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장미학적 존재증명, 부재의 현존, 결핍에서 풍요로!

나뭇잎숨결 2023. 5. 19. 11:00

 

N수녀님께서 보내주신, 감사드립니다!

 

 

장미학적 존재증명, 부재의 현존, 결핍에서 풍요로!

-주님승천대축일, “나는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다”를 중심으로

 

 

1.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모든 것을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고/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말며//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어지기 위하여//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

 

 

독일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전혜린과 최승자다. 두 사람 이름 앞에 붙는 상찬의 부사는 ‘치열하게’다.

 

난 치열하게 사는 것이 싫다. 좀 목가적으로 살고 싶다. 너무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집 앞을 빙 돌아 가고 싶다. 치열함이란 단어자체가 열정이라는 의미보다는 과부하의 의미가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승자의 시집과 번역서들을 보면 이걸 과연 한 사람이 할 수 있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죽기살기로 번역을 하셨구나, 그 와중에  시를 쓰셨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시를 쓰면서 번역을 하셨다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승자라는 고유명사를 시인으로 기억하지 번역가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이제 시인 앞에 붙는 그 모든 평가를 뒤로 하고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를 좀 거리두기를 하고 읽어볼 수 있을 거 같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는 낭만적 사랑시가 아니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모든 것을 콘크리트 벽이다

 

이 정도의 사랑이라면,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를 사르트르가 읽었다면 사부라고 불렀음직한 실존주의 교본에 가깝다. 시인이 밀고나가는 사랑은 전쟁같은 사랑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천년전 좌도와 우도를 소환한다. 누군가에게 전경이었던 생명이 누군가에게 배경으로 끝나버린 사랑의 소환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

 

최승자 시인은 일과 사랑, 언어와 시, 두 길을 치열하게 살다 찬란하게 하늘나라로 간 한 시대의 화인이다. 언어 자체가 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의 번역서 중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같이 읽으면 원문보다 번역본이 더 가슴에 파장 내지는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격렬함 너머의 그 무엇을 시인은 본 것인가? 그때, 언어와 시를 일치시켰구나, 그렇다면 치열함 속에는 단지 치열함만 있는 것이 아니겠구나, 어떤 사랑, 그 어떤 사랑이 특정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삶이 시인에게는 사랑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는 연민을 바탕으로 한 생에 대한 예찬의 시로 읽힌다. 어떻게? 창에 찔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옆에 있던 우도와 좌도의 죽음처럼 팔다리를 꺾어, 올 수도 갈 수도 없게하여, 그 생사를 확인하였다면 바로 그것이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어느 날 이 시는 삶과 사랑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사랑이라고, 그러니, 부디 어느 하늘 아래서건 아프지 마시고 잘 살아내시라!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사랑의 존재증명이라고 말이다.

 

 

 

 

이 자유의 사진도 N 수녀님께서

 

 

 

2. 나의 의미는 나의 밖에 있다(메를로 퐁티, 『지각현상학』)

 

 

 

전 생애를 거쳐 J가 한문장으로 던질 명제나 화두를 진리의 상아탑 속에 생을 유폐시키며, 도서관의 한 귀퉁에 꽂혀 나도 한때는 사람이었다오를 속삭이는  책들이 있다. 최승자 시인의 사랑의 대상이 삶이라면, 이들의 사랑은 지식애다. 진리는 꼭 교회나 학문 영역에서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런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란 명제에 심장이 낚인 이들이 있다. 그들 역시 진리에 몸바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겠다. 

 

'부재의 현존’은 자유의 또 다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자유를 관념이고 초월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유는 철저하게 이 땅의 논리와 저 하늘의 숨결이 합쳐진 것으로 바라본 이들도 있다.

