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 가면, 순애데레사가 탱큐!
지혜에 관한 명상,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연중23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를 중심으로
1. 류시화, 「떨림」 & 「흉터의 문장」
류시화의 「떨림」 & 「흉터의 문장」을 읽어본다
손가락을 못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면 / 그 순간 손가락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 마찬가지로, /존재가 깊이 상처입어/날개가 부러지거나 / 심장에 금이 갈 때/너는 비로소/너 자신에게로 돌아온다/울대를 다쳐 바람으로 대신 우는 울새처럼/차갑고 고독한 행성 가장자리에서/별똥별 빗금으로/금 간 곳 꿰매며/다시 삶에 놀라워하며(「떨림」)
「떨림」은 어떤 이유에서건 “존재가 깊이 상처입어/날개가 부러지거나 / 심장에 금이 갈 때/너는 비로소/너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필연적으로 어떤 상처가 놓여 있다는 것을,
「흉터의 문장」에서는 흉터는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불의 흔적이 단지 흔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줄 테니”에서 이 흉터의 흔적이 바로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말한다.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터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냈음을// 흉터는 말해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흉터의 문장」)
류시화의 「떨림」 과 「흉터의 문장」을 읽다보면,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라고, 너와 나라는 개별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상처와 흉터, 그 흔적이라는 것에서,
상처나 흉터를 타인에게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바꾸어 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흉터로 상징되는 자신을 넘어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때만이 우리는 자신의 상처나 흉터로부터 자유롭자고 말할 수 있겠다.
2. "빛을 비추려면 불타야 한다.What is to give light must endure burning."(빅터 프랭클)
물이 자정능력이 있듯, 어떻게 타자를 무한히 신뢰하고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인간에게는 영적 무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바라본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이 있다.
자아실현과 자기표현을 넘어, 인간은 자기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바라본 빅터 프랭클(1905~1997년)은 『무의미의 의미-내 안에 빛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에서 삶은 무조건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조차 병적인 것이 아니라 그만큼 건강하다는 징표라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하는, 즉 무의미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의 힘이 되는 우리에게는 지기 치유능력인 로고스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①그렇다면 실존적 공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 본능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와는 대조적으로 무엇을 책임지고 해야 하는가에 대해 더 이상 전통이나 가치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책임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때로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하거나(conformity: 순응주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totalitarianism: 전체주의).
②이른바 삶의 3대 비극인 고통, 죄책감, 죽음 같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것들조차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무기력한 희생자가 되어 갇히고,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직면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그러한 어려움을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인간성취로 바꿀 수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삶의 비극을 승리로 바꿀 수 있다.
③이는 썰물 때 드러나는 암초에 비유할 수 있다. 썰물 때문에 암초가 나타나는 것이지 누구도 암초가 썰물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죄책감도 내인성 우울증 같은 정신증적 우울증의 원인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감정적 썰물인 우울증 때문에 죄책감이라는 암초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생리적 원인에 의한 정신증 증상으로 고통을 겪는 환자가 자신의 우울 증상을 ‘실존적 죄책감’의 측면에서 영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도덕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되는 경우 그런 해석이 잠재적으로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히 예측할 수 있다. 이는 자책(self-accusation)하게 만드는 병리적 성향에 또 다른 형태의 병리적 요인을 추가하는 꼴이 될 것이며, 결국 환자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④‘슈타인호프의 대량학살자’로 불리던 닥터 제이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대답은 이랬다.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붙잡혀 슈타인호프 병원 독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있던 독방의 문이 열려 있었고 아무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치 당원들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나는 처음에는 시베리아에서 그 다음은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루블라냐 감옥에서 수년간 수감되어 있었던 전 오스트리아 외교관을 진료할 기회가 있었다. 신경적으로 이상이 없는지 검진을 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닥터 제이라는 사람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안다고 답하자,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루블라냐에서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방광암으로 40세에 사망했지요. 그러나 죽기 전까지 그는 정말 최고의 동료였습니다. 그는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감옥에 있었던 오랜 시간 동안 제가 만난 사람들 중 그는 정말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슈타인호프의 대량학살자’로 불리던 닥터 제이에 대한 이야기다. -p. 57
