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몸’의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 치유받는 ‘몸’, 낡아가는 ‘몸’

나뭇잎숨결 2024. 2. 2. 08:11

아침과 저녁,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몸’의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 치유받는 ‘몸’, 낡아가는 ‘몸’

-연중5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를 중심으로

 

 

 

 

 

1.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엊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 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정지상의 「송인」,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형기의 「낙화」와 함께 이별시의 백미로 꼽히는 시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이별이 단지 상실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치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그것도 엊그제가 아니라 한 두 철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섭섭하지만 아주 조금만 섭섭한 이별이고, 영 이별은 아니고 어느 내생애라도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는 잠시의 이별이었음하는 화자의 어조에서,

 

이별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간다. 감정과 정서로 표출된 이별이 아니라 생의 어떤 페이지에 남겨진 지문(指紋), 시인이 이별에 내생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 시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그 만남은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 이별할 때 보면 두 사람이 지닌 인격의 깊이, 관계의 진면목이 나온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별이 어떻게 시간의 얼굴일 수 있을까? 이별은 시간의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변형시키다-변형하다)를 가장 잘 반영한다. 이별로 관계가 끝나는 선적인 크로노스Krónos의 시간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반면 이별을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의 과정으로 영원의 문을 여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전자는 이별을 상실로 보았다면, 후자는 이별은 영원 속에서 보편적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본 것이다. 전자는 상실이고 후자는 치유에 해당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2. 상처 받은 치유자에서 치유하는 치유자로(헨리 나웬)

 

 

 

 

이 시대에 파견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치유받은 치유자’ 의 길을 가는 길위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시간의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변형시키다-변형하다)를 사는 또 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실존의 상황에서 맞닥트린 고독과 고통과 치병의 심연에서 걸어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 사람이기에 그렇다. 

 

상처받은 사람이 어떻게 고독과 고통과 치병에서 치유자가 될 수 있는지를 바라본 헨리 나우웬 신부는, 『상처 입은 치유자』 에서 상처받은 치유자만이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왜 그가 그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는 인간의 기준으로 해명할 길이 없다. 다만 고통이라는 깊은 심연에서 자신의 유사죽음을 목격한 이만이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은 성심의 상처가 모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에서 상처의 신비는 치유의 신비로 가는 유일한 루트라고 할 수 있다. 

 

나우웬 신부는 치유를 네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첫 째, 고통받는 세상을 다룬다. 그는 세상을 단자화된 ‘단절된 세상’으로 진단하며,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길은 바로 '함께'라는 것을 제안한다. 둘째, 고통받는 세대를 다룬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젊은이들의 눈높이에서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의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  셋째, 고통받는 개인을 다룬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내일의 소망을어떻게 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넷째, 외로움의 상처로 떨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예수님의 길을 보여 준다.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상처사용설명서를 통해 사역자가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치유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치유의 길로 나서기 전에 자신의 상처를 예수님의 상처와 만나게 하라는 것이다. 

 

나우웬은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더 온전한 인간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상의 예를 들어 치유의 일상성을 말한다.

 

