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2)
- 연중33주,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를 중심으로
1. 김승희, 「너에게」
너는 산이 되어라 / 산이 되어 달아나지 마라 / 산이 되어 다가오지 마라 / 너는 / 너는 //산이 되어 / 산이 되어 / 달아나지 마라 / 다가오지 마라 / 산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1999년)
김승희 시인의 「너에게」는 “산이 되어 달아나지 마라 / 산이 되어 다가오지 마라”로 수렴된다. 언뜻 견고한 단절을 말하는 듯하지만, 너라는 대상에 대한 지고의 갈망과 동시에, 그런 너가 적어도 이 지구상에 한명쯤은 있으리라 상정하고 싶은 자신에 대한 만만치 않은 자부심을 내장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산은 신성의 표지이자, 태초의 창조 에너지의 근원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죽음을 무릎쓰고 설산을 오르거나, 화산암들이 솟아있는 산을 뜨거운 햇볕아래 나무 한 그루 없는 붉은 산을 전 생을 걸고 오르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 이들은 어느 공간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알고싶고, 점검하고 싶어 한다.
그런 맥락에서, 너는 산이 되어라, 라는 것은 동네 뒷산이 아니라 에너지의 볼텍스(vortex)에 버금가는 산이 되라는 것이기에, 화자가 살아야할 이유이자, 화자가 머무르고 싶은 곳을 지나쳐야할 이유를 찾고 있는 엄중한 자기점검의 표현이기도 하다. 산처럼 자신을 넘어선 의연한 사람을 보고 싶다는, 존경과 외경심 사이에 스스로 한가로운 이를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그것은 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자 자기한계치를 바로 신 아래 정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아나지 마라 / 다가오지 마라> 는 것은 푸코가 문학은 불가피하게 이 세상에서 『거대한 낯섦』 이라고 말한 것처럼, 언뜻, 갑자기, 불현 듯, 흘깃, 보았지만, 내가 본 것을 여기 있소! 하고 대령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 생각할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 자신의 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 자신의 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이라고 뻔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불가능에 부딪히는 파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김승희 시인의 「너에게」는 어떤 것이 사람이고, 어떤 것이 산이라고 그 경계를 말할 수 없는 <고열동천苦熱冬天>의 대아(大我)를 찾으려는 부단한 질주라 하겠다.
2. 괴테,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on!)
2020년에 바라보았던 괴테의 『파우스트』 를 재인용하여 다시 바라보기로 한다.
『파우스트』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1832년)가 23세에 시작해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82세에 끝맺은 작품이다.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12,111행의 대작으로,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를 지닌 인간 파우스트의 생애를 그려낸 장엄한 드라마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파우스트』에 대한 해석은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져 영혼을 담보로 현세의 모든 것을 맛보려 하다가 마침내 천상의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문학, 철학, 종교, 정치, 전쟁 등을 아우르며 다양하고 폭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버킷리스트에 속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며, 괴테가 완성한 독일정신의 총체인 동시에 인간정신의 보편적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파우스트는 인간이 통과하게 되는 5개의 비극을 통과하고 생을 마친다. 어떤 학문과 지식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해 절망하는 ‘학자의 비극’,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레첸 비극’,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쥔 파우스트의 불만족과 신하들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긴 실권 없는 황제의 운명이 서술된 ‘황제의 비극’ 이상적인 세계인 헬레나에 대한 동경과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헬레나 비극’ ,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만든 땅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비로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다룬 ‘지배자의 비극’이 나온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번뇌를 108가지로 바라본다. 어떤 인간이 108가지의 번뇌를 다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일까? 그 맥락에서 파우스트가 통과한 5개의 비극은 가장 불행한 인간 파우스트를 말하고자 함인가? 아님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는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을 들어보면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분명히 드러나고, 그것이 괴테가 60년동안 고민한 삶에 대한 궁극의 지점인 듯하다.