⑤도스토옙스키를 정신의학적 관점으로 투사해보면 그는 단지 간질병 환자에 불과하다. 베르나데타는 환각 증상을 보이는 히스테리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의학적 차원에서 투사하게 되면 ‘인간존재’로서의 도스토옙스키라는 사람과 ‘질병’으로서의 간질병 환자를 구분할 수 없다. 또한 정신의학적 차원에서는 ‘인간존재’로서의 성녀인 베르나데타와 ‘질병’으로서의 히스테리 환자를 결코 구분할 수 없다. 정신의학은 인간존재로서의 도스토옙스키를 간질병 환자로부터 분리시키고 인간존재로서의 베르나데타 성녀를 히스테리 증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예술적 성취와 업적 그리고 종교적 참 만남과 경험은 정신의학적 범주의 개념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들의 자리는 정신의학을 넘어선다. 병리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정신과 의사들은 알지 못한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이며 영성가이자 철학자로, 빈 3대 심리치료학파 중 하나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인 그는 인간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깨달았다고 토로한다. 인간은 가스실을 발명한 존재다. 그러나 또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가스실로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 반 동안 매일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최악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형, 그리고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수용소 안에서도 ‘누군가는 성자가 되고 누군가는 돼지가 되는 모습’을 목격했고, 영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ing for Meaning)』는 지금까지도 극한에 던져진 인간이 어떻게 자신 안에 있는 로고스를 체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길을 열어주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 영향을 준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였다. 프랭클은 프로이트에서 무의식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 동의하면서 인간은 본능과 충동의 차원을 넘어선 영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무의식에는 책임감, 양심, 품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들러에서 인간에게는 자기결정권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면서 권력의지로 인해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원초적 욕구에 좌우되는 이유를 받아들이면서,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조건이 권력의지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가장 고귀한 것을 바라보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데 초점을 두었다.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는 자유의지를 지닌 영적존재라는 사실을 통합하여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자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로고테라피가 지향하는 자기치유의 길이었다. 외부에서 비쳐주는 빛을 보기 위해 자기 안의 빛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에서 "빛을 비추려면 불타야 한다.What is to give light must endure burning" 라는 치유의 로고스를 인류에게 선사했다.
3.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18,15-20은 루카17,3에도 실려 있는 관계론으로, 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형제를 지켰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세기4,9)
여기서 형제를 지킨다는 의미는 그를 그로써 적극적으로 존재케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를 그로써 존재케 하는 그 중심에, 그가 누군지 알게하는, 그를 존재케하고자 하는 나는 누구인지 알게되는, <말-말씀>의 관계가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주 묵상 주제인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마태오 18, 21-23),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오 5,43-48),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오7, 1-5) <황금률>(마태오7, 12) 등과 함께 이 땅(이웃사랑)의 현실이 어떻게 하늘(하느님 사랑)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연중 21주, 22주와는 다른 맥락으로 23주, 24주를 연결하여 <말-말씀>의 관계가 지닌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
무엇은 얻고 또 지킨다는 것은 그럴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에서 <말씀>이 지닌 어떤 힘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미태오 복음사가의 교회론과 연결하여, 의인의 교회가 아니라 죄인의 교회, 단죄의 교회가 아니라 자비의 교회와 같은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마태오18,15-20에서 어떻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가가 초점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주체와 대상을 동일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과 말씀>의 관계를 통해 생각해 본다.
[1]<말-말씀>에는 어떤 창조성이 있는가?
연중 21주와 22주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인 종적인 관계로부터 횡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십자가를 통한 교회론을 정립했다면, 23주와 24주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횡적인 관계로부터 종적인 관계로 향하는 용서를 통한, 용서받은 교회론을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리에서 사도로 거듭났던 복음사가의 교회론이 묵직하게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일어나 그를 따랐다.(마태오9,9-13/마르코2,13-17/루카5,27-32)
이어지는 13절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것에서 죄의 상태에서 한 순간에 사도로 거듭날 수 있는 힘은, 너는 세리고, 따라서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렇게 우울하게 앉아있지 말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었다. 복음사가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께 그대로 담겨 있다는 말씀의 현존을 영혼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그 한마디에 세리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를 수 있었다. 사도로 거듭 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이 지닌 능력이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힘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말씀만이 그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말씀을 깨우고, 일어나 걸어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는 파견은 그런 말씀의 힘을 체험하라는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태오18,15-20에서 용서를 통한 교회론, 그 바탕에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라 <말씀>에 담긴 자비에 방점이 놓여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마태오18,15-20은 Ⓑ18절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