 

지난주 하이데거의 사유를 소개하면서 존재와 존재자는 근원적으로 서로에게 내맡겨진 존재, 함께 있음이라고 전한바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그 존재론을 받아들인, 그러나 전혀 다른 방향에서 존재의 자유를 논한 메를로 퐁티가 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사물로 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따라서 자유를 원한다면 나는 부단하게 자유롭지 않으면 안된다.(648)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행동들이 한번이라도 나의 것이기를 멈춘다면 그래서 세계에 대한 나의 파악을 잃는다면 나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자유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사람은 약간만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유를 추구하기는 하나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적다. 자유는 도처에 있으나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가 적어도 자신의 상징을 보게 되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결정에 작동하기 시작해서 자신이 선택하는 상황을 정립할 때만 자유로운 선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행동의 순환이 없다면 어떤 성취를 부르는 열린 상황들이자, 이 상황들을 확증하는 결심을 하게한 열린 상황들이 없다면, 동기화가 없다면 자유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이 열리 상황은 상황자체의 진전과 동일사건은 아닐 수도 있다. 진정한 선택은 우리의 성격 전체의 선택이고 우리가 세계에로 존재하는 방식의 선택이다.

 

우리 각자가 처해진 역사.사회.정치적 맥락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이 고유한 몸(살)로부터 자유를 논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해 본다.  메를로-퐁티는 자유가 관념이나 초월의 영역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치 역사적 맥락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각의 현상학』으로 대표되는 메를로 퐁티는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과 경험주의로 대표되는 영국의 실재론을 모두 배격하고, 게슈탈트 이론과 후설의 현상학을 받아들여, 그리고 후기에 하이데거를 받아들여, 대상(세상)과 인식(생각)을 매개하는 곳이자 지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몸(신체)을 강조하는 사상을 펼침으로써, 철학계에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메를로퐁티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받아들여 인간의 지각을 입체적으로 바라본다. 지각은 부분과 부분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그 자체에서 이미 보완되어 '구조(형태)'로써 지각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3개의 점'을 보게될 때 우리는 그것을 3개의 점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 그 자체에서 이미 보완하여 '삼각형'의 구조로 지각하게 된다는 것. 이는, 인식을 감각의 단순 총합으로 보는 '경험주의'으이 한계를 뜻하며, 또한 인식을 단지 의식의 논리적 재현으로 보는 '주지주의적 관념론' 역시 한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지각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의 개념을 이용해 '몸'을 분석함으로써 이 개념을 설명하였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현상학은 의식과 대상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항상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식을 하는 주체와 대상은 연결된 하나의 개념이며, 또한 연결된 하나의 '주체-대상'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하고 있는 특징을 가진다. 이를 '지향성'이라고 한다. 즉,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의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받아들여, '몸'을 설명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지각하는 주체이자, 지각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를 현상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드러나는 장소인 동시에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곳이 바로 '몸'인 셈. 따라서 '몸'은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엮이어 있는 곳'이다.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지시하며 스스로를 현상하고 있는 '몸'을 주목한 이유다.

 

 

그런데, 메를로퐁티는 후기로 갈수록 전기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각이 이분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데에 또 다른 문제의식을 느낀다.  따라서 후기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학' 대신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가져오게 된다.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다시 그 속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여기서 개별과 전체는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은 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지향적 개념이 사라진다. 후기 철학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퐁티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살(chair)의 개념'을 강조한다. 살은 몸보다 더 본질적인 나에게 근접한 것이다.

 

내가 전진할 가능성을 가지는 것은 제한도 유보도 없이 지금 나인 것으로써 이고, 내가 다른 시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시간을 체험함으로써 이며, 내가 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현재와 세계에 뛰어듦으로써, 뜻밖에 나인 것을 단호하게 맡음으로써,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내가 행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이다.(680)

 

나는 누구인가? 자유든 사랑이든 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살'은 감각하는 피부 표면과 그 표면 밑에 숨겨진 '살'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메를로퐁티가 철학용어로 쓰는 '살'은 지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인 육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지각 이면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존재 의미가 마치 지각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지각'보다 둔하고 애매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자유의 의미를 도출한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는 어떤 창조와도 무관한 존재인데, 의식과 몸과 살을 지닌 존재인 인간이 그 어떤 창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에서, 자유의 두께와 자유의 주름은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 모두를 포함한다고 바라보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자유의 장애물이라 부르는 것조차도 사실은 자유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유를 한계 지을 수 있는 것은 자유에 대해 자신이 자신의 발의권에 의해 한계로서 규정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650)

 

자유의 완성이란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는 동기화를 가졌다는 것이고, 그 자체가 자유의 열린 지평이라고 본 것이다.