[...] 내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내 이제 최고의 순간을 맛보노라.[...] möchte ich [...]Auf freiem Grund mit freiem Volke stehen. 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Es kann die Spur von meinen Erdetagen Nicht in Äonen untergehn. -Im Vorgefühl von solchem hohen Glück
Genieß' ich jetzt den höchsten Augenblick.
『파우스트』에서 명문장 가운데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되는 문장을 꼽으라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일 것이다. 그 문장은 바로 앞에 나오는 ‘순간을 향해’ 속에서 태어난 말이다. 영원 앞에서 우리의 삶은 순간에 비유할 수 있다.
『파우스트』를 ‘구원의 책’이라 일컫는 이유는 그 구원의 이유가 선악의 저편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방황하던 절망적 예외인간 파우스트의 비극적 결말이 하늘의 일방적 '시혜'가 아니란 점에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 조건과는 달리, 천사들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고 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이끌어간다. 파우스트 구원의 이유가 최후의 순간까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였다는 것이 오늘 이 글이 바라볼 주제이다.
①“자아 로테,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차갑고 무서운 술잔을 손에 들어 죽음의 도취를 다 마셔버리렵니다. 당신이 이 잔을 내게 손수 내어주셨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②처음으로 세상에 나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고 많은 재능을 습득하려고 하며 무엇이든지 다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의 교양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보다 큰 집단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을 익히며 의무에 따라 활동하는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할 줄 아는 것이 유리합니다.(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③이탈리아 기행『이탈리아 기행』은 괴테가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약 20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일기, 메모와 보고를 다시 엮은 것이다. “현명한 자는 모든 산만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하나의 분야에 자신을 제한하고 그 하나 속에서 유능해진다네. (『이탈리아기행』)
④“가장 분별 있는 행동은 언제나 스스로 지니고 태어난 일, 자기가 배워서 익힌 일에 힘쓰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그들의 직분을 다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 것이네. 구두장이는 언제나 자기의 구두골 앞에, 농부는 쟁기 뒤에 있으면 되고, 군주는 나라를 통치하는 법을 알면 되는 것이겠지.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도 배워야만 하는 직업의 하나이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주제넘게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요한 페터 에크만, (『괴테와의 대화』)
『파우스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피게니에.스텔라』,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탈리아기행』을 통해 집약된 괴테 인생의 총체적 비전이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는 한순간에 문학적 재능으로 태어난 문장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기록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현자들이 서슴없이 저 문장을 꼽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가 전하는 희망의 전언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 전시(과시)할 수 있는 어떤 결과물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열망하며 자신이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 ④의 요한 페터 에크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를 보면 이 점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3.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25,14-30
이 글은 2020년 가해 연중 33주 묵상과 연장선에서 쓴 글입니다. 탈렌트talents, 내가 ‘나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네가 '너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고 전하는 마태오25,14-30(탈렌트의 비유)은 루카복음19,11-27(미나의 비유)에도 실려 있는 말씀으로 마태오복음 사가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입성 전에 탈렌트와 미나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의 중요한 한 국면을 전하고 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테오3,2-3)라는 구원사상을 고취시키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즉, 하늘 나라는 은총이요 요구이자,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 요구와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면 단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탈렌트가 한 사람에게 주어진 생의 자족적 실체에 머물지 않고 누룩, 소금, 빛처럼 공유되고 확장되어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함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많은 방안 가운데 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을 선택하셨는지, 창조의 완성은 창조된 인간과 <함께>라는 의미까지 성찰하게 이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창조와 은총의 모든 복을 사람의 손에 맡기시어, 우리가 좋은 뜻을 세워 아버지의 섭리로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돌아오실 아버지를 깨어 기다리는 충실한 종으로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전하는 데서 탈렌트의 의미를 창조의 사랑까지 연결해 바라볼 수 있다.
탈렌트의 비유(마태오25,14-30)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하늘 나라는 <은총이요 요구이자,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에 대해 성찰해 보기로 한다.
