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예루살렘 인 예루살렘, 예루살렘 오브 예루살렘

나뭇잎숨결 2024. 4. 12. 08:06

 

 

충북농원

 

예루살렘 인 예루살렘, 예루살렘 오브 예루살렘

부활3,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모든 민족들에게를 중심으로

 

 

 

1. 김승희, 「보리수나무 아래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 더욱 정직하겠지, /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생각하지 않지만//나는 한밤중에 일어나/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물푸레나무 아래 휘어진 하이신스 꽃길이/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흔적 같은 향기로/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아니라/청춘을 중퇴한 듯해./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정말이야, 꼭 미친 듯이 뛰는 것,/그것이 나의 ㄷ인생이었어.//그래서 난 새해 같은 것이 오면/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서서/자신을 봐야 하니까./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갑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누구에게도/쉬운 일이 아니지.//“쓰러질 것 같아요” /“용기를 내”/“아직도 멀었을까?……”/쓰러질 것 같아서/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 /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하더라도/결국은/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모든 길이란아마도,/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김승희의 「보리수나무 아래로」는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하더라도/결국은/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 이라고 쓰러질 때까지 사랑하고 일했던 사람들의 모든 길은 각자(覺者)의 길이라고 바라본다.

 

그 핍진한 시간의 끝에서 “이제야 비로소 난 /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로 수렴되는 「보리수나무 아래로」는 . 즉 모든 이들의 길을 존중하되, 그 누군가의 영혼에도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극한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 것이다.  “쓰러질 것 같아서/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라며 그런 습명의 시간을 착한생각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런 착한생각들은 실은 착하지 않은 지독한 일과 관계들을 통과하면서 얻게되는 그로테스크(grotesque)한 타자윤리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2. 모든 장소에 맞서는, 절대적으로 다른 비균질적인 공간, 헤테로토피아

 

   

다시 한번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읽어본다. 

 

그로테스크(grotesque)는 건축과 장식예술에서 동물, 사람, 식물 모양을 사용하여 만든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벽장식이나 조각장식을 지칭하며, 그런 장식이 발견된 네로의 황금저택 같은 작은 동굴을 그로토grottoe 혹은 그로테스키grotteschi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그것은 인간을 두렵게 하고 섬뜩하게 만드는 그 무엇, 인간의 언어로 설명불가능한 현상과 상황을 가르키는 초현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푸코의 유년기에는 두 개의 서재가 있었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서재는 의학책이 가득한 지식인의 서재였고, 그 맞은편에는 문학책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서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서재는 금지된 곳이었지만, 어머니의 서재는 자유롭게 뽑아 읽을 수 있는 독서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푸코는 인류에 회자된 버킷리스트에 해당하는 고전 문학을 발견한다. 이후 모리스 불레즈가 맡고 있던, 고등사범학교의 자유열람식 도서관에서 푸코는 “기존 담론의 질서를 해체하고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탁월한 문체”와 “섬세한 뉘앙스”, “말놀이”를 구사하는 저술 활동을 펼치게 된다.

 

푸코는 어머니의 서재에서 보르헤스의 에세이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 나오는 “어떤 중국 백과사전”의 기이한 동물 분류법을 읽게 된다. -“a) 황제에게 속한 것 b) 향기로운 것 c) 길들여진 것 [……] m) 방금 단지를 깬 것 n)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과 마주쳤을 때 느낀 당혹감을 토로하며, 이 부조리한 ‘텍스트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 이름 붙인다. 그것은 공간의 이질성에 대한 당혹감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사유가 자리한 불가능성, 사유의 한계, 우리의 담론 아래에서 사유할 수 없음을 증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그런 문학적 체험 속에서 모든 장소에 맞서는,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말과 사물』에서였다. 푸코는 비균질적 공간,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말과 사물을 함께 붙어 있게 하는 통사법을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한다. 『말과 사물』에서는 가볍게만 언급했던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다시 끄집어내 본격적으로 논의하는데 ‘실제의 유토피아, 혹은 “장소와 다른 장소”’였으나, 이후 『헤테로토피아』로 제목 바뀐다. 푸코는 이 용어의 의미 축을 ‘텍스트 공간’으로부터 ‘사회 공간’으로 옮겨놓기에 이른다.

