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은 진리를 나누는 것인가? 경험을 나누는 것인가?

나뭇잎숨결 2023. 5. 12. 08:39

분이가, 서리산에서

 

사랑은 진리를 나누는 것인가? 경험을 나누는 것인가?

-부활6,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를 중심으로

 

 

 

 

 

1. 이브 본푸아가 「희망의 임무」

 

 

가끔 듣는 말, 아무아무개가 내 인생의 롤모델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누가 자신을 일컫어 롤모델이라고 말하면 천하를 얻은 듯, 두고두고 기뻐하기도 한다. 롤모델은 사람이 아니다. 오직 J뿐이다. 우리가 극복해야할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절대우위가 아니라 비교우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브 본푸아가 「희망의 임무」에서 말하는 희망의 임무는 그런 배고픈  이름에 대한 허상을 떠나라는 잠언시다.

 

새벽이다이 램프는 결국죽음을 모르며밤을 새우는 자의/열기로 흐려진 거울 속에 손을 얹고,/이렇게 희망의 임무를 마친 것인가?//그러나 그는 램프를 끄지 않았다./램프는하늘이 있음에도그를 위해 타오르고 있다.또 다른 강의 작은 배아침의 잠든 자들이여,/갈매기들은 성에 낀 유리창에 영혼을 소리치고 있구나.

 

이브 본푸아의 「희망의 임무」에서,

 

밤을 새운 자에게 램프는하늘이 있음에도그를 위해 타오르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희망의 임무란 하늘이라는 초월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을 위해 램프가 되라는 것이다.

 

또 아침에도 잠든 이에게는 "갈매기들은 성에 낀 유리창에 영혼을 소리치고 있구나." 에서는 오히려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라며 초월을 권한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는 땅을, 땅을 내려다보는 이에게는 하늘을 권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램프와 갈매기를 통해 보여주는 희망의 임무란 지금 그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 지금 지향하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그 반대편으로 생각을, 머리를 돌리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희망의 의무란 여기에 있는 사람은 저기로, 저기에 있는 사람은 여기로, 생이라는 운동장을 한없이 확장하라는 큰 틀에서의 어떤 시선이라 할 수 있겠다. 

 

 

 

 

 

 

 

2.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자신이 달리는 운동장의 트랙이 너무커서, 즉 시선이 너무 광대해서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이들이 역사상 가끔 있었다. 아마도 하이데거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생의 운동장이 광대하다는 것은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규명하느라 아마 외로운 줄도 모르고 그 넓은 운동장을 바톤터치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달렸을 수도 있다. <존재와 시간>은 창세기의  철학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너무나 큰 틀을 가진 철학자라 하이데거와 같은 시대를 통과한 그 누구도 하이데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대신, 하이데거와 히틀러를 역사적 맥락으로 묶어 하이데거 철학을 평가, 재단, 폄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에게 사유는 근원의식에서 바라본 감사였다. 개인적으로 신의 공현, 통찰, "현현Epiphany"을 하이데거에게 배웠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일반적인 사유가 아니다. 사유자체가 현현이라 할 정도로 하이데거는 사유로 하늘과 땅을 연결했다.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와 「하이데거에서 '사유'의 문제」(문동규)에서 인용했다.

 

하이데거는 사유를 통해 <발현, 현현>의 의미를 신학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바라보았다. 현현, 에피파니를  하이데거처럼 분명하게 설득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사유의 어떠한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며, 혹은 거꾸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가지도 못한다. 오히려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이미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

 

하이데거에서 '사유'는 '존재의 사유'다. 그런데 이 존재의 사유는 전통 형이상학적 사유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에 의해 처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는 그러한 사유가 아닌 다른 사유, 즉 '사유'의 유래, 다시 말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을 묻는 사유가 되는데, 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존재'다.

