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자의 원천적인 의지, 역설적 신비, 계시의 아름다움
- 연중21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를 중심으로
1. 김춘수, 「능금」
1. 그는 그리움에 산다./그리움은 익어서/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그리움은 마침내/스스로의 무게로/떨어져 온다./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눈부신 축제의/비할 바 없이 그윽한/여운을 새긴다.//2. 이미 가 버린 그날과/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물은/이 아쉬운 자리에는/시시각각 그의 충실만이/익어간다./보라,/높고 맑은 곳에서/가을이 그에게/한결같은 애무의/눈짓을 보낸다.//3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푸르게만 고인/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우리들 두 눈에/그득히 물결치는/시작도 끝도 없는/바다가 있다.
김춘수의 「능금」을 읽다보면 능금에게도 심장이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인류에게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윌리엄 텔과 아들의 머리 위에 놓여있던 사과. 뉴턴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 스티브잡스의 사과, 함민복의 사과, 김춘수의 능금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손바닥에 놓인 능금이 있다.
김춘수의 「능금」은 ‘그(능금)는 그리움에 산다’로 시작하여 능금이 우리의 손바닥에 놓일 때, 그는 비로소 그리움을 완성한 것이며, 스스로 그리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떨어져 우리에게로 온다고 전한다.
능금이 능금임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가 버린 그날과/아직 오지 않은 그날’ 이라는 시간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에 이를 수 있을 때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이 그리움의 완성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직 그의 충실’에서 비롯되며, 그가 능금으로서의 완성은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에 도달하는 것으로, 모든 그리움은 생명의 기원인 바다로 수렴된다. 그때 능금은 정서가 아니라 생명의 표지가 된다.
그래서, 김춘수의 「능금」을 읽다보면 능금에게도 그리움을 아는 심장이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2. 시간은 너를 관통하며 흘러, 너 자신이 강물 속에 있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어떻게 유한자가 시간의 그물에 잡히지 않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까?
시간이 너를 관통하게 하라, 그래야 너 자신이 도착할 강물에 너는 닿게 된다고 조언하는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 Urs von Balthasar)는 세계의 모든 사물, 사람은 하나의 <심장>으로 모아진다고 보고 있다.
『세계의 심장』을 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는 아름다움을 통해 계시를 해석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새로운 신학적인 체계가 탄생하였다. 그래서 그의 신학 체계는 ‘신학적 미학’이라고 불리곤 한다. 두 번째로 그는 광범위한 문헌들을 바탕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작품들을 풍요롭게 했다.
모든 인간의 심장은 단 하나의 심장으로 모아진다는 것, 발타사르는 인간 존재가 지닌 ‘역설적 신비’에서 그것을 찾는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의 신비를 조명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의 유한성에 주목했다. 인간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 유한한 존재임에도 인간은 자기한계와 지기초월을 동시에 산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한함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유한자이면서 무한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역설, 여기에 인간 존재가 지닌 신비한 ‘모순’이 있다.
①한 심장의 고독을 통해 세상이 구원되었다. 삶의 상처 자국들 주위로 방어하듯 울타리를 친 은밀한 방의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라, 우리를 무방비로 시끄러운 소란에 내어 주는 저 고독을 통해 세상이 구원되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발타사르는 고독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고독은 한낮의 고독이다. 십자가의 고독이다. 고독 가운데 심장은 불가능들의 얼음물 속에서 나지막이 맴돌며, 차가운 칼날과도 같은 사랑, 늘 깨어 있는 상처와도 같은 사랑을 느껴야 하리니, 그런 고독을 통해 세상이 구원되었다고 발트사르는 바라본 것이다.
②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에게서 꽃피어 났다. 내 심장의 피 한 방울이 너희의 모든 생각과 노력에 스며드는 게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세상에 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이긴다. 내(J) 심장의 생각들이 너희의 세상적 심장 속으로 조용히 배어드는 게 너희는 놀랍지도 않은가? 너희 안에서 한 속삭임이 날아올라, 너희가 낮이고 밤이고 콧노래와 꾀는 소리를 체감하는데도? 사랑으로 오라고, 기꺼이 고통받으려는 사랑으로, 나의 사랑과 함께, 구원하는 사랑으로 오라고 꾀는데도? 너희는 세상 속으로 달아나고 그분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다.