Ⓐ(선물)---Ⓑ(과제 이행)---Ⓒ(과제 불이행)---Ⓓ(심판)으로 나누어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그냥 생물학적인 존재로 온 것이 아니라, 누구나 탈렌트를 갖고 왔다. 즉 이 땅의 삶에서 자신이 풍요로울 수 있는 충족이유율을 이미 갖고 왔다는 것이다. 충만할 수 있는 선천적 영적 DNA 가 있다는 것이다. 그 탈렌트는 다른 이름으로 창조의 본성이자, 하늘나라의 재산이기에 필연적으로 번성하고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조의 대 긍정이 바로 탈렌트가 내장하고 있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탈렌트의 비유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에게 탈렌트가 주어졌다는 것으로부터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탈렌트는 그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탈렌트를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탈렌트는 자신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타인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풍요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탈렌트를 두 배로 늘렸다는 것은 자신도 행복하고 타자도 행복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것에서, 풍요는 언제나 확장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16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는 받은 이들은 모두 주어진 능력의 두 배를 벌었다. 자신도 행복하고 타자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탈렌트를 받았다는 것에 이어서 다음 초점은 자기가 무슨 탈렌트를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모든 면에서 비교우위를 논하는 세상에서 카인의 질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탈렌트는 그것이 공존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탈렌트의 바탕이 <애주애인>에 있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할 때, 그것은 적어도 두 배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탈렌트는 하늘 나라의 재산이라는 점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은 모두 선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탈렌트의 출처가 하늘나라의 재산이라는 것은 탈렌트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감사를 동반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다. 그 감사가 찬미로 들어높여질때, 우리는 탈렌트를 준 주인과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도 체험하게 된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도대체, 탈렌트는 얼마나 큰 풍요로움이기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라고 전하는 것인가? 틸렌트의 풍요로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탈렌트는 당시 일꾼이 6,000일, 약 16년 반 동안 일하여야 벌 수 있는 액수며, 두 탈렌트는 약 33년, 다섯 탈렌트는 약 82년 동안 일하고 받은 품삯의 총합(김상우 바오로 신부)
탈렌트의 확장은 주인과 함께 누리는 기쁨에서, 그 기쁨은 땅의 기쁨을 너머 하늘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렌트를 올곧게 사용했을 때, 우리 인생 전체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탈렌트를 받은 당사자와 그 혜택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탈렌트의 비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그렇다면 탈렌트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하는 것이다. 돈(재물)인가? 은총인가? 사랑인가? 성령의 은사인가? 여기서 탈렌트가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는 것은 일고의 재론할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늘 나라가 자본주의 부의 축적, 부익부빈익빈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탈렌트를 받은 이들은 하늘의 뜻에 맞게 돈과 재물을 재배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돈 그 자체로 탈렌트라고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렌트는 은총인가? 사랑인가? 이것 역시도 탈렌트를 묵상할 때, 성찰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은사는 달리 주셔서도 은총은 더 주시거나 덜 주시지 않고, 각기 주어진 재능과 그 양은 달라도 사랑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모 마리아가 중요한 분이시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중요한 분이셔도 그분들이 우리보다 사랑의 은총을 더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이시라고 해도 그것은 하느님이 은총을 우리보다 더 주셔서 가득히 받으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은총을 우리보다 더 잘 그리고 많이 받아들이셔서 가득하신 거고, 어머니가 되는 은총을 주신 것은 특별한 은총이기는 해도 하느님이 마리아를 편애를 하신 것이거나 마리아만 더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실 은총에 충만에 문제가 없으며, 은총은 한 방울이라도 우리를 충만케 하시니 우리가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양적으로는 은총과 은사의 내용이 다를 뿐입니다.”(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지 알게되면 왜 하필 나에게 이 탈렌트를 주셨을까를 성찰하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토12, 4-11)라고 탈렌트는 성령의 은사이자, 공동선임을 분명히 하신다. 따라서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2코린토 10, 17)라고 전한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자기 탈렌트를 알고 그 탈렌트를 공동선을 위하여 온 열정을 다하는 것이 착함이고 성실함이라고 전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착함과 성실함에 대한 정의를 뛰어넘는다. 더불어 그 탈렌트를 두 배로 늘이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일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면서 우리의 교만을 경계하신다. 탈렌트의 실현여부에 의해 그에게 더 크게 하늘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임에 방점을 찍는다. 루카 복음 사가는 미나의 비유에서 열배나 네 배는 열고을이나 네 고을을 맡은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구체적으로 하늘 나라의 확장을 언급한다. 여기서 고을의 크기가 아니라 그 고을에 사는 이들 안에 하늘나라의 본질을 얼마나 심어줬는지의 여부와 관련되었다는 것에서 마태오 복음 28장의 파견의 의미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탈렌트를 받은 그 사람은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왜 땅에 묻어둔 것일까?