어떤 이의 눈을 들여다봤다면 그가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잔학한 처사들을 피해 달아나는 이 시대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고통과 죽음이라는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그 은신처에서 데리고 나와 그들이 속한 사람들에게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과 함께 두려움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두려움은 바로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의 세대가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에 속한 익명의 그리스도라라면, 내일의 세대는 이 고독한 군중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는 세대와 우리는 맞닥뜨렸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좀 더 성숙했다고, 좀 더 똑똑하다고, 힘이 더 세다는 이유로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는 아버지가 없으면서 아버지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을 거부하는 이 세대,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제도의 적법성을 거부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이 세대는 새로운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길을 열어주는 아버지에게 인도받지 못한 그 자신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망자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내향적이고, 심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실했고 강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를 우리 마을 한가운데로 데려가서 그 젊은이의 모습 안에서 두려움에 싸인 이 세상을 구원해 줄 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 우리는 내면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며, 긍휼히 여기며, 묵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국 기도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메시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구체적으로 잡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파악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환자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고통의 끝에 마주할 죽음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짧은 대화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지만, 그를 방문한이들은 계속해서 그 주제를 회피하려하거나 그 고통스런 실상을 은폐하려 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의 처절한 울부짖음, “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라는 말은 주님께 자신의 죽음을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삶의 경계 저편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에 비해서는 오히려 작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환자는 지극히 실존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실존을 넘어서는 것임을 치유자는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그에게 어떤 답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치유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이 줄 수 잇는 답이 아닙니다.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답입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어요.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잇습니다.” 세상에서 고립된다는 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최악의 것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태도가 있다면, 바로 무관심입니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에 귀기울여 주고, 격려의 말을 해 주며, 용서하며, 안아 주며, 자신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거나 그들은, 더 이상 도울 능력이 없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 합니다.그런데 치유자들은 그들의 곤경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비극입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에 개입해야 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전인격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 입고 심지어는 파멸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보호하여 값진 선물로 소중히 간직하게 합니다. 치유자가 이런 그릇된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간 이해의 원천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진정으로 섬김 수 없습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안내를 통해 소망의 표적이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고통을 회피할 필요가 없고 그 고통이 삶에 대한 공동의 추구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고통은 절망의 표현에서 소망의 표적으로 바뀝니다.

 

외로움이 사역자의 가장 큰 상처들 중 하나라면, 환대는 그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인간이 당면한 곤경이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불멸의 추구라는 것을, 또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신비주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초월이라는 방식의 두 측면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언젠가 인간이 자유로워지리라는 확신, 곧 자유롭게 사랑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게 합니다.

 

 

크리스천이란 치유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나우웬은 우리에게 사역자가 된 것이야말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가 실존하는 시대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섬김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의 부르심은 자신의 시대가 처한 고통을 그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며, 그 깨달음으로부터 그의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혼란한 세상에 동참하려 하거나, 강박적인 것 같은 동시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거나, 또는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려고 하는 등 그 모든 경우 그의 치유의 손길이 진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길은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경험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길은 단순히 목회자나 성직자만의 길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향한 소명인 것이다. ‘소외’와 ‘단절’과 ‘외로움’과 ‘죽음’ 앞에 고통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일은 성직자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한 소명인 것이다.

 

이 시대에 세상에 파견받은 모든 이들은 예수님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 부름 받았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상처 입은’ 사역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이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몸이 찢기심으로써 친히 새생명의 길이 되어 주셨듯, 실존의 현장에서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들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나웬 신부는 바라본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치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많은 크리스쳔들의 물음에 답을 준 것이다. 또한 섬김의 여정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단절된 세상’, ‘흔들리는 세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이천년전에 예수님의 공생활 대부분을 차지했던 치유는 어떻게 21세기에 섬김이 어떻게 치유인가를 안내한다.

 

자신이 경험한 고독과 상처와 치병,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상처가 치유가 되는 역설, 공동체 일원들의  나약해 보이는  ‘상처’를 바로 보고, 인정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남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역자로서 내면에 감춰 둔 상처를 드러내 보임으로( 상처의 직선적 노출이 아니라, 누구나 실존의 현장에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경험의 일반화와 보편화를 통한 드러냄)자신의 치유와 더불어 공동체의 치유와 성장을 열 수 있다. 늘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약함을 통해 완벽함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투영한다. 먼저,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를 만지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먼저 치유받아라. 그리고 세상을 치유하라. 나우웬 신부의 『상처 입은 치유자』는 이 시대 크리스천을 상처입은 치유자로 재정의하며, 크리스천은 자신이 입은 상처와 고독과 치병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치유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전한다.

 

 

 

 

 

 

 

 

 

 

3.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르코 1,29-39

 

 

이 글은 [지각의 전환, 치료와 치유의 해석학](2021214일 연중5)과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29-39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마르코1,29-31/마태오8,14-15/루카4,38-39),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마르코1,32-34/마태오8,16-17/루카4,40-41), 기도와 전도여행을 떠나시다(마르코1,35-39/루카4,42-44)에 실려 있는 <치유-기도-전도>의 트라이앵글을 통해 치유(해방)의 메시지를 전한다.

