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알랭 핑켈크로트)

나뭇잎숨결 2023. 4. 14. 06:18

©Marco Bottigelli/Moment/Getty Images 멕시코 바야돌리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세노테 수이툰은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담수 웅덩이 중 하나로 얕은 옥빛의 물과 마법과 같은 싱크홀 중앙까지 뻗어 있는 돌길이 있고. 이 동굴 세노테는 가운데로 신비로운 빛이 떨어지는 빛의 천장이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알랭 핑켈크로트)

-부활2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부활은 엄밀히 말해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나>의 재탄생의 경험라고 할 수 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처럼 “너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한 3,7-15)는 것을 경험하는 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 수 있는가? 아니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자명하게 알게 되는 경험이 부활체험라고 할 수 있다.

 

백년도 못 사는 생명, 천편일률적인 1/n 로 살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나, 창조상태의 나를 경험하는 것. 즉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체험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나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나는 죽고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경험이 부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부활은 다시 쓰는 창세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창조의 과정은 기억과 망각이라는 강물을 건너야 한다. 기억을 망각하고 망각할 것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창조이전의 나인 카오스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죽음의 상태에 잠겨있겨 된다. 오직 나를 생물학적인 생명체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부활신앙을 박제화 시키지 말라는 것은 신앙을 고백적 차원에서 끝내지 말라는 조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연대성이 있듯 죽음의 연대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 체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되는 것 뿐 아니라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분명히 알게될 때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자명하게 알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생명의 창세기를 다시 쓰는 부활신앙은 그 어떤 설렘보다 더 설레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양재천에서

 

 

 

 

2. 나는 사랑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도다(성 그레고리오 교황) 당신이 예수라면, 당신의 상처는 어디 있습니까?(성 마르티노)

 

 

기억과 망각의 강물을 건너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재탄생을 가로막는 장애가 다름 아닌 나의 과거, 상처라는 이름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2주에 어김없이 만나는 토마스가 확인하고 싶어했던 예수님의 상처를 불신앙과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았던 헨리 나우웬 신부와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그리스도인과 상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는 진정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 곧 여정을 함께 걷는 친구이다. 그분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상처받은 다른 이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통해 다른 이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고 상처와 상처가 동행하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상처 받은 인간, 상처 입은 치유자)

 

 

못 자국들을 볼 수 있는 상처 입은 신앙만이 믿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심장이 꿰뚫리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눈이 멀어 본 적 없는 신앙,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결코 도울 수 없다. (토마시 할리크 상처 입은 신앙- 내 상처를 보고 만져라)

 

 

믿는다는 것’이 항상 시급한 문제들의 짐을 벗어던지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 믿는다는 것은 의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또한 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의 힘은 ‘신념의 확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불분명함을 견디고 신비의 무게를 버텨 내면서 충실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능력에 있다. 신앙이 살아 있는 한, 신앙은 늘 상처 입고, 위기에 내던져지고, 가끔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주체란 우리에게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상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주체가 존재한다. 상처가 깊을수록 주체는 더욱더 주체가 된다. 주체란 내면성 자체이며 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상처이다. 인간 깊숙이에 열려져 있는 것은 쉽게 닫혀지지 않는다. 생명의 뿌리가 머무르는 골수는 상처의 중심부이다.(로이스브루크, 선집)

 

상처와 주체의 관계에 주목했던 로이스브르크는 상처를 직시할 것을 권한다. 상처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나아가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기 위해선 자신의 상처로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사랑의 공동체는 상처의 연대성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면, 자기연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상처의 확대경이라는 데 주목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한 누구에 의해서도 상처받을 수 없음에 주목한다. 상처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고 권하는 이들은 상처는 불가피한 생존현장의 한시적인 어둠의 체험일 뿐 근본적인 생명의 빛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빛은 결코 어둠을 덮을 수 없으므로, 상처에 초점을 맞추는 하향평준화를 휴머니즘으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특히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롭다. 하지만 열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입힐 수 있는 고통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 바로 사랑이 상처를 입힌다.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안젤름 그륀,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처를 줄 수 없다. 자신의 참된 자아에 의해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에픽테토스, 삶의 기술)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은 끝없이 많은 고통을 받는다하더라도 강해진 상태로 고통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쇠약해지고 몰락한다.(요한크리소스토모, 사도 바울로의 서간집 주해

 

 

