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아름다움, 거울을 보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리셋(reset)하라!
- 대림1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를 중심으로
1. 유치환,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오직 알라의 신(神)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동아일보』, 1938.10.19.)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되었을 때, 즉 본질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읽고 필사했음직한 통과의례의 시라고 할 수 있다.
1연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다 발견한 지식의 한계와, 애증에 휘둘리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여 ‘아라비아 사막’으로 상징된 이열치열의 공간으로 가고자 한다. 아라바아 사막은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모든 장식이 걷어진 절대고독의 시간을 나에게 줄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2연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찾아낸 공간이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이다. 모든 것이 사멸하고 뜨거운 태양만이 내리쬐는 열사의 땅에서 시적 화자가 만나려고 하는 나 자신,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 홀연 공간이 바뀌는 것을 체험하는 것처럼,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시간을 안다는 것이고, 나의 시간의 얼굴을 알려주는 것은 ‘열사(熱沙)의 끝’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비워진 공간이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의 시간에서이다.
3연은 화자가 몸담고 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 사라진 고독과 허무와 열사의 끝에서,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에서, 원시적인 본연의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극대화된다. 만약 열사의 끝에서도 나를 만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로 모아진다. 모든 것을 걷어낸 상황의 극한, 절대 고독에서만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시인의 본질적인 생명 탐구방법이 나온다.
2.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쇼펜하우어)
그렇다면 시인 뿐 아니라 인류의 현자들은 왜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했는가?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추구해야할 행복을 안다는 말이다.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에서 재인용하여,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 ‘행복하게 산다’라는 말은 ‘덜 불행하게’, 즉 그럭저럭 견디며 산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광적인 기쁨이 아니라 동양의 중용에 가깝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그럭저럭 살아가며, 삶을 견뎌 낸다’, 이탈리아어로는 ‘그럭저럭 헤쳐 나가라!’, 독일어로는 ‘헤쳐 나갈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또는 ‘그는 어떻게든 세상을 헤쳐 나갈 것이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의 충족이유율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많을수록, 따라서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세상은 궁핍과 고통으로 넘친다. 그것을 면한 사람에게는 사방에서 무료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나쁜 것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어리석음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 운명은 잔혹하고 인간은 가련하다. 이러한 세상에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실제 현실 생활은 열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진다. 하지만 열정에 의해 움직이면 곧장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니 의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지성을 부여받은 자만이 행복하다. 그들은 실제 생활 외에도 지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인 생활은 지속적으로 그들을 아무런 고통 없이 활기차게 일에 매진하도록 해 준다. 지성이 의지에 봉사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그러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힘이 실제로 남아돌아야 한다. 그래야만 의지에 봉사하지 않고 순전히 정신적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예컨대 나의 철학은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준 것은 없지만, 내가 매우 많은 일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렇다, 삶의 노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장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 대단히 큰 기쁨이나 엄청난 쾌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생존 자체를 일종의 길 잃음보다 나을 게 없다고 본다. 생존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그러한 길 잃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인간은 존재하고 인간인 한 이미 ‘잘못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도 자신의 삶을 굽어보며 대체로 ‘잘못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구원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통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경우에서,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행로에서 삶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는 오비디우스의 말은 좋은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은 너무 애쓸 가치가 없다”라는 플라톤의 말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독일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이보다 앞서 30여 년 전에 출간됐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뒤늦게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행복론에서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생활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지침을 ‘행복론’이라고 정의하면서,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논의에서 탈피하여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피력한다. 그 행복은 자신의 행복으로 그치는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복이로 전이된다.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나 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기 드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카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은 그에게서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적인 충족이유율에 바탕을 둔 행복론으로. 첫째, 인간을 이루는 것,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가 포함된다. 둘째,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즉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셋째,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즉 타인의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을 의미한다. 넷째,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태도,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그 운명 등이 어떻게 행복과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이 네 가지를 충족 이유율을 고려한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은 현실에 대한 유연한 자기통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3.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라고 전하는 <문지기의 비유>는 공관복음에 (마르코13,33-37/ 마태오24,36-44/ 루카17,26-36) 동시에 실려 있는 공통사료로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과 재림의 필연성 앞에서 하늘나라의 본질을 알기 위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에 <깨어 있어라>는 메시지가 주는 이 큰 울림을 33절과 37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