 

예수님의 치유는 몸와 마음과 영혼을 지닌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몸의 운명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특정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 뿐 아니라 몸을 지닌 모든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몸의 메타모르포제(metamorphose), 치유받는 몸, 낡아가는 몸>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를 통해-열망이란 이름의 사랑, 상처 받은 치유자에서 치유받은 치유자로 어떻게 그분의 상처받은 십자가의 신비를 우리 삶에 접목시키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과 닿아 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삼중의 존재로 <치유되는 ‘몸’과 부서지는 ‘몸’>(마르코1,29-3/2고린토12,7)을 동시에 살고 있는 실존의 덕후들이다.

 

우리가 살아내는 몸의 운명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몇 개의 질문이 동반된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 훼손된 상태, 그에 대한 ‘치유와 복음의 상관관계Correlation between Healing and Gospel’는 무엇인가? 치료와 치유는 함께 가는 것인가? 치료와 치유는 병원과 사목으로 전문화되고 분화된 것인가? 

 

먼저 질환과 질병은 무엇인가?

 

“‘질환’은 의학적 개념으로 신체의 기관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상태를 지칭하나 ‘질병’은 그의 사회적 기능과 그 존재에서 느끼는 가치하락과 소외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질환은 치료하고 질병은 치유한다”(허버드대 L. Eisenberg, 『질병과 질환, 치료와 치유』 )

 

성서에서 치유는 기적의 차원, 일상적이고 개인적 차원, 사회.문화적 차원, 자연현상적 차원, 상징적 차원 등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그 모든 치유의 기적이 여타의 기적 사화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전일적 차원the whole dimension of the gospel’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수반한다. 즉 전일적 (全一的)이란.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히 통일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치유가 전일적 차원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성서에서 말하는 몸(soma)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와 ‘치유의 기적’이 하나로 모아지는 신비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베드로 장모의 병과 베드로의 집, 문 앞으로 몰려둔 앓는 이들에 대한 치유기적사화는 몸의 치유가 단지 육체를 낫게 했다는 치료의 의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영육이 함께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전일적 차원으로 수렴되었는가, 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 육신과 마음의 유기체적 통합의 차원, 즉 심신일원론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치유는 영육의 전일적 차원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질환은 ‘nosos’(마태4,23/루가9.1/마르코34,사도19.12)를 사용하고 병에 해당하는 ‘astheneia’(마태오8,17/요한5,50), ‘kakos’, ‘exein’(마태4,24)는 ‘치료하다’(hiaomi), ‘치유하다’(therapeuo), ‘온전하게 하다’sothesomi등의 동사와 연결된다. 치유를 기적이라고 할 때 기적(miracle)은 ‘놀라워하다’는 동사 ‘mirari’에서 비롯하였다. ‘경이로움’에서 시작된 기적은 자연현상에서 머물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된 신의 현현(epiphany)이라는 표징의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창조는 기적의 시작으로 보며 구원을 기적의 완성으로 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기적의 원리는 하느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마르코복음에 실려있는 이적사화는 18편이나 수록되어 있고, 구마이적사화4편, 치유이적사화8편, 소생이적사화1편, 자연이적사화5편 등으로 보아 치유이적사화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파나움은 하루에 낮(빛)에서 저녁을 거쳐 새벽으로 이동하는 예수님의 동선을 거쳐, 치유의 여정을 볼 수 있다.