 

그러나 이 '존재의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할 수 있는 그것인 '존재'와 그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인간'이 '함께 속해 있다'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유는 하나의 '감사'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표상적 사유가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사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역시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변하는 사유'이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사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묻는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이 말 건네는 것에 '귀기울이는 사유', 즉 '응답함'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서 사유는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대답하는 사유'인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응답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사유는 철저히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는 사유의 근본요소이며, 사유의 사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존재가 사유의 근본요소이자 사유의 사태라면, 존재의 사유는 사유의 본질적인 변화와 사유의 시선 변경 없이는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존재를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유가 아니라 존재와 인간이 함께 속해 있는 가운데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두 가지가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음', '각자가 각자에게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두 가지가 각각 분리된 요소로 따로 존재한 후 서로 '결합'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인간이 함께 속해 있다고 할 때,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에서 '속해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함께 속해 있음'이 '서로 서로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 '속해 있음'은 단지 '존재에 귀기울이는 인간이 그 존재에 '속해 있다'는 사태뿐만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고유한 진리를 훤히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 '현-존재'의 열린 '그곳'을 '필요로 한다'라는 사태 관계도 지시하고 있다.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본질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로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 고이 깃 들어 있고, 존재는 오직 자신의 요구(말 건넴)에 의해서 인간에게 다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본래적으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속해 있음'은 인간이 존재에 '속해 있음'과 '동시에'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진리를 훤히 드러내기 위해 현-존재의 '그곳'을 필요로 함으로써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즉 '내맡겨져 있다'는 이중적 사태 관계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속해 있음'은 존재와 인간이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과 존재는 서로 서로에게 내맡겨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로 서로 속해 있음'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함께'는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와 인간이라는 분리된 두 개의 요소가 결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속해 있음' 안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질 연관'을 의미한다.

 

'존재가 인간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 '필요로 함'이란 '존재가 스스로 탈은폐하며 던져옴', 즉 '발현함(Ereignen)'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존재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존재자체가 자신의 고유한 진리의 열린 장 안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알려오고 던져온다(다가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라 존재자체는 인간을 무엇보다 먼저 존재자의 개방됨에서 존재의 진리를 지켜나가는 그러한 '현-존재'로 열어 놓으면서, 즉 인간을 존재의 고유한 진리의 열린 장 안에 탈자적으로 내존하도록 하면서, 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와 인간이 항상 '함께 속해 있다'는, 그것도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발현의 필연성이다. '그것', 즉 '사유해야 할 사태'에 응답할 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 건넴을 받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응답할 때, 우리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진정으로 대답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응답함' 내지는 '대답함'의 전형적인 어떤 상태다.

 

사유란 본질의 보호 아래에 내맡기는 것이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명하는가?를 물을 때,  사유는 일종의 기억이자 감사다. 그런데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이 은혜 입은 것에 대해 감사 입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감사하는가? 그것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우리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던 '존재의 이중성', 즉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하기'의 이중성인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사유'란 '감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우리의 최고의 감사는 바로 사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감사는 '사유해야할 것', '사유되어야 할 것', 즉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을 회상하는 사유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을 사유하는 한에서, 우리는 본래적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자의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본래적인 사유, 또는 시원적인 사유, 본질적인 사유, 근원적인 사유는 "존재의 은총에 대한 반향"인 셈이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존재는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를 준다"라고 말한다.

 

"존재, 그것에 의해서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소묘되는 그런 존재는 곧 현존을 뜻한다."  "현존을, 즉 존재를 주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존재는 자신을 열린 장으로 이끌어오면서 이러한 현존을 허용해 주는 '현존하게 함'으로, 즉 '주고 있는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그 '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존재를 현존으로서 주는 그러한 줌'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것이 존재를 준다'에서 그 '줌'을 "보냄"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주는 것', 즉 '그것'에 의해 '보내진 것이며, 역사상의 시기마다 '주는 것'에 의해 보내진 '운명적인 것으로 보내진 것들'이다. 그래서 "존재의 역사"는 곧 "존재의 보내져 옴"을 의미한다.

 

그런데 존재를 주는 '그것(Es)'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것이 존재를 준다'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것은 '발현이 존재를 준다'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하며 다가가는 그런 응답 속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발현(Ereignis)' 혹은 ‘현존(Anwesen)’은 자기 존재를 줄 수밖에 없는 상태를 칭한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존재자와 존재는 '함께 서로에게 내맡겨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요한14,15-21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부활6주,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라고 전하는 요한14,15-21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무한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너무나 말씀의 성찬이라 어떤 문장에서 묵상을 시작해야할지 모를 정도다.

