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81억개의 목숨과 81억개의 유혹, 그리고 단 하나의 상황!

나뭇잎숨결 2024. 2. 16. 07:20

 

 

 

 

 

 

81억개의 목숨과 81억개의 유혹, 그리고 단 하나의 상황!

-사순1주,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를 중심으로

 

 

 

 

1. 안민영 「매화사」

 

빙자옥질이여 눈 속에 네로구나/ 가만히 향기 놓아 황혼월을 기약하니/아마도 아치고절이 너뿐인가 하노라(6)

 

안민영의 「매화사」에서 빙자옥질이며 아치고절이라고 예찬하는 매화는 꽃이 필 수 없는 2월에 핀 꽃이라 예로부터 매난국죽과 함께 사군자라 불렸다. 사실 겨울 꽃 하면 동백도 있다. 그런데 굳이 매화만 사군자로 일컬은 것은 동백은 남해안 일대의 비교적  기온이 따뜻한 군락지에서 피지만 매화는 그 어떤 지방도 가리지 않고 개별자로 눈 속에 피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는 겨울이라는 상황, 눈이라는 상황,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스스로 나무임을 증명하듯, ‘꽃은 어떤 상황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것으로 자신이 꽃임을 증명한다. 매화가 상황에 굽히지 않는 자기응시의 상징으로 전환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꽃이라는 사물이 '결기'라는 형이상학으로 수렴되는 이유이다. 매화는 ‘그렇기 때문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운다는 것에서 사랑의 논리와 비슷하다. 매화는 매화 스스로 매화인 것이다.

 

 

 

 

 

사진작가 분이가 정선에서, 탱큐! 수묵화같다!

 

 

 

 

 

2.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하다(칼 야스퍼스)

 

 

그렇다면 인간은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와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기1,26)라는 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9,8-15에서, 상황에 매몰되어 현세적인 향락만 추구하는 인간을 ‘고깃덩어리’라고 칭한 표현이 나온다. 인간은 사람과 고깃덩어리 사이라는 것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는 것으로 풀어나간다.

 

『철학』은 1932년에 나온 야스퍼스의 주저로서 『철학적 세계정위』, 『실존해명』, 『형이상학이』라는 3개의 저서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야스퍼스는 『철학』에서 <한계상황>이라는 화두를 통해 인류의 상황을 진단하였다. 야스퍼스는 존재를 ‘객관존재’, ‘'자기존재’, ‘즉자존재’라는 3양태로 구별하고 이것들은 상호간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하며, 이러한 존재양식에 대응하여 고찰을 전개시키고 있다. 첫째 객관존재를 살피면서는 존재를 우선 시간 공간적 대상으로서, 또 그 밖의 대상성(對象性)에 있어서 다양하게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탐구는 개별과학의 과제로 넘어간다. 인간은 ‘개별적인 방식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지만, 그 통합성이 명백해지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세계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처진다. ‘철학적 세계 정위’, 곧 참으로 철학이 세계 자체에로 자기를 방향짓는 것은 개별과학의 테두리를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자기존재에서 ‘철학하는 것’의 과제는 ‘실존해명’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해명’, 곧 우리들에 대해 객관적 대상으로서 결코 주어지지 않는 실존의 해명이 그 과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대상화되지 않는 자기 자체이며 그것은 확실히 확인되지만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행위에 있어서 처음으로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세계, 곧 참된 ‘실존’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대상적 세계를 탈각한다. 이 세계에 사랑·불안·고독·사귐 등이 있다. 이는 즉자존재를 살피면서 야스퍼스는 단순한 실존주의 철학에 머물지 않고 즉자존재 또는 ‘초월자’의 형이상학을 지향하게 된다. 철학하는 것은 대상적 세계로부터 비대상적 즉자존재로 초월하는 것이며, 이러한 세계는 보통의 의미로서는 대상적으로 인식되지 않으나 역사 속에 ‘초월의 암호’로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인 지식을 내적으로 비추어 보려고 하는 시도가 된다. 이와 같이 철학은 어떤 학문적 카테고리-일정한 체계적 학설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식을 근저로부터 변혁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방식의 전환이며 해방으로 바라본다. 철학하는 것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는 본래적인 것을 자각하고 객관존재의 세계가 투명해지고 근원적인 것이 지각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상황의 의미를 규명할 수 있다. 한계상황은 저절로 세게로 하나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1년 사순1주 묵상에서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에서, 인용했던 야스퍼스의 글을 다시 읽어본다. 