동물도 생존현장에서 상처를 받으면 자기 굴에 들어가서 홀로 자기 상처를 핥으며 자가치료를 하고 다시 생존현장으로 복귀한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간이 이미 지난 시간의 고통을 환지통처럼, 훈장처럼 달고 있거나 대물림한다는 신랄한 조언이다. 안젤름 그륀, 에픽테토스, 요한크리소스토모는 모든 상처라는 이름의 희생은 타인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초래된 운명을 겪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3.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을 읽어본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 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라고 전하는 요한 .20,19-31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한 부활의 축복은 크게 두 번의 발현으로 제시된다. 첫 번째 발현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치유를 통해(19-23절) 그리고 두 번째 발현은 의심하는 토마스의 신앙을 통해(24-31) 평화, 파견, 성령, 용서, 믿음이라는 부활의 축복을 전한다. 이 두 번의 발현을 관통하는 것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세 번의 인사와 십자가 죽음의 흔적인 <상처>가 매개한다.

 

평화와 상처, 우리는 확실한 부활신앙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런데 부활신앙이 인격의 차원이 아니라 고백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가 겪어내는 평화와 상처의 균형점을 찾지 못한데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평화는 누가 준다고 갖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처는 거부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화는 하늘이 준 가장 지고의 선물이고 상처는 이 땅이 준 가장 뜨거운 생존의 흔적이다. 평화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상처의 치유라는 점에서 20절, 25절, 27절에서 상처에 대한 확인은

 

모든 상처는 사랑의 상처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언처럼 <나는 사랑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도다>를 이해하는 과정이자

 

당신이 예수라면, 당신의 상처는 어디 있습니까?(성 마르티노) 라는 사탄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상처로 비유된 사랑의 크기는 최소의 것에 최대가 담기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랑의 무한한 찢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상처를 본질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폭이 가진 사랑의 숙명이 바로 상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각자가 진 십자가의 그 이름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상처라고 할 수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첫 번째 인사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표지인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신다. 그것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표지에 그치지 않고 사랑만이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과 사랑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랑은 불가피하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부활의 인사가 건넨 평화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평화의 인사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의 어령에 해당한다. 제자들이 기뻐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그분이 입은 상처가 그 어떤 가해를 가하지 못했다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전능은 상처받을 수 있는 전능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 그 이상의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렇게 죄책감에서 해방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

 

두번째 평화의 인사로 건넨 축복의 이름은 파견이다. 죄책감이나 사랑의 상처를 치유한 사람만이 파견될 수 있다. 누가 파견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치유는 사랑의 확장에 불가피하게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의 운명이다.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의 문을 걷어 닫을 수밖에 없듯. 사랑의 치유는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게 만든다. 상처를 치유한 사람만이 세상에 나가 사랑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절과 23절의 파견은 우리에게 창조신앙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아라>라는 것에서 복음사가는 부활을 제2의 창조, 창조신앙과 연결한다. 여기서 여드레 후라는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 26)그 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를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놓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2,7)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흙이었던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그분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분이 하느님을 닮은 생명의 주인이 되었듯, 제자들도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것이며, 그러기에 파견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죄의 용서는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리는 최우선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치유기적 사화에서도 병을 고치면서 죄의 용서를 동시에 했던 것처럼, 육체적인 치유이전에 그의 마음을 먼저 치유하셨듯, 용서가 누군가의 삶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여드레 뒤에>라는 시간 부사는 창세기의 7일 창조의 창조사업의 계승, 창조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두번째 발현에서 토마스를 통해 단 한명의 제자까지 보듬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랑법을 만날 수 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부활2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토마스를 불신앙의 대변자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여정의 한 표본이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

 

상처를 통해 그분의 부활을 확인하는 것은, 이천년전의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부활의 확인에 초점이 놓여있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타자윤리학의 근간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

 

29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2의 창조란 무엇인가를 더 생각해 본다.

 

[1]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 지각(현실적 자아인 에고, 마음의 표층)의 눈과 지식(성령칠은, 마음의 심층)의 눈이다. 육안이라 볼 수 있는 지각의 눈은 현상을 보고, 영안이라 불리는 지식의 눈은 실재를 본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는 것은 지각의 눈으로 어떻게 나(사랑, 실재)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지각의 눈으로 사랑이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기에 당연히 믿을 수도 없다.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것은 고백적 차원에 그친 신앙이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다. 