[1]“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3절)
<집주인이 언제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는 전언은 강생의 신비를 알기 위해서, 또 재림하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기회를 결산하기 위해서,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찰하기 위해서, 이 깨어 있음은 제자들을 청자로 할 뿐 아니라,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로 그 청자가 확산됨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이 보편적인 구원론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더욱이 마르코 복음사가는 깨어있으라는 전언 이후에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배치시킴으로써 깨어 있으라는 것은 지상에 남긴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것으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초점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코1, 1절)으로, 세례자 요한의 출현(1,2-8) 빈무덤 발견(16, 1-8)까지 역사상 예수, 특히 인성을 취하신 예수의 공생활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제자들까지 예수가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는 것이 복음사가의 안타까운 기조이다. 이는 복음이 쓰였던 1세기 그리스도론 뿐 아니라 21세기 우리의 신앙 역시, 어제의 예수와 오늘의 예수, 내일(재림)의 예수라는 삼차원적 그리스도론 속에서 이를 얼마나 통합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복음사가의 편집사상이 초점화된 채색된 예수, 교회의 신조로 윤색한 예수, 그리고 재림할 예수까지 <깨어 있으라>는 것은 삼차원적으로 전해진 예수를 어떻게 구체적 예수그리스도로 체험하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카테고리에도 가두지 말고 화석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삼차원적 그리스도론 속에서 순례의 여정을 하고 있는 우리가 <깨어 있으라>는 것이 무엇인지 33절에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와 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를 연결하여 교회 일원인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어떻게 세상을 깨울 수 있는지, 그 깨어 있음의 연계성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와 이방선교의 교두보인 바오로 사도와의 특별한 인연을 가졌던 복음사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33절에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가 아니고 <깨어 지켜라>는 것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지켜라- 있으라>는 단지 복음사가의 서술어선택의 반복 변조의 차원이 아닐 것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을 어떻게 현재화하여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 되는 은총의 사건인지, 즉 <말씀과 육신>이 인간(der Mensch)이 되신 사건이 어떻게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시는 지, 사도와 제자의 도를 <지켜라>는 서술어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이자 제자인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정립해야할 것, 깨어 있어야 할 각성의 화두는 <예수그리스도>의 합성어가 의미하는 하늘과 땅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듣는다는 것은 예수가 그의 말씀 안에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담았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는 진실로 그리스도로써 그리스도는 예수 안에서밖에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라는 것!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있을 자리에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신앙의 결정적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마디의 불가분의 일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와 사명의 일치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는 것은 그분의 사도이자 제자라는 너의 이름과 너의 사명을 하나로 일치시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에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에 준 달란트의 비유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다.
이름과 사명과의 일치가 바로 신앙이라고 바라본 것, 이를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16세교황)은 『사도신경 강해』에서 ‘고백적 신앙’과 차별화하여 ‘위격적 신앙’이라고 부른다. 고백적 신앙은 말과 행위의 불일치, 이름과 달란트의 불일치, 혹은 앎의 무지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진 암기적 혹은 암송적 신앙고백을 의미한다면, 위격적 신앙은 그분의 위격과 우리의 인격이 같아진 지점이 삶으로 녹아든, 스며든, 신앙을 의미한다.
“예수라는 인물이 그의 가르침이며 그의 가르침이 곧 그 자신이다. 그리스도 신앙,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그렇기에 참으로 위격적 신앙(personlicher Glaube)인 것이다.”
위격적 신앙에 대해 칼 라너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의 신학적 소고』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름과 달란트의 일치로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는 길이며 그것으로 강생의 의의를 알아들을 수 있고, 강생의 의미를 알아 들 수 있는 자만이 그분처럼 하늘과 땅이 같아진 풍요의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에 불탈 수 있고, 그 갈망이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증거한다고 전한다. 즉 강생의 신학 그 동합의 연계고리에 대해 펼친다. 왜 우리가 성탄이라는 그리스도의 강생 앞에서 온 인류가 설렐 수 있는지? 적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은 그 설렘의 이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들어 내신 하나의 작품으로서만의 세상은 아니고 세상이 바로 당신의 한 실존으로 즉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본성 또는 이와 함께 주어진 조건으로 마련하셨다는 것도 알아듣게 될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실존을 말씀과 일치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창조를 완성한 사람(창세기1장)으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온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주고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2, 7) 라는 에언의 성취로, 말씀과 삶이 하나인 그 사람이야말로 말씀과 존재의 합일을 이룬다(요한복음1장)는 것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장30절)라는 명제가 기독인의 전유물이 아나라 인류의 유일한 축복의 화두가 될 수 있다는 전언이기도 하다.