 

 

 

 

 

 

3.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이 글은 전교주일 묵상,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주님승천대축일 복음 마태오 28,16-20을 읽어본다.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 와 함께 있겠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을 통해 주님승천의 의미와 그 축복의 메시지를 읽어본다.

 

마태오 28,16-20은 임마누엘로 예언되고(이사 7,14), 임마누엘로 탄생하시고(마태 1,23) 언제나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겠다(마태오 28,10)고 하신 말씀을 확증해 주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를 삶이라는 구체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을 위임받은 사람으로서의 어떤 길을 걸어어가야 할 듯하다. 

 

 

전교주일과 승천축일 복음으로 인용되는 마태오복음28, 16-20을 묵상할 때마다 항상 18절과 20절에 며칠씩 묶여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도 더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몸을 다해, 정신을 다해 알아 듣고자 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2023년 부활과 승천 축복을 묵상하면서, 결핍의  원리가 어떻게 풍요의 원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성의 터닝포인트가 무엇인가를 알아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에서 삶(십자가)은 고통의 아수라장이 아니라 풍요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축복은 나의 선택과 결정 여부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절)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 와 함께 있겠다.”(20절)

 

따라서, 18절과 20절은 어떤 생의 리듬에 관한 것으로 바라보아야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추상적인 그리고 고백적인 주님이 아닌 구체적인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 될 거 같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천상질서의 어떤 깨달음을 갖게 되었지만, 깨달음과 상관없이 동일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최승자 시인의 시처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오늘의 닭고기를 먹으며 시를 써야 한다. 영적 축복을 받았지만 생존의 현장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역사적 맥락 즉 실존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보는 바로크의 주름 같은, 유교의 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의 세계 같은, 기쁨과 슬픔같은 그 리듬을 감당하는 삶이 우리에게 변함없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사실은 나와 하느님관계, 나와 동료인간과의 관계가 만든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과 승천이라는 기쁨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이 땅에서 생명체로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땅의 질서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하늘의 권한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왜 땅의 권한까지 받았다고 하셨는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이 하늘과 땅이 준 권한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생존이고 실존이고 곧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은 그 급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없이 쓰러지면서 다시 일어나 걸어가는 것이 하늘과 땅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의 리듬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이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다는 것은, 결핍과 풍요의 원칙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처럼 분명 우리도 같은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울었지만 울음으로 끝나지 않는 기쁨을 견인하는 삶, 반복해서 그분의 승리를 체험하는 삶, 죽음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승리가 분명하다는 것. 그 축복의 길에서 만나는 장미와 가시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이유다. 

 

 

[1] 왜 승천의 장소가 갈릴레아인가? 그리고 올리브산인가?

 

마태오 28,16-20Ⓐ(16절, 17절)의 주님승천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제자군과 Ⓑ(18절-20절)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의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 와 함께 있겠다.” ,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모아진다.

 

그런데 왜 승천장소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장소인 예루살렘이 아닌가?

 

갈릴레아 호숫가는 마태오4, 12-17에서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신 곳이다. 그리고 4, 18-22절에는 안드레아, 베드로, 야고버, 요한을 부른 곳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부르신 원체험의 공간이다.