 

 

그렇다면 세계(나-너-신)와 분리를 조장하는 그 유혹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유혹자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놓인 처지, 상황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일정한 처지(處地), 다시 말해서 자기 주위의 일정한 여러 사물 즉, 환경으로서의 자연 내에 존재한다. 인간은 상황적 존재다. 그래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칼 야스퍼스는 인간을 ‘상황내 존재(In der Situation Sein)’라고 부른다. 그 상황이란 변화가 가능한 상황과 변화가 원천봉쇄된 상황이 있다. 전자의 상황을 한계상황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상황은 가변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 있는지, 야스퍼스의 생각을 좀 더 살펴본다면,

 

①한계상황(Grenzsituation)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모든 유한한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인간은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이 좌절은 인간 자신으로 하여금 실존에의 비약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의 비약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초월자 앞에 서게 된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서 신을 알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을 체험한다는 앎, 신을 닮아 산다는 그 앎이다.

 

우리는 그것을 개별자로써 체험한다. 개별자이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 역시, 독립적 실체로서 철저히 객관 세계를 부정한다.

 

②존재론은 결국은 언제나 내재론(內在論)이며,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어 존립하는 것에 대한 교설,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관한 교설이다. 여러 세계상은 항상 특수한 방법으로 인식된 세계고, 그것이 잘못되어 세계 존재의 일반으로까지 절대화된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처한 개별적 상황을 통해 ‘분리’의 원인인 ‘불안(결핍)’이라는 조건을 구체화한다.

 

③모든 것은 불쾌할 정도로 뚜렷하게 인류의 몰락을 예언하는 듯하다. 점점 더 신속한 상품 교환을 낳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으로 현존재가 변해가고 있다. ···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간의 실제 행동이 자유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다.

 

이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한계 상황의 끝, 죽음으로 이끌고, 가변적 상황이었던 것이 불변의 한계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을 죽기 전에 체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임에도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관념의 영역이고 다른 사람의 영역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죽음을 좀 더 냉정하게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서 마음의 소리보다 영혼의 소리를 더 잘 경청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④‘사람은 결국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려 한다.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분석은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양식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에 무관심한 평온을 갖는다. 즉 ‘나는 죽는다’가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죽는다이기 때문이다.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나'라는 개별자를 알게 된 후에 '너'라는 개별자를 알게 되는 필연 앞에 인간은 서 있게 된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앞에서 너라는 세계와의 유대를 실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규정하면서 이 유대가 ‘나’라는 개별성을 잃는 그 유대가 아님을 강조한다.

 

⑤인간의 본래적 가치는 그가 가까이하는 유(類)나 형(型)에 있지 않고, 대리하거나 바꿔칠 수 없는 역사적 개별자에 있다. 그럼에도 실존은 다른 실존에 의해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실존과 함께 자신이 될 때에만 나타난다. 전달이 없으면 이성은 잠시도 존재하지 못한다. 현존재적 현실성, 의식 일반과 정신은 모두 전달에 의해 운동하고 변화한다.

