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존재의 편린(片鱗)에서, 창조질서와 은총질서가 하나가 되는 향연(饗宴)

나뭇잎숨결 2023. 10. 13. 07:00

 

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고맙습니다!

 

존재의 편린(片鱗)에서, 창조질서와 은총질서가 하나가 되는 향연(饗宴)

연중28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를 중심으로

 

 

 

 

1.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10월10일 김남조 시인의 영면에 부쳐, 절대고독의 백미라 불리는 「가난한 이름에게」를 읽어본다.

 

이 넓은 세상에서/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이 넓은 세상에서/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검은 벽의/검은 꽃 그림자 같은/어두운 향로//고독 때문에/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이가 시린 한겨울 밤/고독 때문에/한껏 사랑을 생각하는/고독한 여인네와/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얼굴을 가리고/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불신과 가난/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어딘지를 서성이는/고독한 남자들과/허무와 이별/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고독한 여인네와//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머리를 수그리고/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울면서 눈감고/입술을 대는 밤// 넓은 세상에서/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김남조 시인의 「가난한 이름에게」는 절대고독의 끝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이 어찌 고독을 논할 수 있을까?를 묻는 진정 고독에 경이로움을 표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독이라는 단어 자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가 고독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 만으로도 인간의 지위가 과분한 것이라고 시인은 바라본 것이다. 인간의 품위는 그가 고독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러기에 시인은 고독을 가난과 대체하여 쓴다.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원래 인간은 가난하게 한 생명으로 왔고, 무엇을 이룬다는 것 역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드러낼 뿐이며, 결국 인간은 가난한 존재로 와서, 가난한 존재로 살다, 가난한 존재로 간다. 지극히 공평하고 상투적인 삶이다. 그런 상투적인 삶 속에서 고독을 알고, 느끼고, 살았다면 그는 세상의 시선으로는 "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겠지만  시인의 시선으로는 그지없이 고귀한 인간의 품위를 맛보았다는 반어이자 역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나는 가난하다’와 ‘나는 고독하다’는 것은 인식의 지평이 아니고, 인간의 품위에 관한 시선에 가깝다. 인간에게 <고독>은 얼마나 닿을 수 없는 열망인가? 그렇기에 어떤 사람과 고독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여, 이 지상에 착지하지 못한 상태를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라고 시인은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독은 인간이라는 이름에게 주어진 고귀한 인격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심혼에 다가가려는 시인, 예술가, 연구가, 도서관환상자, 영적안내자들은 모두 고독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는 길을 간다. 그래서 고독은 벗어나야할 것이 아니라 고독속으로 더 깊이 침잠해야한다는 응시가 필요할 것이다. 

 

이제, 영면에 들어간 시인은 그 고귀한 고독(시)마저도 차마 뒤돌아보며 봉인하였을 것이다.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2. ‘점’의 사유를 넘어 새로운 ‘선’의 사유로(화이트헤드)

 

 

고독이 인간의 품위라면, 생성과 공존 역시 인간의 품위라고 바라본 사람이 있다.

 

인간은 과정중에 있는 존재라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은, 과정이 곧 실재다, 라고 유기체철학을 주장한 화이트 헤드는 왜 철학이 관념만을 다루어야 하는가? 실재하는 물질, 공간, 시간 사이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우주와 자연은 끊임없는 생성 혹은 과정의 흐름이라고 규정하고, 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유기체철학을 주장한다. 그는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유기체철학』을 통해 세계의 실재, 인간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①"유기체 철학의 목적은 '체계' '과정' '새로움으로의 창조적 전진' '진정한 사물' '엄연한 사실' '경험의 개체적 통일성' '느낌'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으로서의 시간' '재창조로서의 존속' '목적' '한정성의 형식으로서의 보편자'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의 궁극적 작용인으로서의 개별자- 즉 진정한 사물'등과 같은 여러 개념에 기초를 둔 제합적인 우주론을 표현하는 데에 있다.“

 

 

②초월적 형이상학에서 생산적 형이상학으로 “신은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진 텅 빈 공간에서의 지극히 하찮은 한 가닥 먼지의 존재도 현실적 존재자이다. 그러나 비록 그 중요성에서 등급이 있고 그 기능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태가 예증하는 원리들 안에서 모든 것들은 동일한 수준상에 있다. 궁극적 사실은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현실적 존재자들이라는 것이다.”

