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나’라는 절대적 타자여, 사랑하기 위해서만 고개를 숙여라!

나뭇잎숨결 2024. 6. 15. 07:32

 

 

 

 

‘나’라는 절대적 타자여, 사랑하기 위해서만 고개를 숙여라!

Abaisser la tête seulement pour aimer(르네 샤르)

- 연중 11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를 중심으로

 

 

 

1. 서정주, 「바다」

 

 

귀기우려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 반딪/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속에 숨기어가지고……너는,/무언의 海深에 홀로 타오르는/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처/둥그란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바다의 깊이 우에/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애비를 잊어버려/에미를 잊어버려/형제와 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알래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눈 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알래스카로 가라!/아라비아로 가라!/아메리카로 가라!/아프리카로 가라!

 

 

서정주의 「바다」는 모든 길이 막혔던 시대, 청년들에게(혹은 자신에게) 바치는 격정적인 헌시에 해당한다.

 

시인은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알래스카로 가라!/아라비아로 가라!/아메리카로 가라!/아프리카로 가라!”는 것으로 수렴되며, 길은 항상 어데에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는 것으로 길의 역설을 전한다.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은, 혹은 가고 싶은 길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희망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희망을 가지는 존재일 뿐 아니라 바로 희망의 존재라는 사실에서, 서정주의 「바다」는 시대를 초월해, 누군가 걸어간 길을 찾지 말고 네가 바로 길이 되라, 는 아니 너는 바로 길이라는 메타포를 던진 셈이다. 네가 바로 길이라는 것은 너 조차도 ‘절대적 타자’로 바라보라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너 자신이 되지 말라, 인간이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기에

 

 

‘나’ 자신을 절대적 타자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서 이 세계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진 이들이 참 많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는, 아니 자신이 가야할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분명 희망의 원리다. 그 희망의 원리는 자신 역시도 절대적 타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정>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나를 절대적 타자로 바라볼 것인가?를 풀어간 모리스 블랑쇼, 그런데 블량쇼가 말하는 우정은 어떤 시공간을 함께하는 상투적인 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블랑쇼가 말하는 우정은 평생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과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타진이기도 하다.

 

블랑쇼는 우리의 공간적인 거리가 오히려 우리를 가깝게 한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동일성에서 벗어난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문학적 우정에 대하여 블랑쇼는,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관계 맺지 않으며 관계하는 자유로운 우정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사르트르만큼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모리스 블랑쇼는 예술, 정치, 문학, 철학에 관한 그의 29개의 비평적 에세이와 평론을 모은 『우정』(1971)이 선집에서. 『문학의 공간』(1955), 『도래할 책』(1959) 등 그간 블랑쇼가 해온 문학 비평의 연장선으로서, 라스코 동굴 벽화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원자 폭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를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 블랑쇼는 문학과 예술, 정치와 혁명 등에 대해 바타유, 말로, 레비스트로스, 뒤라스, 카뮈 등 그가 우정과 존경을 바치는 작가들을 들어 써 내려간다. 글로써 그가 이들과 나누는 무한한 대화는 때로는 파괴하며 융합하고, 분산하며 수렴하는 어떤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한다.

 

좋다, 그렇다면 빨리 결론을 내 보자. 인간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제도와 사회 질서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변화를 통해 요구되는 것에서도 온다. 실존의 총체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전향을 통해 오로지 철학만이-교리를 가지고 하는 종교는 안 된다. 이미 계획과 범주의 틀을 가진 교회나 국가는 할 수 없다-이 변화를 조명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개인적인 전향. 전복과 동요를 통해서만 도달되는 실존, 그것만이 나의 실존이다. 나는 내 삶을 바꾸어야 한다. 이 변화 없이는 내가 지닌 근본적인 가능성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소통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들과 연결되어 사는 것처럼, 어떤 유보 조항 없는 온전한 성실성으로 미래에 연결되어야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그런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셰스토프식 남자를 신념에 이르게 한 부조리가 시지프를 기쁨에 이르게 한 것이다. 적어도 이런 해석이라면, 다시 말해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드러나게 해 둔 카뮈의 제안을 간파하고 이를 약술화해서 말하는 거라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은 일종의 도덕적 추론에 의해 나온 부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존엄한 행복은 희망이 없다는 진리를 충실히 수용할 때 오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는 자에게-되돌아갈 수 없는 자인데-가장 어려운 비밀이 나타난다. 행복한 부조리는 이런 두 움직임의 신비한 상관성에 있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다. 이것이 단순함의 수수께끼다. 부조리가 앞에 있을 때 행복을 주고, 행복을 움켜쥘 때 부조리를 주는 이런 단순함. 또한 우리로 하여금 부조리에서 행복을 끌어내고, 행복에서 부조리를 끌어내게 하는 단순함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끝없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여기서 쟁점이 무엇인지 예감할 것이다. 이른바 (문학이 요구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 앞서 말하는 이 말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전혀 다르게, 차갑게, 내밀함이나 행복감 없이. 아무것도 말하는 게 없으면서 저 안에 있는 깊은 것이 말하는 듯이 말하기. 항상 단 한 사람을 위해, 즉 비인칭적인, 비개인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 말하기. 저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면서 그것 자체로 바깥을 말하기. 진실이나 진리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정반합 같은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와는 전혀 다른 다량의 흐름으로, 플럭스(flux)로 말하기.