③번개가 쳤는가?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틈새를 따라 십자가 위 열매가 보였는가? 흐릿하고 멍한 눈에 구더기처럼 창백한, 어쩌면 이미 죽은, 죽음처럼 미동도 없이 굳어 버린 열매가 보였는가? 그것은 정녕 그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그 어느 끝없는 물가에서, 그 어느 물 없는 바다 깊이에서, 그 어느 어두운 불구덩이 밑바닥에서 영혼들은 표류하는가? 처형대 둘레에 모여 있던 그들 모두가 갑자기 깨닫듯, 그가 떠났음을. 가늠할 수 없는 공허가 매달린 몸에서 흘러나온다. 환상적인 이 공허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사람들은 돌연 자신이 영혼을 지진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을 보면서.
④내 실패에 동참하여라. 나와 함께 구원의 허무함을 맛보아라. 이것을 재료 삼아 나의 아버지는 당신의 은총을 발휘하신다.
신의 손에 저울이 들려 있다. 한쪽 접시에는 하중을 받으며 짓누르는 허무함이 놓여 있다. 다른 쪽 접시에는 위로 향하는 가벼운 희망이 놓여 있다. 그가 돌무덤에 없을 때, 첫 번째 접시가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하여 판결은 떨어졌다. 희망이 올라간다. 벗어나듯 날아오르며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서 그와 함께 벗어난다.
⑤선생들이 말했습니다, 지식의 길은 셋이라고. 긍정의 길, 부정의 길, 그리고 이 둘을 뛰어넘는 초월적 극단의 길이 있다고. 첫 번째 길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저마다 자신의 파편 안에서 당신 빛의 광채를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길은 모든 피조물을 떠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굳건한 한계들은 한없이 유동하는 당신 존재를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길은 모든 피조물의 완결성의 껍질을 부수고, 당신 영원성의 한없는 척도까지 확장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심장』은 신학적인 책이면서 신학적인 책이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이 책에 담으려 한 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그 심장 박동에 대한 애정이다. 발타사르는 이 작품의 서정 문학적 양식이 오늘날에도 호소력이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소음 속에서 이 심장의 박동을 느끼기 힘든 이들에게 이 글을 바쳤다. 그들이 사랑의 본질 자체를 발견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책에 담은 인류를 향한 사랑의 신비,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에 대한 비전이 이 시대의 특히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이 책을 읽는 청년들이 인간 존재가 간직한 모순, 그리고 이 모순을 넘어서서 충만한 삶과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책을 접하는 청년은 물론, 뜨거운 젊은 시절의 심장 박동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하느님의 심장과 함께 다시 뜨겁게 타오를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어떻게 시간의 그물에 잡히지 않고 자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발타사르는 우리는 심장을 가진 존재이고. 심장이 뛰고 멈춘다는 이 생명현상, 심장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가 완성할 것은 것을 완성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3.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16,13-20
그렇다면 신앙인들이 완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고 전하는 마태오16,13-20은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는 말씀으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17절~19절을 첨부함으로써 교황 수위권 및 전권대사를 지닌 교회론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성서해설서들은 성서 속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적을 바탕으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를 선험적고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그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이어지는 세 번의 수난과 부활예고에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인지 정확히 몰랐으며,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다툼은 모름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십자가 수난에서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카이시리아에서 행한 베드로의 고백’은 복음서에서 아직도 잠들지 않은 논쟁 대상이 된 대목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베드로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수위성(首位性)이 예루살렘교회 초기부터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사가는 17~19절을 누구를 위해 첨가한 것일까? 마태오복음사가는 개종한 유대인들을 주 청자층으로 삼고 복음을 서술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럼에도 성서가 성령의 감도하에 써진 것임을 17~19절에서 다시금 확인 할 수 있다. 단지 개종한 유다인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향후 교회가 걸어갈 길을 분명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16, 16절)라는 고백은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서 슬피 울었다.(마테오26, 75)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 17)
Ⓐ, Ⓑ, Ⓒ는 베드로 사도의 어떤 급격한 영적 터닝포인트에 해당한다. 우리도 인생에서 어떤 터닝포인트를 겪을 때 이전과 이후의 급격한 낙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의 고백은 베드로였기에 가능한 고백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곧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결코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부활 후, 목자로서의 베드로의 위치는 요한 21장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19) 질문의 핵심은 교회가 수행해야할 임무였다. 그것은 바울로가 보존한 전승(Ⅰ고린 15:5)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게파에게’나타나셨다는 것에서, 예수가 부활한 후 맨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났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부활의 증인이었고, 이를 사도직의 표준이라고 공표했다(사도 1:22)는 점이다.
