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1),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

나뭇잎숨결 2023. 6. 23. 06:56

N수녀님께서 보내주신 냥이의 망중한, 포만감의 극대화, 감사합니다.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

-연중12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1.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2.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쇼펜하우어)
3. 기도와 용서의 궁극, '충족'을 넘어 '충만'으로
 

 

 

 

 

 

1.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마리 누우떼가/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다//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들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로 모아진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얼얼하고 먹먹하게 만드는 시다.

 

생명 자체가 오직 생명으로 양육되는 것이 모든 먹이사슬의 상생원리라는 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상생의 원리는 참으로 고귀하고도 한편 비정한 소멸의 논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우리의 식탁 문화가 그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는 다른 맥락으로 설명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종을 지키기 위해 불멸의 나선형 구조인 DNA가 있기 때문이라고. 누우떼의 이타적인 행동 속에는 이기적인 유전자인 DNA의 불멸에 대한 선택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인간의 불멸에 대한 갈망을 DNA 유전정보로 설명할 수 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 역시 용의주도하게 이 먹이사슬에서 피해간듯 하지만 사실은 인간 역시 한순간에 먹혔는지 서서히 먹히고 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군가를 위해서’ 낡아가고 소진되면서 생노병사를 겪어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인간은 여타의 생명체처럼 생물학적인 생명이기는 하지만 범신론적인 관점의 생명이 아니기에, 자연과학으로 규명하는 원소의 집합만으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DNA의 유전정보만을 지닌 생물은 더더욱 아니기에, 인간이 겪는 소멸과 생성이라는 생의 주기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이가 보내준 오대산 선재길~ 탱큐!

 

 

 

 

2.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소멸과 생성이라는 생의 주기를 <의지와 표상>으로 바라보고 이를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로 바라본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결국 충족이유율 뛰어넘지(통합하지)못하기에 고통 혹은 무(없음)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그의 철학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왜 인간은 생의 조건인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지 못하고, 즉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충만>에 이를 수 없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하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충족, 또는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망, 즉 부족이란 모든 향유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목표도 휴식도 없는 계속된 소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식의 다양성이 없어지며, 의지와 더불어 그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 현상의 일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본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이 인간이 형이상학으로 넘어 가지 못하는 이유는 ‘충족이유율’은 인식이나 사고, 사물 등에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판단이나 현상에 대해 “왜”라고 물을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인식이유’와 ‘원인’이 혼동되어 왔으며, 데카르트는 ‘원인’을 제시해야 할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닦았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별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을 생성, 인식, 존재, 행위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생성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인과적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고, 인식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개념적으로, 존재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공간적이며 시간적으로, 행위의 이유율은 표상들을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은 이처럼 전혀 다른 네 가지 관계들에 대한 공통의 표현인데, 전혀 다른 관계의 이 법칙들은 그것들이 충족이유율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처럼, 동일한 뿌리, 즉 우리의 인식능력 전체가 갖는 어떤 동일한 근원적 성질로부터 유래한다. 다시 말해 충족이유율은 우리의 지성에 뿌리를 둔다. 이런 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이 적용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강단철학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며, 그것은 곧 칸트철학의 성취를 왜곡하고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표상된 세계로서만 알 뿐, 세계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개별화의 원리다. 인간은 무지로부터 고통 받는다. 특히 생성과 존재율이 개별화의 원리가 되어, 인간의 삶에 고통으로 작용한다. 세계(의지의 세계)는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즉, 이유나 원인 같은 게 없다. 인간은 살아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이러한 삶에의 맹목적 애착은, 의지의 맹목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타난다. 본래 세계는 하나지만, 너와 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파악하게 되는 서로 다른 세계라는 것. 이것이 바로 개별화의 원리다. 각자는 고립되고 외로운 낯선 존재가 되어, 본질적으로 하나인 의지의 세계를 모르는 채, 개체적 존재로서의 자기 입장과 자기 욕심을 관철시키려는 개별화의 원리가 결핍의 원리라고 보았다. 이렇게 '무지'로부터 인간의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생이 주기를 고통으로 본 이유일 것이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는데 인간의 의지는 신이 제시한 그런 충만의 영원으로는 넘어가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영원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마리안나 선배가 보내준 이스라엘에서 만난 엘리야와 십자가~ 감사

 

 

 