 

우리의 실존은 고립 상태가 아니다. 개별자로서 홀로 있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상호간 의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공동체에 의해서만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너를 알았다는 것이 너의 불안과 나의 불안을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이에 이르러 야스퍼스는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을 초월자에서 찾는다. 신앙을 부정하며 현실 인간에게만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또 다른 허무주의를 낳을 뿐이다. 신을 안다는 것은 한계상황 앞에서 삶의 마지막 암호를 푸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불안을 벗어난 안정은 오직 초월자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성이라는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초월자라고 보았다. 이때 우리는 비로서  한계상활을 초월하게 된다. 외견상 통합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희망은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 때, 초월은 초월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초월할 수 있으며, 시간의 한계를 통해 시간의 소멸, '영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실존개명, 드디어 눈을 떴다고 표현한다. 

 

상황은 공간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삶과 관련된 일체의 것에 의해서도 의미·규정된다. 상황은 어떤 의미 연관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상황은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상황은 이 양자가 동시에 나의 존재에 대하여 이익 혹은 피해, 행운 혹은 제한을 뜻하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황 내 존재인 한 인간의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 상황의 의의도 달라진다. 상황이라는 개념은 외적인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특수한 품성, 즉 육체적·정신적인 상태까지도 포괄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일반에 대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을 통하여 상황을 피하거나 부담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보다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다른 상황이 있다. 야스퍼스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상황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규정한다. 한계는 내재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이미 초월자를 가리킬 만한 그 본래의 기능을 시작한다. 개별적인 한계상황, 즉 죽음·고통·투쟁·죄책 등을 체험함으로써 초월이 일어난다. 인간은 현재의 질서가 불충분한 데서 한계상황이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기 때문에 단지 이 질서를 개선하려고만 하였다. 질서로서 인식한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제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것들과 대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은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그것이 아니면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로써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다. 존재는 한계상황이 억압하는 현실에 부딪히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행동의 근거에 회의를 느낀다. 존재는 삶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에서부터 불안을 감지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좌절은 가능적 실존을 현실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서 <분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유혹자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이자, 유혹자로부터 비로서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자만이 희망하는 자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유혹자의 이름을 어느 정도 적시할 수 있다. <나-너-신>이라는 이 스크럼은 생의 조건이다. 이 조건 가운데 한 사슬이라도 빠졌을 때 우리는 연쇄적인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유혹의 결과는 <분리>라고 할 때, 그 유혹자의 이름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자는 기존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 자로서’ 자기초극과 자기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지 못하는 ‘나’ 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콜,   <광야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예수>

 

 

 

 

 

3.<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코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3-1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12-15은 공관복음(미태오4,1-11/루카4,1-13)에 동시에 실려 있는 말씀으로, 유혹사화가 빠스카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시기의 축복의 문을 여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바라보기로 한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님 세례와 갈릴레아 공생활의 중심에 광야의 유혹사화를 다루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탄의 유혹과 천사의 시중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공관복음과 차이가 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40일 단식 후의 사건으로(시간차로) 유혹사화를 다루고 있으며 유혹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차이는 인간이 처한 실존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맞물려 있는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유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유혹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

 

그 맥락에서 요한복음은 유혹사화를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연결하여 빛과 어둠을 창조와 선택의지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코복음사가의 실존상황 이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은 언제나 유혹의 현장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님 상황적인 맥락으로 유혹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전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식을 하고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유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도 유혹은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즉 유혹의 현재성과 유혹의 사후성(40일 단식후에)은 유혹자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으며, 회개와 믿음에 대해 디테일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마르코복음은 유혹받은 당사자의 선택이 중요하다면, 다른 공관복음은 말씀의 내재화가 중요한 포인트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유혹자의 현재성을 통해 사순절의 키워드-파스카축제를 준비하는 가장 근본적인 회개와 믿음을 더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광야의 유혹사화가 지닌 함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순례여정은 누구에게나 광야 40일, 혹은 40년에 해당한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사막을 거쳤으며(신명기8,2),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단식했으며(탈출기34,28) 엘리야는 하느님과 마주하기 위해,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40일을 호렙산으로 걸어갔다(1열왕기19,1-8)

 