 

네가 날 이해한다고 넌 말해선 안 돼.” 그는 브로트에게 이런 말을 반복한다. 친구들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인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가 절망하지 않아야 할 모든 이유를 그에게 언제든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은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불행으로만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의 너무나 호의적인 해석들 때문에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고유한 고통(불행과 괴로움)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쓰다와 살다. 어떻게 하면 정확히 대결 구도로 놓기 힘든 두 용어를 대결 구도로 볼 수 있을까? 쓰기는 삶을 파괴하고, 삶을 보존하며 삶을 요구하고, 삶을 무시한다. 이건 상호적이다. 삶이 글로부터 삶을 얻는데, 만일 글이 삶으로부터 얻는 것이 필연적인 불안밖에 없다면, 글쓰기는 궁극적으로는 삶과 어떤 상관성도 없다. 부재하는 관계성. 다시 말해, 글은 자체적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 결코 그 어떤 것과 관계성을 맺는 게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와 전혀 다른 것이 글쓰기를 망쳐 놓거나 교란시킨다. 그건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중립성을 띤 어떤 것. 그것은 글에 소속되어 있는데, , 글은 어떤 데 소속될 줄도 모르고 소속지를 지명할 줄도 몰라야 한다. 카프카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절대 끊어지지 않고 지속성을 잃지도 않으며 펠리체와 하나가 되기 위한, 그래서 하나로 결합하는(분리를 결합하는) 과정을 수련한 것이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의 ‘공모적 우정’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우정』을 시작한다. 이때 공모적 우정이란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은 자, 절대적 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류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정은 ‘절대적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어떤 절대적 거리’를 가지는 우정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공모적 우정을 느끼는 동시대 작가들을 소환하여, 비평으로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정」에서 블랑쇼는 바타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이별이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핀다. 죽음은 ‘추억’하고 대화를 이어 가기를 강요한다. 즉 죽음이 분리를 지워 버림으로써 둘 사이의 공허를 사라지게 하는데, 블랑쇼는 이를 경계한다. ‘분리’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으로, 블랑쇼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관계’, ‘말 없는 신중함’을 추구한다. 이는 소통을 관두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말의 침묵 속에서 서로가 연결되는’ 우정의 방법이다. 즉, 서로에게 현존이 되어 주는 것이다. 너 자신이 되지 말라, 인간이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기에, 라는 우정의 역설은 바로 내가 무엇인가에 의해 말해진다.

 

‘현존’은 블랑쇼의 문학의 화두로서, 실존은 언어와 에고가 있어야만 가능한 반면 현존에는 ‘무언어’와 ‘무아’(無我)가 필요하다. 그는 ‘에고’라는 허상에 현혹되지 말고 끝없이 분열하고 해체될 것을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에 동화되면 안심을 느낄 순 있으나 자기 한계에 매몰되고 만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곧 ‘에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인간은 이러한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익숙한 것이 부재한 중성적 텍스트들을 통해 에고의 올가미를 벗어야 한다.

 

루이르네 데 포레, 미셸 레리스, 장 폴랑 등은 문학에서 이 궁극의 무, 무심함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한 작가들이다. 앙드레 고르츠는 현대문학의 소임은 강력한 소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라며 개성성, 자기 중심주의, 소속주의, 애국주의, 한마디로 일체의 동일화를 공포로 여겼다. 블랑쇼는 문학이 하는 놀라운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무심함에 대해 열정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언어를 우리는 결코 버릴 수 없겠으나, 문학은 언어를 버리기 위해 오히려 언어를 껴안는 역설적 문학 행위를 수행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현대문학이 자기 파괴적 면모를 보인 연유도 이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계를 넘는 위반의 힘으로 훨씬 많은 것이 고발된다. 왜냐하면 무한 자체가 무한에게는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무한은 중립적 표명을 통해 한계를 알림받게 된다. 여기서 중립적 표명이란 한계 내에서 말하면서도 한계 너머를 말하는 식으로 표명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요한 문학은 우리에게 마지막 새벽처럼 나타난다. 재앙과도 같은 지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도 항상 어떤 가변성은 띤다. 혹독한 무아(無我), 무장한 저 인내심 깊은 상상을 통해 이 도저한 거부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르네 샤르).

