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지진, 불이 지나간 뒤 들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누구의 음성인가?
- 연중19주,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를 중심으로
1. 이문재의 「어떤 경우」 & 「손의 백서」
이문재 시인의 시 두 편을 읽어본다.
어떤 경우에는 /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어떤 경우에는 /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어떤 경우」)
이문재 시인의 「어떤 경우」를 읽어보면 너무나 지당하고 자명한 결어라 사족을 붙일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손의 백서」를 읽어본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손의 백서」)
「손의 백서」를 읽으면 그냥, 기도하고 싶어지고, 잘 살고 싶어진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로 모아지는 이 시는 제목에 ‘백서’가 들어갔다. 그 ‘백서’를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에 따라 ‘손’의 의미가 달라진다. 대략 ‘백서’는 두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로 쓰인다.
①백서(白書) 〔영국 정부가 공식 보고서에 흰 표지를 사용한 데서 유래〕 공적인 글로 정부가 정치·경제·외교 등에 관한 실정(實情)이나 시책을 발표하는 보고서로 쓰인다. ②백서(帛書)는 개인적인 글로 비단에 쓴 글. 또는 글이 쓰여진 비단이라는 의미가 있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것에서 이 시의 백서는 ①백서(白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갈망이 크면 자연 시어들도 대립적인 시어들로 들끓어 바꾸어야 한다는 쪽과 바꾸지 말자는 쪽으로 나뉘어 시어가 시어를 노려보아야 한다. 역동적 에너지가 없으면 세상은커녕 그 무엇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문재의 「손의 백서」에는 대립적인 시어들이 없다.
그래서 ②백서(帛書)로 읽어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요한데, 어떻게 세상을 바꾸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데 지난 역사를 복기해 보면 들끓던 열기는 표면이나 구조를 좀 바꿀 수 있었을 뿐, 즉 나쁨이 또 다른 나쁨으로 바뀐 것이지, 본질로 귀의하지는 못했다는 것에 이르러, 세상을 바꾸려면 그 무엇보다 조용한 내적 혁명,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시인의 구상을 수긍할 수 있겠다
2.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M. 베르트하이머)
‘인식의 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능이 낮은 아동도 어떤 문제의 전체구조를 파악할 수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들은 이를 게슈탈트(Gestalt)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반대로 세상을 전체구조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사건에 매몰되어 혼란을 겪는 상황을 멘탈이 나갔다고 말하지 않고, 게슈탈트가 붕괴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게슈탈트(Gestalt)는 심리학, 철학, 임상학 등에서 부분이 모여서 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전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로서의 형상과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경험하는 유기체로서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을 통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야기되는 사건과 접촉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접촉하여 경험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매 순간 자각하여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유기체의 인지기능에 대한 신뢰가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전체를 통해 부분을 바라보는가. 부분으로 전체를 바라보는가에 의해 한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그 원인을 부분과 전체의 지각에서 파악한 것이 게슈탈트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통해 게슈탈트(Gestalt)심리학의 단초를 마련한 M. 베르트하이머(1880-1943) 등의 독일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 이론은 한마디로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명제를 던진다.
간단히 말해서 과거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경험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경험에서 얻는 것이 맹목적이고 이해되지 않은 연결인가. 아니면 구조적이며 내적인 관계성에 대한 통찰인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회상할 수 있는 하는 것이며, 회상한 것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즉 맹목적이고 단편적 방식으로 적용하느냐 아니면 상황의 구조적 요구와 일치하도록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다(M. 베르트하이머, 『지각적 형태의 체제화 법칙』)
1910년의 어느 여름날, 독일의 심리학자 막스 베르트하이머Wertheimer는 기차여행을 하는 도중 모종의 영감을 얻었다. 기차의 투명한 벽과 창문 프레임이 부분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베르트하이머는, 인간의 눈은 일단 '모든' 영상자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뇌가 이러한 감각정보들을 일관된 이미지로 재구성한다는 가설을 구상함으로써 게슈탈트 심리학(형태심리학)의 기초를 제공했다. '게슈탈트Gestall' 란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 명사다.