마르코 복음서에선 유혹의 현재성을 통해, 유혹의 내용이 초점이 아니라 40일 동안 계속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 그 중심에 놓인다. 또한 유혹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이 그분과 유순하게(이사야11, 6-8) 함께 지냈으며, 천사가 시중을 들었다는 것에서 빛과 어둠의 동시성이 주어진다. 이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광야의 상황이자 우리의 실존상황이라고 할 수 있기에 유혹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내가 선택한 오늘이 곧바로 지옥과 천국으로 갈린다는 것을 지나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세례와 공생활 한가운데 광야 40일의 유혹사회를 편집한 이유를 <상황>이란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성찰하게 이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12)

 

왜 성령께서는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을까? 여기서 악령을 내 쫒으셨다는 단어와 같은 ‘내보내셨다(ekballo)’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취하여 광야로 가셨다고 볼 수 있다. 광야는 생명의 하느님께 적대적인 불모의 땅이다.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원초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창조의 질서가 교란된 혼동의 터전이다. 예수님께서 자주 한적한 곳으로 가 기도하셨다, 혹은 게쎄마니동산에서 혼자 기도하셨다는 것과 연결하여 근본적인 목소리를 듣는 공간이 광야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공간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광야는 모든 의식주의 장식을 제거한 채, 창조와 구원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본질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신명기2,7/32.10/마르코1.2/4,35/6,31-44) 그렇기에 광야라는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은총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하느님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은총의 수용여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에수께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에서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무엇인가? 마르코복음은 유혹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예수님이 처한 유혹의 상황만 전달한다. 성서에서 유혹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dokimavzw는 시험을 통해서 숨겨진 의미인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다는 테스트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peirazo로 시험하다는 의미에서 불신에 더 가깝게 쓰인다. 여기서 유혹은 시험을 통해서 완전히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40년 동안 그리하였다(히브리서3, 9-10)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버서 1,13)

 

바오로와 야고버는 유혹을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두 측면을 동시에 주목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은총의 두 측면을 12절에 이어 13절에서 유혹사화가 갖는 상대적 의미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전이시킨다. 유혹앞에 있던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킨다. 즉 유혹상황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상황은 어떻게 넘어서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3)

 

광야의 유혹사화에 등장하는 세력은 영과 사탄, 천사와 예수 그리고 들짐승들이다. 들짐승은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하며(창세기2,19-20) 에덴의 상태를 보여주거나 또는 평화의 상태(이사야11, 6-9)를 암시한다. 광야는 유혹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자를 이길 수 있는 빛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코복음서에 유혹자인 사탄은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것이 초점임을 알 수 있다. 루카복음 사가가 훗날(십자가사건)을 기약하며 유혹자가 떠나갔다고 유혹을 상황윤리와 연결시킨 것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초점은 인간의 실존 상황 자체가 늘 유혹자와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을 주지한다.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왜곡시키는 죽음과 고통과 소외는 인간의 실존상황에 가라지와 알곡처럼 서로 얽히고설킨 같은 뿌리라고 바라본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은 어떤 특정 시공간에서가 아니라 늘 유혹이 상존하는 광야체험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광야는 우리를 억압하는 사탄의 정체를 인식하고,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는 이중의 공간이 된다. 성령 안에서 인식이 바뀌고 거듭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혹사화 다음에 마르코 복음 사가는 갈렐레아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연결시킨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광야체험 이후에 예수님은 갈릴레아에 가시어 본격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 세례자 요한은 갈릴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의해 체포되어 동부 있는 마케론트 별장에 가두었다가 참수형에 처해졌다.(마르코6,17-29) 그 사건으로 요한의 시대 즉 예언자의 시대가 막을 고하고 메시야의 시대, 예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사의 격랑 속에서 하느님 역사가 어떻게 개입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때가 차서, 라는 말에서 때(kairos)는 일상적인 시간(chronos)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된 시간을 의미한다. 이 때는 하느님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는은총의 시간으로 구원의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의 하느님 약속의 실현으로 바라본다.) 메시야 시대는 하느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인 완성점에 이르렀다고 보여준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당신 아들을 통해 결정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역사에 개입하시어 복음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다. 이는 율법의 시대가 가고 복음의 시대가 왔음을 시사한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지지만 이미 지금 여기서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치유와 복음 선포로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인간 역사의 총체적인 변혁이자, 새 세계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 회개와 믿음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바라보는 회개와 믿음은 유혹사화의 차이점 만큼이나 다른 맥락의 선택을 요구한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에페소, 3)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소1, 10)

