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정호승)

나뭇잎숨결 2023. 3. 31. 05:44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

- 주님수난성지주일,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를 중심으로

 

 

 

 

 

1.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 사랑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인류의 죄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직 사랑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길이 없는데도 끝까지 길이 된 사랑,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랑.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 사랑은 끝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사랑은 시작이 있는 것인가? 

 

주님수난성지주일 복음 마태오 26,14─27.66 가운데, 46절(마르코15:34)을 중심으로 예수님은 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나 자신에게 다시 묻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거룩함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사랑 때문에 자신의 거룩함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사랑이라는 자신의 창조목적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인간의 행위에 먼저 다가가 반응하셔야할 내적인 필연성에 대한 답을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2.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켄터베리의 안셀무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안셀무스)라는 질문은 한 개인의 질문이 아니라 인류의 질문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그동안도, 오늘까지도, 앞으로도 계속될 저 질문에 대해 교회는 조직신학의 인간론에서 속죄론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반론과 반론으로 이어지면서 예수성심으로 수렴되었다. 신학적으로  속죄론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학자들의 사유를 살펴보면,

 

오르게네스(185-254)는 『원리론』에서 총체적 구원론인 <속량이론>을 통해 강생의 원리와 인간구원을 설명하려 했다. 그의 <속량이론>에 따르면 사탄이 인간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오르게네스의 이론은 교회 안팎에서 그 자신조차 위기에 처하게 했지만, 오르게네스의 영성이라는 말이 오늘날도 회자될 정도로 속량이론이 초기 교회를 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악마의 권세 아래서 행동하며 악마의 사악에 복종하는 이 계층들 가운데 어떤 존재들은, 자신들 안에 자유의지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시대에는 언젠가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아니면 계속되고 고질화된 사악이 습관이 되어 마침내 본성처럼 죽어지는가?

 

그러나 겐테버리의 대주교 안셀무스( 1033-1109 )는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육화된 신비를 인간 구원과 관련해서 <속량이론>에는 이성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속량이론>이 악마의 권리를 지나치게 인정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위협하는 듯하다는 것에서 안셀무스는 출발한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인간 본성의 비천함을 회복하고자 받아들인 ‘필연적인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죄에 대해 하느님께 빚진 것을 사람이 갚지 않는 한, 그 빚은 해결 될 수 없었다. 그 빚은 너무나 커서 하느님만이 갚을 실 수 있었다. 따라서 똑같은 인물이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했다. 하느님께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단일한 인격안에 인성을 취하셔야 했다. 그의 본질상, 갚아야 하지만 갚을 수 있는 분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필연에 의하지 않는다. 신이 자신의 불변성으로 인해 그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안셀무스는 <속량이론>이 아니라 <대속이론>을 발전시켰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파괴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저지른 이 죄악은 너무나 커서 인간의 죽음으로 보상할 수 없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하느님을 직관하는 가장 큰 행복에 이르도록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도록 계획하셨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파괴된 세상 질서가 복구되어야만 한다. 즉 손상된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가 회복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하느님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의 자발적인 보상이 필요하기에 성자의 육화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성부께서 시작하신 구원업적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가 자원하여 인간의 구체적 역사적인 인격적 본성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육화를 통해 신적 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도록 구원받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많은 신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안셀무스 자신에게 익숙했던 사회법적인 정의-교환정의에 따라 구원을 축소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명예회복관습에 따르면 명예가 손상된 자의 품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화해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성취했다는 것은 아가페의 무조건적 사랑을 간과했다는 반론이었다.

 

안셀무스는 강생의 이유에 더 나아가 하느님의 육화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려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이 계획은 실패할 수 없는 없으리라는 것이 '필연적인 이유'라고 덧붙인다. 각 사물에는 올바름 즉 신적인 조화가 존재하므로 모든 피조물에 내재한 올바름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언제나 올바른 것을 원하시기에 최종적으로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원하여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섭리의 필연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에 주목하여 11세기 이후, <대속이론>이 교회의 교의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성자의 죽음이 지닌 효력만을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의 고통이 갖는 구원론적 가치를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항상 제기되었다. 또한 죄없이 돌아가신 성자의 업적과 죄지은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다보니 교부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설명할 길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이 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찾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안셀무스 저서의 주 번역자인 박승찬 교수는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하느님과 외부세계를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사 안에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는 늘 충돌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사랑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신비이며 이를 해명해야 하는 숙제를 인류에게 안겨준 셈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1079-1142)는 『속죄의 본질』에서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을 <창조신앙>으로 비판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사랑이신 신 존재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이성의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쳤다는 것에 대해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하느님의 정의의 실현으로 둔갑시켜 구약으로 시계를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정화시켜주었는지? 신의 정의가 충족되어야지만 신의 자비가 실행되는 것인지? 사랑보다 더 큰 죄가 있는지? 등을 안셀무스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요한 1서에 35이나 나오는 바로 그 사랑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으로 나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속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페투르스 아벨라드두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아우르는 총론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을 죄지은 인간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창조신학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조차도 인간은 더 큰 인간의 위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떤 교환행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는 아가페라고 바라본 것이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한계와 신의 사랑의 무한은 교환불가능하기에 비교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은 분명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 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도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라는 게 안셀무스 이론에 대한 반론의 초점이다. 굳이 십자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빛으로 어둠이라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창조신앙의 원천인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다가 얼마전 하느님으로 품으로 가신 요셉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16세교황, 1927-2023)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은 무엇인가에서 코린토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를 마지막 아담으로 규정한 바오로의 견해와 같은 선상에서 마지막 아담, 궁극의 인간상으로 이를 설명한다.