여기서 어느 정도 선한 행동처럼 보이는 Ⓐ의 행위가 Ⓒ의 행위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땅과 하늘에서 <매면-매이고, 풀면-풀어지고>의 의미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땅에서 매어 있는 것을 누가봐도 윤리적인 비판을 할 수 없이, 증인까지 세워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윤리로는 풀어주기 어려운 것조차 풀어주는 자비라고 할 때, 그 자비가 하늘과 땅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조건은 한사람-두세사람- 교회라는 점층적인 단죄의 확증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일 듯하다. 그것은 네가 죄를 짓거든 나는 어떻게 이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에는 주의기도처럼 언제나 황금률이 적용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제자로 삼아’(마태오28,19)라는 마태오복음의 마지막 장을 연결하여 바라본다면, Ⓐ의 사랑이 땅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에서 맺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삼으셨고, 이민족이라면 더욱 보살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셨던 마태오복음의 방향성에 관한 것으로 Ⓐ가 땅에서 매인 것들을 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말에는 말씀을 담겨 있지 않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겠다. 용서의 황금률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이라는 조건부에서 <죄>가 형성하는 관계론의 본질-죄의 개별성과 죄의 연대성의 근원을 <말과 말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ㅡ그렇다면 Ⓐ와 다른 Ⓒ의 관계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는 교정이 목적이다. 즉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형제를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곳에 말이 난무한다. 그러나 Ⓒ는 그를 교정해주려는 사람들의 변화에 초점이 맞쳐져 있다. 말씀이 용서의 주체 안에 있다.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대상과 상황과 맥락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들의 말이 말씀으로, 원함이 청함이 되어 아버지께 이르고,(그들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같아지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인 모임이 주님의 이름(사랑)으로 모인 곳이 된다. 살아 있는 말씀의 성전이 교회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깨어진 관계를 치유했다는 의미다. 그것은 말씀으로 용서의 주체와 대상이 동일선상에 놓여야 가능한 일이다. 죄의 경중이 용서의 포인트가 아니고 죄의 유무가 용서의 포인트가 된다.
부연해 보자면, Ⓐ처럼 타인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하고, 교정하는 것이 에고에게는 친절하고 옳고 선한 일처럼 보인다. 그곳에 윤리라는 말이 존재한다. 용서는 윤리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윤리를 완성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바라보면 에고만이 에고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한다. 여기서 에고와 성령을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과 말씀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에고의 분별심과 성령의 분별심은 상반된 시야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윤리적 우월감에서 정의라는 이름의 분별심을 말을 통해 동원한다면, 성령은 창조의 온전함 속에서 자비와 치유라는 사랑의 분별심만을 행사한다. 따라서, 성령은 에고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에 판단하지 않는다.
너희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대로 그래도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은 것이다. (마태오7, 1-5)
그렇기에 성령은 에고에 집중하지 않는다. 에고에 집중하는 것은 타인의 죄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태를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부재한다. 이는 죄책감이라는 후회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같은 죄를 반복해 짓거나, 같은 죄를 반복해 고백하거나, 그 바탕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챔감이 있다. 죄보다 더 무서운 죄책감은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임을 드러낸다. 죄책 혹은 자책은 말들의 범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말의 범람은 자신의 죄 역시 교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죄로 일컬어지는 모든 오류의 해제는 오직 살아 있는 말씀,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 23)
그런 맥락에서 주님 부활의 선물이 왜 평화-성령-용서인가를 곱씹어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말로 타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말씀>의 현존 뿐이다. 타자의 오류를 오류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실은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내가 용서받았음을 바라보지 않고는 타인의 죄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언제나 오류를 넘어서는 연습, 간과, 오버룩, 그가 지닌 1%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자, 그리스도의 비전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것이 모든 관계 안에서 말씀을 현존케 하는 성령의 역할이다. 따라서 타자의 어둠을 어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의 어둠을 고착화 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나의 오류 역시 실재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용서받았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나와 타자, 모든 죄와 그 경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죄의 교정은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하느님에게 오는 것이기에 그렇다. 성령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 성령은 오직 모든 것을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창조의 상태를 회복시켜준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라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할 역할을 대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시간 안에서 오류로 인한 관계의 깨어짐, 분리에서 치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로 단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치유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치유다. 살아있는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 치유다. 치유를 배우면 단죄는 다시는 실재가 아니며 나의 모든 오류도 실재가 아니기에 용서받았음을 바라보게 된다.
사랑받았음을 알때, 사랑하는 데 힘이 들어가지 않듯, 용서 받았음을 알 때, 용서는 당연한 것이 된다. 내가 사랑받았다면 사랑받지않을 자 누구이며, 내가 용서 받았다면 용서에서 제외될 자 누구이겠는가?
[2]여기서 복음에서 다루는 ‘죄’와 ‘죄들’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할 듯하다.