Ⓒ24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한 탈렌트를 받은 문제적 주인공은 받은 탈렌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탈렌트를 주신 주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뜻 타당한 말인 듯싶다. 그로인해 그는 주인에 대해 무지를 앎으로 혼동했다는 것이다. 두려운 하느님, 상선벌악의 하느님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왜 하늘이 인간에게 탈렌트를 주었는지?를 결코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탈렌트가 축복과 풍요, 사랑과 자비의 선물이라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탈렌트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출처를 안 것은 다행이나, 탈렌트를 주신 주인의 품성을 모진 분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은, 공포의 하느님에 기초한 집단무의식에 자신의 의식을 성찰없이 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투적인 위험앞에서 움츠러드는 종교적인 갑질 매트릭스에 갇혔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반납이자, 상실이다.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악’하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25절)라며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종을 과연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의해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받은 한 탈렌트를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24-25절) 이 대답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왜곡이 ‘악’임을 알려줍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과 다른 거짓과 오해가 모든 문제를 발생시킨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완고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인색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가 됨을 알려줍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그로인해 그는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두었으니 누구의 탈렌트인들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하늘나라의 주인을 오독한 그 사람은 주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악이고 게으름이고 쓸모없는 인간, 어둠에서 울부짖는 상태이다. 자기 탈렌트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실은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아담, 타인을 질투하는여 죽인 카인의 삶으로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므로 타인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랑에 진정 배고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배고픔도 습관이고 두려움도 습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 그 무지/앎이 탈렌트의 확장에 얼마나 중요한 분기점인가를 다시 한 번 상기 시킨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인지,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의 탈렌트를 알아보는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자신의 탈렌트를 진정 바라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탈렌트를 알았다면 왜 하느님을 신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르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 세상에 올때, 천부적인 탈렌트를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임을 알고도 하늘은 우리에게 탈렌트를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탈렌트의 확장 과정에서 완벽하게 지고지선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하늘은 알고도 우리에게 탈렌트를 맡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탈렌트는 아가페의 표지이자, 자비의 표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두려움은 결핍의 이름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탈렌트를 선물을 받았는지 결코 알 수 없기어 이 순례의 여정이 꼬일대로 꼬인 사랑에 배고픈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지 알 수 없기에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에서 타자가 자신에게 누구인지도 결코 알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알고- 나를 알고- 타자를 아는 것이 바로 다섯 탈렌트를 열 탈렌트로(두 탈렌트를 네 탈렌트로) 확장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렇기에, 탈렌트를 맡기신 주인이 모질고 두려운 분이라는 것은 무지의 신앙,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탈렌트가 무엇인지 아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은총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전언대로 성령의 은사를 아는 것이기에 그렇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탈렌트를 받았음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나? 다른 사람이 받은 탈렌트를 알아보는 영안이 생겼을 때, 알 수 있다. 이것이 탈렌트 확장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안이 아니라면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두 배로 늘릴 수는 없다. 