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연중14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를 중심으로
1. 이육사, 「청포도」 2.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장폴 사르트르) 3.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1. 이육사,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 을 함쁙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1904-1944)의 「청포도」에서 ‘청포도’는 단순히 과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자가 이루고 싶어하는 어떤 세계를 뜻하기도 하고, 시인이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면, 공동체의 힘이 모아지는 원형적인 역사의식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화자가 그리는 그런 세계가 온다면 필연적으로 그 세계는 누군가의 피땀과 고단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기에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쁙 적셔도 좋으련
하여, 화자 역시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은, 그런 치열한 시간을 살아낼 것이라는 핍진함이 흐른다. 오는 사람이 고단하다면, 그를 맞이하는 사람도 고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육사 「청포도」의 시적 품위는 마지막 행에서 절정을 이룬다. 화자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이루는 고단함과 핍진함을... 거대 서사 속에서 아이야! 라고 부른다. 그리고 식탁, 은쟁반, 하이얀 모시수건...이라는 정갈한 사물에 화자의 소망을 담는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렴해 두렴.
아이, 식탁, 은쟁반, 하이얀 모시수건, 이 투명한 시어들은, 옥고를 17번이나 치른 시인의 시혼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이육사와 비슷한 시기를 통과한 사르트르는 모든 역사의 흐름 그 주인은 인간이므로 인간만이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장폴 사르트르(1905-1980)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45년 10월 29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라는 책의 근간이 된 강연을 했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란 참관자가 아니라 "참여적이 되어라, 인류를 함께 끌어들여라, 너 자신의 힘만으로 늘 새로이 스스로를 창조하라." 는 것이었다.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휴머니즘 뿐이고, 그 휴머니즘은 오직 주체의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 문명에 확고히 장착되어 있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휴머니즘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가치는 우리가 그때그때 결단의 상황에서 매번 새롭게 고안하고 실현시킬 때만 휴머니즘은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이런 자유와 그에 결부된 책임 앞에 우리를 세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현실도피나 비관주의, 정적주의, 에고이즘, 혹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참여의 철학이 된다.
"실존주의가 인간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행동에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에게 삶을 허용하는 유일한 것은 행위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이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한마디 변명도 듣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을 선고받았다고 내가 말할 때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이끼나 부패물이나 꽃양배추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가는 하나의 지향적 존재다. 이 지향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하나의 뚜렷한 그 무엇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되고자 지향한 그것이다. 되고자 원하는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적 결정이어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정당에 가입하기를 바랄 수 있고, 책을 한 권 쓰고 결혼하기를 바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이른바 의지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자연적인 선택의 표시에 불과하다.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서 선택한다고 말할 때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의 행위 중에 우리가 ‘이고자’ 하는 사람을 창조함과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개념을 창조하지 않는 행위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될까 저것이 될까를 선택하는 것,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공격에 앞선 준비 사격은 포격을 받는 병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그가 포격에 대항하여 취해야 하는 행동을 예상하려고 할 때이며, 그가 이 포격에 ‘버티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때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부대를 찾아가는 징집된 군인은 어떤 경우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조약돌 위에서 미끄러져 절벽 아래의 심연 속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오솔길의 무른 흙이 발밑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예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의 사물로서 주어진다. 나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수동적이다. 나 또한 만유인력에 끌리고 있는 이 세계의 하나의 사물인 한, 그 가능성들은 밖에서 나에게 온다. 이것은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이 순간에 ‘두려움’이 나타난다. 두려움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 관해 파악된다. 실존의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이 분리적 효력에 관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적 동태에 속하는 비슷비슷한 관념, 즉 ‘모든 “지금”은 곧 “지난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또 시간은 분리하는 자로서, 인간을 그의 괴로움에서 또는 괴로움의 대상에서 분리함으로써 치유해 준다.