3.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오 18,19ㄴ-2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18,19ㄴ-22은 <성령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기도>(18~19)와 <용서>(19~22)라는 키워드를 통해 차고 넘치도록 <충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기도와 용서는 인간이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은총의 도구이며, 그때 절대자와의 합일을 통해 소멸과 생성은 다른 차원의 의미로 넘어간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충만’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축복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이 <차고 넘침>을 의미한다. "충분하다", "충족하다", "충실하다"(루카 2:40) "만족하다‘ (시편 90:14) "가득하다" (마테오 23:25~27), "넘치다"(잠언 3:10, 시편 23:5)."풍부하다" (창세기 13:2) "전부", "전체"(루카 13:21, 21:4). "성취하다", "완성하다"( 2코린토 8:6~8, 갈라디아 6:2). "큰 무리"(로마11:25) "채우다"(루카 5:7, 요한 2:7)."목표에 도달하다", "경지에 이르다", "극점에 달하다"(갈라디아 4:4~5, 사도행전 40:1~2)."왕성한"(시편 72:16/창26:12) "흥하고 왕성하다"(시 72:7). "풍성한"(에페소1.7)

 

 

[1]기도가 어떻게 우리를 <충만>에 이르게 하는가?

 

누구나 기도한다. 기도는 종교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런 말, 하늘이 무심치 않지, 혹은 그렇게 살면 천벌을 받지, 하늘은 뭐하고 계신지 모르겠어, 내가 그 사람 복받을 줄 알았어, 날 따뜻한 날, 그분 귀천했어, 혹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이런 말들 속에는 선이 승리할 거라는, 아니 선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기도의 초기 형태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이들도 선에 대한 갈망이 본능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면 굳이 종교를 통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종교인들의 갈망은 시간안에서의 충족을 원한 것이지 영원이라는 초 시간 안에서 충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이 원하는 선이나 충족은 현실주의에 바탕한 것으로 오복 혹은 윤리적인 덕에 국한시킨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고 유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국 쇼펜하우어가 누군지도 모른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무(없음)와 고통으로 생의 기회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의 기도는 어떻게 충만에 이르고,  충만에 이른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모아 함께>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18장 18-20절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단독 문형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영원한 것, 선한 것만을 들어주신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무엇이든>은 인간에게는 결핍이 있을 수 없다는 충만의 법칙이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축복은 물론 현실적인 풍요 역시  그분이 허락한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충만의 법칙>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려면, 그 마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어야 하므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없음)와 고통은 <모든 것>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소유하다와 존재한다>는 것은 에고의 언어로는 다르지만, 영혼의 언어로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요한11, 41-42)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15.7)

 

Ⓔ너희가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오7, 7-11)

 

Ⓒ, Ⓓ, Ⓔ는 기도의 대표적인 유형에 해당한다. 기도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절대적인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주시겠느냐?에서 알 수 있듯,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나, 라자로의 소생사화에서 보듯 기적에는 어떤 난이도를 둘 수 없다는 것,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의 궁극은 충만과 풍요의 법칙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향해 올라가는 아들의 마음, 믿음이 기도의 제1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데서,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것이 마음을 모으는 것임을. 이 때 마음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에서 알 수 있듯,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불변, 불멸하는 그 마음일 것이다. 세태에 따라 변하는 변화무쌍한 마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마음은 무엇인가? 예수성심에서 보듯, 애주애인에서 보듯, 하늘을 향하고 땅을 향한 하나oneness에 대한 절대적인 투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니고 사랑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기도의 제2 원칙이고,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충만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음들은 진리 안에서만 결합한다.(185) 같은 의도를 품은 두 마음은 매우 강해서 그 뜻은 하느님의 뜻이 된다. 이는 오직 예수님처럼 한 음성만 들는 그 마음이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듣겠다는 마음이다. 기도는 한 음성만 듣는 방법을 예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친다. 기도는 이 세계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즉 나 자신의 욕망을 뛰어넘는 자유의지의 만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넘어서야 이 세상의 풍요를 알 수 있고 그 풍요를 축복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충만에 이르는 길로 기도의 제3원칙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은 한 공간에 모인 사람의 숫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마음은 오직 한 음성만 듣는 그 마음을 의미하기에 그렇다. 소화데레사 성녀가 수도원의 작은 기도방에서 올린 기도는 수도원 밖의 수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그것은 누군가와 특정 공간을 공유한 마음이 아니다. 땅을 박차고 나간 우주의 홀로그램, 혼자이지만 함께한 그 마음이다. 한 목소리만 들을 때,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가 된 마음의 합일을 의미한다. 그런 마음이 모인 곳에서 청한 <무엇이든>은 인간의 결핍을 채우는 근본적인 충만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제4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엇이든>은 이원대립적인 세계를 넘어선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기도의 완성은 하늘과 땅이 같아진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마음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뜻을 이루어주시는 것은, 분명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 후 예수님의 일성, 평화의 상태일 거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평화 인사는 <모든 것이> 가리키는 어떤 상태, 충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우리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는지 확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기도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만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도는 언제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과정을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기도의 제5원칙이다. 하늘과 땅이 연결된 기도는 예수님의 일생을 고스란히 축약해 살아낸다. 그래서 진정 그분의 현존 앞에서 경외심을 체험하게 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이와 나누지 않는다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도의 완성은 감사로 표출되고, 전적인 감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금 충족의 상태인지 충만의 상태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5, 28)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9, 22)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1, 14)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 31)