 

①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ées.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튀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②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결국 나는 우리가 이 장소에 맞서고, 이 장소를 잊게 만들기 위해 그 모든 유토피아들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의 매력, 아름다움, 경이로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유토피아, 그것은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이다. 한데 그것은 내가 몸 없는 몸을 갖게 될 장소인 것이다. 아름답고, 맑고, 투명하고, 빛나고, 민첩하고, 엄청난 힘을 지니고, 무한히 지속되고, 섬세하고, 눈에 띄지 않고, 보호되고, 언제나 아름답게 되는 몸. 원초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③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겨진 그의 눈 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제야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④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⑤그런데 오늘날 이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사회적인 규범의 요구나 평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개인들이 들어간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그러한 장소에 속한다. 아마 여기에 양로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양로원은 위기의 헤테로토피아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의 경계에 있다. 그것은 위기이지만, 여가활동이 규칙이 되고 무위가 일탈이 된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일종의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⑥한데 여전히 박물관과 도서관은 개개인의 선택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반면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일종의 보편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발상, 한 장소 안에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식, 모든 취향을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시간 그 바깥에 있으면서 부식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담아둘 장소를 구성하려는 발상, 이처럼 고정된 어떤 장소에 시간을 영원하고 무한하게 집적하려는 기획,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근대성에 속하는 것이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19세기 서양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다.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반공간contre-espace”인 헤테로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모든 사회, 모든 문화에는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한다. 둘째, 그 존재방식이나 작동방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묘지).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한 장소에 복수의 공간을 겹쳐놓을 수 있다(극장, 페르시아 정원).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전통적인 시간과의 단절, 일종의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를 동반한다(박물관, 휴양지). 다섯째, 헤테로토피아는 그것을 주변 세계에 대해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미국식 모텔). 즉 그것은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다. 여섯째, 헤테로토피아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이의제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단단하게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공간을 신기루처럼 보이게 한다거나(사창가), 확고하게 질서 잡힌 것으로 여겨져온 제국의 공간을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식으로(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식민지), 현실 공간을 ‘다르게 보이도록’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푸코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로 떠오른 공간개념으로 ‘유산된 사유’가 배태한 역설적인 생산성 사유할 수 있는, 바깥을 사유하는 매개체가 된다. 푸코가 다른 저작들에서 보여준 논리적 엄격성이나 꼼꼼한 사료 분석을 생각할 때,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모호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며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로 제시된 공간들이 일관성도 별 쓸모도 없다는 비판들이 적지 않았다. 푸코가 스스로의 지적 행보에서 일종의 일탈을 하여 벌인 ‘문학적 게임’에 속하는 글, 푸코 전체 저작에서 ‘부차적인 텍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그것이 ‘재발견’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문학, 예술, 건축, 도시공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쟁적인 해석을 낳았다. 그 모호하고 허술한 비논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덕분에 새로운 사유와 연구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은 ‘유산된 사유’가 배태하고 있던 역설적인 생산성을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자신이 독자들보다는 이용자들을 희망한다”라고 말하며 여전히 이 공간 개념에 여러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사회 공간의 배치 양상과 경계, 그것을 낳은 상상과 그것이 간직한 합리성과 가능성을 가로지르는 공간, 한마디로 공간-존재의 한계를 위반하는 반공간. 헤테로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상상 속에서 채워주던 유토피아가 현실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졌을 때 드러나는 그 균열과 틈새를 직시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여기서 새로운 상상, 현실의 지평이 열린다.

 

 

 

 

 

 

 

 

3.<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고 전하는 루카 24,35-48은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을 통해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체험을 하게되며 복음의 전파자로 거듭날 수 있는가를 전한다.