예수님 부활 이후 거의 15년 동안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회의를 주재하여 유다 대신 마티아를 사도로 임명했으며(사도 1:23~26), 교회가 탄생하게 된 오순절에 맨 먼저 일어나 설교를 했다(사도 1:14~39). 또한 예루살렘의 유대인 종교법정에 서서 사도들을 변호하는 설교를 하고(사도 4:5~22), 교회 안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훈계하는 재판장 역할도 했다(사도 5:1~10). 베드로는 12사도들을 이끌고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회를 확장했다(사도 9:32). 그는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갔고(사도 8:4~17), 그 결과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 사마리아에서 그는 마술사이자 주술적 치유자인 시몬 마구스를 만났다. 그뒤 사론 평지의 리따로 가서(사도 9:32~35) 중풍병자 애네아를 고쳤으며, 지중해연안 도시 요빠로 가서(사도 9:36~43) 다비타(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지중해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카이사레아에 간 베드로는(사도 10:1~11:18)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우스를 개종시킴으로써(사도 10:1)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함으로써(사도 10:48)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고, 이것은 유대 그리스도교도들 및 일반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됐다.(사도 10:10~15) 헤로데는 야고보(요한의 형)의 목을 베고 베드로를 체포하게 한(사도 12:2, 3) 시건은 초대교회의 지형을 바꾼다. 베드로가 감옥에 있는(AD 44경) 베드로를 주의 천사가 찾아왔고 두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려서 그는 감옥을 빠져나왔다(사도 12:1~8). 그는 즉시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가"(사도 12:12). 자기가 감옥에서 빠져나온 사실을 "야고보와 다른 교우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사도 12:17). 우리가 부활이후에 성서에서 베드로의 행적을 짚어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럼에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는 어느 시점에서 고백되었든 베드로는 예수님이 현존하신 그 곳에 그도 함께 살아 있다는 그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이길 때 그도 함께 이기며, 우리가 쓰러질 때, 휘청거릴 때, 우리가 의식 무의식으로 그분을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질 때, 그는 쓰러진 우리를 일으키고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만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우리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사도만큼 자비의 은총과 성인의 통공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사도도 없다.
베드로 사도가 우리와 동행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16절과 17절은 우리에게 <계시>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받은 계시는 단지 그에게 내린 축복만이 아니라 교회구성원 모두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는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 그의 고백이 우리와 함께 동행한다는 의미는 진리의 확장의지에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나온 계시는 진리다. 그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기에 그 뜻을 실현하지 않고는 결코 그분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의 심장』를 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 는 베드로가 받은 은총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베드로는 형상적으로 볼 때 무능하다. 그의 능력은 오로지 그를 이루고 있는 ‘원천적인 의지’에 있다”(H. Urs von Balthasar, Il complesso antiromano, Queriniana, Bresdia, 1974, p.353).
S. 치프리아니는 『말씀과 전례』에서
Ⓔ“베드로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의 영역과 또 그 믿음을 해석해주는 영역에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와 그의 모든 후계자들 안에는 우유부단하고 불확실한 인간이 아니라, 그 옛날 인간적 약함을 지닌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베드로와 바울로를 붙잡아주셨듯이,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붙잡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계시를 당신 은총의 성사로 베풀어주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주신다.