 

Ⓕ너희는 이제라도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2,12-13)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창세기9,8-15)에서,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베드로 1서 3,18-22)에서, 노아의 시대에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시편 (25(24),4-10)저자는 "주님, 당신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당신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옵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에서 하느님의 약속인 메시야 시대의 도래에 필요한 회개와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요엘서는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라고 요구하며, 베드로는 세례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약속을 실현된다고 바라본다, 시편저자는 하느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라고 진리의 길이 바로 하느님의 행로라고 전함으로써 진리는 하느님 약속이 어떻게 구원을 보증하는 메인카드인지 제시한다.

 

시편저자는 하느님의 행로와 인간의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진리만이 인간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유혹사화가 어떻게 진리와 연결되고, 진리가 어떻게 근본적인 회개와 믿음을 포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할 필연성이다. 

 

 

 

 

 

 

 

3-2

 

마르코복음사가가 유혹사화에서 전하는 빛과 어둠의 현재성과 실존으로 주어지는 상황논리는 시편저자인 다윗이 전하는 <하느님의 행로인 진리로 이끄소서!>와 어떤 맥락에서 같은 메시지에 해당하는지 다섯 개의 질문을 연결해 바라본다.

 

 

Q1. 유혹자의 이름은 무엇인가?(Quel est le nom du séducteur?)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1,12-15에는 칼 야스퍼스가 피력한 대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속에 놓여 있음을 전재하고 있다. 실존의 상황이 유혹이 될 수도 있고 은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 곁에 상존한다는 것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가 아니라 에고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처한 실존의 상황 너머를 볼 수 있는 첫 번째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자를 밖에서 찾는 한, 유혹상황은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방어기제를 작동할 준비를 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원하지 않는 상황이 끝났다해도 다른 상황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우리가 지금 원하든 원하지 않는 상황이든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놓여 있다. 야스퍼스가 간파한 대로 인간은 상황내 존재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상황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의 순간 순간마다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인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황은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인간 삶을 방해하는 어떤 외부에서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상황은 세계가 던진 고통이나 위기의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서, 유혹자의 이름은 어떤 상황, 외부의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고착화 시키려는 것은 나의 방어기제가 작동할 준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이 유혹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유혹의 승인자는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삶의 벼랑에서 뛰어내리라고 속삭이는  달콤한 소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나의 유혹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유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다, 라는 겸허한 고백이 회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겸허한 고백 속에서 유혹자의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시중을 받는 나, 들짐승(우주)과 연결된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도 알게 된다. 두 개의 상극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현실인식이다. 따라서, 그리므로, 예컨대, 어떤 치명인 실수를 무엇무엇 때문에, 혹은 상투적으로 술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의 유혹자는 내 내부의 나의 욕망이라는 고백은 다음 질문을 하게 한다. 나의 유혹자는 나의 욕망이라는 고백자체가 나에게 평화를 곧바로 가져오지 않기에 질문을 완성해야 한다. 고백은 믿음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육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두번째 질문에 앞서 그렇다면, 이 상황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이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유혹의 현재성 속에서 예수님이 그 상황을 예수님이 목표하는 그 상황으로 전이시켰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시편저자가 통찰한 대로 진리가 하느님의 행로라고 한다면 진리가 우리의 행로, 길이자,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이치다. 여기서 두번째 질문을 할 수 있다.

