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현행적 지향과 잠재적 지향 사이에서 지향의 순수성에 대하여

나뭇잎숨결 2023. 7. 28. 07:00

 

현행적 지향과 잠재적 지향 사이에서 지향의 순수성에 대하여

-연중17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를 중심으로

 

 

 

 

1.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걸요//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애당초 마음도 없지만//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는 꿈속 같은 현실에 갇힌 사람이 눈을 뜨자, 뜨니, 뜨면, 뜨면, 뜨니로 꿈의 연쇄 속에서, 화자가 마주한 현실은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바람 부는 절벽 위→익숙한 천장→혼자 가는 먼 집’등으로 모든 것이 한바탕 꿈속처럼 이어진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오히려 꿈같은 세계 속에서 화자는 자신을 토끼조차도 될 수 없는 토끼풀이라고 고백하며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라고 거대현실속의 미립자에 불과한 자신을 수긍한다.

 

화자가 토끼조차도 될 수 없는 토끼풀 같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자못 위대하다. 거대자본이 이끌어가는 이 세계보다 더 거대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거대자본이 절대 부러워하지 않는, 투명인간에 불과한, 미립자의 세계, 그런데 엄존하는 그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멸을 꿈꾸는 것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위대한 것이다. 아마도 그 위대함의 역설이 화자의 존재이유이자, 시의 존재이유일 것이다.

 

그 하찮은 것을 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화자가 적응하지 못하는 거대현실조차도 그 최초의 출발점은 누군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거대현실 앞에 비록 토끼도 되지 못한 토끼풀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에 편입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오만한 <마음> 때문이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는 선언은 놀라운 자기 존엄에 대한 시인의 결정이자, 사실 시(문학) 본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책이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프란츠 카프카)

 

 

문학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야유에도 불구하고, 나 여기 있소,를 고백하는 메두사의 머리(마음)를 갖고 있다.

 

프란츠카프카(1883-1924)하면,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갑각류로 변한 『변신』을 그의 대표작으로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의 삶 자체가 문학이었다. 카프카는 그의 연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라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아포리즘-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된 길에 대한 성찰』에서 카프카하면 회자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평과는 달리 인간의 근원적 본질에 대한 성찰을 치열하게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문학이다, 라고 선언하는 차별화된 자신의 신원의식과 달리 그에게도 보편적 근원의식에 대한 그리움이 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 앞에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믿음의 가치는 결코 고갈될 수 없다. 여기에 일말의 믿음의 가치가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살지 않을 수야 없지 않은가? 바로 이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속에 믿음의 광적인 힘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부인 속에서 이 광적인 힘은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가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특정 종교가 지향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신앞에 서 있는 단독자와 같은 입장에서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고, 그것도 죽어가면서도 살고싶어하는 광적인 믿음이라고 본 것이다.

 

겸손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가 외롭고 절망에 빠진 자라 할지라도 동포와 가장 강한 관계를 갖게 한다. 그것도 즉시 물론 그 겸손이 완전하고 지속적일 때뿐이지만, 겸손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한 기도의 말, 경배이며 동시에 가장 굳건한 결속이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생각하는 겸손은, 인간이라는 종을 수락한 것이 이미 겸손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되는 순간, 인간은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데, 겸손이란 바로 관계를 지속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 세계든 그 누구하고든 관계를 맺어야 하기에, 인간의 겸손은 수덕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에 필연적이기조차 하다고 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기도와의 관계이며, 자신과의 관계는 노력의 결과이며, 기도에서 노력을 위한 힘을 얻게 된다고 본 것이다.

 

오로지 여기서만 고통이 고통이고, 괴로움이 괴로움이다. 여기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는 이 괴로운 때문에 마땅히 높여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괴로움이라 불리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도 변함없이 그 반대의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축복이라는 뜻이다.

 

카프카는 고통, 괴로움은 정치이데올로기 못지않은 어떤 이항대립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데 주목했다. 고통은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측면에서 어떤 이즘(~ism 주의)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서만 자신을 발견하는 이분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축복인데,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고통과는 반대되는 관념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제언이다.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져야 고통이라는 이데올로기도 동시에 사라진다는 관점이다.