 

성서에서 기적은 ‘하느님의 지고한 행위’(신명3,24), ‘놀라운 일’(탈출기 5, 11) ‘능력과 징표’(탈출기7,3, 신명기4, 34)등, 과학적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예수님 시대, 엣세네파나 바리사이파는 기적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사두가이파는 기적, 천사.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마 치유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고 왜곡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사화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신적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던 것에서 그를 추론할 수 있다. 1세기 역사가 폴리비우스 요세프스는 성서에 수록된 기적에 대하여 가급적 ‘자연현상’으로 설명하였으며,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마이어와 필로는 하느님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으로 치유기적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치유와 기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저변에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치유기적사화를 바라보는 관찰자시점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니까. 하셨겠지, 하셨을 테지, 라는 방관자적 자세에서 치유이적사화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성서에서 치유의 기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은 기적을 체험한 한 개인의 차원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느님 나라의 ‘표징semeion’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임마누엘’ 체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표징이자 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온전한 인간에 대한 표징을 동시에 읽어낼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치유받은 몸(마르코1,29-39) 치유가 보류된 몸(2고린토12, 7-10)에서 치유가 어떻게 복음의 ‘전일적’ 차원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코1,29-39)

 

 

 Ⓐ~Ⓔ에는 환자 당사자가인 베드로의 장모 본인이 아니라 제자일행이 병의 상황을 예수님께 알려 주었고, ‘다가가서 잡아 일으키는’ 예수님의 손, 행위에 의해 치유가 이루어진다. 몸에 대한 몸으로의 응답이다. 이 응답의 원리는 기적의 원리인 그분의 한없는 사랑과 능력에 달려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은 북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병 말라리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은 일상의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치유의 ‘만짐’은 일상으로의 회복에 초점이 놓여있다. 일상의 모든 일은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몸'은 메를로 뽕띠가 바라본, ‘사이세계’와 ‘접합점’으로서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만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지는 자의 순환이 있고, 만져진 것은 만지는 자를 파악한다. 또 보이는 것과 보는 자의 순환이 있다. 보는 자는 보이는 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보이는 것에 만지는 자의 등록이 있고, 민질 수 있는 것에 보는 자의 등록도 있다.”

 

 

여기에서 Ⓒ->Ⓓ->Ⓔ의 과정은 당시 엣세네파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만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몰려든 수많은 환자들, 특히 예수님을 찾아나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은 단지 유능한 의사, 치료자일 뿐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이후의 그들의 행적에서 추론할 수 있다. 오늘날 의사는 치료만 할 수 있을 뿐이고, 교회는 치유의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으로 세분화되는 그 사이와 틈새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성서는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의 온전한 회복을 약속한다. 이러한 원대한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거쳐야 할 과정이 치료이전에 치유일 것이다. 이처럼 치유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우선적으로 취급될 과제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의 전적인 회복은 치유의 과정을 필두로 해서 사회적 복귀나 통합으로 이어져야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장모,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몰려든 환자들의 면면을 통해서 치유의 기적은 예수님 사랑의 전능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전능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에서, 치유의 은총에 필요한 그릇, 갈망-믿음이 전제함을 알 수 있다. 그 갈망-믿음은 당사자의 믿음이 관건이기도 하지만 그들 주위의 사람들이 그 병을 함께 아파할 때, 역시 이 치유기적이 이루어졌음을 바라보게 된다.

 

병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칸트가 바라본 대로 “소수자the minority로의 전락이고 치유는 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란, 타자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이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중심부 담론을 이끌어가는 주류세력인 지배자the majority와 갈등(축출과 소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바로 그 맥락과 닿아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치유 사건을 통해 예수가 단지 유능한 치료사가 아니라 소수자the minority와 지배자the majority의 위치가 전복되거나, 견고한 유대사회의 카테고리가 무너지는 기능을 하게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치유기적사화는 저수지에 바늘구망을 내는 가치관의 전도가 시작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갈릴레아에는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치료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일정한 곳에 자리잡고, 예수님처럼 원격치료를 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며,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바라사이의 경전 토라Torah중심주의를 견고케 하는 이들이었다(신명기13, 2-6)

 

그들과는 달리, 38절에서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것에서 예수님의 치유기적사화가 갖는 메시야의 정체성,  오직 일상과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의 복귀와 치유만을 원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연민의 권능)이 부각된다.

 

 

 

 

 

 

 

 

그렇다면 병(고통)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치유는 어떻게 가능는가?