 

Q2. 모든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상황을 넘어섰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은 매우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지침을 알려준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폭을 훨씬 넘어 안전하게 각 상황너머로 볼 수 있을 때까지, 성령은 우리를 빛으로 한결같이 안내한다. 상황 너머로 '훌쩍' 넘어서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이 상황은 무엇을 위한 상황인가?를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상황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의 선택여부에 의해  빛으로 가는 진리의 여정으로 이끈다.

 

이 원함은, 우리가 설정한 목표이자 성령의 목표이기도 하다. 상황이 결과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에 내 인생 전체에서 내가 목표하는 총론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되는 지점이다. 사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없다. 사탄은 모든 것을 죽음이나 무로 돌리기 때문에 목표가 없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질문은 나는 내가 정한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려 하는가이다. 목표와 수단이 일치하면 모든 일을 이루어진다.  목표는 어떻게 수단과 함께 하는가?

 

Q3. 진리라는 목표(총론)는 어떤 수단을 요구하는가?

 

목표와 수단이 따로 분리되어 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고통이자 갈등이다. 바오로 사도는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요한복음과 메시지를 공유한다. 경험적으로 진리를 우리 중심에 놓았을 때는 사람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일 때는 사람을 잃는다. 사람 자체가 진리, 그 자체이기는 어렵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고 했을때, 그 사람의 오욕칠정의 낙차를 믿거나 그의 세속적 가치관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나와 같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 나를 위해 그러하셨듯, 그를 위해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타자의 구원을 믿는 것이지 타자의 가치관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엇이든지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2코린토13,8)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에페서6,14)

 

진리가 우리의 구원을 가늠하는 이유는, 인간이 늘 어떤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 종료되기 전에는 그 상황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상황이 숨기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기에 그렇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그 상황을 일으키는 수단이 되게 한다.  사랑은 사랑이 목표이자 수단이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이라는 목표에 사랑이 수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이 곧 목표를 이루게 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목표에 도움이 되는 것에는 집중하고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넘겨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하느님 나라 혹은 진리라는 성령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전자는 진실이고 후자는 거짓이다. 목표가 상황을 의미있게 만든다는 것이, 실존주의가 주지 못한 유혹사화가 준 답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라는 명제는 우리의 목표가 바로 성령의 목표이기에 모든 상황을 상황 너머로 인도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진실 혹은 진리가 모든 상황을 넘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음너머 부활의 선물이 평화라는 것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넘어섰다는 것은 바로 평화의 상태를 사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진리로 인해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화가 있는 곳에는 항상 진리도 있다. 성령의 목표가 상황을 결정하고 그 목표에 따라 우리가 선택한 상황을 경험한다. 진리가 곧 평화라는 것은 진리는 믿음조차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진리는 사실 아무것도 우리에게 청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진리는 평화에 필요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Q4. 진리는 믿음을 요구하는가?

 

믿음은 우리가 진리의 성령을 목표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그 믿음을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는 목표를 지향한다. 이는 내가 처한 상황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 상황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생긴 믿음이다. 또한 그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 나름대로(주어진 달란트가 다르기에-그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에고는 자신을 가로막는 상황을 조각내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불신이라는 상황에 갇힌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기에 진리는 에고를 통해 오지 않는다. 상황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상황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것은 불신의 대표적인 상황인식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어떤 정도의 믿음을 요구하는가? 하느님을 믿어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한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코11, 23) 마르코복음사가는 광야에서 빛과 어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을 천사의 시중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까지의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면, 문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다. 문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문제를 그대로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아담 자신의 결핍이 최초의 원인이지 에와의 유혹 때문이 아니다. 결핍이 유혹을 승인하고 합리화 시켰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내 상황이 유발한 문제를 나의 결핍의 원인에서 찾지 않고, 아담처럼 외부(에와)에서 그 문제를 바라볼 때, 상황이 유발하는 문제는 해결의 길이 막힌다. 그렇다면, 진리와 믿음이 들짐승조자 시중을 드는 평화를 낳는 모태라는 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Q5. 진리->평화->믿음은 어떻게 빛의 트라이앵글을 만드는가?