 

최초의 우상숭배는 분명히 사물들에 대한 두려움이었겠으나 그것과 연관지어 보면 사물들의 필연성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또 그것과 연관지어 보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책임감은 매우 엄청나보여서 사람들은 감히 어떤 유일한 인간 외적 존재에게 부과시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상숭배는 바로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나타나는데, 그 두려움은 사물과의 필연적 관계에서 비롯되며, 물신주의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카프카는 일갈한다. 다른 말로 인간은 자신과 동료인간에 대한 책임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감의 근저에 인간이 하나의 물질적 구성요소를 지닌 존재로서 다른 물질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과도한 책임감에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물질은 신의 자리를 대신한 우상이 된다고 바라본 것이다.

 

다른 모든 죄들이 파생되어 나오는 두 가지 주된 인간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조급함과 태만함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지 한 가지라 한다면, 그것은 아마 조급함일 것이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추방되었고, 조급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카프카는 인간의 죄를 크게 두 가지 나눈다. 인간의 모든 죄는 조급함과 태만함에서 비롯되며, 조급함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다시는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조급함과 태만함 중에서 죄의 근원을 굳이 찾자면 그것은 조급함이라고 바라본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가 되듯, 인간은 결국 인간을 만든 최초가 될 수밖에 없는데, 너무 성급하게 아버지가 되려고 하다 길을 잃고 영원히 아이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좋은 지향’이라는 문제 앞에서 무엇이 진정 더 ‘좋은 지향’인가를 고민하고 성찰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신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이들 조차도 진선미에 대한, 사랑에 대한, 불멸에 대한 고민이 깊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에게는 종교심이 있고,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두에게는 <마음>이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자유라는 이름의 비상

 

 

 

 

 

 

3.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13,44-52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전하는 마태오13,44-52은 마태오 복음에만 있는 단독 문형이다. 지난주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그 청자는 군중들이다. 그러니 이 군중들은 아직 하느님나라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지향과 행위의 괴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도 그 군중 속에 끼어 광야의 여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향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이 왜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는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에서  얼핏 자유의지를 문제삼은 듯이 들리기 때문이다.

 

악이 두려워 선을 행하는 것이 과연 선인가? 선이 좋아서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한 선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에 초점을 맞추면 선은 하나의 의지적 수행의 결과일 것이고, 후자를 생각하면 그것은 본성적 측면일 것이다.

 

마태오13,44-52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세 개의 통사구조로 되어 있다. 이 세개의 통사구조를 다른 맥락에서의 강조어법인 병치로 볼 것인가? 아님 하나의 인과적 구조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묵상의 방향이 사뭇 달라진다.

 

하늘나라를 간절히 원했던 이들에게서 하늘나라가 그렇게 자명하게,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비유이기에, 우리의 신앙여정이 연륜을 더해갈수록 표출된 행위의 결과만 문제삼던 것에서 행위를 유발한 원인까지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하늘나라는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기서 ⒜, ⒝, ⒞의 주체는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의 주체는 ⒜, ⒝, ⒞의 행위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이며, 그 주체는 하느님의 전령인 천사들이다. ⒠의 주체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들이다. 주체들만 놓고 본다면, 땅-하늘- 땅으로 귀환한다.

 

흔히 49절을 종말론적인 심판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좋은 지향으로 좋은 행위를 하려는 신앙의 여정에서 좋은 지향 속에 은폐되어 있는 바리사이즘에 대한 경계, 근원적인 성찰의 요구로 바라볼 수도 있다. 너희가 바라사이들보다 더 정의롭지 못하다면? 하는 지향의 정화를 결코 간과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5,20)

 

마태오13,44-52을 내용상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 ⒝----------> ⒞, ⒟<------------⒠

 

⒜와 ⒝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진 것을 다 처분하여, 보물을 산다는 것이 초점이다. 그리고 ⒞와 ⒟에서 좋은 것 안에서 나뿐 것을 선별하여 던져버리다, 는 것이 초점이라면 ⒠는 곳간에서 새것과 옛 것을 꺼내는 것에 초점이 놓인다.