세계는 인간적이다. 우리는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안다. 존재는 나를 거역하며 내 주위 곳곳에 있다. 존재는 내 위로 무겁게 덮쳐 온다. 존재는 나를 에워싼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에서 존재로 지향된다. 거기 있는 이 탁자는 존재이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바위, 이 나무, 이 경치는 존재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존재를 파악하기를 원하면서도 이제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인간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그 의자 위에’ 존재하는 일이고, ‘거기 그 탁자 앞에’ 존재하는 일이며, ‘거기에, 이 산꼭대기에, 이러이러한 크기로, 이러이러한 방향 따위로’ 존재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필연성이다.
그 밖에도 타인들과 나의 직업적이고 기술적인 관계들이, 나를 또한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서 알려 준다. 카페 종업원에게는 나는 손님이고, 개찰원에게는 나는 지하철 이용자이다. 끝으로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테라스 앞 거리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사건 또한, 나를 이름 없는 목격자로서, 또 ‘이 사건을 하나의 외부로서 “존재하게 하는” 시선’으로서 지시한다. 내가 구경하고 있는 연극, 또는 내가 참관하고 있는 미술전람회가 지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관객이다. 또 분명히 내가 구두를 신어 볼 때, 내가 병마개를 딸 때,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내가 극장에서 웃을 때, 나는 나를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 만든다.
그들의 불행은 그들에게 ‘습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불행은 “존재한다.” 불행은 노동자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불행은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불행은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불행은 노동자들에 의해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에 주의를 집중하지도 않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워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일인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한하기는 하지만,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된다. 죽음은 종결화음이 멜로디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가 된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해당 계열의 하나의 항(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계열의 각각의 항은 그 계열의 모든 항에 대해 언제나 앞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죽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인생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오직 나만이 나의 삶과 죽음에 책임이 있다.
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오11,25-30
연중 14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전하는 마태오11,25-30을 통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그분께 배운다면 삶이라는, 생존이라는 그 멍에가 쉽고 편하리라고 하신다.
마태오11,25-30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온유와 겸손>이 주는 축복의 메시지를 생각해 본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 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5절에 26절에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는 것이 아버지의 선한 뜻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당시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던 유다인,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라고 한다면 철부지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라고 바라본다.
여기서 <온유와 겸손>의 첫 번째 특징을 바라볼 수 있을 거 같다.
이는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고 부르신 것에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오5 3-12)는 것에서 온유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축복임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뵙고 하늘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에서 겸손은 하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축복임일 알 수 있다.
그래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는 이 온유와 겸손이 자리할 마음의 여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철부지들에게라고 비유된 말은 철딱서니 없는 혹은 천방지축의 의미가 아닌 진리에 대한 갈망, 마음의 여백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기에 그런 갈망만이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 정말 알고 싶다는 갈망이 <온유와 겸손>의 첫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7절에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이 곧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은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므로 당신의 신적 정체성과 제자들의 신자 정체성을 같음을 연결하신다. 세속에서의 정체성은 자신의 자아를 굳건히 한 정체성이라면 27절에서 말하는 정체성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 이들의 믿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체성이 바로 십자가의 구체적인 실현인 <온유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온유와 겸손>이 실존의 짐을 편하고 가볍게 질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유와 겸손은 사람이 타고난 선천적인 성격 혹은 사람의 기질지성이 아닌 신자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예수님께로 정향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께 그 무엇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숫자적으로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보다 적었다고 전해진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기적의 표징, 그 본질적 의미를 읽지는 못했음을 성서 전반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례자요한, 엘리야, 예레미아, 혹은 구약의 예언자 정도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16, 15-16/마르코8,27-30/루카9,18-21)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유와 겸손>은 그분이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실존교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마태오16, 13-20)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너는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었으므로, 너는 반석이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교회의 청사진이 그려진다. 베드로로 상징되는 교회는 하늘과 땅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로드맵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 <온유와 겸손>의 세번째 특징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은 역사라는 시간 안에서의 예수님의 위치가 아니라 시간을 포괄한 영원에서의 정체성임을 알 수 있다. 영원에서 그분의 신적정체성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 그 어떤 상황논리 앞에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신자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온유와 겸손으로 집약된 그분의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는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렇다면, 마태오11,25-30은 28, 29, 30 절에서 <온유와 겸손>이 어떻게 무거운 실존의 상황이 <안식>으로 연결되는지 바라보아야 할 거 같다.