이후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베르트하이머에 의한 최초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영상인식은 감각적 요소와 형태를 다양한 그룹으로 조직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즉, 여러 자극이 존재할 때 인간은 그 자극 하나하나를 지각한다기보다는 몇 개의 자극을 서로 관련시키거나 분리시켜 하나의 '통합된 자극'으로 지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게슈탈트가 형성되거나 붕괴된다고 본 것이다.
막스 베르트하이머Wertheimer로 대표되는 전통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물리학의 장이론과 비슷한 맥락에서 심리적 생활공간이라는 이론으로 게슈탈트가 형성-붕괴되는 원인을 본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빈(1890-1947)이 있다.
직접 경험의 장에는 우리가 성인이 된 후 그의 생활에서 다 알고 있듯, 자아와 환경의 두 가지 극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양극은 자력선과 같아서 그 사이에는 역선 혹은 긴장이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자아는 단순한 극이 아니라 여러 하위체계를 가지고 있는 복합체이다. 그러나 자아는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유동하는 가운데에서 조금도 정적으로 되지 않고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완전히 균형이 잡힌 것이 아니라 완전한 휴식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어떤 곳으로 가고 있다.(쿠르트 레빈, 『장 이론』)
레빈의 장이론은 개인의 행동은 공존하는 사실들의 전체성 역동적 장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믿었다. 모든 행동의 패턴은 그가 어떤 환경에서 존재하는가가 좌우한다는 자아와 환경과의 상호의존성을 주목헸다. 전체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활동은 한 인간이 지닌 요인들, 욕구, 가치, 감정, 성향과 주어진 외적 환경과의 사회작용의 결과이지 한 개인의 개인심리학이 아니라고 바라본 것이다.
게슈탈트가 붕괴되는 긴장은 한 인간의 자아 안에도 있고 자아와 환경 사이에도 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욕구나 자극대상을 포함해 한 인간이 경험하는 내적 외적 영향의 구조 총체라고 바라본 것이다. 레빈이 말하는 생활공간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활에서의 대상, 사태 등은 개인의 욕구를 감소시키거나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개인심리학은 언제나 사회심리학이라고 바라보았다.
게슈탈트심리학에서 말하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M. 베르트하이머) 전체는 물론 부분을 정의하지만 부분은 전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귀납적 일반화가 가능한 지각수준(형이하학)에서만 의미가 있는 명제다. 이 세계는 지각수준에서만 파악가능하지는 않다. 지각 수준이 아니라면(형이상학)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부분을 아는 것이 지식전체를 아는 것일 경우도 있다. 지각의 차원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지식의 차원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언제나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오14,22-33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전체는 무엇이고 부분은 무엇인가?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전하는 마태오14,22-33은 예수님의 시현사화와 제자들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 부분이고 무엇이 전체인지 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 이후에 물위를 걸으신 시현사화는 마르코(6,45-52)와 요한(6,16-21)복음에 공통으로 실려있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베드로의 믿음과 의심, 그리고 제자들의 고백을 첨가해 세상 안에서 교회론의 한 축을 구축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과의 관계라는 이중의 관계를 통해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를 거듭 천명하면서 동시에 배에 비유되는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포괄적 로드맵을 제시한 것으로 그 묵상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는 제1독서에서 엘리야의 하느님체험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 관계에 대한 통찰을 크로스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는 불가피하게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 관계의 규정은 믿음의 척도와 관련된다. 교회는 세상과 불가피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격절성>에 대해 22절과 23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엘리야 예언자뿐 아니라 그분께 부름 받은 모든 이들은 “나와서 산위 주님 앞에 서라!”(열왕기상권19,11)는 음성에 답해야 한다. 세상에 살되 세상과의 격절의 의미를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 그러기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의 거리, 간극, 격절!을 내재화 하기를 먼저 요구한다. 마르타가 되기 전에 마리아가 되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전에 먼저, 네가 누군지 알라는 것이고, 너의 컨트럴타워가 어디있는지 알라는 것이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교회의 1차적인 소명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소하는 일일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의 빵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충만에 이르기 위해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재배치하는 방향키를 갖고 있다고(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의 빵이 되기 위헤서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세상 사람처럼 살되 이미 천상의 시민이 되라는 이 이중의 과제가 순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의 마인드로 광야에 살라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 다음에 물위는 걷는 시적사화가 연이어 놓여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과 인간의 어떤 실존의 상황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세상과 교회, 성스러움과 속을 구분하기 위해 구획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하기 위해서, 교회구성원 역시 영적 컨트롤타워가 되기 위해서다. 아마 그것이 제1독서에서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과 맞물리는 부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주님께서는 지진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주님께서는 불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열왕기상19,9-13)