 

⒜와 ⒝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분명 보물을 발견한 들이다. 그리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보물이 묻혀 있는 그 밭을 산다. 여기서 초점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거나 혹은 처분하여에서 보물이나 진주를 산다는 것이다. 보물이나 진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사거나 파는 행위는 같은 가격으로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또 보물을 산다가 아니고 왜 그 밭을 사거나, 혹은 보물 그 자체인 진주를 산다는 것에서 보물 그 자체나 보물이 묻혀있는 밭은 같은 등가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밭은 사람의 마음이고 보물이나 진주는 하느님나라 혹은 말씀이라고 한다면 산다는 것은 그 보물이나 진주를 알아본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은총은 경험상, 선험적 은총이지, 체험적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느님나라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보물과 진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무상의 선물을 알아보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 ⒟는 세상 종말에 대한 심판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여 밖으로 <던져버리거나> 선과 악으로 나뉘어져 불구덩이에 <던져버렸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 ⒝를 선험적 은총이라고 한다면, ⒞와 ⒟는 맥락상 불가해한 사후심판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는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던 율법학자들이 결국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구약의 율법에서 그리고 술, 새 푸대에 비견되는 신약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자기 곳간에서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여 하느님 나라는 그들에게서 신구약을 통합하는 능력으로 완성된다.

 

이제, 행위를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팔거나 처분하여- 샀다, 가려내어- 던져버리다. 옛것과 새것을 꺼내다, 라는 행위동사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진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응하는 대가가 뜻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이냐의 실천여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뜻을 결정하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행위를 결정하는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향과 행위에 대한 고민은 우리만 한 것이 아니다.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는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열왕기상3, 9)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8,28)

 

솔로몬은 사람이 과연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을까를 바라보았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그 뜻을 바라볼 수 있다는 한 차원 더 높은 하늘에서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전하는 마태오13,44-52을 솔로몬과 바오로 사도의 통찰과 연결하여 바라본다면,

 

⒜, ⒝----------> ⒞, ⒟<------------⒠

 

지난 주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어자리를 비어놓고 <결정하지 않는 결정>이라는 수동적능동성을 언급한 바 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물론 가진 것을 다 팔 수 있고 당연히 그 보물을 살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 하늘나라라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태 22.37에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이라고 전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Mt 22.37) 

 

마음과 목숨과 정신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고 그것으로 하늘나라라는 보물을 살 수 있다면,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우리는 이미 선험적으로 보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샀다, 던져버리다. 꺼내다.는 행위동사는 우리의 본성적 지향에 대한 소급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13,44-52은 그래, 너는 신자이므로 어느 정도 선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선한 동기는 무엇이지? 라고 행위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그 잠재적 동기까지 우리에게 정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기까지 바라보는 것을 [현행적 지향(intention actuelle)과 잠재적 지향(intention virtuelle) 사이에서 지향과 행위의 관계]에서 근원적 의도, 생각의 정화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현행적 지향이라는 것은 명시적이고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감지할 수 있는 동기에서 표출된 행위라면, 잠재적 지향은 인간행위의 근본적인 방향성, 무의식까지도 염두한 지향의 절대순수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코린토전서13장의 바오로 사도의 사랑론에서 우리는 이를 소급-적용해 볼 수 있다. 또 고백의 기도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까지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에서 추론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서 모든 기적 사화는 이  근원의식의 회복에 초점이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모든 사람들을 놀래킬만한 그런 위대한 행동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촉발된 것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영광이 아니라, 영광의 근원으로 돌리는 본질적인 영광인가? 하는 질문이다. 세상과 너 자신을 표출된 행위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 머리카락 숫자까지, 네 마음의 심연까지 보는 하늘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위선, 바리사이즘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하늘나라는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