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근원적 질서에의 갈망에서 들리는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
-연중15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를 중심으로
1.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 2.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활동이며 관조다(아리스토텔레스) 3.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
1.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분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는 화가 김환기로 하여금 강력한 영감을 받게하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을 그리게 했고, 「저녁에」를 읽는 이들에게 우리 인연의 이름은 무엇일까? 라는 인연의 억겹을 생각케 만든 시다.
수많은 별 중에서 어떤 별에 시선이 가는 것도 인연인데, 하물며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저 하늘의 별과의 만남 그 이상이라는 것에서,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때론, 사람의 생명 뿐 아니라 어떤 사람과의 인연도 기승전결을 거친다는 점에서 만남과 이별의 이름을 어떻게든 결정짓고 싶어하는 심사가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 「저녁에」)를 곰곰 읽다보면, 우리도 한 때 별이었고, 지금도 별이고, 그 어느 때나 별일 것이기에 <다시>와 <무엇이 되어>는 만남 이전에 이미 주어진 그 이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인연의 이름은 또 무엇인가?
2.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활동이며 관조다(아리스토텔레스)
그 이름은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나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정향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일에 마음을 쓰고 또 옳고 귀하게 행동하고 싶어한다는 어떤 갈망이 내재한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 인간이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구는, 신의 한 위격인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다른 말로 근원적 질서에 대한 갈망이라고 바라본 사람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귀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행복하다는 것에서 행복은 활동이고 관조라고 『니코마스윤리학』에서 말한다. 활동과 관조, 언뜻 행복의 역설에 대해 말한 듯 하지만 활동과 관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언제나 자매처럼, 연인처럼 함께 다니는 동행어이기도 하다. 행복은 근원적 질서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열매로 인간의 다섯 가지 본성 가운데, 프로네시스와 소피아의 관계에서 이를 연역하기도 한다.
행복은 덕을 따르는 경향인데, 당연히 그것은 최고의 덕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최고의 덕은 우리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관련된 덕이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을 지배하고 이끌며 우리로 하여금 아름답고 신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하는 부분은 바로 이성이다. 그러므로 고귀한 것을 따르는 이성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인 것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인 아레테(arete)에는 다섯 가지 지성의 덕성이 있는데, 이 다섯 가지 덕의 조화 속에서 행복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 다섯 가지 덕이란 프로네시스(phronesis실천적지혜), 테크네(techne기술적지식),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력), 누수(nous직관적이해), 소피아(sophia현명함,지혜)라고 보았다.
이성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은 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 관조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행복하다. 행복은 순수한 관조에 뒤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관조 속에 깃들어 있다. 순수한 관조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따라서 행복은 어떤 형태의 순수한 관조라고 할 수 있다.
에피스테메는 보편적 진리를 뜻하고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보편적응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 어떤 상황 맥락에도 의존하지 않는 형식적 객관적 지식을 의미한다. 테크네는 테크닉, 테크놀로지, 예술 등에 해당하는 말로써 창조능력에 필요한 노하우나 실질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프로네시스는 신중함,윤리 또는 실용적지혜 또는 실용적 이성을 뜻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공익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는 능력을 말한다. 테크네가 지식 그 자체라면 프로네시스는 가치판단과 가치판단 실현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를 “진실을 포착하는 결정적인 마음의 습관”이라고 묘사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선한 것을 목표로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선은 하나의 원칙이며 목표는 그 방향성이 된다. 한편 소피아는 최고의 지혜를 의미하며 소피아라는 지적인 덕성은 에피스테메와 누수를 통해 획득되는 덕성으로 생성변화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행동을 추동하기보다는 표출된 행복을 스스로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바라본다. 아무리 상황이 행복해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바라보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 다섯 가지 덕인 프로네시스(phronesis실천적지혜), 테크네(techne기술적지식),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력), 누수(nous직관적이해), 소피아(sophia현명함,지혜)이 서로 협력하여 자신에게 행복을 부여하는데, 특히 동적이고 실천적인 지혜인 프로네시스와 정적이고 본유적인 소피아는 결정적으로 협력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이라는 신적 경지로 그 사람을 이끈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행복은 활동이자 관조라고 바라본 것이다.
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오13,1-23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 그 만남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태오13,1-23을 읽어본다.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는(마태오13,1-23/마르코4, 1-9/루카4, 1-20) 내용으로 말씀의 풍요로움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생각케 한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3분의 1정도가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예수는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①고도의 영적인 난해성을 비유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서 ②예수의 말씀을 듣던 청중의 지적 수준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③예수의 일생을 알레고리로 바라보기 위해서, ④천상의 신비를 예수의 육성으로 직접 듣기 위해서, ⑤가장 위대한 것이 얼마나 작은 것에 담기는 것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⑥예정설에 대한 암묵적인 결정론의 입장에서...등등으로 갈린다.