 

15절과 20절을 통해----16절과 17절을 바라보고---요한복음8,31-32을 통해----15절과 20절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고---21절의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에서 전하는 발현, 현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

 

~하면, ~할 것이다. 라는 문형은 ~하면은 주절이고 뒤에 ~할 것이다는 종속절이다. 주절이 선행되면 종속절은 따라온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켜서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당연히 지키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동료인간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오감각으로 체험되지 않은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

 

15절과 주절과 종속절이 바뀐 문장이 20절에 나온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0)

 

복음사가는 15절과 20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의미를 반복해서 제언한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15절은 제자들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에서 도출되었다면 20절은 굉장히 보편적인 모든 사람의 길, 확장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단순 강조어법의 변형된 반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라고 알려주신 그 사랑은 언제나 울타리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면 마땅이 그래야 할 것이다.

 

15절의 ~하면 ~할 것이다는 것은 시간이 존재하는 사랑이다. 본질이 정립되면 자연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 표출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20절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다. 본질과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한 사람은 ~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15절에서 분명히 그 청자를 지칭할 수 있는 너라는 제자군이 있었지만 20절은 제자들로 국한된 사랑을 넘어서 모든 사람(너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으로 청자가 확대되는 보편적 사랑으로 넘어간다. 그 사랑을 매개하는 것이 보호자 성령- 진리의 영이시다.

 

16절을 보면 그 사랑은 <아버지-예수그리스도-성령- 제자들인 우리>의 상호작용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는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6)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7)

   

그분의 계명, 애주애인의 사랑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힘으로는 그 사랑을 하기 어렵다는것을 그분 역시 아신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다. 또한  그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나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암시도 내포되어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이 계명, 죽음까지 포함된 그 사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기에 16절에서 다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보호자는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의미에서 미래적인 은총이 이미 주어진 은총으로 표현된다.

 

미래적인 것이 이미 주어진 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번역의 오기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라는 어떤 키워드가 내장하고 있는 메카니즘이다. 창조된 피조물은 모두 그 사랑안에서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은 이미 함께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영원이 된다.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사랑은 영원은 아니다. 그래서인가? 17절에 이미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미래적인 은총이 이미 선취적인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미래적인 은총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이 근원의식이  너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라는 것에서, 제자들은 그분의 수난예고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너희는 이미 내가 원하는 그 사랑을 알고 있다는 표현으로 제자들이 인생 전체에서 완성할 사랑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한다. 오늘보다 더 큰 너, 현재보다 더 큰 너,

 

오늘의 내가 아니라 총체적인 인생 속에서의 나, 영원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사랑은 따라서,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가능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 31-32)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의 이름이 된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줄 보호자를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애초에 이 진리의 영과 함께 있었던 생명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게 되는 은총이 아니다. 태초에 함께했던 그 은총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15절과 21절이 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0)

 

여기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고뇌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예수님의 고뇌는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이들이 겪어야할 고뇌의 이름이다.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주어지는 고난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만나게 되는 고뇌다.  세상의 힘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고 두려움에 떠는 얼굴들, 그 면면들 때문에 겪는 고뇌다.  잠시 후면 예수님 당신이 겪어내야 할 십자가의 수난을 그분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제자들에게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지 않은 영원한 사랑의 완성에 대해 거듭해서 알려주면서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이 환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두려움의 수렁에 빠진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것을, 너희는 나와 하나라는 것을, 너희가 나와 하나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도, 진리의 영과도 하나라는 것이 지닌 사랑의 힘을, 세상의 힘에 압도적으로 휩싸인 제자들에게 설득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가다 마주하는 어떤 고독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 고독마저 넘어섰을 때,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는 현현 혹은 현존의 의미가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이 진리인가? 체험인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을 떠올려 보자. 아브라함의 하느님 체험, 이사악의 하느님 체험, 야곱의 하느님 체험, 모세의 하느님 체험,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 이사야,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다윗의 하느님 체험, 바오로의 하느님 체험, 순교자들의 하느님 체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 체험 등등.....하느님 사랑의 메신저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을 직접 체험했다. 그러나 그분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백성들은 그들의 체험과 같은 직접 체험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체험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이 그들에게 도착한 그날은 아니다....또한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이들도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체험한 것이 아니다..하느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현존체험이 말씀의 메신저인  이들에게 필요했기에 준 선물이다. 이 선물은 사적 선물이 아니라 공적인 선물에 해당한다. 이 선물을 받은 이들은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이 선물을 받은 이들은 필히 요나의 고래뱃속의 상징성과 모세의 가나안 입성의 좌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런 깨달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비전(진리)은 공유될 수 있지만 우리 각자가 받은 개인 은사에 해당하는 그런 영적 경험은 비전이 공유되는 방식처럼 직접적으로 공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라는 메시지만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존 체험 혹은 경험은 정해진 때가 되었을 때, 그분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든 모순들은 그 법칙 아래서 조화를 이루게 되겠지만 그 때를 씨뿌리는 사람인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라는 그 시간을 우리가 정할 수 없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비전은 하나의 법칙을 갖고 있다. 도전이다.  '너는 형제 안에서 나와 너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형제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체험처럼 네가 박해하는 이들이 바로 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못들은척 하고 싶은 도전인가?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이자 아이러니가 있을까?

