결되어 있는지?
위의 세 머무름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분에게서 인간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 통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대체불가능한 해결사라는 점이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단지 그분만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알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의 원래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의 머무름의 완성, 완전한 소통에서만 가능하다. 찬미와 찬송을 바친다는 것은 그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찬미와 찬송에 합당한 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안다는 것은 결국 영원에 대한 체험으로,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원형적인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머무름>의 몇 가지 유형을 보면,
Ⓐ라삐 어디에 묵으십니까?(...)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요한1장35~39)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루카, 24, 29)
안드레아 요한,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경우처럼 강한 끌림은 강한 머무름의 갈망을 동반한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5, 38)
지각의 차원에서 말씀의 머무름을 체험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14, 10)
온전히 말씀에 머무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머무름이 필요하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안에 머무르겠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 1-17)
Ⓐ~Ⓓ에서 본 것처럼, 그분 안에 머물러야지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신앙인이라면 그분 안에 머무름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영원한 생명의 물이 그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세상을 헤메고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오욕칠정이 좌우되는 아이러니. 그분을 아는 데, 알면서도 세상에 끌려다닌다는 것, 이 자유의 반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단적으로 모든 교리와 신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어떤 문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언제나 동시에 답을 갖고 있다. 나의 결핍-혼란과 모순과 갈등과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인식할 때, 그 답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기적처럼 주어진다. 결핍은 하나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정작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안다는 것이 그분을 안다는 것의 확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에 대해서 들었지만 정작 나에 대해선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증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인지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배고프고 저기서도 배고픈 상태, 기도해도 배고프고 기도 안해도 배고픈 상태를 자신에게 준다는 것이다. 결핍의 이름은 바로 우리 생이 근본적으로 그분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정답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면, 나의 결핍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목마름과 결핍은 그분을 알게되는 계기다. 원래 인간은 결핍의 존재로 광야의 순례를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을 역설적이게도 그분을 알게하는 기재가 된다. 그분만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 즉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그분 안에 머무르는 나 역시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세상 때문에 목마를 이유가 없음도 알게 된다.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원을 알 수 있다. 그때, 카인처럼, 유대의 종교인들처럼 누구를 질투하고 시기하느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는 않게 된다.(질투때문에 타자를 살해하는 것은 타자와 자신을 동시에 살해하는 것이다. 질투와 시기는 가장 큰 결핍의 이름이고 두려움의 근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사랑에 온전히 물들지 못해 결핍에 허덕이는 하이에나의 삶을 살지는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 벽화의 그림처럼 몸은 정면을 향하고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는 형상처럼, 그것은 우리 자신을 분열된 상태를 일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형상이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 왜곡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두 개의 틀로 경험하고 있을 경우가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몸과 마음, 사랑과 미움, 풍요로움과 가난...등등 대립되는 두 개의 틀을 실재화 시킨 상태에서 이 둘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미움을 모른다. 미움이 사랑을 모르듯, 그러니 사랑과 미움을 변증법으로 통합할 수는 없다. 신앙은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아니다. 갈등의 봉합에서 평화를 알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일 것이다.
예컨대 선과 악 혹은 빛과 어둠은 조화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는 실재고 하나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오직 선이고, 빛이다. 이것을 바라보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 실재를 선택해 주는 것이 그분 안에서의 머무름이다. 선택과 조화는 같은 상황 맥락이 아니다. 머무름은 선택이지 조화가 아니다. 여기서 머무름은 창조의 상태를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거룩한 실재, 품위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머무름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고, 하느님과는 오직 사랑으로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무름>의 궁극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왜 사랑을 모르면 영원을 알 수 없는지도 수긍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머무른다>는 것은 마음이 영혼을 <섬긴다>는 것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섬긴다>는 표현은 흔히 타자를 상정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섬김은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섬김이 어려운 것은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섬긴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섬김의 시작은 내 마음이 내 영혼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요구, 결단이지만,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 선택이다.) 마음이 영혼을 섬길 때, 우리는 진정한 내적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다. 그 기쁨과 평화는 모든 것을 불사른 다음에 맞이한 그 기쁨이고 평화다. 그 상태에서 어떤 내적 갈등도 없다. 이때,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나 자신이 빛과 소금임을 자명하게 알 수 있다.(M96)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생각하라! 는 발터 카스퍼 주기경님의 전언대로
빛의 상태에 있을 때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자신의 영적 품위를 경험할 수 있고, 우리의 순례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임을 알수 있기에, 모든 것을 팔아서 에고의 밭에 묻어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주를 사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사순3주 복음으로 예수님을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라고 전하는 요한4,5-42을 선택한 것은,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순례여정, 마음이 영혼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그분 안에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 어떤 지난한 과정을 겪어내야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머무름’의 축복을 다시 읽어본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4절)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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