 

③현실적 존재자는 생성의 과정이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자들의 생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과정을 "창조가 자연스러운 맥박을 산출함으로 인해서 과정에는 리듬이 생긴다. 맥박은 곧 역사적 사실의 한 단위를 만든다. 연결된 우주의 무한성 속에서 우리는 이 사실의 유한한 단위를 막연하게 이해하게 된다."라고 표현하였다.

 

④"창조성은 새로움(novelty)의 원리이다. 현실적 계기는 그것이 통일하고 있는 다자에 있어서의 어떠한 존재와도 다른 새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의 내용에 새로움을 도입한다. 창조적 전진이란 창조성의 궁극적 원리가 그 창조성이 만들어 내는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우주는 현실적 존재자의 연대이다. 유기체 철학의 원리는 이미 주어진 존재자들과 다른 하나의 새로운 존재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성, 다자(many), 일자(one)를 궁극자의 범주로 묶어 이러한 것들이 우주 생성의 과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궁극자의 범주에 나타나는 이 세 가지 개념 중에서 한가지만 빠져도 궁극자의 범주가 성립될 수 없다. 창조성은 가능적인 현실적 존재자를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자로 만들며, 이 원리에 따라 각각의 현실적 존재자는 이 우주 안에서 창조의 과정을 거쳐 생성하게 된다. 이러한 생성의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바라본 창조의 원리이다.

 

궁극적인 실재들이란 기원적인 그 과정 속에 있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때에, 마치 분리된 개별체처럼 보이는 각각의 사건은 두 개의 구체적인 공재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 관해서, 그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종국적인 공재성을 이끌어 내는 외적 창조자에 관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우주 안에는 이러한 이행의 한 사례나 이 사례들의 구성원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사물들의 본성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창조성이란 각 사건이 새로움 속에 드러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창조는 누구나 가 닿을 수 없는 그 넓은 시야, 화이틑 헤드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통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외부에서 변화의 동력을 얻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위상수학, 양자역학과 같은 다양한 자연과학적 논의까지 함께 끌어들여 기존의 철학이 ‘점’의 사유였다고 바라본다. 존재하는 것들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점의 사유는 정태적이고 자족적인 것이기 때문에 동태적이며 상호 작용하는 창조를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과학의 성과에 힘입어 ‘점’이 아니라 ‘선’이야말로 철학의 기본 개념이리고 주장한다. 그로 인해 그는 철학과 과학 모든 분야에서 ‘관계성’을 새롭게 사유하였고, ‘선’을 철학의 기본으로 정의함으로써, 새롭게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성’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라, ‘선’을 사유하면서 화이트헤드의 선은 단순히 점과 점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선 개념을 통해 시간의 유동, 변화를 긍정함으로써, 세계가 실재이자 과정임을 드러내고, 세계야말로 현실적 존재들이 원인과 결과가 되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순환적이고 연장적 체계임을 보여 준다.

 