 

갈릴레아는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전도가 시작된 곳이다. 시작 속에 이미 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릴레아는 모든이에게 다시  쓴 창세기의 첫페이지, 첫사랑, 초심, 알파와 오메가다. 근원의식에서 우리와 그분은 같다는 것을 갈릴레아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산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신들의 집이 있다는 신성의 의미를 넘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천상적질서의 서막을 의미한다고 바라볼 때, 이 천상적 질서의 펼쳐짐은 땅의 질서의 정립을 비로서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 하늘의 질서를 알때, 십계명, 주의기도, 성호경 등에서 우리는 하늘의 질서가 먼저 서야 땅의 질서를 재배치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선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적이라면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천국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이스라엘의 해방을 부활과 승천의 궁극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협의의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질서는 곧 땅의 질서지만 그것은 이 세계가, 모든 민족이 완벽하게 하느님 나라로 재편되었을 때의 일일 것이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에게 땅의 질서의 재편, 재배치의 능력이 주어진 것임을 바라볼 수 있을때,  그것이 파견이고 전교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시대를 살지 않고는 예수그리도의 부재의 현존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비전이 아니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은총의 사건, 축복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일을 완성하게 돕는 협조자를 보내주겠다는 그분의 사랑, 성령의 필연성이야말로 주고 또 주시는 사랑의 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7)

 

부활도 마찬가지지만 승천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초자연적 사건이다. 부활을 믿지 못했다면 승천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마리아 수태고지도 믿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강생부활승천은 연속적인 믿음의 싸이클에 해당한다.

 

17절의 <경배하였다 <----> 의심하였다> 이 대립적 상태가 우리 안에서 해결되면 18-20절을 통해 예수님이 남기신 지상의 마지막 메시지인, 우리에게 맡긴 그 모든 권한과 사명을 자동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경배가 믿음이라면 의심은 죽음에 대한 경배라고 할 수 있다. 의심은 일종의 죽음에 대한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사건이 총체적이라면 죽음의 사건도 총체적이다. 생명과 죽음은 타협이 가능하지 않은 지점이다. 모든 것들은 다 죽어있거나 모든 것들은 다 살아 있어 결코 죽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만이 우리의 선택이고 결정이다. 죽음과 생명은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 하나의 생각에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 생각은 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죽기 전에 인간의 상태를 점하고 있는 죽음의 상태란 무엇인가? 죽음의 메카니즘은 어떤 귀납적 사고의 고착화에서,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죽음은 하나의 생각이고 하나의 결정이다. 죽음은 형태를 달리해서 나타나며, 귀납적 사고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실증적으로 봐라,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존재 증명을 한다.

 

의심은 대표적인 불신, 불성실, 변덕, 시기, 질투, 비일관성, 절망, 자기연민, 쾌락 등 이들이 건네는 죽음의 상태로 모두 육체에 초점 맞춘 것들이다. 모두 죽음의 형태가 그 종말이다. 이 의심이 분노와 두려움을 거쳐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이 죽음의 상태들은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의 화신이자, 죄의 노예이며, 죄책감의 유인이자, 환상과 기만의 주인이 된다.

 

이들은 모두 불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자기 육체에 그 상태를 증명한다. 하느님이 죽었다는 증거가 바로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신 부재증명의 삶을 살게 만든다. 우리는 눈앞에서 어떤 사건이, 결정이 확증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죽음의 상태는 희망의 상태나 믿음의 상태 사랑의 상태보다 훨씬 그 존재증명이 빠르다고 사람들이 믿는다. 왜인가? 육의 눈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부활과 승천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매카니즘에서 벗어날 것을, 벗어날 수 있음을 다른 식으로 증명한다. 임마누엘의 하느님, 그 불멸의 사랑으로 증명한다.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여기서 무엇을 믿고 있는지 믿음의 문제가 거론된다. 하느님의 일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잇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있는냐?(코린토전서16장 54-55/ 이사야25,8/호서13, 14)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이사야25, 8) Ⓕ죽음아, 네 흑사병은 어디 있느냐? 저승아, 네 괴질은 어디 있느냐?(호세13,14)

 

이 모든 죽음의 상태를 극복하라는 것이 바로 주님 부활과 승천이 주는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축복은 우리가 생존의 현장에서 선택과 결정의 문제이기에 그 결정을 가장 나답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제자들의 시대가 아닌 성령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선택을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 없다. 