공관복음은 주로 복수명사인 ‘죄들’에 대해 말한다. 이는 하느님 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여기서 죄의 고백과 용서를 거론할 때(마태3,6/마르1,5/3,28/11,25/루카11,4) 세리와 창녀라는 그들의 행업 자체를 사회악, 죄라고 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개별성을 지우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는 집단적이고 일반적인 유다인들이 규정한 죄의 개념으로 선민의식이 그 배후에 깔려 있다. 죄의 연좌죄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과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지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죄들’이 아니라 ‘죄’로 인간 개개인의 ‘죄’만을 이야기 한다. 인류 전체가 인간 개개인을 ‘죄’로 충동하고 몰고가는 ‘실추된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F.뵈클레, 『기초윤리신학』)
요한은 인간이 저지르는 개개의 죄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져 인간을 노예로 삼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원천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이 세상의 어둠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3, 19)너희는 자기 죄 속에 죽을 것이다.(요한 8,21-44)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9,40)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쫒겨날 것이다(요한1231.32)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1요한3.5) 죄를 저지른 자는 악마에 속한 자입니다(1요한3,8)
바오로는 요한과 같은 선상에서 죄를 바라보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바오로 자신까지를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바오로는 굉장히 용기 있고 정직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인간상태 혹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 상태를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볼모상태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힘입지 않고는 그 누구도 죄와 죽음의 권세에 벗어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바오로는 육체를 지닌 인간의 조건에서 죄의 경향성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다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1, 18-3,20)모두가 비뚤어져 다같이 길을 잘 못 들었다(로마서3, 10-12)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서7, 7-25)
나아가, 요한과 바오로는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죄와 어쩔 수 없이 일의 상태로서의 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어떤 병립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결단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인간개개인이 범하는 범죄행위와 전체 인간이 행하는 죄들이 연대성을 이루어 죄의 증식원리가 된다고 바라본 것이다.
바오로는 인간은 세가지의 강력한 불구속 상태에 있으며---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때만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데, 그때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뿐 아니라 그분의 영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놓여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토3,17)
글의 도입부로 돌아가서, 연중 21주와 22주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인 종적인 관계로부터 횡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십자가를 통한 교회론을 정립했다면, 23주와 24주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횡적인 관계로부터 종적인 관계로 향하는 죄의 용서를 통한 교회론을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리에서 사도로 거듭났던 복음사가의 교회론의 바탕에 용서와 자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따르라>는 한 말씀이 세관에 앉아 있던 그의 영혼을 치유하고 그로 하여금 사도로 걸어가게 만든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를 통한 교회론이든, 죄의 용서를 통한 교회론이든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이유는 우리에게 창조신앙을 회복시키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말씀을 경청하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룩서는 이를 지혜에 관한 명상에서 그 답을 전해준다. 죄와 분리의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한 처음 모든 시원의 근원에 있던 말씀(지혜)이 있었음을 바라보고, 말씀(지혜)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권한다. 인간의 불행은 지혜의 샘을 저버린 탓이고, 지혜가 가르키는 길을 걸었더라면 영원히 평화롭게 살았을 것임을 기억하라고 거듭해서 권한다.
지혜(슬기)를 붙잡는 이는 살고.지혜(슬기)를 잃은 자는 죽는다. 야곱아, 돌아서서 슬기를 붙잡고 그 슬기의 불빛으 향해 나아가라.(...)예루살렘아 동쪽으로 눈을 돌려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바라보아라(...) 예루살렘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바룩서 3장, 4장, 5장)
지혜에 관한 명상은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맥락에서, 칼 바르트는 이를 가리켜, "창조는 계약의 외적 기반이요, 계약은 창조의 내적 기반"이라고 구세사의 인과율을 조명한다. 이는 창조주와 그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말씀>으로 규정하고, 그 <말씀>을 경청할 것을 모든 부자유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유의 길임을 권한다. 또한 창조는 한처음에 이미 종결된 행위가 아니라(이사야43,14-21) 영원하기에, 따라서 창조는 현재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의 현존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단지 인간들에 의해서만 아니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전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구원의 도구로 머문다(, W. 바이너르트, 『창조신앙』)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빛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지닌 <말씀>의 힘, 치유와 창조능력에 있다고 하겠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18,15-20은 형제를 얻거나 잃는 배후에 <말-말씀>의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말의 윤리에서 말씀의 현존만이 모든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타자를 용서하는 문제를 넘어, 내가 용서받았음을 바라보는 황금률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관계 안에 <말씀>이 존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타인을 설득하고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은 옮음의 윤리가 아니라 말씀의 현존, 사랑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말의 단죄 속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땅과 하늘에서 우리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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