세상은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하지만 종교는 고요가운데, 모든 문제의 답을 그분의 뜻에서 찾는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이고, 존재 이유이고, 묵상과 기도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은 왜 기도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산에 오르신 것일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의 거룩한 빵이 되기 위해서 세상 끝날까지 인류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무엇보다 필요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세상과의 관계도 깨진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움직이는 컨트롤타워는 이 세상의 소음에서 들을 수 없는 고요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위와 바다라는 대립적인 공간 속에서 일엽편주에 해당하는, 혹은 노아의 방주에 해당한 교회는 늘 세파에 시달린다. 교회일원의 생존의 현장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 밖에 있기도 하지만 세상 안에 있기도 하다. 오직 세파에ㅡ시달린다면 그 때 우리는 아직 그분의 현존을 우리 삶에서 체험하지 못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지낸 '저녁에서 새벽까지'의 시간을 우리는 바람과 바람에 시달린 즉 세파에 시달린 시간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 부재의 현장이다. 세파에 시달리는 그들이 그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들의 상황을 아시고 그들 쪽으로 가셨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일 것이다.
25-27에서 예수님은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에게 다가가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구성원이 오히려 그분의 존재이유를 현실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분은 분명한 실재가 아니고 비실재가 된다. 어떤 문제상황 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는 단계다. 우리 이 문제를 기도로 풀어보자!가 아니고 기도는 맨 나중에 '혹시나'의 차원으로 동원되거나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무력한 도구로 쓰인다. 난 기도밖에 할 것이 없네!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유령화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신의 길이 바다를, 당신의 행로가 큰 물을 가로질렀지만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지 않았습니다(시편77,20)
시편저자는 하느님의 권능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분임을,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발자국을 보지 못하는 상황임을, - 우리의 지난날을 총체적으로 기억해 보면 어떤 순간도 그분이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역시 그분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지만,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 구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에게 그분은 우리의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비실재, 유령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사화를 제자들이 연결하지 못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히려 신앙이 세파에 시달리는 이들을 안정시키기는커녕, 양쪽으로 시선이, 힘이 분산되면서 이중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피상적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갈등은 두려움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에고 에이미는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의 권능이다. 우리가 그분을 유령이 아니라 실재로 우리 현실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계신 메시아로 체험하는 것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순간부터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정말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다. 들음 속에서 믿음이 큰다.
(이 글 전체 맥락 속에서)교회가 사랑을 부르짖기보다 믿음을 먼저 부르짖어야한다. 사랑을 잘 하기 위해 믿음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신망애 삼덕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은 무리지만, 제대로 사랑하기 위헤서 믿음부터 키워야 한다. 왜? 사랑은 교회 밖에도 있다. 교회일원이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단체를 만들어 봉사도 많이 한다. 하느님 이름을 알기 전에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안다. 사랑은 자연종교이자, 보편종교에 가깝다. 생명이 이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하느님을 믿어야 이미 하고 있는 본성에 가까운 사랑이 애주애인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는 세상이 모른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길은 교회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애주애인은 믿음이 형성되면 교회밖에서 이미 배운 사랑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다. 존재가 먼저고(믿음) 행위는(사랑) 자연적으로 따라나오게 되어 있다.