마태오13,1-23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성서에 나오는 37개의 비유가운데 비유의 은폐적 성격과 계시적 성격이 공존하는 대표적 유형에 해당한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씨뿌리는 농부의 자세(예수의 희망관)에 초점을 두고 바라볼 것인가? 아님 씨(말씀)와 땅(복음선포를 듣는 청중)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의해 그 해석이 상이하게 달라진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코4, 11)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15절)
Ⓐ,Ⓑ,Ⓒ는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선택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나 비밀에 관한 것으로 비유의 은폐적성격을 예단해 볼 수 있다. 이는 선택의 예정설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대부분의 성서연구가들은 이 부분이 예수님의 의도가 아닌 복음사가들이 유다인들과는 다른 맥락의 선인사상의 첨언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비유가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난해하지 않다는 것에서 비유의 계시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소5,9)
Ⓔ설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디아5,22)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요한15,5)
Ⓓ. Ⓔ. Ⓕ의 열매의 비유는 분명히 그 누구에게나 이해의 난관을 두지 않고 곧바로 전달된다. 다만 말씀을 듣는 이에 의해, 그 열매의 정도가 결정된다고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일까? 그분은 군중들 앞에서는 비유로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까지 하신다는 점에서 비유의 은폐적 성격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해 직접 설명을 하지 않으신 것일까?
비유와 그에 대한 설명은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는 뿌리는 농부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씨앗이 좋은 땅과 나뿐 땅에 뿌려질 수 있다는 비유의 해설은 표면적으로 세상과 하느님 나라는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 누구에게나 이해가 가능하기에 그렇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23절)
그런데, 23절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다시 비유의 은폐적 성격으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과 하느님나라만 갈리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하느님나라로, 아침에 온 일꾼이나 저녁에 온 일꾼이나 그 받는 구원의 몫이 같다고 알고 있었는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는 정도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환시체험처럼 하늘도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좋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는 정도가 다른 것에서 좋은 땅에도 등급이 있는가? 혹은 단계가 있는가? 아니라면 땅의 문제가 열매를 결정하는 것인가 하는 여러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서 종종 느끼는 생생함과 연결시킬 수 있다. 바오로의 영성은 교회를 위해 몸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는 열매를 우리 안에서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사도의 영성은 현재진행형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매는 땅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인가?
그런데, 이사야 예언서는 이를 총체적인 문제로 답을 준다. 씨뿌리는 농부, 그리고 그 씨앗,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즉 세 층위가 하나로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는 통합의 폭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열매는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의 결과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야551-11)
그분에게서 나온 모든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뜻한 바가 있다. 그 뜻이 실현되려면 그분의 뜻과 우리의 뜻이 같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당시 라삐 사회의 가르침의 한 교수법으로 주로 비유를 들어서 구체화에서 일반화를 도출하는 방식이 정석이었다. 그 연장선인가?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방식은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알곡처럼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바라볼 때 비유는 은폐일 수도 계시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제자들에게 비유를 풀어서 설명을 해 주어도 온전히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은폐가 된다.
비유는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은폐가 된다. 그러나 알아들으면 그것은 계시가 된다. 그렇다면 은폐와 계시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갈망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에서 이미 그분은 세세대대 인류와 대화적 상황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람의 되시어 오셨다는 자체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린 셰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대화형식에 대해, 비유의 은폐적 성격과 계시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중인 이유에 대해 두 신학자의 견해를 들어본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자들에게만 알려주기 위한 방편으로(...)사람들이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작고 대수롭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예상 밖의 모습으로 임했다.(로버트 H 스타인, 『예수님의 비유, 어떻게 읽을 것인가』,1981)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 사회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수님 자신의 특수한 대화형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의 比喩』,1952)
비유(Parable.比喩)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현상이나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일이다. 로버트 H 스타인은 비유의 은폐성은 필연적임을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이미 정해진 사람들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정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는 결과론에서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반대로 1세기 청중들은 누구나 쉽게 예수님의 비유를 육성으로 알아들었다는 전제하에, 하느님나라가 신비인 것은 맞지만 말씀을 일부러 알아들을 수 없도록 신비라는 이미지를 쒸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 자체가 비유가 아니라하더라도 파격적이기 때문에 제자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알아듣지 못한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예레미아스가 강조하는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어느 시대에나 , 즉 오늘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직접적인 육성은 그분의 생생한 현존체험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때 말씀에 깨달음의 정도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한 구절을 읽고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풍부한 영성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현존체험과 말씀의 풍요로움은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때 그 은총체험을 몇 배라고 수량화 할 수는 없겠지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개념 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평화 속에 머무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생생한 