 

 

Ⓔ, Ⓕ, Ⓖ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속에 이미 충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예수님의 일생을 산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기도는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충족을 권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충만을 약속하신다. 우리 마음이 언제나 비워 있었던 적은 없다. 충족은 만족을 모르는 결핍의 원리로 대상을 끊임없이 바꾸어 우리 앞에 대령한다. 우리가 무엇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으려 하는가의 여부가 바로 충족과 충만으로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충족은 만족을 모른다. 충족은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만은 오직 사랑으로 채우기를 권하기에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온다. 진실한 기도는 예수님의 일생을 함께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기도는 인내를 먹고 예수님을 입고, 살아낸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는 기도의 바이블이다. 기도는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기에,  기도는 지극하고, 거룩한 성심을 사는 것이기에 기도는 불가피하게 인내를 수반한다. 

 

어떤 책에서 인용한 글을 순서를 바꿔 재인용 해 본다.

 

“하느님을 견디는 것은 믿음이고, 나를 견디는 것은 희망이고, 다른 사람을 견디는 것은 사랑이다”

 

이 시간 안에서의 충족이 아니라 영원에서의 충만은 언제나 기도 속에는 예수님의 일생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소멸과 생성의 생의 주기를 그분과 함께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삽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은 그분이 하늘을 향해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충만을 알아보기 전까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줄 알기까지, 그분의 이름을 알아도, 말해도 굶주리고 목마름에 시달린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기도는 바로 충만에 이루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데, 그 안내자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모든 기도를 하나로 완성해 하늘에 올린다. 성가 510번처럼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같이 하시옵소서!" 처럼 내가 드린 기도가 그 자체로 지극히 거룩한 봉헌이 된다.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그분에게로 이끌어 줄 때, 우리는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통해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도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받아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모든 기도는 십자가와 부활 그 어느 하나도 생략하지 않는다. 

 

 

 

 [2]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우리를 충만으로 이끄는 것일까?

 

 

21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용서의 완성을 해야, 용서 너머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용서는 천국에서의 형태없는 사랑이 땅에서 취하는 형태”(186)라고 말할 수 있다. 더이상 용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용서했을 때, 우리는 희미하게 혹은 어렴프시 보이던 그분의 얼굴(음성)을 분명히 볼 수(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희마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분명히 알게 된다고 전한 바오로 사도의 고린토전서 13장의 '그 때'가 바로 용서를 넘어서 용서를 완성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서는 누가,누구를,무엇을, 어떻게, 용서하는 것인가?

 

용서는 용서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상을 적시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용서할 것이 더 이상 없을 만큼 용서한다는 것, 용서의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대상이 있는 용서보다 대상이 없는 용서, 대상을 모르는 용서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용서의 완성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이 바로 타자의 용서에 있지 않고 나의 용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표출된 행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괴로움과 절망의 이름, 하이에나처럼 배고픈 이유를 바라보는 것은 용서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자를 용서했을지라도 용서의 완성, 그 마지막 관문이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두 주인을 섬기느라( 한 목소리를 듣지 않으므로), 엉뚱한 곳에서 배고픔을 채우려하는 만성배고픔의 원인을 바라보는 것, 이것은 아직 용서받아야 할 자비가 남아 있다는 씨그널에 해당한다.

 

예컨대, 이런 말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어. 밖에도 잘 안 나가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야 죄를 짓지. 언뜻 죄없는 사람처럼 들린다. 그렇지, 사람을 안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안 만날 수는 없다. 우리가 성호를 긋는 순서를 생각하면 그것은 바로 성찰의 순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동적인 악행과 적극적인 선행을 간과하면 자칭 의인이 된다. 또 이런 말,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사는 게 영 재미없어. 그냥 죽지못해 살지 뭐. 사는 것이 재미없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용서받을 죄라면 수긍할 수 있을까? 적극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박탈한 것이 용서받아야 할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누구를,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 용서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성령께 용서하는 법을 구할 때,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지, 성령은 즉각적으로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기에 성령과 함께 하는 것이 용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 11주에 살펴본 것처럼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저변에는 용서할 것이 잠재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적시할 수 있는 고통, 즉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횡적인 용서라 한다면, 종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로,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하는 용서의 시작이 되는 부분이다. 종적인 용서든 횡적인 용서든 성령의 도움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놓인다. 우리가 용서하고자 할 때, 그것을 돕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용서의 시작은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고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이 용서의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용서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용서받았는지를 안다면, 사실 타자를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를 바라보게 된다. 나의 용서에서-->타자의 용서로 넘어가야 용서의 완성은 감사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 34)