한계를 정하는 사랑을 넘어설 수 있는 마중물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대명사였던 마더데레사성녀나 소화데레사성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심한 무신론에 시달렸는지는, 믿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믿음이 강한 이들은 스스로 교회 밖으로 나가 가장 힘든 일에 자신을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예수님을 시각적으로 이미지로 추종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는 순간 베드로의 용기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모멘트가 된다.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주님, .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용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때,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이때 교회는 세상을 끌어가는 어떤 나침판, 빛, 등대, 소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거센 파도를 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베드로는 물에 빠진다. 세상에 진다.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말은 예수님 믿으라고 세상에 외치지 말고, 너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라는 말과 같다. 28절부터 31절까지는 왜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서 그 용기를 항구하게 지니지 못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세상의 힘이 우리를 삼킬듯한 두려움 앞에서 그분의 현존을 쉽게 무화시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세상의 다양한, 현란한 가치앞에서 그분의 고요한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워크홀릭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신자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분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비실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세상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이다. 그분의 음성은 언제나 부드럽고 고요하다. 평화다. 세상의 소리 때문에 생이 여러번 금이 가본 사람은 세상의 소리와 그분의 소리를 예민하게 분별하게 되고, 내 스스로 분별하려 하지 않고, 분별하게 해달라고 성령에게 언제나 청하게 된다. 오직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게 된다. 아오스딩 성인의 고백처럼 당신안에 쉬기까지 나에게 쉼은 없었나이다를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수많은 시련을 경험한 이들이 받는 현실의 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상급이다.
베드로의 경우로 돌아가서,
“주님, 주님이시거든 -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 명령하십시오.” 주님이시거든, 이라는 가정법이 지닌 불확실함은 오너라-두려워지다, 사이의 낙차를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을 주님으로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와 현실 사이에 두려움이 개입한다.
29절과 30절을 읽으면 우리는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어내는 신앙의 낙차를 가장 리얼하게 겪어내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리와 오너라, 라고 말하는 그분의 음성 사이에서 용기와 좌절을 겪는 베드로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그리고 믿음이라는 바위위에 세워진 일엽편주다. 베드로는 우리가 현실에서 겪어내고 있는 상황을 너무나 우리 자신처럼 겪고 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믿어주셨다는 것을 보여준 신앙선조다. 우리는 분명 그분의 목소리만을 듣고자 하지만, 우리는 시청각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존재다. 세파의 거센 파도가 우리를 삼킬 듯이 엄습할 때, 우리는 번번히 로고스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밀려오는 파도부터 먼저 본다. 먼저 본 것에 종속된다. 시각이 모든 감각을 지배한다. 이미지의 정치학이 세상을 끌고가는 이유에 해당한다. 이미지와 실재의 싸움, 세상의 힘과 권능과의 싸움은 우리 믿음이 준 실재와 비실재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이 빠진다) 저를 구해주십시오, 라는 외침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제 주님은 주님이다. 주님이 주님일 때, 비로소 나는 나가 될 수 있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즉시 그분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그 어느 훗날이 아니라 '지금' 잡아주신다. <곧>,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두 번째 용기는 진정한 신앙인의 고백에 해당한다. 주님이시거든이 빠져 있다는 것, 예수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신다. 그 고백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잡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그분은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의 감긴 눈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 믿음이 나를 구한다는 믿음의 방정식이 만들어진다. 나를 천국에 보내는 것도 나요, 나를 지옥에 보내는 것도 나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고 믿음이 약한 자라는 질책은 32절에 나오는 “스승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교회 구성원의 고백을 낳게 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보여준 적나라한 신앙인의 모습이자 교회의 맨얼굴이다.