 

35절에서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그들의 부활체험을 사도들에게 전한다.(24,13-35)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예루살렘 유턴,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무서워 다락방에 문을 잠그고 있던 열한제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론의 바탕인 타자론의 구성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서, 제자들 역시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도망칠 수 없었던 사건, 이것이 부활사건을 싸고 있는 빅픽쳐인 배경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론의 바탕인 타자론의 구성요소는 배경(여기서 배경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원천적인 바탕을 의미한다)에 해당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인류란 없다.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타자는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타자는 요구가 많은 유령이 되어서 당신의 영혼을 점령한다.(알랭 핑겔크로트, 『사랑의 지혜』)

 

복음사가는 부활의 체험을 36-43절에 이르러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유령체험으로 소개한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만큼 부활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예측불허의 인격의 업다운을 거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로테스크 체험의 원형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 어떤 복음사가보다 더 구체적인 부활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복음사가가 자주 사용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측면에서 타자윤리학의 실체를 전한 것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생과사를 넘나드는 혼령에게서 느끼는 그로테스크 체험이 아니라 제자들이 갖고 있는 메시야관과 에수님이 보여준 메시야관의 낙차에서 느끼는 전율은 곧 유령체험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이어지는 36-43에서 부활발현사화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부활사화는 마태오, 28,16-20/마르코16,14-18/요한20,19-23/사도1,6-8에 동시에 실려 있는 공통사화로 부활의 체험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선택의지,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에 초점이 놓인다. 따라서, 모든 민족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나타난다는 점이 초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그 작은 갈망 속에 그분의 부활체험이 담긴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고 전하는 루카 24,35-48은 인지발현사화(36-43)와 사명발현사화(44-49)로 구성되어, 부활의 체험은 믿음과 복음선포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인지발현설화는 요한20, 19-20과의 맥락에서, 사명발현설화는 마태오28,16-18과의 맥락에서 전하고 있지만, 부활의 육체성을 통해 육체를 뛰어넘는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음사가의 부활신학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요한복음 21,1-14를 통해.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21,1-14)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설교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행전10,4-41)

 

사도 바오로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영광스런 몸’(필립비3,21)으로 장차 부활할 우리의 육체를 ‘영적인 몸’(1코린토15,44)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과(24,13-35)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36)는 것에서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37절) 는 것에서 대부분의 복음해설서에서는 부활이라는 비가시적인 사건을 가시적으로 초점화한 복음사가의 스토리텔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부활의 비가시적인 사건을 가시적인 사건으로 만든 스토리텔링이 강한 복음사가의 의도는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예수의 부활을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유령설로 바라본 그 저변에 복음사가의 그리스도론의 근간인 타자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부활의 육체성을 통해 그 육체를 뛰어넘는 부활의 믿음이 강조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바오로사도의 다마스쿠스체험의 연장선에서(사도행전9, 1-19) 예수의 부활 혹은 예수의 현현(epiphany)을 타자론에서 찾아야할 필연성을 제시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모든 민족에게(47절)에게 나를 전하라는 것을 모든 민족에게서 나를 바라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행전9, 1-19)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4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37절)

 

루카복음사가는 부활발현사화에서 그분의 증인인 사도들의 상황적아니러니를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41절)에서, 기쁨이 믿음보다 앞서는 이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보면, 부활은 선험적이지 실증적이지 않은 사건임을 보여준다. 루카복음사가가 사도들의 상태를 변호할 만큼, 그만큼 부활신학을 믿기가 어려운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4절-46절의 사명발현사화는--------

 

부활자체를 믿기 어려워하는 사도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어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나라를 전하라는 것은 세속의 논리로는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고 전하는 루카 24,35-48는 부활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면 사도들이야말로 복음전파에 최적화된 이들임을 알 수 있다.

 

44-46은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는 1코린토15,3-4에 수록된 선포문과 같은 맥락으로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따른다.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이 부활발현사화와 사명발현사화를 갈릴래아가 아닌 예루살렘임으로  지정한 것에서, 수난과 죽음이 부활의 연속성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낱낱이 체험한 제자들이야말로 부활의 증인으로 최적화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그리스도라고 지칭하는 사탄이 한 성인에게 나타났다. 성인이 묻는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의 죽음의 흔적, 상처를 보여주시오? 그런 맥락에서 수난-죽음-부활은 하나의 트라이앵글이다. 여기서, 갈릴래아가 아닌 예루살렘의 상징성을 부활과 연결하여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주어진다.

