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 속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

나뭇잎숨결 2023. 4. 21. 04:46

 

N님께서 보내주신

 

 

부활 그 이상의 사랑,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 속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

-부활3주,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1. 발타사르 그라시안, 「항상 끝을 생각하라」

 

 

 

가끔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금을 살펴보라/우리의 삶은 대개 환희의 문을 지나 행운의 문을 거처/마지막에는 쓸쓸한 퇴장의 문을 반드시 거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그대는 항상 끝을 생각하고 행복하게 될 것을 그려라 / 처음 들어설 때의 환호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 어쩌면 그러한 갈채는 누구나 받는다 /그러나 물러설 때 받는 갈채야말로 진정하고 위대하다 / 왜냐하면 행운이라는 그림자가 물러가는 자의 문까지 따라 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세상에는 등장하는 자는 후한 대접을 받으나/퇴장하는 자는 경멸당하기 쉽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항상(가끔) 끝을 생각하라」는 잠언시다. 시인의 충고는 제목이 말해주듯, 지혜로운 선택이 인생의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조언이다. 흔히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이 시를 읽었을 때, 그렇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멈춘 부분은 다음 시행이었다. 왜냐하면 행운이라는 그림자가 물러가는 자의 문까지 따라 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멈춘 부분은  그대는 항상 끝을 생각하고 행복하게 될 것을 그려라

 

끝은 언제나 시작과 닿아 있다. 그래서  ‘태초에’ ‘한 처음에’ 이미 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태초에’ ‘한 처음에’를 생각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내릴 유일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홀현, 습명같은 것이다.

 

문득,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가 성녀로 시성될 때, 자칭 자신을 무신론자로 칭하던 어떤 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만약 당신들이 믿는 신이 진정 존재한다면, 마더 데레사가 선택할 길은 빈자의 어머니가 되는 길, 그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라는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것 하나를 지혜롭게 혹은 운좋게 집어든 것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선택지는 그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결정은 우리를 자명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A님께서 보내주신 

 

 

 

 

2. 사랑은 결정하는 것인가? 선택하는 것인가?

 

 

 

우리가 자명하게 단 하나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할 때, 이성적으로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것이 방어기제다. 이 방어기제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병리현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꺼내드는 태도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방어기제란 무엇인가? - 어떻게 나를 보호하는가?]에서 인용했던 대표적인 방어기제를 살펴본다.

 

방어 기제 [防禦機制]두렵거나 불쾌한 일 또는 욕구 불만의 상태에 부딪쳤을 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동적으로 취하는 적응 행위 방어기제라는 개념은 마음속에 서로 반대되면서 충돌하는 2가지의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주된 방어기제에는 억압·반동형성·투사·퇴행·승화·부정·합리화 등이 있다. 이 용어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논문 『방어의 신경정신학 The N#128-Psychoses of Defence』(1894)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방어 기제 중 대표적인 것으로 억압(repression)의 기전이 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망이나 욕망, 욕구, 환상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경증에서 작동되는 기전이지만, 특히 히스테리 증상에서 두드러진다. 즉 무의식적인 욕구나 욕망들이 의식화되는 것을 미리 막음으로써 그것이 의식화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불안을 방지하는 것이다. 억압된 욕구나 욕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 남아서 우리의 인격이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정신 분석을 할 때 자유 연상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억압에 의해서 묻혀진 것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다. 억압은 무의식의 내용들이 의식화되려고 할 때 이를 막는 일차적인 방어 기제이다. 만약에 이 억압이 실패하면 투사와 같은 다른 방어 기제를 동원하게 된다. 억압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억압이 과도하게 일어날 경우에 억압된 내용은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남아서 스스로 드러나려고 하는 역동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에 억압된 것을 표현하지 않는 성격적 특성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런 억압을 통해서 억압을 하기 위한 반대의 힘, 즉 억압하려는 내용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편견은 성격에 고착되어 살아가면서 계속적 장애를 유발하게 된다.