 

병 넓게는 고통의 원인을 인과응보론(네 몸에 뿌린 거 결국 네가 거둔다), 숙명론(삶은 고해, 생자필멸은 인간 운명이다), 상대적축복론(너희 가족은 아프냐? 우리 가족은 건강하다. 고로 하느님께 감사한다.), 자아만족론(내 건강은 내가 지켰다. )등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 성서에서 욥기와 요한9, 1-5 등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재(연중6주 나병치유와 관련되어 묵상 주제)로 병을 포함한 고통을 바라보기로 한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병(고통)은 환자 본인이 그 발병요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타자가 그  요인을 일반화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병은 그 어떤 주제보다도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의대정원을 늘리는 문제, 그리고 가장 높은 성적을 받는 학생들 대부분이 의대지망을 한다는 점에서, 의사는 병의 고통 반대편에서 로망의 직업이 되었다. 무엇보다  타자에게 인색하고 무관심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병을 고치는 데는 부지런하고 거액의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다면 병 만큼 성찰의 대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발병의 수많은 요인 가운데, 병의 원인을 그 무엇보다 <마음>으로 보는 관점을 살펴본다.

 

"한때는 질병의 원인을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외부 인자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성행했다. 특히 최근에는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해 어떤 질환들은 유전자 변이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특정 유전자를 공격하여 질환을 유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치료법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외적인 병인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질병의 원인이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유발되고 촉발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예전보다 더 미세한 영역에서 질병의 발달과정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특정 병변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한 기전은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결국 유전자 변이 역시 스트레스와 같은 마음의 상태와 연관이 깊다는 가설은 아직도 유효하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 예수님은 음식이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각종 마음의 악으로부터 몸이 더럽혀진다고 말씀하신다. 즉,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마르 7,22 참조)이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마음이 병의 원인이다. "(박현민 베드로 신부)

 

 

왜 병의 주 요인이 마음인지에 대해, 그 맥락에서 치유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본다. 

 

치유는 고통 받는 환자가 고통에 더 이상 그 어떤 가치도 두지 않는 순간 이루어진다. 많은 병은 본인의 선택이며 결정이다. 치유 역시 본인의 선택이며 결정이다. 병은 약함이 곧 강함이라는 잘못된 확신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치유는 병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일어난다. 병에서 얻을 것이 아무런 것도 없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병은 치유된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려면, 결정의 주체는 병의 원인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병은 내가 지각하는 세상에서 몸이 결정권자일 때 존재하기 때문이다. 병이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몸을 이용하기로 한 결정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치유의 토대이며, 이는 모든 형태의 치유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병을 치유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치유에 특별한 치료술을 가하는 것은 환자의 선택에 형태만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갈망에 감지되는 형태를 주기위한 선택이 치료술이다. 이런 치료에서 치유가 가능하기 위해 지각의 전환에 필요한 조건은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 인식의 대가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전체가 이미 그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인식과 함께 책임은 책임이 있는 곳에 있게 된다. 책임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병을 유발하는 원인 가운데 죄책감, 절망, 분노, 희생관념은 같은 뿌리의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선물인 치유라는 해방을 받아들이려면 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몸은 중립적이기 때문에 마음이 선택한 것을 수행할 뿐이다. 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고통을 사라지게하며 창조물에 대한 모든 혼동도 동시에 사라지게 한다. 사물의 존재이유를 안다는 것은 우리 몸의 존재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관점에서 정렬되면 그 일반화에서 따라올 가치는 무한하고 끝이 없는 은총의 기억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하느님 사랑 앞에서 병은 그 목적을 상실한다. 목적이 없는 것을 사라진다. 병의 원인과 결과는 창조를 흉내낼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치유는 치유를 갈망하는 자 앞에서 항상 확실하다.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속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자가 이런 치유를 위협으로 여기면 치유는 항상 뒤로 물러선다. 환자가 치유를 갈망하는 순간에만 치유는 주어진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치유자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았을 때, 치유받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법칙이 성립된다. 하느님의 선물은 주고받는 이에게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의 증상이 여전히 남아있거나 치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치유의 선물은 언제 받아들여지는 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물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은 환자나 치유자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뢰(기도)는 치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치유는 성령이 환자를 위해 추구하는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치유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의 결과를 제한하는 것은 치유의 결과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이다. 치유자가 하느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자 할 때 치유는 늘 성공한다. 사랑을 주었기에 오직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치유자는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렇다. 치유를 받아들인 사람만 치유할 수 있다. 결과를 의심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심이다. 실수는 언제나 환자를 배제한채 자기 자아에 집중하고 염려하는 형태를 띤다. 그것은 자기 창조의 근원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치유자는 다시 환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한다면 의심은 불가능하다. 치유는 하느님 창조의 사랑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마르코1,29-39으로 돌아가 본다.  베드로의 문 앞에 예수님께 몰려든 많은 병자들은 토라중심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 몰려든 그들이 안식일 혹은 안식일적인 의미가 있는 저녁시간에 예수님께 몰려든 것으로 그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마치유나 병의 치유는 단지 개인적 차원의 사회복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치유기적 사화는 몸의 치료나 치유의 의미를 넘어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인 복음의 의미-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현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에서 이를 거둡 확인할 수 있닫. 치유시적사화 이후에 다른 지방으로 가자는 예수님에게서 치유기적은 복음선포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치유와 치유 사이에 기도가 있다는 것은 복음 선포에 보이는 표징뿐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된 자기치유가 얼마나 관건인가 하는 점이 마르코복음사가의 복합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1,29-39에서 치유되는 ‘몸’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았다면, 그렇다면 치유가 거절된 ‘몸’(2고린토12,7)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지닌 몸이 지닌 궁극적 운명을 바라볼 수 있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10)