 

무심함에 대한 열정,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하여 블랑쇼는 작가 카뮈가 이르려 했던 ‘무심함’, ‘무관심’이 ‘부조리’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알려진 데에 대해 해명하려 한다. 사람들은 카뮈를 그가 주장하는 극단적인 생각에 가둬 두려 했으나 카뮈는 이것을 거부했으며 ‘부조리’라는 고정된 용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블랑쇼는 카뮈가 ‘자기 생각을 직접 말하기보다 늘 우회를 통해 말한다. 그러다 보니 거부하고, 피하고, 바꾸기를 줄곧 하면서 우회를 통해서만 새로운 진실이 표명되도록 한다’고 밝혔다. 카뮈는 전복이라는 자유로운 흐름에 있으면서도 결코 그 무엇에도 장악되지 않았다. 블랑쇼는 카뮈의 이러한 ‘이상한 무관심’에 주목한다.

 

그는 또한 책의 후반부 상당 부분을 할애해, 카프카 문학의 순수성을 진단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고 전부 파괴하고자 함으로써 익명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사후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그의 글들이 출판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을 얻었다. 블랑쇼는 이러한 남용을 절제된 언어로 비판한다. 카프카와 그의 편지,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 등에 대한 논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에서 드러났던, 카프카를 통한 블랑쇼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엿본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는 이 시대에, 블랑쇼의 사유를 통해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 뿐 아니라, 문학 혹은 작가라는 테제를 통해 관계맺지 않는 우정, 무심함의 열정은 무엇인가를 통해, 이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은 자, 절대적 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류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정은 ‘절대적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어떤 절대적 거리’를 가지는 우정을 통해 우정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거부한다. 블랑쇼의 초점은 그가 공모적 우정을 느끼는 동시대 작가들을 소환하여, 비평으로서, 언어로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3.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마르코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4,26-34은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마태오13,31-32/루카13,18-19) 하느님 나라의 ,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26-29절에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에 대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복음사가는 처음과 끝이 극적으로 대조되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는 비록 씨앗의 형태지만 분명히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작은 씨앗에서 엄청난 결실이 맺어지듯, 인간이라는 작은 우주에 어떻게 무한한 하느님 사랑이 담기고 그분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는지, 시작과 마침이 하나로 이어진 창조의 사랑을 보여준다. 사람이 씨앗을 뿌리지만 뿌리는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이 자라나 엄청난 낟알이 열리듯, 하느님 나라는 신비한 방법의 역동성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 복음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믿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있을까? 

 

28절에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저절로’라는 원리로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열매를 내는 땅의 놀라운 비옥함이 강조된 것이다. 이는 창세기 1, 11절에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라” 라고 하신 창조의 사랑에서 알 수 있듯, 하느님 나라는 시작에 이미 완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행위에 힘입어, 인간의 의지에 의해 발전하거나 인간에 의해 조장되거나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5, 17에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게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창조의 사랑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늘 일하신다. 따라서 아들도 일한다는 것에서, 우리도 일한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듯,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도 하나라는 놀라운 관계가 선포된 셈이다.

 

여기서 하느님 권능과 창조는 때와 리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을 절대적 타자로 바라보아야 할 당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일을 내가 했거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봉사 혹은 희생, 비교우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이 하느님의 리듬을 함께 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는 관찰자가 되라는 것인가? 이런 고민 끝에 이르러 우리가 그분 나라를 위한 어떤 행위나 실천은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불어 앞에서 언급하였듯,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것이 이미 천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 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6, 32)

 

하느님 나라의 리듬을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모세가 내려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출처를 아는 것이 하느님의 리듬을 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맛보는 자유의 원천, 사랑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내 행위에 내가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와 사랑 말이다. 