두 배로 탈렌트를 늘린 것은 자신도 풍요롭고 타인도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탈렌트를 받은 것은 자기 우상화, 추종자,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통해 타자의 삶을 본질적인 측면에서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안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탈렌트도 당연히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이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누리는 은총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이 가득한 사람만이 그 탈렌트의 풍요를 나누기에 다른 이 역시 은총이 가득한 삶으로 인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사랑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오10, 40-42)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테살로니카 1서 .5,1-6)라고 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빛과 낮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라고 거듭해서 당부한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이며,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 탈렌트가 무엇이든 모두 하늘 나라를 풍요롭게 할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다는 표현은 자신이 자신에게 준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늘 나라는 은총이요 요구이자,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 요구와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면 단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사도 요한은 열매와 연결하여,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한 15,4.5)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탈렌트를 가졌는지는 그가 이 세상에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산 사람인가를 보면 그 사람의 탈렌트가 무엇인지도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사람 존재 자체가 평화이듯, 그 사람 자체가 하늘나라의 재산인 탈렌트를 나눠주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진 사람은 더 가질 수밖에 없는 탈렌트 잉여의 법칙이 도출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않은 탈렌트도 없기에, 자신에게서 풍요롭게 넘치지 않으면 나눌 수 없다. 반면, 가지지 않은 것을 결코 나눌 수 없다. 인색해서 못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탈렌트를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을 풍요롭지 못하기에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에 머물지 않고 카인이즘에 빠진다는 것이 문제다.
Ⓓ29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이 축복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지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는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삶을 이미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는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이기에 어둠 속에 내던져진 상태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탈렌트는 나눔이기에 나눔이 없는 삶이 어둠이기에 그렇다.
솔로몬은 잠언서에서 <훌륭한 아내는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잠언 31,10-13.19-20.30-31)라고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라고, 외화내빈의 상태를 경계하며, 인류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아내에 비유한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그 손이 거둔 결실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한 일을 성문에서 칭송하여라.
하늘 나라의 재산인 탈렌트는 훌륭한 아내가 거둔 결실처럼 하느님 나라의 충족이유율이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제시하면서,<하늘 나라는 은총이요 요구이자,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 요구와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면 단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같아지는 순간이 바로 탈렌트의 올바른 실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렇게 고귀한 가치가 이 땅에서 쉽게 이루어질리는 만무하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하늘나라의 실현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 시대나, 구약의 예언자 시대나, 오늘 21세기에도 모두 십자가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탈렌트를 받았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마치 백만송이 장미를 받은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 길은 그에 상응하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늘나라의 그 어떤 좋은 것도 십자가를 동반하지 않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탈렌트의 비유를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문장으로 축약해 바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on!)(2)]는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가장 고귀한 것을 향해 질주한 사람만 <멈춘다>는 것이 무엇인 줄 알며, 자신에게 하늘이 선물로 주신 길을 향해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탈렌트의 실현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어떤 삶을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천사들이 모든 것을 다 잃은 파우스트에게 들려 준 말,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는 것에서 그 기쁨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하늘 나라에 대한 강렬한 열망만이 자신의 탈렌트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파생하는 상대적 고독과 절대적 고독, 그 모두를 넘어설 수 있으며, 그 탈렌트가 공동선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알아볼 때, 그 어떤 십자가의 길도 마다치 않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으며, 타자의 탈렌트 역시 자명하게 알아보고 격려하며, 하늘나라를 풍요롭게 하는데 인생 전체를 올인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몰입의 아름다움, 거울을 보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리셋(reset)하라! (0) | 2023.12.01 |
---|---|
존재의 거룩한 질량, 고독의 물질성을 너머 타자윤리학으로 (0) | 2023.11.24 |
불멸의 사랑,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양인자) (0) | 2023.11.10 |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추락하는 날개 위로 비상하는 날개 (0) | 2023.11.03 |
사랑받는(하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있다(2) (0) | 2023.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