체험은 누군가에게 생생하게 예수님의 육성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은 사람만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축복을 받기 위해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고 있는 야곱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하느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야곱은 어떻게 생생하게 들은 것인가? <야곱과 하느님과 씨름하다>는 창세기32,23-33은 형 에사오를 만나기 직전, 야곱은 엄습하는 두려움에서, 그 누구에게라도 축복을 받아내야 하는 어떤 상태에 몰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한 두려움이 강한 축복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엄마 레베카의 기지로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그 대가를 평생, 혹독히 치뤘음에도 형 에사오라는 두려움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두려움을 축복으로 이기려 했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축복의 관계를 야곱처럼 선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준 신앙선조도 없었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이라는 것을 야곱은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두려움과 갈망의 터널을 건너는 법을 알려준 셈이다. 두려움의 상황이 몰려올 때마다 야곱의 하느님을 불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너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우리의 경우를 야곱의 체험에 대입해 본다면,
우리는 언제 축복을 받는가? 아니 언제, 우리가 축복받았음을 알게 되는가? 왜 우리는 축복의 심층에 한결같이 머무르지 못하고 믿음의 변죽만 울리는 거 같은 피상성과 두려움과 편안함의 상태를 반복하는가? 왜 우리는 좋은 땅이었다가 돌연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의 상태는 아닌가하는 의혹을 갖게되는가? 분명 우리는 돌아가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하늘을 향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고백할 수 있다. 이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 삶의 존재이유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시로 야곱이 겪었던 두려움의 딜레마를 왜 경험하는가? 또는 그 어떤 영적 아우라도 없이, 평화의 상태도 아닌 미적지근한 상태로 걸어가게 되는가? 왜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서 모든 순간 우리의 삶을 견인하지 못하는가?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왜 생생하게 듣지 못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중간보고서를 제출해 보자면,
(1)망각(레테)의 강을 아직 온전히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망각의 강은 죽음의 강이다.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우리 역시 십자가체험, 즉 죽음체험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세례성사 때 끊어버립니다!를 고백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뇌의 시상하부에 남아있는 기억속에는 끊어버리지 못한 나쁜 기억들이 잔존해 있다. 결핍에 대한 기억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들이 때때로 출몰하여 믿음의 정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야곱은 우리들의 그런 상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망각의 강을 온전히 다 건너지 못햇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 오는 두려움을 수시로 경험하기도 한다. 그 두려운을 넘어선 곳에 근원에 대한 갈망이 싹튼다.
(2)갈망의 크기와 방향성에 대한 정직함이 있는가? 하느님 나라의 근원적 질서에 대한 갈망이 그 어떤 갈망보다 큰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기는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열매를 맺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악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과도 싸운다. 선과 선이 싸운다? 그렇다. 최선이 있는데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선인가? 밤새 악에 걷어차이는 것이 아니라, 밤새 선에 걷어차이면서, 선에 대한 갈망이 선의 갈증을 증폭시키는 경우를 경험하는가? 갈망조차 없었다면 그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편하게 쉬지 못하는 갈망의 딜레마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어떤 성인들은 그분을 잊어야 그분을 찾을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분을 찾고자 하는 갈망에 걷어차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선의 방향과 선의 크기를 알게 된다.
(3) 말씀의 풍요로움을 진정 체험하는가? 우리가 두려움과 갈망의 터널을 넘었을 때, 축복받은 존재임을 알 수 있고, 말씀으로 열매를 맺는 삶을 비로소 산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그분 말씀으로 풍요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속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외로운 거다. 우리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려준 그분도 외로울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내가 누군지 나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나의 풍요로운 시선에서 모든 이들의 정체도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풍요를 보라! 는 것은 근원적 질서에 대한 갈망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 근원적 갈망의 절실함이 그분의 육성을 들을 수 있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근원적 질서에의 갈망에서 들리는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
(4) 그분의 직접적인 육성을 들은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나와 이웃이 누군지 아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언제나 열매의 정도를 결정하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을 근원적 질서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J-나-이웃>이라는 삼각형의 구조가 그것이고, 그것을 통합하는 능력이 열매의 정도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한축이라도 무너지면 우리는 말씀 안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분명한 현존체험은 언제나 <하나oneness>라는 것을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체험하게 이끌고 돕는다. 그 하나가 지닌 무게와 풍요는 <하나oneness>라는 말씀이 지닌 열매의 셈법으로 그 <하나oneness>라는 트랙이 얼마나 하늘과 땅으로 확장되었는지의 여부가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게한다고 할 수 있겠다. 갈망의 크기가 열매의 정도를 가늠한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풍요로움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엄정한 무게도 풍요만큼 크다는 것을 감당한다는 점에서 '하나'라는 말은, 흔히 축소해 사용하거나 수사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자주 언급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는 말은 바로 그 풍요와 맞먹는 무게를 동시에 함축한 진정한 <하나oneness>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oneness>라는 말은 진리 가운데 가장 풍요롭고 가장 무거운 무게를 지닌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모든 인연에 대한 억겹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영원히 <하나oneness>였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oneness>라는 인연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는 것에서 그분이 가셨던 모든 길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고, 들은 것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확장된 것이 보편적 사랑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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