 

마르코복음사가가 전하는 광야의 유혹사화를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상황은 생각들의 결합이므로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주지 않은 것만이 나에게 결핍으로 체험될 수 있다. 내가 정한 목표가 우주에 봉사하듯, 우주는 즐거이 성령께(목표에) 봉사한다. 불신에는 원인이 없지만, 믿음에는 원인이 있는 이유이다.(창세기1장).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된다. 타자에 대한 믿음은 바로 믿음의 전형을 보여준 자기 확신의 예이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그 어떤 타자도 구원에서 제외될 리 없다는 구원의 하한선에서 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의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내재화될 때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해진다. 구원이라는 목표는 천상의 것이지만 구원을 수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나 자신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그 누가 구원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맥락에서 타자에 대한 믿음은 타자를 과거에서 해방(용서)시켜 그에게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다. 타자에게 영원이라는 '오늘'을 돌려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2,7)는 것은 내가 타자를 낳았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완성의 과정 중에 있는 나를 내가 견디고 있음을 바라볼 때, 완성의 과정 중에 있는 타자를 인내할 수 있는 여백을 갖게 된다. 여기서 시간은 영원으로 넘어간다. 하느님의 창조가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종적인 믿음 없이는 타자에 대한 횡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6,14)라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이 바로 빛과 어둠의 상황속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이유다. 진리는 믿음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외롭다는 것, 혹은 두렵다는 것은 불신이고 한바탕 꿈이다. 진리(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언제나 평화와 함께 있기에 그렇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를 누리면서 외로울 수도 없고, 평화를 누리면서 두려울 수도 없다. 진리가 모든 상황을 감싸고, 뛰어넘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믿음에서는 자명한 사실이 된다. 따라서 진리를 상황이라는 관계의 목표로 삼을 때, 모든 특별한 관계(상황)는 거룩한 관계(영원)로 전이 된다. 상황에 질질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전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유혹사화는 우리에게 전한다. 이때 우리는 아담과 카인이 쳐했던 결핍과 질투라는 이름의 그 모든 상황을 ‘훌쩍’ 넘어설 수 있다.

 

 

[81억개의 생명과 81억개의 유혹, 그리고 단 하나의 상황 -사순1주,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를 중심으로]

 

 

2024년 2월 현재, <Worldometers> 에서 제공하는 세계인구는 약 81억이다. 그 81억의 사람은 모두 어떤 상황, 어떤 문제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표면적으로 모두 다른 상황과 문제에 봉착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상황은 언제나 빛과 어둠에 싸여 있다. 마르코 1,12-15에서 전하는 유혹사화는 인간은 언제나 빛과 어둠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따라서, 81억의 생명을 싸고 있는 81억이 경험하는 빛과 어둠에서 우리가 주어진 상황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선택이 빛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이 목표일 때 우리는 빛으로 갈 수 있다. 목표는 갈망이고 갈망은 목표를 이루게 한다. 오소서! 성령이여! 라는 기도는 성령의 목적이 바로 나의 목적입니다, 라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81억의 인류에게 주어진 81억개의 선택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상황 앞에 인류가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 것인가? 내 에고의 중심으로 살 것인가? 선택지는 단 하나이다. 선택지가 하나라는 것은 상황도 하나라는 것이다. 사탄이라는 이름의 유혹자가 던지는 어둠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빛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단 하나의 상황 속에 81억의 인류는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순1주,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광야 40일의 유혹사화는 우리가 선택하고 지킨 것이 결국 우리를 지킨다는 은총의 메시지를 전한다. 매화가 2월에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운 것이다. 꽃을 피우고 싶다는 갈망이 꽃은 피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매화는 매화 스스로 매화인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