 

십자가상의 용서의 기도는 용서의 바이블이다. 용서의 기도에는 타자의 근본적인 무지의 원인을 이해일 뿐 판단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 용서에서 이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은 글에서 용서는 간과, 오버룩이라 한 이유다)예수님의 용서는 자신을 죽이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1도 없다. 단죄가 1도 없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의 연장선이다. 용서받아야 할 모든 것은 그들이 진정 <몰라서> 한 일일 뿐이다. 정말 제대로 정확하게 그분이 알려주신 대로 알았다면 존재와행위와소유가 하나로 일치한다. 존재와행위와소유가 하나가 된 곳에 절대 용서할 것이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게는 존재와행위와소유가 하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부활은 참 앎으로 넘어간 상태이기에 용서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용서의 상황인 죽음 너머의 부활, 너와 나의 무한한 사랑의 지평, 그 영원의 상태를 결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

 

용서는 내가 용서하고 싶어도 무엇을 용서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과연 그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기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청할 수밖에 없다. 용서할 것이 있다는 것은 분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의 분리는 어렴프시 무엇이 원인인지 추정이라도 해 볼 수 있겠지만, 자신이 두 음성을 듣는 배고픔의 만성기아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흔히 용서의 범주에 넣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타자와의 관계- 윤리도덕보다 더 큰 용서의 주제는 하느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 충만의 원리로부터 벗어난 분리의 근본 원인을 바라보는 것임을 성찰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면 용서받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보면 된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 역시 깨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속성교환의 원칙에 해당한다. 내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는 이웃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분리도 없다면 다른 사람과도 분리가 없어야 마땅하다. 용서가 우리 이제 사이좋게 놀자, 손잡고 밥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마르코2, 1-12)

 

대상을 적시할 수 없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어떤 상황을 보고 그 상황을 재단함으로 인해 자신을 더 큰 절망과 고통의 나락으로 던져, 세상이 나에게 준 상처가 1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에 감정의 밥을 먹여 1000으로 키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 상처주는 것 못지 않게 상처받는 것 역시 용서의 대주제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이 나에게 가한 고통과 상처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가한 자책과 절망은 용서의 대상인 나의 혼돈, 그분과의 분리이자 모든 분리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자기가해의 상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나의 작용 범위를 벗어나 떠나가 버렸을 때, 이제 내가 나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했을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을 되어가는 대로 놔주는 것, 나를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 나의 빈손을 열어 하느님을 붙잡는 것뿐이다.(안셀름 그륀, 앙드레 루푸, 「약함의 자기수련」)

 

반복하지만, 용서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가장 어려운 용서는 <나>, 자기용서이다. 자기용서가 어려운 것은 자책과 죄책감을 내려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계획한 내 인생의 스케쥴이 맘에 들지 않을 때, 완벽주의자로 불리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시간에 대한 용서가 어렵기 때문이다.(완벽주의자는 기도와 용서로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완벽은 허상이다. 완성이 자비이듯, 완벽에 대한 욕망은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만날 수 없게 만드는 에고가 만든 허상이자 환상이다. 바오로의 '가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다음주 십자가 묵상에서 보충)마치 하느님이 나를 꺽어버린 듯한 어떤 시간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 나의 텅빈 손을 그럴 수도 있다고 수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 '무능의 전능'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하나의 보상이 결코 아니고, 나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응답'이다.”라는 이 무능의 사랑을 인정할 때 우리는 나 자신조차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움으로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용서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서를 완성한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삶을 행복하게 기쁘게 충만하게 살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아직도 표출되지 않는 내 무의식에 남아 있는 절망과 분노가 희미하게나마 감지된다면 우리는 용서의 완성 앞에서 <나>에게 막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용서의 완성은 나를 초월한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마태오5, 45)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카6,36)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에서,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하느님과 같아진다.(맥락을 잘 이해하시길) 하느님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용서할 대상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 해방감과 자유를 알 수 있다. 또 용서의 궁극이 감사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용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완성은 우리가 미처 온전히 통회하기 전에 우리에게 자비가 내렸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용서하고 싶다는 갈망, 용서 받고 싶다는 갈망이 용서의 완성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이 완성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기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나를 넘어선 그 곳에 탕자의 비유처럼 신과 옷과 반지를 주시려고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것을 돕는 분이 성령이시다.

 

기도와 용서는 절대로 우리 혼자 완성할 수 없는 어떤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경지? 그렇다. 기도와 용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삶을 아주 조금 살아보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나를 뛰어넘어보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네 겹 혹은 수만겹의 세상이 던지는 충족을 넘어 영원한 충만을 맛보는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결국 하나Oneness라는 일치에서 비롯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기에 그렇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표지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