 

전치(displacement)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적 갈등이 있는데 그 대상이 갈등을 표출할 대상이 되지 못할 때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은 근친 상간의 문화적 벽을 피해서 이모나 누나 또는 다른 이성으로 옮겨간다. 공포증이 이 방어 기제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자신에게 무해한 대상으로 공포의 감정을 옮기는 것이다. 감정이 옮겨진 대상은 본래의 것이 지니고 있던 감정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본래의 대상보다는 사회적으로 훨씬 허용적인 대상이 선택된다. 본래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박증에 나타나는 손씻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추잡한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전치는 무의식의 욕구나 욕망 등을 억압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또 억압에 실패했을 때 일어나는 갈등을 다른 대상을 통하여 처리해주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있을 때, 아버지가 사랑하는 동생을 때린다든지,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개를 때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때 동생이나 개는 아버지의 전치된 대상이다.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은 자신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욕구, 욕망, 충동, 소망을 막는다. 억압된 욕구나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서 정반대의 특성을 강조하게 된다. 예를 들어, 타협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무의식 속에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충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 이것은 강박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에게 증오심이 많이 있을 때 겉으로는 지나치게 과장된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도 반동 형성을 볼 수 있다. 또 겉으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에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은 아주 심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마음속 깊은 곳에 가학적 성향이 강할 때 그것을 오히려 강하게 부정하여 마치 평화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들이 모두 반동 형성에 해당한다.

 

격리(isolation)는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연을 당하면 처음에는 실연의 사건과 그에 대한 감정이 같이 있어서 그 사건이 떠오르면 괴롭지만, 시간이 지나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분리되면 그 사건이 생각나도 괴롭지 않을 수 있고 또 그 사건 자체를 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격리가 성공하게 되면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내용만 기억하게 된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고통 없이 대하고 기억에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정신 치료에서 과거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떠올릴 수 없을 때 이 기전이 작동되면 고통 없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격리의 일종으로 지식화(intellectualization)가 있다. 이것도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는 방어 기제의 하나이다. 상처받은 사건에서 감정을 분리해서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 사건에 담겨 있는 감정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분리(splitting)은 모순된 감정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분리해버리는 무의식의 과정이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에서 선함과 악함, 쾌감과 불쾌감, 사랑과 증오 등을 분리한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분리해낸다. 이런 분리가 통합되는 것이 성장인데 분열이 계속되면 성숙을 가로막는다. 분열은 행동과 태도로 나타나는데 모순된 행동을 교대로 나타낸다든지,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든지, 상대를 이상화하거나 비하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경계선 인격 장애의 주요 방어 기제로 알려져 있다. 투사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어떤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는 자신의 어떤 이미지인 표상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둘째 단계는 무의식적인 투사가 된 대상이 자기의 표상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고, 셋째 단계는 투사된 것이 그 대상 속에서 변형되어 투사한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이것을 재함입이라고 한다. 이렇게 투사된 표상이 변화하는 것 때문에 대인관계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전이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는 전이를 말하고 셋째 단계가 의식적으로 처리되면 전이라고 할 수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처리되고 투사된 대상도 모르고 행하게 되면 그것은 전이다. 이 경우는 무의식적인 것이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쳐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무언가를 강하게 느끼는 경우처럼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투사하는 사람이 투사된 대상을 조정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떤 표상을 없애려고 할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투사된 사람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서 없애려고 한 것을 원하는 대로 통제한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투사(projection)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대상에게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투사와 투사 동일시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투사에는 반드시 많든 적든 간에 동일시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대상들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편집증 환자의 경우에 자신의 표상을 투사하고 그 대상을 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투사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피하는 행위도 대상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일시 기전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투사는 자신의 속성인데 그것이 자신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속성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이 기전에 의해서 자신의 인격 안에 있는 중요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은 이 투사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투사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모르고 남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난을 한다. 그에게 투사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메아리임을 알아야 한다. 투사는 불안을 일으키는 죄책감이나 수치감을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자신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의식에 있는 것이 투사될 때에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생각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망상이 나타나는데 주로 피해 망상이 나타나며, 편집증에 중요한 기전이 된다. 반면에 지각으로 투사가 나타날 때에는 환청 등의 환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주로 이때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런 투사가 나타날 때 흔히 보이는 것이 관계 사고인데 이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주시하고 자기를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위의 대표적인 방어기제를 보면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할 상황에 놓여 있는 거처럼 보인다.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선과 선 조차도 대립쌍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을 집어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집어든 방어기제가 실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우리 앞에 수많은 선택지가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결정이 있을 뿐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단 하나의 결정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단하나의 결정이 놓여있는 거처럼, 산다는 것은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서 온갖 지혜와 갈등 끝에 하나를 운좋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할 것인가 안할 것이냐에서의 기로에서 오직 결정만이 있다는  생각이 '오늘'은 든다.