화이트헤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상정하는 대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생성의 과정과 유동적 사건에서 찾는 동시에, 모든 경험에 타당한 세부적 설명의 원리를 필연적으로 구성해 나갔다. 그는 생성의 존재론, 사건의 철학, 존재의 유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시간, 공간, 물질, 지각, 관계 개념들을 재확립한다. 그는 서로 단절되어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각 학문을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 형이상학이 미적 질서이자, 미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보여 준다. 맛, 색깔, 소리 같은 개인의 감각들이 존재론의 범주 안으로 들어와 현실적 사건의 과정에 개입하는 보편적 요소로 승격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옆으로 길을 내고, 언어의 한계 바깥으로 이행하며, 완전성 대신 생산성을 중심에 두고 구축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⑤“사실상 삶의 예술(art)은 첫째 생존하는 것이며, 둘째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이며, 셋째 만족의 증가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성의 기능은 삶의 예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모든 존재자는 미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것들이다. 환경 역시 미적인 조화와 질서를 만들어 가며, 인간 역시도 내부적 환경과 외부에 맞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조화를 구성해 낸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안에서 우월과 열등을 나누는 이분법은 없다. 오직 존재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가장 조화로운 상태로 진행하려 하고, 다시 창조적 활동으로 나아가 스스로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기존의 현대 철학이 자연과 육체, 감성을 우위에 두려 했다면, 화이트헤드는 그마저도 새로운 이분법으로 보았다. 그는 현실적 존재자의 생성과 소멸마저도 미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진과 선에 짓눌려 왔던 미의 가치를 새롭게 회복시킨다. 그가 말하는 미의 가치는 바로 관념의 ‘모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를 변화와 유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끊임없이 관념의 모험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유기체, 과정, 창조와 같은 과정을 강조하는 이유도 자연이나 문명, 종교의 동적인 측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혼과 정신이라는 개념을 재인식하고,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세계와 신 개념을 현대 과학의 조류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주체-자기초월체’(suject-superject)의 책무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사는 것, 잘 사는 것, 더 잘 사는 것이 바로 자기 삶의 미적 가치를 증진시키려는 인간의 충동이라고 말한다. 미적 가치를 삶과 철학에서 실천하기 위해 무엇보다 철학의 ‘모험’, 존재의 ‘모험’, 관념의 ‘모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삶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순애데레사가, 탱큐!

 

 

 

 

3.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오22,1-10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라고 전하는 마태오22,1-10은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이,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오”(마태오21, 33-43)에 대한 세 번째 답이다.

 

이 글은 [1]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이들이 입어야 하는 <예복>은 무엇인가? [2]이를 바탕으로 창조질서와 은총질서 안에서 <혼인 잔치>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려고 한다.

 

[1]‘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혼인잔치의 비유>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에만 실려 있는 사료로 루카복음(14, 15-24)에서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들에 초점을 맞춰진다. 1세기 교회의 전교과정을 기점으로 30년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령감림 이후의 교회의 확장, 그리고 40년 이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방인 전교를 통해 지상 교회의 확장과정을 비유했다고 할 수 있다. 루카복음사가의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초대받았던 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에서 결국 인류는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신자와 비신자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끝내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양적 팽창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가히 예언적인 메시지로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초점이 맞춰진 구원의지로 바라볼 수 있겠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초대에 응한 이들에 대한 초점으로 <잔칫방은 손님으로 가득찼다>라고 전하는 데서, 결국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밖에 없다는 더 포괄적 교회론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창조질서 안에서 누구도 예외없이 그의 믿음이나 고백과 상관없이 하느님께 속해 있다고 바라본 창조의 존재론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초대에 응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합일,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었는지를 문제삼았다는 것에서 질적 교회론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즉 인류와 하느님과의 혼인잔치는 신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만나는가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9절)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10절)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12절)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마태오 21, 33-43은 결국 Ⓐ--Ⓑ--Ⓒ를 통해 그리스도의 잔치, 즉 인류와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으로 가득찼지만, Ⓑ에서 잔치에 참석하는 이들이 입은 예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초점화 된다. 이 예복의 착용유무가 Ⓒ의 부르심과 선택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체가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겠다.

 

이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3, 17)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오17, 5)내 아버지께 복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오, 25, 34)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사랑하는-마음에 드는>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은 창조된 모든 인류를,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은총질서까지 받아들인 아들로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입은 예복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입은 예복의 의미를,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이사야서 25,6-10/6)고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잔치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초대된 잔치를 의미한다. 그 잔치의 목적은 분명하다. 어떤 고통과 죽음의 시간을 지난 이후의 부활의 상태와 비슷하다. 얼굴을 가렸던 너울과 덮개가 사라지고, 죽음을 영원히 사라지고, 그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내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고, 희망, 구원, 기쁨, 즐거움 등으로 잔치의 기쁨은 고조된다. 25장은 이사야서를 세부분으로 나눴을 때, 첫 번째 부분으로 이는 유배를 경험한 이후의 진정한 기쁨을 미리 예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수난과 고통 죽음을 겪은 후에 만나게 되는 부활의 기쁨과 닿아 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시편 저자는 (23(22),1-3ㄱ.3ㄴㄷ-4.5.6( 6ㄷㄹ)에서,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라는 풍요의 근원을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가 따르는 그분의 집에 사는 것'으로 집약시킨다. 많은 기독인들이 암송하는 시편이다. 그런데 그 시편의 충만은 <집>으로 수렴되며, 완벽하게 하느님께 의탁한 자만이 누리는 기쁨에 그 초점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피서4,12-14.19-20) 라고,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의 원칙>이란 상황논리가 아니라 존재논리라는 임을 고백한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는 <풍요로움>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라고, 그리스도라는 풍요로움으로 사는 것이 바로 혼인잔치에 참례하는 <예복>이라고 말한다.