누구의 삶이든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생이 두 번 주어진다면 글쎄, 한번 심사숙고해 볼 만큼 그렇게 삶은 녹녹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멍에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무엇엔가 묶여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실존주의 명제가 도출되겠는가?
그런데 그분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 온유와 겸손을 배운다면 실존의 멍에가 편하고 가볍다고 것! 그분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은 그분을 따르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오 8, 20)
온유와 겸손을 8장 20절과 연결하건데, 그분이 말씀하시는 안식은 현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안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서 삶의 고단함을 다른 차원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안식을 의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인식의 전환은, 삶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은 현상 때문에 무거운가? 바라보는 방식 때문에 무거운가?를 정립했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내가 지는 삶이라는 십자가는 그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 삶을 다른 차원으로 재배치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지고가는 십자가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16, 24)
여기서,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뚜렷해진다. 자신을 버리는 것, 몰아의 사랑이 다름 아닌 온유와 겸손의 네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인가? 혹은 겸손한 사람은 반드시 온유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먼저, 온유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본다. 온유함은 성격적인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의 길을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자기제어 능력을 말한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정의의 실현에 있지 않고 사랑의 기다림에 있었음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자비와 연민이 바탕이 된 온유함에 있었다. 특히 십자가상에서의 용서의 기도는 온유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온유(praus)란 성격적인 양순함 유순함이 아니라 달리던 야생마가 길들여진 상태, 말에 재갈이 물린 상태, 거센 돌풍이 잔잔해졌을 때, 자신의 힘을 하느님의 뜻에 맞춰 조절하는 능력으로, 성령의 은사를 일컫는다, 온유에는 강약을 조절하다, 구부리다. 절제하다. 기다리다. 인내하다. 용서하다, 분노하지 아니하다. 걱정하지 아니하다. 슬퍼하지 아니하다. 상처받지 아니하다, 풍요롭다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키엘36, 26)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 Ⓕ를 보면, 온유함이란 살로된 마음,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성적인 영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얼마든지 정의와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타자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세상의 힘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와 하느님 시간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에서 가능하다.
그러기에 온유함은 용서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몇 주 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어떤 고통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 괴로움 혹은 슬픔, 절망, 분노 등 어둠의 이름으로 감지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지 못한 그 무엇이 내재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괴로움과 생의 무거움이 용서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이 알려준 신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영원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 고통, 절망 이런 상태들은 시간 안에서의 삶이 절대적일 때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상처들이다. 온유는 상처도 주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온유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고 곧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받아들였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온유가 진정으로 내적인 강함이라는 것은 그의 내적 풍요로움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에 가능하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런 내적 풍요로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 31-32)
자신의 내적 풍요로움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한 예수님의 길, 강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끝까지 이겨낸 후의 부드러움으로 이는 분명,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선천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재하는 듯한 생존의 현장에서 성령의 길을 따라간 내적 훈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적 충만은 하느님나라가 이미 욌다는 것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 구약의 예언자들(연약함에서 강함으로 강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예수의 전생애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온유는 겸손과 자주 동의어로 쓰이거나 병행하여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온유와 겸손은 다른 측면의 덕을 의미하는 듯 하지만 실은 온유는 진정한 겸손에서 파생된 덕임을 알 수 있다. 또 겸손의 실천은 온유를 통해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온유와 겸손은 분리될 수 없는 동행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데 지금까지의 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문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성찰의 결론은 언제나 온유와 겸손을 잃었음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유교의 예의범절에서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아듣고 그것을 네! 라고 받아들인 사람의 통찰과 성령의 은사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근원을 아는 자, 하느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정체성이 바로 겸손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겸손(anawah)은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아니라, 우리의 근원 앞에서 자신을 알기 때문에. 낮아지다, 흙이 되다. 굽히다, 굴복하다. 절을 하다, 엎디리다. 섬기다, 등등...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맡기는 의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혜의 교훈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15,33)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 38)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4, 34-35)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2, 7-8)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드로전서5, 6)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4, 2-3)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야고보서4,6)