 

십자가는 계시이다. 십자가는 아무것이나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계시한다. 십자가는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준다(...) 액체 호모(ECCE homo) 보라, 이것이 그 사람이다(요한19,5)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적 실패의 심연에서 그보다 훨씬 그지없는 사랑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이다.(159,231)

 

라칭거 추기경은 히브리서 9,12에서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피로 인간과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을, 피를 하나의 물질적- 물량적인 속죄수단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요한 13, 1절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것에 방점을 찍는다, 아담이 아닌 마지막 아담인 예수가 자기 자신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랑의 총량을 타자(인류)에게 내어준 그 사랑을 초점화한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전서15장45에 "첫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은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에서, 예수를 마지막 인간, 즉 궁극의 인간으로 바라본 것이다.

 

무엇보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고발에 편승해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죄인으로 군중 앞에 세우며 한 말, 액체 호모(ECCE homo) 보라, 이것이 그 사람이다”(요한19,5)인간이란 이런 것이다”의 반전의 의미가 바로 예수가 사람이 되시어 오신 궁극의 이유라고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의 총론은 하느님 사랑의 계시라는 것이다. 그 총론의 몇 번째 항에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 항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은 인간의 모든 실존의 상황, 부자유로부터 해방이기에, 속량이론이나 대속개념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고 바라본 것이다. 마치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야말로 십자가 사랑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3.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제,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왜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마지막 절규의 공표를 시편22장2로 인용했는지에 대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상의 절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절망과 아픔을 준다. 이천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는 이 아픔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답을 찾을 수 없고, 하느님마저 침묵할 때, 십자가를 안고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본 사람들은 알 수 있을까?

 

대부분의 성서해설서에서는 이 부분을 시편 22장 2절의 아람어 번역으로 공경에 처한 의인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야훼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마침내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미리 감사를 드린 것으로 바라본다. 시편 22:1부터 69:21까지 자신(메시아)의 사명에 대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 시편 전체를 암송하시며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들도 있다.

 

인간에게 뿐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버림받은 것 같은 이 '절대 고독'을 라칭거 추기경은 인간 실존의 극한, 지옥까지 확대된 사랑으로 바라본다. 지옥까지 경험한 사랑. 그래서 예수를 마지막 인간이자 궁극의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사랑이야말로 사랑이 무한하다고 하는 그 사랑의 진폭을 성전휘장이 찢어질 만큼 종교의 카테고리를 넘어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었다고 바라본 것이다. 지옥까지 내려간 사랑이야말로 끝까지 걸어간 사랑, 십자가를 통해 보여준 사랑이라는 것이다.

 

가상칠언에서 마태오 27장 46절이 차지하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①(루카23:34)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②(루카23:43).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③(요한19:2627)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에게)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④(마태오27:46,마르코15:34)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⑤(요한19:28) 목마르다!

⑥(요한19:30) 다 이루어졌다!

⑦(루카 23:46).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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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십자가상의 칠언 중 .내용상, 시간상으로 네번째 말씀이고 가상칠언의 중심에 위치한다. 이 말씀은 왜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망에 찬 절규로 볼 것인지? 인간의 실존 그 바닥과 벽, 희망의 닫힘 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까지 버림받은 듯한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는 놀라우신 사랑의 고백으로 볼 것이지?

 

제4언을 중심으로 제 1언부터 3언까지는 '사람과 당신 자신의 관계'에 관한 신적사랑에 대해서, 제 5언부터 7언은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사명'에 대해서,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4언은 신 자신이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것 같은, 육체의 죽음 이전에 마주한 영적 죽음까지를 천명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 절규와 탄원이 우리에게 주는 절망의 깊이는 가히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육체의 찢어짐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더 말을 이어가 본다면, 4언은 광야 유혹의 최종판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광야의 유혹 사화 끝에 4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라고. 다음 기회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런 상황에 몰렸음에도 너의 답은 하느님인가? 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넘어 하느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거 같은 상황에서, 하느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라는 절규야말로 십자가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이들이 백주대낮에 만천하에 드러난 하느님의 부재, 어둠이다. 이는 인간이 가한 모욕보다 더 큰 고통으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혼의 어둔 밤을 능가하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의 무덤(없다)이다. 그 쓰러짐을 경험한 사랑이야말로 끝까지 걸어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끝까지 걸어간 사랑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강론에서,

 

고독의 심연에서 그는 신의 일반적인 이름, 하느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왜? 가장 극심한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나를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그 답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는 우리의 가장 쓰라린 고통의 심연까지 내려갔고, 배신과 포기의 절정을 우리와 함께 경험합니다. 무너진 많은 것들에 직면하여, 배신당한 수많은 희망에 직면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지옥을 경험하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에게 용기, 내 사랑에 마음을 열어라, 나도 네가 있는 그곳에 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때, 희망의 죽음 앞에서 당신은 당신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힘, 하느님의 위로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걸고 있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걸고 있는, 모든 희망의 배신과 침묵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희망없이 희망하며(로마서4, 18)라고 전한다. 정서적 의지나 이성의 의지가 아닌 목마르다!”고 토로할 정도로 영적 목마름의 상황에서, 그래도 끝까지 걸어간 사랑이었기에, 그 사랑은 다 이룬 사랑이므로(요한19:30) "다 이루어졌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카 23:46).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다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아버지의 이름이,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그것이 자기 비허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법이었다. 아버지!!!

 

 

글을 마무리하며, 성찬례 제정의, 최후의 만찬 26, 27, 28절을 다시 읽어본다.

 

26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27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