 

밤이 물러가고 낮아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있게 살아가십시오. 흥정대는 술잔치와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 12-13)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디아3, 27)

 

마태오복음+이사야예언서+시편+바오로서간문을 종합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한 이들이 입은 <예복>은 그리스와 함께 사는 부활의 상태를 의미한다. 부활의 상태를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상황을 그분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어떤 상황에도 좌우되지 않은 그리스도를 통한 <풍요로움>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전한다. 바오로 사도가 전한 상황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풍요로움, 즉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일까 무상의 선물일까? 를 좀더 성찰해 보기 위해, 마태오, 이사야, 다윗,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전한 그 풍요로움이 그분의 선물로 가능한 것인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지?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2]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신앙인이 되는 것도 인생의 터닝포인트겠지만, 신앙안에서 아! 하느님 만으로 살 수 있겠구나!는 얼마나한 터닝포인트일까? 그 기로에서 하게되는 질문들--- 어떻게 하느님만으로? 어떻게 예수님만으로? 어떻게 성령의 인도만으로 이 삶이 충만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은 근원적인 창조질서를 반추-기억해보는 일일 것이다.

 

흔히 천문학은 겸손의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태양계와 같은 은하계는 수십억, 수백억에 이르고 현재, 나사에서 밝혀낸 행성은 겨우 5.000개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은하계가 아직도 어떤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칼 세이건이 말한대로 태양계 안에서도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그 생성의 원인을 하느님이다, 혹은 하느님이 아니다, 라고 그 ‘있음’의 근원을 규명하거나 무관심하게 머물다 100세 전후로 지상의 여정을 마친다.

 

여기서, 인간이 우주를 향하여 정향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가 인간을 위하여 운행되고 있으며, 인간은 우주로부터 각기 고립된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수많은 혜택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창조질서를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라고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으로 고백한다. 모든 있음의 근원을 “나는 있는 나로다”(탈출기4,13)라는 근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피조물이고 따라서 인간 존재가 조건부적인 존재이지 필연적 존재가 아님이 분명한데, 어떻게 하느님만으로 살 수 있는 <충만>에 이를 수 있을까.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인간의 인격적 처지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구원의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분을 믿든 안 믿든 인간은 불멸을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이 창조질서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할 수는 있으나 그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인간이 자기 존재를 끝끝내 무(없음)로 밀쳐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는 창조자체로부터 벗어나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하느님을 부정한다손 치더라도 존재자체를 무로 돌릴 수는 없다. 창조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하느님을 부정할 때, 창조자체가 교란되지는 않지만 은총질서는 교란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자체를 무로 돌릴 수는 없으나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존재는 하느님의 실존과 동일하다.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과 달리 필연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창세기1,26-27)에서 삼위일체 하느님도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창조의 최종적인 근거설정은 하느님이 위격을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취해져서는 안 되고, 하느님 당신의 본질에 따라서 유일한 창조주라는 사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는 창조의 질서가 있다. 창조질서의 필연에서 은총질서의 필연도 나온다. 