 

29절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낫을 댄다는 것은 씨를 뿌린 자가 거둘 것이란 점에서 이 구절을 심판의 의미로 종종 무섭게 해석되곤 하지만, 여기서 심판은 단죄가 초점이 아니라 하느님 다스림이 시작되는 창조의 연속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예수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듣고 응답하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맺을 추수의 때는 혹독한 시련이 아니고 풍성한 수확을 즐기는 기쁨의 때가 될 것이란 희망의 전언이다. 하느님 나라의 추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 기적은 30절 이후에서 다시 한 번 겨자씨의 비유로 반복된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마침이 어떻게 뫼비우스띠처럼 연결되어 있는지, 창조의 연속성이 극적인 구조로 강조된 것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모든 생명을 품을 만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이행하고 집행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나라는 타자의 수고를 절대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수확에 대해 즉 결과론자가 되지 말라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농부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그가 수확을 확증하고 가늠하지 못하듯, 행위의 결과, 수확은 오직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법하다. 하느님 나라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사람은 왜 필요한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나아가 달란트의 비유나 미나의 비유(루카19, 11-27/마태오26, 14-30)에서처럼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종의 비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창조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행위로써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행위는, 실천은 왜 필요한 것인가? 행위와 실천은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를 행위를 함으로써 비로서 인식하게 되고 확증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행위로 인해 내가 아버지와 하나(요한9,30)라는 것을 비로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를 함으로써 용서의 하느님을 닮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다는 줌과 받음의 법칙이 다시금 입증된다. 하느님나라의 은총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때만 자신이 어떤 은총속에 살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나라의 은총을 받기 위해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희망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예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받기 위해서 아니고 받은 것을 알기 위해서 행위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 삼위일체만이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삼위일체인 신 조차도 사랑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자신을 절대적 타자로 만든 사건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직 사랑 앞에서 나를 절대적 타자로 바라볼 때(나를 객관화 혹은 보편화 할 때),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원리를 알게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겸손과 믿음과 인내,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2디모테오4, 2에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전한다.  에제키엘 17,22-24에서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라고, 이사야 예언서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의 왼성은 하느님 말씀의 전능때문이라는 것을 전한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며,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야55, 10-11)

 

빛이 생겨라!로 시작되는 창조의 사랑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희망의 전언이다. 이는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는 복음 환호성과 같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나 조차도 절대적 타자로 바라보는 신망애삼덕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인간이라는 최소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담기는 이 신비를, 신조차도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절대적 타자로 만든 사건이 바로 강생의 신비이자 십자가신학에서 현현되는 신의 <여유>라고 전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피조물의 수준, 그 이하로 내려가는 여유!

 

“창조된 세상의 갈라진 양극을 결합시킨(에페소2, 13)그리스도의 사랑은 창조의 알파벳에서 알파가 아닌 오메가가 되기를 자원한 신을 말해준다. 성서는 자신이 사랑의 행위인 신, 순전한 위타적인 신, 그렇기에 필연코 맨 끝 벌레(시편22, 7)의 구멍에 까지 기어드는 신을 말해준다. 성서는 당신의 피조물과 동일화됨으로써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이라는 신망애 삼덕의 원리를 보여준다. 즉 최소의 것에 의해 포괄되고 압도됨에 있어ㅡ 자신이 신임을 입증하는 저 <여유>를 실현하는 하느님을 말해준다“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에서 인간이라는 최소에 담기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바로 그리스도적 희망이라고 전한다. 그 희망이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한 “희망없이도 희망하는” 바로 그 희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희망은 세상의 희망이 아닌 이유에 대한 언급이다. 

 

“인간은 현실의 참을 수 없는 압박을 벗어나 위로하는 고차원적인 미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적인 미래를 현재에로 이끌어 들이어, 이미 지금 미래로 향하여 살아간다. 희망 안에서 인간은 그에게 약속된 미래에로 자신을 개방하고 그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상에 지은 그의 집을 떠난다. 희망이 그리스도의 나라로 향한다면 희망을 희망하는 자는(희망없이도 희망하는 자는 로마서4,17) 그가 보는 바 지상의 인간적 상태와 대립하게 한다.”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무한하고 파악불가능한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은 희망에 가깝다. 수난과 죽음이 부활의 관문임을 믿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마르코 4,26-34)라고 전하는 초소의 것이 최대의 것을 낳는 이 축복의 메시지는 여러 측면에서 묵상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절대적 타자, 사랑하기 위해서만 고개를 숙여라Abaisser la tête seulement pour aimer(르네 샤르)라는 주제로 성찰의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실 앞에 설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나(자기)를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를 봐,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나를 극복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는 눈, 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나를 넘어서야 하느님이 창조하신 나를 볼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그때 내게 온 사랑의 출처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서 만나를 먹여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이나 회의를 갖지 않을 것이고, 자기우상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위대함은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부텉 시작된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골방에서 바친 기도가 지구 저편, 누군가에게 평화를 전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겨자씨 같은 나의 작은 믿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는지 바라보는 메신저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