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오늘’이라는 ‘영원’, 그 웜홀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2)

나뭇잎숨결 2023. 9. 30. 21:06

사진작가 분이가 대천에서, 탱큐!

 

'오늘’이라는 ‘영원’, 그 웜홀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2)

연중26주일, "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를 중심으로

 

 

 

 

1. <오늘>은 무엇인가?

 

 

긴 연휴라, Y에 갔다. 그곳에 있는 노트북을 쓰면 되니까 홀가분하게 갔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인터넷 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도 유에스비로 저장해 오면 되니까,  추석 달도 원없이 봤다. 사랑하는 이들과 그 달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지만, 신자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니까 웃으며. 하느님의 부드러운 모습 같기도 하고, 성체같기도 한 그 달을 보고 또 봤다. 서울로 올라와서 글을 올리려고 보니 분명히 저장했다고 생각한  글이 없었다. 참 기계치다. 늘 부족하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부족하다. 바오로 사도는 가시가 하나라는 데, 나는 가시가 너무 많다. 무능의 극치다. 그러니 포도밭 일꾼으로 살라고 불러주셨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썼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이미'를 유보하는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적인 시간을 살면서 어떻게 '오늘'을 알 수 있는지를 성찰하기 위해, 먼저 시간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기로 한다.

 

['오늘’이라는 ‘영원’, 그 웜홀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1)]에서 인용했던 글들을 다시 읽어본다. 

 

①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 11권 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②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③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④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⑤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⑥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⑥에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⑦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순수한 지각만이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빛으로 ‘나’를 비춥니다. 그때 ‘나’는 몸이라기 보다 ‘그것’인 것같이 됩니다. 보편의 체험입니다.(데이비드호킨스)

 

⑧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자이다. 당신은 춤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가정한다. 그 마음을 넘어야 현존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때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이 모든 실체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한다.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⑦에서 데이비드 호킨스 ⑧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바라본 시간은 시간이 사라진 상태, ‘오늘’을 사는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두 사람은 물질의 우주에서 영혼의 우주를 통합하고 넘어선 시간을 사는 현대 영성가들이다. 두 사람이 바라본 ‘오늘’이라는 시간도 우리가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의미로써의 ‘오늘’이 아니라 ‘평화’라는 어떤 상태로, 영혼의 현주소를 의미한다. 이때, 시간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평화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언명이 적시하는 바로 무시간의 시간체험과 같은 맥락이다.

 

위의 7명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바라본 시간은 단선적으로 실존적 시간관(후설, 베르그손, 레비나스, 하이데거)과 존재론적 시간관(아우구스티누스,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분절적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그들이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내적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문제 삼거나 고찰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상정하지 않을지라고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이 신이기 때문이다.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2.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1]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전하는 마태오21,28-32은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은 당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첫 번째 답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21, 23-24)

 

예수님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응수하신다.

 

<먼저>라는 시간부사를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 는 것이 사후의 천국론인가? 아님 오늘 지금부터의 실재론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믿음의 실재>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A(세리와 창녀)가 B(너희)보다 ‘먼저’?

 

 마태오 복음사가는 A와 B를 비교하여 하느님 나라에 A가 B보다<먼저> <들어간다>는 어떤 구원의 적정선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절대적인 사랑 혹은 자비, 혹은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은총이든, 자비든, 용서든 누구보다 적게나 누구보다 많게라는 비교우위, 혹은 상대평가로 우리가 살아온 삶을 평가, 재단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남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 역시 죄의 차원이 아니라 은총의 개별성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더구나 죄의 유무, 자유의지의 선택을 말할 때도, 어떤 민족 어떤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한 집단 전체를 묶어서 구원을 받는다거나 벌을 받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이나 은총을 집단화하여 바라보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사랑을 개별적인 것으로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득권층에서 배제된 나아가 죄인으로 주홍글씨가 붙은 예수님 시대 세리나 창녀라는 어떤 직업군에 대한 일괄적인 구원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한다. 그분은 죄인을 부르러 왔으니까, 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는 것이 성서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는 그들은 누가 죄인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죄인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죄인은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인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를  살펴보면, (1)그리스도교는 왜 타력종교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2) 죄의 전염력은 바이러스보다 강하다,는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는 바로 앞 절의 질문에 대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21, 23-24)

 

당대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삼았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권한 위에 다른 권한이 있을 수 있나? 라는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의 바탕에는 나는 나 스스로  철저하게 613조의 율법을 지켜 구원을 확증할 수 있다는 구원논리가 지배적으로 깔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건 너희의 생각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 선 것이다. 