 

(깨어있지 않으면 죽음의 메카니즘에 누구라도 휘말린다. 이런 죽음의 상태에 나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하루 중 모든 결정과 선택의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수없이 바친다. 짧고,강력하고, 체험되는 화살기도다. 성령이시여! 이 거룩한 순간을 당신께 드리오니 함께 하소서! 당신이 함께하시면 저를 평화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를 다시 한번 더 기억해 보자.

 

[3] Ⓑ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 와 함께 있겠다.”(20)

 

20절의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은 우리와 그분과 근원의식이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태초의 그 사랑이라는 의미다. 하느님 나라의 모든 권한이 우리에게 위임되었다는 의미다. 이를 복음사가는 이미 11장에서 다르게 표현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11, 28-30)

 

반복적으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18절의 내용은 예수님께 국한된 축복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진, 오늘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 주어진 모든 축복은 인류와 공유된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근원이 하느님과 하나다, 라는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리가 이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삶을 꾸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엄중함에 묶여있기 때문이고 죽음에 대한 우상숭배가 그분의 사랑을 부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절과 20절의 축복을 오롯이 받기 위해선 우리에게 오직 믿음만이 요구된다. 복음 사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마테오17, 20-21)

 

여기서 믿음은 곧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불멸의 사랑에 대한 결정이고 선택이기 때문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파견이 믿음이라면, 파견이 사랑이라면, 파견은 곧 삶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18절과 20절은 어떤 생의 리듬에 관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추상적인 그리고 고백적인 하느님이 아닌 모든 상황에서 함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강생부활승천의 축복으로 천상질서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갖게 되었지만, 깨달음 이전의 동일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영적 축복을 받았지만 생존의 현장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역사적 맥락 즉 실존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보는 바로크의 주름 같은, 음양을 감당하는 삶, 리듬을 타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사실은 나와 하느님관계, 나와 동료인간과의 관계가 만든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N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성모님과 빛의 향연, 사진 참 잘 찍으신다.

 

 

장미는 가시와 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장미는 그 종류를 알 수 없을만큼 수많은 장미종이 있다. 그 향기도 장미마다 다르다. 그렇게 풍요로운 장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지닌다. 성모마리아를 매괴의 모후라고 하는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마리아의 <칠고칠락>에서 장미와 마리아의 영성을 연결시킬 수 있다. 성모님조차도 '칠락' 앞에 '칠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모님의 영성이 지닌 '풍요로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눈물과 기쁨은 이 땅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어떤 풍요로운 생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칠고칠락을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눈물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의 리듬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활과 승천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승천축일은 우리가 하늘과 땅의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라는 사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오늘, 이미 주어진 구체적인 삶에서 그분과 모든 순간을 함께하려고 선택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무엇으로? 위로와, 기쁨, 감사와, 평화, 그리고 사랑으로...그 기쁨은 근육의 미소가 아니다. 기쁨은 어떤 선택과 결정, 의지에 더 가깝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실존의 현장에서 십자가(애주애인)를 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바오로 사도의 강력한 권유는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생존의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대로, 부활과 승천의 축복은  결핍의  원리가 어떻게 풍요의 원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영성의 터닝포인트라 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에서 삶(십자가)은 풍요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천상의 질서와 이 땅의 질서를 동시에 <사랑>으로 끌어안고 살아내는 일이 주님승천축일이 우리에게 전례주기를 통해 거듭거듭 확증해 주는 축복과 감사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부활과 승천의 축복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받은 하늘과 땅의 권한이 무엇인지,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분이 누구인지 알게 한다는 것이다. 

 

풍요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권한을 위임받은 하느님 백성으로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풍요의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 와 함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