이를 이사야서와 시편저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라고 전하는 이사야서 63,16ㄹ-17.19ㄷㄹ; 64,2ㄴ-7에서는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라고 창조의 사랑의 전한다. 시편저자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인해 그 창조의 사랑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도한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시편 80(79),2ㄱㄷㄹ과 3ㄴㄷ.15-16.18-19)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3절)는 결국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하느님 창조의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포괄된다. 이는 네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갈 수 없다(요한복음14장)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깨어서 지키라는 것은 제자이자 사도의 기본 인격으로 그분이 누구인지 재정립하라는 제언,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몰입하라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2]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37절)
깨어 있으라는 두 번째 측면은 모든 인류가 누리는 설렘의 이름이 진정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3절)는 제자들에게 준 언명은 37절에 이르러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37절)라고 확대된다.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보편적 구원론을로 확산된다. 33절에서 깨어 지켜라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면 37절은 너는 누구인지 알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대림절이나 사순절하면 <기도, 희생, 자선>에 초점을 맞춘다. 그 <기도, 희생, 자선>의 궁극적인 방향은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생-성탄의 방향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코린토 1서 1,3-9)라고 전하는 보편적 구원론에서 이미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나타나시기>를 이라고 미래시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그들 삶 속에서 이미 그분이 계시지만 그들이 그분의 현존을 아직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깨어 기다린다는 의미를 미래시제로 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바오로 사도의 2차여행에서 세운 고린토 교회는 여러 측면에서 영적 위기에 봉착하여 있었다. 고린토는 항구도시로 해외무역의 교두보였고 그로인해 육상과 해상에서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동시에 만끽하던 세속의 도시였다. “황금의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빠지면 인생은 무슨 맛이냐”( 밈네르모스, 『고대 그리스 서정시』)라는 노래가 널리 알려졌듯, 고린토인들이 누리는 풍요는 오직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풍요로움 때문에 안팎으로 부도덕, 술취함, 사치, 방탕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로마신들의 숭배자로써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주변국가들이 모여 운동경기를 격년제로 벌이는가 하면 또한 땅의 신인 풍요와 다산, 욕망을 중시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동시에 믿고 있었다.
이런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외적 환경 속에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던 바로오 사도는 고린토교회의 실상, 파벌과 분열, 음행과 우상숭대, 사랑의 부족 등에서 고린토교회가 깨어나야 할 것을 제언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가 바오로 사도의 이성적인 어조의 서신이었다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바오로 서간문의 행간에 넘치는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어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린토인들의 문제는 21세기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이 추구해야할 풍요로움이 진정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깨어있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같은 맥락의 답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린토전후서는 단지 고린토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21세기 모든 인류에게 진정한 풍요로움으로 깨어있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대림 1주에 깨어 있으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풍요로운 자에게도, 또 현실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자에게도 실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탄식과 열망의 주름을 동시에 사는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그 현주소를 제대로 바라보라는 은총의 초대다. 우리 삶 겹겹히 어떤 풍요로움이 있는가를 바라보라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리치의 율라아나는 『사랑의 계시』에서 진정한 풍요로움,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너의 모든 고통에서, 모든 질병에서, 모든 괴로움에서, 모든 슬픔에서 갑자가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 보상을 받고, 사랑과 지복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너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고, 온갖 싫은 것도 의지의 결여도 없을 것이며, 언제나 끝없는 기쁨과 지복이 잇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뜻이고 나의 영광이다. 그 때에 잠깐이라도 네가 고통을 받도록 괴롭힐 수 있겠느냐?“