 

이 창조질서에 의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8)라는 신약의 명제가 나온다. 그 명제로부터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향하는 통로가 만들어진다. 세상 창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구원과 구원이 이어지는 은총질서에 초대된다. 구원의 영속성, 이를 은총질서라고 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생기는 위격적인 사랑, 그 위격으로부터 발출해 나오는 성령의 사랑. 그리스도의 강생은 하느님 사랑의 극단화에 해당한다. 사랑은 항상 자신을 외현화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육화는 하느님이 세계를 당신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명제를 확증해 주는 봉인이다.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분의 구원의지 또한 순수한 사랑일 것이다. 창조가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라면 구원의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라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뒤 따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 명제를 정식화하여, “하느님으로부터의 하느님,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느님으로부터의 하느님”이라고 그리스도를 신원을 확증한다. 구원의 영속성은 인간은 창조질서에서 예외적 존재는 없다는 것뿐 아니라 또한 끊임없이 은총질서에 의해 창조질서가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마태오22,1-10의 결어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는 것은 칭조질서에 의해 모든 이들은 하느님께 다가가거나 외면하면서 결국 하느님의 창조질서의 자장안에 놓여있지만 그들이 모두 권능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모두 사랑받지만 그러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적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두 질서의 통합을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로부터(창조질서) 그리스도를 통해(은총질서)우리 모두에게 준 <풍요로움>이라고 정의한다.

 

12절과 13절을 보면, 인류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부터 바라보아야 혼인잔치의 본질은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인류에게 보내주신 것은 인류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는 어떤 상태를 이미 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청자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 당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들이 바라볼 수 없었던 하느님의 사랑을 포도원 일꾼 품삯(연중26)-포도원 소작인의 소출(연중27)- 아들 잔치의 초대(연중28)로 점층적으로 소개된 이유일 것이다. 품삯이나 소출이나 잔치는 다르게 표현된 같은 의미일 것이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12절)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에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그들을 알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것은 사실 아버지를 몰랐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인류와 하느님의 합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에서 그 1차적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겠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들은 마치 손과 발이 묶여 있는 구속의 상태, 어둠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묶여있었지 사랑으로 그 율법의 정신을 풀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내어쫒김을 당한 자, 소외의 존재론과 닿아있다. 그 어둠의 상태는 그들이 창조되기 전의 심연의 상태와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죄와 죽음에 묶여 있는 자유의 상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가 겪는, 인간의 품위를 잃은 자의 비참한 실존의 상황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완성, 즉 은총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혼인잔치에 참여하도록 그토록 그분의 구원의지가 작용했다면 왜 은총질서에 비유되는 예복에는 구원의지가 작용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창조질서 안에서 모든 인류는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이지만, 은총질서의 수락과 거부 사이에서 인간은 그분의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는다. 사랑-자유, 이것이 사랑의 법칙이다. 사랑은 결코 자유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의 자기구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창조질서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거부하는 이들도 무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은 언제나 자유의지의 선택하에서 “있음”의 상태, 자신이 선택한 어둠을 스스로에게 경험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볼프강 바이너르트는 『창조신앙』에서 모든 조물은 창조질서에 속했지만, 모든 인간이 동시에 은총질서에 속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적 사유는 창조질서와 은총질서의 연결을 강조한 바 있느나 두 질서의 동일성애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창조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존은 궁극적으로 창조의 지속적인 의미를 보장해주고 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는 곧 창조된 것의 목적이기 때문에 창조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하느님과 인간관계에 환원할 수 없는 신비가 놓여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은총의 수락여부를 지닌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과 하느님의 어떤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예지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과 자유를 부여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숙명에로 넘기지 않으시고, 하공에 내세우시고 동시에 붙들고 계신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교황16세)은 『나자렛 예수』에서 창조질서뿐 아니라 은총질서까지 인간이 받아들일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성이며, 그 결과인 삶의 <충만>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고 전한다.