 

 

 

 

 

 

 

 

3.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루카 24,13-35을 읽어본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 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부활3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의 표정이 침통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좌절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스승으로 모시던 분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들은 그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십자가 사건이 있던 공간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떠나는 것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달리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들을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 공동체와도 결별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행자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분의 설명을 듣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라고 그분을 뜨겁게 붙잡은 것일까?

 

그런 상태를 라칭거 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부활이 제자들에게 여전히 왕, 예언자 혹은 구세주라는 확신을 주기는 했으나 ‘십자가’는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는 두고두고 깨달았어야 했다”는 데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16절과 31절을 중심으로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눈이 보여,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 그것이 오늘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생각해 본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19)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20)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22)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23)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29)“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기대)----->Ⓒ(좌절과 실망)--->Ⓓ(포기)----->Ⓔ,Ⓕ(뜨거움)

 

성서 저자는 그것을 <눈이 가려서>와 <눈이 열려서>라는 상반된 표현을 하고 있다.

 

 

 

[1]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6절)

 

 

끝은 언제나 시작 속에 있다. 그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는 이미 그들의 실망에, 어떤 필연성을 던져준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랐지만 그분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구약의 유능한 예언자,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시는 그런 분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눈이 가려진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기대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거나 말거나 더는 그분에게 그 어떤 기대도 갖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유다의 길도 아니고, 다른 제자들의 길도 아닌, 엠마오라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침통한 표정이 드러나게 만든 그 절망은 분노와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용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에서만 절망과 포기를 할 수 있다. 복음사가는 요한복음과는 달리 용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을 등진 행위에서 그것을 추론할 수 있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

 

로마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은 부분적인 선이다. 그 부분을 전체로 치환한 절망과 분노, 포기의 다른 이름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기대가 무너졌을 때 작동시키는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현실에서 눈이 가리어라는 표현은 방어기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다른 진리가 공격하는 듯이 보일 때 이 방어기제가 작동된다. 그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절대선으로 보게 된다. 그러기에 그 어떤 방어기제도 자기기만이 내재해 있다. 이 자기기만은 자신을 자신이 속이는 줄도 모르고 속이게 되는 기만이기에 알아차릴 수도 없다.

 

방어기제의 목적은 실재를 숨기고, 실재를 공격하고, 실재를 바꾸고, 실재를 무력하게 만들고, 실재를 왜곡하고, 실재를 뒤틀어놓는 것이며 실재를 전체성으로부터 해체하여 부분으로 만든 다음 그 부분 부분을 전체처럼 보이게 하는 실재와 전체에 대한 은밀한 왜곡,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진리가 공격하는 듯이 보일 때 이 방어기제는 작동된다. 이 방어기제는 생물학적인 생존과 욕망과 관련이 있으므로 찰라에 가까운 방어본능, 즉각적인 결정이다. 자신이 찰라에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는 사실자체를 망각하게 만들 정도의 순간이다. 그러기에 방어기제는 언제나 그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의 최종 도착점은 자기 자신이라는 데 있다. 원인이 곧 결과이다. 즉 자신이 자신을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절망이라는 이름의 도피다. 절망은 일종의 사랑의 부재를 의미한다. 

 

어떤 글에서 예수님을 일컬어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기대와 실망, 절망과 포기는 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분리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분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민족적 숙원을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는 믿음 그 저변에 깔려있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었다. 대의를 부르짖는 사적 욕망이다. 그것이 방어기제가 작동시키는 자기기만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절망이 지닌 사랑의 부재를 말한다.