 

하느님의 삼위일체 사랑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예수라니? 우리의 근원의식으로 돌아가면 모든 창조물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말이 아닌가? 근원의식 자체를 취소하고싶게 만드는 이들의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다. 그들을 위해서 그분은 수난을 당하셨다는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한한 사랑,

 

그러기에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도 알 수 있다고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힘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던 그를 바라보라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힘에 좌고우면하는 나를 바라보듯이 말이다. 겉으로 표출된  모든 이의 약함을 뛰어넘고, 이 세상의 사악함을 뛰어넘고, 세상의 힘을 수시로 두려워하는 나의 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21)

 

21절에 이르면 그분은 일관되게, 한결같이,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부활의 사랑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는지를 다시 말씀하신다. 대체 이 사랑은 무엇인가? 십자가 수난의 의미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이후의 현존에 대해 말씀하신다. 초등학교 일학년에게 마치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 같은 사랑의 진도....

 

여기서,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그 열매에 대한 확신이고,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우리 생전에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원은 씨앗을 뿌리는 자에게 자유이자,  혹독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유인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만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과, 그 열매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혹독한 것은 씨앗을 뿌린 농부는 그 추수까지 하고 싶은 애착이 생긴다. 그런데 눈물로 씨뿌린 것을 기쁨으로 추수하는 그 사람은 나일 수도 있겠지만 나 아닌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전하는 그 사랑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만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신앙은 사랑만이 우리에게 절대고독을 통과하는 길을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봉헌하는 것은 사랑한 것뿐 아니라 사랑함에도 채워줄 수 없는 부분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아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사랑함에도 사랑은 절대고독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영역이지 경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누고 싶어 한다. 때론 나누고 싶어하는 그 마음도 상당히 감옥이자 족쇄로 작용한다. 나눔에도, 갈망에도 절제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운명을 살아낸다는 것을 동의가 아니라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사랑에는 무한한 사랑만큼의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매주 복음 묵상을 하면서 은총을 선물을 받고 있는데, 이번주 복음을 묵상하면서 받은 은총은 진리의 영역은 나눌 수 있지만, 경험의 영역은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진리 뿐 아니라 우리가 개별적인 은사로 받은 경험까지 나누려고 할 때, 그런 갈망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기 때문에 더 큰 고독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근원의식으로 살기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거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 절대고독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1차적으로 우리에게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고독너머에서 본질적인 것을 만날  수 있고, 우리는 그분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현실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끝없이 유사 죽음인, 포기를 거듭해야함을 알 수 있다. 그 인내라는 이름의 포기 속에서 모든 이들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모든 이들의 근원이 같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는 현현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그분이 자신의 고유한 진리의 열린 장 안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알려오고 던져온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사랑의 롤모델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롤모델은 오직 그분, 예수그리스도 뿐이다. 아무리 나누고 싶어도 진리는 나눌 수가 있지만 경험을 나눌 수가 없다. 그분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그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면 그분은 결코 수난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스펙트럼은 기쁨의 영역인  알렐루야를 환호하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닿지 않은 창조의 아침까지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진리만을 나누려 할 때 주어지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유에 우리의 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모든 창조물의 근원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빛속에서 아버지의 숨결을 받은, 불멸의 사랑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 창조의 아침을 바라보았다면 신의 현현을 함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