그렇다면, 원천적인 의지,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활동한다는 통찰이 나올 정도로 베드로에게는 왜 그토록 놀라운 은총 지위에 초대한 것일까? 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께 집중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집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류와 사랑에 빠진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베드로에게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축일을 같은 날 기린다. 두 사도는 다른 영성과 다른 성향을 지녔지만 그분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합집합은 그분들은 예수가 인류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통찰한 분들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예수님의 사랑에서 헤어 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일 것이다. 그분들은 누가봐도 예수님께 집중했던 사도였다.
베드로가 받은 계시, 바오로가 받은 계시를 보면, 왜 그런 직접적인 계시가 그들에게 내렸는지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듯, 사랑에 빠진 자만이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들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사람들은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에 끌리듯, 사랑은 사랑에 응답한다. 계시는 사랑이기에 사랑의 그릇에 담긴다. 그러기에 그들이 지닌 인간적 약함은 그 계시를 받을 자격요건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오로사도의 통찰처럼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바로오 사도는 제2독서에서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서11,33-36)라고 전한다. 계시의 출처는 하느님이며, 그분께서 나와서, 그분을 향하여, 그분께로 돌아간다. 이를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바오로 영성의 본질이 바로 직접계시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 계시의 출처가 바로 하느님이다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시야말로 '하느님의 풍요, 지혜, 지식'의 원천으로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임을 천명한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디아서1, 12)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2, 20)
바오로 사도는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을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었다고 계시는 바로 인류사랑에 바탕을 둔 창조은총임을 전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계시의 목적이 분명해 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그 사랑에 빠진 자의 원천적인 의지를 통해 계시는 작동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약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직접 계시를 통해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계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할 뿐 아니라 계시를 받은 사람의 인격마저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처럼 계시와 완전히 하나로 빙의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 사도처럼 급격한 인격의 낙차 속에서 선험적으로 체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바오로사도가 받은 계시는 우리에게 어떤 무한한 신뢰를 안겨준다. 바오로 사도가 아무리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고백해도 바오로의 가시(2고린토5-10)는 이미 천상의 가시처럼 들린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통찰에서 찾을 수 있을듯하다. (바오로 사도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것과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하고만 사랑에 빠진 것의 차이를 가설적 추론으로 생각하게 된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강림 후에 행보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이후에 나오는 <반석-교회- 하늘나라의 열쇠>를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져 아직도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계시에 해당한다. 베드로 사도는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베드로사도는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무한함에 우리를 맡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 전해진 계시가 믿음을 심화시켜 준다면, 베드로 사도를 통한 계시는 희망을 심화시켜 주었다는 것이 하느님께서 온 계시의 풍요로움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를 통해 전해진 계시들은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결과들이겠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절대고독을 통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계시의 단호함은 흔들림의 심연 속에서 말하고 살아야 했을 것이고, 베드로 사도는 만천하에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표출하며 메신저의 길을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오로 서간문 전반에 걸쳐 흐르는 내적투쟁에서 알 수 있다.
Ⓗ밖으로는 싸움이고, 안으로는 두려움이었습니다(2고린토7,5)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6,14)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비서 1, 21-24)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계시는 언제나 십자가와 함께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십자가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계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도만 계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나? 그렇지는 않다. 교회구성원은 누구나 계시의 은총속에서 그분을 알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삼위일체 사랑을 고백하며 신망애 삼덕을 키운다. 그러기에 계시는 받는다가 아니가 계시는 듣는다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는 베드로사도를 통해 교회일원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고백했던, 고백한, 고백하게될 보편고백에 해당한다.
그 보편고백과 더불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개별적으로 물으신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고, 사랑의 근원이기에 우리가 돌아갈 ‘근원, 본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 Urs von Balthasar)가 바라본 대로 세계는 하나의 심장으로 모아진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근원.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완성할 것은 ‘신망애’ 삼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신망애’ 삼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 때문이고, 주님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한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이고, 성령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며,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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