 

기대와 실망과 포기의 단계는 방어기전 중에서 분열 혹은 분리(splitting)에 해당한다. 자기분열을 직시할 수 없을 때, 분열은 모순된 감정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분리해버리는 무의식의 과정이다. 모든 분리의 이유가 외부로 돌려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

 

분리의 이 방어기제는 자신을 언제나 주체의 자리에 놓아두고 예수님을 대상화 혹은 도구화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에서 선함과 악함, 쾌감과 불쾌감, 사랑과 증오, 능력과 무능 등을 분리한다. 그래서 자신의 기대치를 중심으로 대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추린다.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대상에서 그 기대가 채워지지 못했을 때, 그 대상과 관련된 모든 것,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기대를 채워줄 수 있었던 분과의 완벽한 헤어짐, 그분과 함께한 공간에서, 한없이 멀어지는 길위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헤어질 때, 넌 북쪽으로 가라, 난 남쪽으로 간다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2]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1절)

 

 

복음사가는 31절에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전한다.

 

길 위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공간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분에 대해 계속 말하고, 그분에 대해 듣고자 하는 이상한 현상을 노출시킨다. 자신들을 아프게 한 그 분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 그것!

 

절망의 상태에서도 그분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그것, 전체가 전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그것이 방어기제의 해제, 내적치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신 때문에 좌절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간 그분의 사랑이 그들을 아름다운 여행자로 변모시킨다.

 

그래서, 이천년을 건너온 이 아름다운 문장(붙잡음)을 우리도 오늘 듣게 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29)

 

사랑은 언제나 사랑의 길을 간다. 그들과 머물면서 그분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성서는 전한다.

 

앞 단락에서 보았듯, 눈이 가려있다는 것은 그들의 기대가, 그들의 결정이 그들의 생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이 보였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부활신앙은 우리를 1차적으로 시간에서 해방시킨다. 과거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야지만 미래의 두려움을 놓아줄 수 있다. 과거는 언제나 미래와 함께 다닌다. 거기서 '오늘'은 실종 된다. '오늘'을 모르는데 영원을 알 수는 없다. 영원은 인간의 숫자, 시간개념이 닿을 수 없는 초시간의 '오늘'이다. 우리가 살아서 영원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과거와 미래가 개입하지 않은  '오늘'밖에는 없다. 그때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오늘>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의 체험은 1차적으로 그분을 보았다는, 부활체험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유턴해, 제자공동체에게 부활을 증언한 것은 그들 인생의 계획을 그분에게 완전히 내 맡겼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눈이 열려>는  그들에게 내적치유가 이루어진 것으로, 치유된 마음은 자기 인생을 더 이상 스스로 계획하지 않는다. 맡긴다. 치유된 마음은 자신의 것이 아닌 지혜에 귀를 기울여서 받게 된 그 뜻을 실행하고 싶어한다. 치유된 마음은 해야 할 일을 성령으로 지도받기를 기다린 다음에 일에 착수한다. 치유된 마음은 주어진 계획을 완수할 자질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 외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의존하지 않는다.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치유된 마음은 모두의 유익을 위해 세워진, 보다 큰 계획에 기여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발걸음으로 그 어떤 장애물도 막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안전함을 안다. 치유된 마음은, 최선의 결과와 그 결과를 성취하는 수단과 계획이 해결하려는 문제를 인식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무엇을 계획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벗어난다. 자신이 자신의 행복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까지는 마음은 자신의 계획에 몸을 오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임을 받아들이면, 마음은 치유되어 몸으로부터 자유롭다. 몸을 놓아준다. 여기서 육체적인 치유도 이루어진다.

 

 

⒝부활신앙의 본질적인 체험은 세상과 자신을 용서했다는 확증이다. 용서를 통해 용서 너머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내 기대를 저버리는 세상을, 타자를, 그리고 나를 용서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용서에 대해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다. 지난주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준 부활의 축복이 용서였다.