복음사가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궁극의 길라잡이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주님이다, 라는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세파의 모든 파도를 그치게 한다. 신앙은 체험이다. 본인이 경험해야 한다. 그때, 교회는 세상속에서 용기와 좌절을 통해, 수많은 좌초위기를 극복하면서,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14,22-33에서 보여주는 서사구조를 통해 교회의 로드맵을 다음과 같이 도식해 볼 수 있다.
Ⓐ(홀로)--->순례의 여정;Ⓑ, Ⓒ, Ⓓ, Ⓔ, Ⓕ, Ⓖ<----ⒽJ함께(교회)
교회는 (노아의) 방주에 해당한다. 성부성자성령이 함께하는 신앙안에서만 세상의 바람이 그친다.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고, 불은 여전하지만, 불가마 속에서 살아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자 앞에서 살아난 다니엘처럼,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할 때, 그 모든 것은 지나간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세상이 일으키는 거센파도같은 가치관의 현란한 바람은 지나가게 할 수 있다. 그 고백이 고백의 차원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이 될 때 말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우리 역시 온몸으로 살아낼 때,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프로그래밍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끌고 가는, 위로하는, 치유하는 그분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렇게 전한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결코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야7,9)” 요한복음은 그 상태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표현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32-33)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6)
세상이라는 바다위에서 서 있는 사람은 혼자 있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을 그분과 함께한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야 하는지, 왼쪽으로 던져야 하는지, 그분의 뜻에 의탁한다. 이 순례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신다. 요한은 전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이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인생은 혼자 결정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위로를 경험하는가? 그분이 모든 순간에 함께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난 믿음이 약해, 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그분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믿음이 겸손이다.
우리는 성서의 수많은 치유기적 사화, 소생사화에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네 믿음이 죽은 네 딸을 살리고, 네 종을 살렸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믿음은 ‘나’ 되기의 출발점이자, 삶을 그분의 뜻대로 재배치 할 수 있는 지혜의 바탕이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힘이고, 한평생 우리와 동행하는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오17, 20-21)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10-41)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정리한다. 믿음이 위태롭다고 느낄때, 그분의 현존이 비실재로 느껴질 때, 자주 필사하면서 묵상하는 부분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제들의 확증입니다(히브리서11, 1)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서10,17)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하는 것이며, 실재가 무엇인지 확증한다고 전한다.
이를 베네딕또16세 교황님이 추기경 시절에 쓴 『사도신경강해』(요셉 라칭거,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4, pp.19~54)에서 ‘태도’로서의 믿음과 ‘이해’로서의 믿음-Glaube als ‘Stehen’ und Glaube als ‘Verstehen으로 규정하고, 두 길을 걸어가는 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릎쓰고’ 믿음이 있으며, 비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그리고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믿음은 가시와 불가시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에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심연이 겹쳐진다... 그것은 다시 현실(실재)이 무엇인가의 이해를 통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로고스)에 의존하고 이 뜻(로고스)을 아무 두려움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땅으로 받아들임을 말한다."
믿는다는 것은 <가시와 불가시 사이의 심연>, <어제와 오늘 사이의 심연>, <실재와 비실재의 심연>을 건너 <몸과 마음과 영혼>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도입부의 질문, 그렇다면 신앙인의 전체는 무엇인고 부분은 무엇인가?
화답송으로 인용한 시편 85, 9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가 신앙인의 전체고 이 세상은 부분이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뒤 고요하고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 세파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모두 내게 <오너라!>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전체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부분으로 이 세상에 던져져 전체가 된 사람이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 수 있는 사람, 오직, 듣고자 하는 사람만 그분과 함께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네. 그분과 함께, 죽음의 문화를 유포하는 세상을 용서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세상을 치유하고, 소유의 전쟁 앞에서 아낌없이 나누려고 두 손을 활짝 벌릴 수 있네! 이전투구하는 세상을 위해 자비의 기도를 드릴 수 있네! 내 가슴이 숨쉬는 만큼,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네!
글을 마치며,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 Q. 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까요?---다음주 연중 20주 복음 묵상에 단상을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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