 

마태오21,28-32의 청자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다.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분은 예수님이고,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대상이 그들로부터 죄인으로 규정받은 세리와 창녀들이다. 이 설정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의 실마리를 던진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구원이 개별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개별적인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집단화하고 있는 그 바탕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인가 그리스도를 배제한 구원인가를 이미 나누어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인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곧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고, 결국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로 통칭되는 율법학자와 바라사이 -당시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구원에서 뒤로 밀린 이유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인 <의로움의 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하는 것에서, 그것을 다시 추론 할 수 있겠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마태오21,28-32을 도식하며

 

Ⓐ+Ⓒ(원인)----------------------->Ⓑ(결과)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과연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 할 수 있나?를 자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원의 은총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 전한 <의로움의 길>이 나누어진다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세리나 창녀들만 세례를 받으로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지방의 바리아시파와 사두가이파들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로 갔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할 때, 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오3, 1-12/마르코1, 1-8/루카3,1-9)라고 전한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진노했다고 전한다. 나아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신과 대비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했다.

 

세리와 창녀에게는 오직 죄의 고백자체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면, 바리사이나 사두가이파 즉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속한 집단에게는 회개의 구체적 행실을 요한은 요구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이 주었던 세례는 개별적인 죄의 고백 이후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연중25주에 바라본 <합의>와 <정당함>처럼 받는 것이지, 스스로가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어떤 행위로 <의로움>을 인정받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움의 길>이 무엇인가? 당시의 기득권층이 생각했던 의로움은 율법을 통해 가능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합당한 공로라고 생각했다면,  요한이 생각하는 행실은 철저하게 애주애인이었다. 율법의 형식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었다.  세리와 창녀라고 통칭되는 이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주어지는 구속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리사이나 사두가이가 받아야할 의로움은 거기서 더 나아가 애주애인이라는 구체적 율법정신의 실천이었다. 전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종적인 의로움이라면 후자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동시에 회복되어야 하는 종적이면서 횡적인 의로움이었다.

 

여기서 당연히 구원의 맏아들이라고 자처했던 이들이 놓친 의로움은 그들 스스로 의로움을 쌓을 수 없었다는 것과,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모세5경에서 찾아낸 613개의 율법조항이 만들어진 이유와 그것을 왜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 받아야 했는지를 그들이 간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간과했는지 하느님과 모세와의 첫 대면에서, 그 답이 나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기3, 5-6)

 

<거룩한 땅>이라는 것에서 율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왜 모세가 중재자로 있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율법은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로마서1장~16장) 스스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행위로 그 죄를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사랑을 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죄를 피하기 위한 법이었다. 또 그들 사이에 모세가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언어와 그들의 언어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계시를 해석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모세의 육체가 하느님과 소통을 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거룩한 영이 하느님과 소통을 했다는 핵심을 그들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의로움을 받아들인 이들에 속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한 순간에 그들은 자유를 알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의 용서를 통해, 육신을 지닌 존재에 머물지 않고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비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가 미사 중에 드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기도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고백은 우리는 자유인이라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구축한 의로움으로 하느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자력 종교에 해당한다. 자력종교의 한계란 죄가 아닌 율법에 억압당하다 결국 더 큰 죄에 눌리게 되어 누가 죄인인가만 규정하느라 한 평생을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할 수 없었음에도 그들은  그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선행, 행위, 공로, 명상, 깨달음으로 의로움을 쌓을 수 없다는 것을. 의로움은 하느님의 자비에 바탕을 둔 '있음-존재함'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16장에 걸쳐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한  장대한 구원론을 펼친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서 1, 17)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입니다.(로마서4, 13-14)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서13, 10)

 

바오로 사도는 죄와 율법과 죽음을, 그리고 성령과 믿음을 하나로 묶어 율법의 완성이 사랑임을 강조한다. 전자는 자력종교의 양태라면 후자는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타력종교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진선미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선의지라 할 수 있다. 방종의 의지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는 것은 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 보듯, 네! 라는 응답을 관류하는 수동적인 적극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후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에서 자유로워진 <오늘>을 산다는 말과 같다. 그 <오늘>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2]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 이들이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 는 믿음의 실재는 무엇인가?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 이들이 만난 <오늘>에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할 둣하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은 통상적인 시간인 과거-현재-미래가 사라진 초시간적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세리나 창녀들이 먼저 하늘 나라를 들어갔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 7)/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의 마음을 안고하게 하지 마라(시편95, 7-8) 자캐오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애 하겠다(...)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 1-10)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잇을 것이다(루카23, 43)

 

우리는 성서에서 자주 구원의 날을 <오늘>이리고 한다는 것을 듣는다. 성서에서 말하는 <오늘>은 현재가 아니다.  <오늘>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진 초시간이다.