<깨어 지켜라> 혹은 <깨어 있어라>는 성서 전반에 걸친 이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알기 위해 비허라고 할 수 있다. 대림 1주 깨어 있으라는 보편적 구원론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풍요속에서 정립하라는 일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성탄을 준비하는 유일한 실재관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서에서 '풍요로움' ‘충만’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축복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이 <차고 넘침>을 의미한다. "충분하다", "충족하다", "충실하다"(루카 2:40) "만족하다‘ (시편 90:14) "가득하다" (마테오 23:25~27), "넘치다"(잠언 3:10, 시편 23:5)."풍부하다" (창세기 13:2) "전부", "전체"(루카 13:21, 21:4). "성취하다", "완성하다"( 2코린토 8:6~8, 갈라디아 6:2). "큰 무리"(로마11:25) "채우다"(루카 5:7, 요한 2:7)."목표에 도달하다", "경지에 이르다", "극점에 달하다"(갈라디아 4:4~5, 사도행전 40:1~2)."왕성한"(시편 72:16/창26:12) "흥하고 왕성하다"(시 72:7). "풍성한"(에페소1.7)등으로 나온다.-[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מָלֵא/fill)으로]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 우리에게 언제나 풍요의 길을 열어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을 걷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이 던지는 달콤함에 끌려 존재론적 외로움과 죽음의 두려움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유일한 실재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애서 만나는 모든 사건, 사물,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편화된 단자로 인식하기에, 지난 시간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깊은 두려움속에서 쩔쩔 맨다. 그로인해 워크홀릭이나 소유욕에서 저 세상이 주는 헤어날길 없는 욕망의 중독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특별한 관계나 소유의지, 혹은 일에서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에 보려는 죽음의 문화속으로 질주한다. 죽음이 죽음인줄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중독은 우리에게 진정 알아야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깨어 지켜라, 깨어 있어라, 는 것을 중독과 몰입을 분별하는 데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절망조차도 실은 자신에게 중독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의 욕망에 중독되지 말고 삼위일체 하느님께 몰입하기 위해서, 자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제언할 수밖에 없다. 밖으로의 시선을 거두고 내가 누구인지 치열하게, 먼저 나 자신의 가난한 이름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자아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보라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을 때, 오직 밖의 시선에 치중한 자신의 진짜 몰골---꾀죄죄하고, 찌질하고, 왜소하고, 비루하고, 비겁하고, 만족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한 불쌍한 중생을 만나게 된다! 욕망의 질주에서 멈춰 그 모든 것을 리셋할 때, 자신을 한없이 외롭게 했던, 두려움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그 모든 왜소함이 유발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과감히 지울수 있는 용기, 그것이 깨어있음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내가 부풀린 나의 고통의 이름을 알 수 있고, 입만 열면 징징거리는 자기연민의 근원을 알 수 있고, 피해자코스프레의 민낯을 볼 수 있고, 과장된 허풍의 실체를 알 수 있고, 질투의 카인이즘을 알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뭉쳐진 우울과 근심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리셋의 포인트는 다시는 찌질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찌질할지라도 찌질함의 횟수가 줄어들고 세상 탓, 남의 탓으로 두겹, 세겹의 찌질함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번째 포인트이고, 나의 찌질함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두번째 포인트이자 본질적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거짓 외로움과 두려움을 리셋하라! 세상이 유포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리셋하기 전에는 성탄의 의미, 그 설렘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다. 리셋은 알다시피 정보의 과잉으로 진정 중요한 정보를 읽을 수 없을 때, 컴퓨터를 초기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엃키고설킨 욕망을 초기화할 때, 그 욕망이 불러일으킨 외로움과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욕망은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배고픔과 고달픔이 가중된다. 그 모든 것을 리셋하기 위해선 절대고독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그것도 상대고독이 아니라 절대고독의 시간을 건너가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비허를 만나게 된다. 사랑의 법칙, 함께 하기 위해선 더 많이 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의 가난, 절대 고독 속에서 즉 빈 구유가 되는 비허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아기로 오시는 것을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다. 즉 마리아야! 베드로야! 바오로야! 라고 그분이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들을 수 있다.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쓰는 창세기, 삼위일체 하느님! 그 생명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읽어야 하는 생명의 텍스트를 비로소 읽게되는 각몽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몰입의 아름다움, 자아성찰의 거울을 보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리셋(reset)하라!]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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