Ⓟ먼저 겸손해지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높이지 마십시오. 많은 이들이 앉기도 전에 일어나기를 원하고,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도 전에 의롭게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거룩한 동경」)
Ⓗ~Ⓟ에서 보듯, 겸손이라는 빛은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의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그 전적인 의탁은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이 겸손은 또 다른 마리아가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은 아버지를 체험할 수 있는 현존체험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
우리가 그분 대전에서 겸손한지 아닌지는 그분의 뜻을 온유함으로 드러냈는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십자가가 만들어진다. 구약의 모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겸손과 온유의 관계가 어떻게 십자가를 만드는지 좀더 이해에 다가갈 듯하다.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했다.(민수기12, 2-3)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기20,12-13)
Ⓣ이렇게 네 눈으로 ,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신명기34,4)
모세는 구약의 예언자 중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맞춰 걸었던 겸손한 분이었다. 그런데 므리바에서 그의 형 아론과 지팡이로 바위를 친 사건으로(하느님 권능의 말씀이 아닌)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오경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모세와 아론은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온유함으로 그 뜻을 그분 백성들에게 행사하지 않았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했지만 사람앞에서 온유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들은 그분 백성들에게 그들처럼 하느님의 뜻을 자명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분노했다. 온유함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가 스스로의 능력을 드러낸 것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린 결정적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라는 진복팔단의 축복은 모세와 아론의 경우에서 반추해야할 복음이다. 그럼에도 신명기 전체를 보면 모세 자신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모든 힘과 축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시종일관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결같이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의 경우를 보더라도, 또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겸손과 온유의 십자가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각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쉽게 각성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되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면서 건설할 수는 없다. 빨리 하느님나라를 보고 싶어하는 조급증도 온유함을 잃게하는데 한 몫 작용한다. 그래야된다는 당위가 앞설 때 우리는 온유를 잃는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의 시간표가 같지 않음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나라는 겸손과 온유라는 십자가로 지은 집이다. 소명을 받은 이들이 가장 어려운 난코스가 온유가 아닌가 싶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네! 라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광야라는 수련기를 거쳐, 진리의 봉투까지 온유함으로 만들게 되기까지 얼마나 자기정화의 내적 수련을 거쳐야 하는지를... 겸손이 들음이라면, 온유는 행함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듣는 것이라면, 온유는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글에서 인용한 글을 재인용하여 다시 또 올린다.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심장에 새겨야할 축복의 글이기에)
"하느님을 인내하는 것은 믿음이고, 나를 인내하는 것은 희망이고, 다른 사람을 인내하는 것은 사랑이다."
말씀을 듣는 것도 어렵지만 들은 것을 온유하게 전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지...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보면 하느님께서 온 진리와 사랑은, 정의로 실현되지 않고 온유함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그분은 <온유와 겸손>을 필히 배우라고 하셨을 것이다. 열매를 거두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온유하게 씨를 뿌리라는 것! 열매가 맺고 수확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간이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온유와 겸손은 성서의 많은 곳에서 혼재되어 쓰인다. 그리고 주로 겸손은 인간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에 흔히 쓰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만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만큼...그리고 그 겸손을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도록 끝까지 온유함으로 드러내셨다. 그것이 그분이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런 맥락에서 온유와 겸손은 빈손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빈손의 영성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짊어진 생존이라는 삶의 무게를 가볍게 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치열하게 살되 치열함의 열매를 탐하지 말라!
그렇기에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희망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을 떠받치는 기둥이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가능하기에 온유가 겸손과 함께 하듯, 희망은 믿음과 동반한다. 그렇다면 신망애 삼덕이 어우러진 상태가 바로 <온유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진정 불가능한 영적 가난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다.
성령이시여! 주님이 끝까지 걸어가신 <온유와 겸손>의 길을 저도 걷게하소서!
온유와 겸손! 이웃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온유함이 생기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데서 겸손함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느님 시간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서 나온 고백,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존재하시도록 그분을 따르는 빈손의 영성이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온유와 겸손>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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