 

베드로의 장모와 많은 이들의 치유 사건과는 달리 ​Ⓘ~Ⓚ에서 바오로는 ‘가시’로 비유되는 치병에 대한 치유의 기도가 세 번이나 거절되었음을 고백한다. 조심스럽게 일부 성서학자들은 바로오가 앓고 있던 ‘가시’를 ‘간질병’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병명이 무엇이든 간곡한 치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거절된 치유를 통해서 우리는 ‘몸’ 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몸’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 앞에 다시 서게 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 그리고 비이원론을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몸’이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철저히 훼손된 그분의 ‘몸’을 통해서 치유를 넘어서는 몸의 운명을 바라보게 된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었습니다”(1고린토12, 27) “유다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토1, 22-23)

 

바오로사도의 가시의 비유는 ‘몸’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 즉 병들고 늙고 훼손당하고, 낡아가다, 결국은 죽어야 하는 부서짐이 예정된 약한 ‘몸’이 어떻게 육신의 부활에 이르게 되는가를 연역하는 포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부서지는 약한 ‘몸’이 부활을 경험하는 고귀한 ‘육신’ 그 사이에 우리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몸은 최후의 타자”이며, “부활resurrection은 융기surrection”라고 보았던 장 뤽 낭시의 이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몸은 인간에게 최후의 타자이다. 몸은 나의 것이면서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최후의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surgissement하는 것, 이런 나약한 몸의 운명이 부활의 터전이다”(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몸’의 부서짐과 사라짐과 낡아짐을 경험하며, 동시에 ‘육신’의 부활을 살아내는 교회의 ‘지체로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이미 살고 있는 종말론적인 존재라는 점으로 몸의 운명은 수렴된다.

 

성서는 1차적으로 치유를 통하여 일상으로 우리를 복귀시킨다. 또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온전한’ 회복을 주신다. 그 결과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 모든 치유의 바탕에는 기적의 원리인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온전한 몸의 회복이란 ‘몸’에 대한 크로스적인 십자가의 이해를 요구한다. 몸을 치유하고 동시에 그 몸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횡적인 몸은 회복되나, 이미 나와 하느님과 연결된 종적인 몸은 치병의 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성전, 부활에 동참한 표징으로 포괄되었다는 것이다. 치유된 몸과 치유되지 않은 몸이 모두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라는 점이 몸의 운명이다. 우리의 ‘몸’은 실존적이며 동시에 존재론적인 이 이중의 의미를 수행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코1,29-39의 치유기적사화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과 하나되어 일어나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