 

지각의 눈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구체적인 예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귀납법을 통한 성급한 일반화다. 사람이니까 그렇지 뭐, 하는 합리화 ... 그런데 그 일반화가 보편화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외치는 그 일반화가 신의 죽음을 선고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의 분열을 겪을 때, 마음의 표층은 지각으로, 마음의 심층은 지식으로 갈라진다. 지각의 층은 구체화를 통한 성급한 일반화를 요구한다. 뭔가 감각적으로 확인가능한, 채워졌다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보고서야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베드로도 두려워한다. 야고버도 두려워한다. 필립보도 두려워한다. 안드레아도 두려워한다. 따라서 나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은 두려워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실증을 요구하는 귀납법적 사고체계다)

 

그러나  지식의 층은 추상화를 통한 보편화의 길로 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연역은 보편화의 길을 가는 사랑의 길이다.

 

지각에 의존하고 감각을 주도하는 에고는 현실적 자아다. 에고는 분리에 기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소통을 모른다. <존재하기-행하기- 소유하기>라는 삶의 패턴에서 지각은 소유하기에 초점이 놓인다. 에고는 소유를 축적하고 분리를 강화할 때만 소통한다. 다른 에고체계를 갖고 있는 에고끼리의 연합이 필요할 때만 소통한다. 이것은 분리주의자인 바리사이파의 전략과 비슷하다. 분리에 위험을 느끼면, 즉 육체적인 생존에 위험을 느끼면 에고는 소통을 중단하거나 상대를 제거한다. 이 중단은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그래서 에고가 지향하는 구체화는 그냥 성급한 일반화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일반화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은 만인에게 열려있는 사랑을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알 수 없기에 기쁨을 알 수 없고 기쁨을 알 수 없기에 평화를 알 수 없다.

 

실존주의자의 소통방식은 누구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가치있는 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다. 에고의 구체화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와만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에고는 육체와 물질, 소유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2]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육안이 아니라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지식(성령칠은)에 기반한 존재는 소유에 초점이 아니라 존재에 초점이 놓인다. 즉 마음에 초점이 놓인다. 특히 마음의 심층으로 실재를 본다.

 

그렇다면 존재에 머문 소통은 어떤 소통을 하나? 존재는 그 어떤 것도 분리하지 않기에 실재하는 모든 창조물과 모두 평등하게 소통한다. 시간과 공간을 너머 소통한다. 여기서 감각은 실재와 우리 자신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통찰하기에 모든 실재를 완전히 인식한다. 그런 맥락에서 실재가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며 진정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를 창조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여기다. 지식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공유하기를 원한다. 실재는 공유할 때만 증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창조한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도 보시니 좋았다는 공유를 통해 기쁨을 확장한다. 참된 창조는 오직 자신과 같게만 창조할 수 있기에 모든 것을 준다. 실존주의와는 달리 소유와 존재의 차이가 없다. 존재 상태에서는 언제나 모든 것을 준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창조만이 찬양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과 완전하게 소통하지 못할 때 하느님도 외롭다. 하느님의 기쁨을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기쁠 수 있다. 

 

계시는 일반적인 소통이다. 그래서 성령의 숨결을 그분이 우리에게 불어넣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계시에서 얻은 지식으로 다른 마음들과 소통할 때 그것은 생의 찬미가 된다. 용서는 소통의 장애가 되는 모든 돌들을 치우는 상태다. 누구든지 전적으로 이 소통의 문을 열 때 자기 생의 찬미로 하느님을 찬양한 거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알게되는 것이 보지 않고도 믿는 부활의 체험이다. 

 

따라서 진실로 타자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은 상처받을 수 없다.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완벽한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상처를 보여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상처의 완벽한 치유를 보고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소통은 완벽한 치유이자 완전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 찬양과 찬미는 찬양하고 찬미하는 이들에게 다시 돌려진다. 그래서 부활은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을 그들에게 그들은 하느님에게 동시에 나아가니 아버지 하느님나라는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기쁜데 아들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아들이 기쁜데 아버지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충만에 이르기 위해 자기비허의 과정을 거친다. 말하자면 축복의 그릇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이 자기비허의 과정이 찰라임에도 그 깊이 때문에 아주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확장의지를 갖고 있다. 부활체험은 존재 자체가 타자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타자의 기쁨에 도움이 되는 자는 그래서 기적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수 있고, 그 누구라도 그분께 안내할 수 있는 것이 부활의 사랑, 확장의지(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체험을 통해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써야할 이유이다. 

 

 

글을 마치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