 

그렇다면, 먼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치매환자들이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불행했던 기억을 잊지 못하는지? 기억의 매커니즘 속에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더 오래, 자주 출력하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은 주문한다. 그것이 <오늘>을 해명하는 키워드다.   이는 연중 24주 살펴본 용서의 은총을 사는 것을 말한다. 용서는 언제나 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용서의 완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지 그 길을 알려준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 이들이 경험한 시간은 바로 그 용서의 완벽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자신이든 타자든 용서할 것이 남아 있다면 역사청산처럼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용서할 의향이 있어도 용서가 어려운 것은 용서 그 자체만을 스스로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은총이다.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한 신적-행위이다.

 

<평화-성령-용서>는 언제나 함게 실행되고 작동되는 용서의 트라이앵글이다.  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분에게 용서의 은총을 우리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마태오복음 마지막 메시지의 현존 체험을 의미한다. 불확실한 미래, 나아가 우리 육체의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와 언제나 확실하게, 영원하게 함께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고 부활하신 분이어야 한다. 죽음에서 죽음으로 끝난 무의 상태가 아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것을 경험하는 일은 하느님의 섭리와 현존을 믿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두려움 없이 불투명한 시간에 내어 맡긴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 우리는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반복하여 저지르는 같은 오류들, 그리고 반복적인 고백들은 아직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쌓아서 구원을 스스로 구축하겠다는 것은 사실 그들 내부에 역사적인 상처이든 개인적인 상처이든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는 절규에 해당한다.

 

그래서 복음 사가는 <먼저>라는 부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먼저>라는 것은 자비의 언어다. 침몰하는 배에서, 선택된 백성을 지렛대 삼아 약한 자의 상징인 이방인과  아웃사이더를 먼저 구원하고, 그들의 구원을 통해서 다시 선택된 이들을 구원하는 이 자비의 순서, 죄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면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던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할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원의 완성은 그분의 구원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하는 갈망보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크기에 구원은 필연적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구원의지를 알기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빈 손을 그분 앞에서 두려움 없이 펼쳐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용기가 바로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리나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그들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용서든 사회가 규정한 죄인이라는 카테고리든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설사 여전이 세리이고 여전히 창녀였다 할지라도 미래를 그분에게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매주 같은 죄를 고백하더라도 말이다. 생존을 위해서 하는 업이지 쾌락 때문에 그 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은 그분의 구원의지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서 우리는 <오늘>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와 마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영원을 어디서 만나고 불멸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아가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누가 일러준다고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출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모든 이들의 구원 상태, 영적 태어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위로부터,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부터 자신이 다시 태어났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전한다. 그것이 영원의 얼굴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 1-23)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실재인 그 <오늘>은 그런데 역설적인 <오늘>에 해당한다.  토마스 머튼은 『생명의 빵』에서

 

"믿음은 이러한 영적 실재의 경험으로 통하는 문이다. 믿음은 개념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며, 그 개념을 '넘어서' 있을 뿐 아니라 개념적 지식의 영역 '안에' 있기도 한 '빛나는 어둠안에까지' 이른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체험하는 일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역설적인 실재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다. 마치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처럼 결합하기 어려운 이종(異種)의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원리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가장 힘든 시간들은 곧잘 가장 큰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웜홀wormhole은 우주 공간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의미로 제안된 이론상의 개념으로, 사과 표면에 있는 벌레가 사과의 정 반대편으로 가려면 표면을 따라가기보다 중심을 지나가는 게 빠르다. 이때 사과에 중심을 관통하는 웜홀이 생기는데, 이 웜홀은 사과의 표면보다 고차원적이면서 서로 다른 사과의 표면을 잇는 최단 경로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시공간의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고차원 구멍이라는 의미에서 웜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찰스 리우)

 

인터페이스 interface는 좁게는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조작 방식을 말하며 넓게는 서로 다른 두 물체 사이에서 상호간 대화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인터페이스는 이종(異種)의 경계면이라는 의미에서 '계면(界面)'이라고 번역해 쓰기도 한다.(도널드 노먼)

 

인류는, 웜홀, 인테페이스라는 개념과 이론을 만들고 그로 인해 우주의 작동원리를 조금 더 이해하거나 상용하기에 이르렀다.  ‘빛이 중력장을 넘어선 어떤 공간에서는 휘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축적된 연구 성과물이자 4차혁명을 가능케 한 베이스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거나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우주의 작동원리인 웜홀은 이해하면서, <오늘>이라는 초시간적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가 삶의 편리를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