 

“인간 나자렛 예수가 인간으로서 세계창조의 의미이면서 또한 세계를 창조한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한 분으로 보여짐으로써, 인간의 철저한 존재양식으로 창조의 목표를 나타낸다. 창조의 목표를 받아들이는 것이 은총이다. 일종의 인간 존재가 아니라 전체인류와 우주가 그 의미의 ‘충만’으로서 집적되어 그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종말론적인 인간 예수가 근본적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창조질서와 은총질서 안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자유의지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았을 때, 어떤 <풍요로움> 혹은 어떤 <충만>에 이르게 되는지 정리해보아야 할 듯하다. 바오로 사도가 제언한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있게 살아가십시오, 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편린(비늘조각)이 아니다. 존재의 편린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떻게 자기소외(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를 아는 것이다. 이는 영적 무장해제를 경험하는 길로부터 시작된다. 고백적 차원에서 인격적 차원의 신앙으로 접어들게 되는 어떤 결절점이다. 그때, 인간은 비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외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소외를 자초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은총질서인 그리스도의 현존체험은 오히려 모든 소외를 극복하여 인간적 존재의 <충만>에 이르게 한다.

 

⒝80억의 인구가 80억개의 문제를 갖고 있는 듯하지만 모든 문제는 오직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다. 그 답은 지고의 <충만>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지고의 <충만>에 이른다. 즉 로고스 안에서 육신이 되고 세계가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먼저 인간이 겪어내야 할 모든 실존에 대한 답을 주셨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이다.

 

⒞예수는 마지막 인간, 최후의 인간으로 그는 인간의 품위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강생의 신비는 최고의 피조물이자 피조물의 총체로서 역사의 모든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고(아가페) 있으므로 여기에 존재의 <충만>이 있다.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임을 알게된다. 

 

⒟이 세계와 구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역사 속의 예수를 통해서, 이 세계가 동경하고 갈구하면서도 스스로 이룩해 낼 수 없었던 평화를 가져온다. 그 평화는 인간과 세계의 <충만>이 어떻게 가능하며, 신의 현존이 무엇이며, 부활과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세계의 실존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는 실존목표이기도 하다. 이 삼위일체적인 생명에의 참여는 창조된 모든 존재가 누리는 존재의 <충만>이다. 공동선, 보편의지가 곧 그리스도의 잔치인 향연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은 개별적 충만을 넘어서 인류 모두들 위한 <충만>의 표지이다.

 

⒡인간이 동료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 관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현존할 때, 세계는 그저 선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주로 확장되는 창조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착한사마리아인에서 보여주듯, 누구에게나 착한 이웃이기를 갈망한다. 그를 통해 보시니 참 좋았다는 것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창조의 완성에 동참하는 <충만>에 이른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모든 생명체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양>이 드러난다. 우주의 작동원리, 뭇생명체에 대한 고마움, 공존하는 생명의 원리를 통찰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볼 수 있을 때, 창조세계는 의미로 가득차 있으며 가치로 <충만>되어 있다.

 

⒣시간의 중심은 사랑의 <충만>이고 다른 시간들은 이 <충만>으로부터 존재케 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적 시간 속에서 <오늘>과 <영원>을 만난다. 과거에 매몰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는 시간에 종속된 것이 결핍이며, 소외인데,  역사는 그 시간을 초월한  <충만>을 향하여 진화되고 있다. 예수는 진화의 정점이며 그것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를 수 있다.(샤르뎅)

 

⒤ 앞으로 도래할 모든 시간, 종말론적인 시간 역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이어진다. 종말은 최후의 심판에서 빛 속에서 빛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다. 영원이 무엇인지,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알게 된 것을 <충만>하게 살게 된다.  무지의 죄로부터 해방된다.

 

⒜~⒤로부터 이 글의 제목을 정했다.

 

[존재의 편린(片鱗)에서, 창조질서와 은총질서가 하나가 되는 향연(饗宴)]

 

우리는 존재의 조각조각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우주의 미아가 아니다. 이 순례의 여정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것과 같다. 인류는 그분의 신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초대에서 입을 예복은 바로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이며, 하느님만으로 충만하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하다, 성령만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존재의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충만>으로만 우리는 창조질서를 진정 갈망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재배치 할 수 있는 은총질서에 기쁘게 참여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론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일 것이다. 그것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부활 후 지상에 던진 예수님의 일성, “평안하냐”(마태오28,9),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 19, 21)에서 그 정점을 바라볼 수 있을 거 같다. 부활의 선물인 평화는 그리스도와 인류의 결혼, 그 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느끼는 존재의 <충만>, 그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