 

이자는 갈릴레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했습니다(루카 23,5)

 

열한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오28,16-20)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24, 33)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7-48)

 

그렇기에 복음사가가 부활발현사화와 사명발현사화를 갈릴레아가 아닌 예루살렘이라고 한 이유는 부활3주의 성찰의 메인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의 공생활과 제자들의 부르심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나, 예루살렘에서 공생활을 마감하셨다. 예수의 공생활이 마감한 바로 그 지점이 파견의 시작점이라는 것,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없이 희망하는 그 역설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육체의 죽음을 경험했다면 사도들은 희망의 죽음을 경험했다. 부활은 언제나 죽음을 통해 체험된다. 그렇기에 부활을 믿지도 못하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1,8)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은, 언뜻,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풀라고 요구한 것처럼 부당하게 보이지만, 제자들이 겪어낸 메시야관-희망의 죽음과 연결해 묵상해보면 그들은 최적화된 복음선포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지상생할의 끝이 사도들의 복음선포의 시작이라는 것! 죽음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

 

부활의 연속성을 이렇게 뫼비우스띠처럼 연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더 생각해 본다. 

 

루카복음의 전체구조는 머리말(1, 1-4)-전사(1,5-2,52)-활동준비기(3,1-4,13)-갈릴레아활동기(4,14-9,50)-예루살렘상경기(9,51-19,28)-예루살렘활동기(19,29-25,53)등으로 구분할 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구조를 보인다. 그런데, 발현사화와 승천사화에 갈릴레아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시대-예수시대-교회의 시대로 구원사관을 하나의 연장선에서 정립하려는 복음사가에게 있어 다시 구원의 시대를 예수시대와 교회의 시대로 세분하면서 그 중심에 예루살렘을 위치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해, 그리고 예수의 공생활을 통해 그리고 교회사를 통해 사도들을 통해 구원의 연속성을 갖게되는 공간이 된다. 예루살렘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진 부활의 명제에 가깝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이야말로 루카복음이 전하는 부활의 에포크epoch라고 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열한제자에게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부활에 이르는 길을 깨닫게 해 주셨음에도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이유는 복음의 메신저가 되는 길은 높은 데서 오는 힘, 즉 성령을 받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 것이다. 성령은 죽음을 생명으로, 찰라를 영원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신 협조자시다.(사도행전 1장, 2장) 죽음의 장소에서 교회를 탄생시킨 신비! 따라서, 부활체험도 은총, 선교사명도 은총일 뿐이다. 사랑의 출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If, 내가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데, 조금이나마 무엇을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45)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데서 오는 힘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 49)

 

반복해서,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표면적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으로는 실패와 죽음의 공간이 예루살렘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모두에게 모든 희망이 끝난 공간이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위에서 오는 힘을 받을 수 있는 공간, 영적으로 거듭나는 재창조의 공간이 또한 예루살렘이다. 희망없이 희망하는(로마서4,17-18) 공간이 예루살렘이다. 우리의 부활체험 역시 이 두 개의 예루살렘을 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을 모르고 부활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이런 상반된 혹은 이중적 공간에서 복음선포의 사명이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부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주제를 우리의 삶으로 체화하는 길은 고난과 죽음 거친 부활— 그로테스크(grotesque)한 타자윤리학을 넘어(인격의 예측불허, 업-다운을 거듭하는 타자는 그 자체로 유령과 다름없다)--- 세속적 시간의 단절을 통한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의 시간을 거쳐 –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예루살렘 인 예루살렘을 거쳐--- 예루살렘 오브 예루살렘으로--- 즉 예루살렘을 넘어서는 여정이 부활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목적과 수단이 함께하며, 원인과 결과가 함께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살게 될 것이다. 부활의 사랑은 목적이 곧 수단이고 원인이 곧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마치며,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