 

성서전반에 걸쳐, 미사전례의 많은 부분에, 주기도문의 후반부에 이 용서에 치중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3)

 

왜 예수님은 부활의 선물 중에서 성령을 통한 용서를 말씀하셨을까? 성서전반에 걸쳐 나오는 이 용서는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적행위다. 신적 행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용서다. 용서는 세상과 타자에게 베푸는 정신적인 자선이 아니다. 궁극적인 용서는 <세상-타자-나>의 순서로 수렴된다. 용서는 밖에서 시작되어 안에서 완성된다. 결국 자기 용서에 이르고 그곳에서 멈춘다. 용서는 오직 내 탓이오다,에서 멈춘다.  자신이 세상에 걸었던 기대, 절망, 좌절은 사랑이 설 자리를 없앤 것임을 알게되는 것이기에 용서는 오직 자기용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서가 중요한 것은 용서 그 너머에 있는 사랑에 있다. 용서 하지 않고는 용서 그 너머의 사랑을 알 수 없다. 우리의 여정은 용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넘어서는 것이다. 용서할 것이 더 이상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사랑은 용서, 그 너머의 사랑을 말한다. 어떤 글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의 치유, <부활 그 이후의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용서는 우리 여정의 끝이 아니다. 시작의 의미가 있다. 물론 용서가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신앙 여정은 용서에서 끝나지 않는다. 용서 너머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을 불러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타자와 자신을 용서한 후에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을 부르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용서는 즉 빛의 근원을 만날 수 있는 태초의 기억을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창세기 1장, 요한복음 1장에서 <한 처음에> 있던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용서할 것이 더 이상 없는 상태의 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 너머에서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1서)라는 메시지를 준다.

 

다시 반복해서, 우리의 신앙은 용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 그 너머로 넘어가는 것.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 신학의 총체를 죄의 대속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용서를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사랑, 그 광활한 스펙트럼을 볼 수 없다. 용서 그 너머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용서는 천국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 그 너머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그것이 부활신앙의 궁극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대하고 청사진을 그렸던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 빛의 세상이 실재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행복의 이정표를 발견하게 된다. 용서는 치유의 근원이자 사랑의 전령이지만 사랑의 근원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방해받지 않고 마지막 단계를 친히 밟으실 수 있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로 인도하시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용서 너머로 인도하시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그곳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무엇도 사랑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활신앙은, 사랑은 배움을 초월하며, 사랑은 (하느님)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활은 용서가 있는 성소 너머로 향한 한 걸음, 더욱 안쪽으로 내딛는 그 걸음은 우리가 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완전히 다른 무엇으로 데려간다. 여기에 빛의 근원이 있다. 지각될 것도, 용서받을 것도, 변형될 것도 전혀 없이 다만 열려져 있고, 깨달아지고,알려지는 곳. 다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실재세상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실재세상을 넘어서지만, 배움을 통해서는 넘어설 수 없고, 다른 방법으로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배움이 마지막은 용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용서라는 배움이 끝나는 곳에서 하느님이 시작된다. 하느님을, 아버지를 만난다. 배움은 하느님 앞에서 끝나며 하느님은 당신이 시작하시고 끝이 없는 그곳에서 태초의 그 사랑을 완성하신다.

 

사랑은 배움을 초월한다. 사랑은 (하느님) 그 자체에 있다.

 

요한 사도의 통찰처럼, 하느님을 모르고는 사랑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학습 너머에 있다. 사랑은 학습되지 않으니, 우리가 태초의 그 사랑을 몰랐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정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아닌 것들에 둘러 싸여 태초의 사랑을 망각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 창조의 사랑을 기억하게 돕는다. 그로인해 창세기 1장,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를 <한 처음에  사랑이 계셨다>로 알아듣게 한다. 

 

우리가 미사전례 중,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아들이고 그 보살핌의 무한한 권능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해 그 권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것, 부활신앙의 스펙트럼은 어제보다 예수님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된 축복이 아니라 엠마오라는 실존의 길 위에서 태초에 늘, 항상 있었던 그 사랑을 용서 너머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절망을 모르는 현실”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며,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29)“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